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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스런 요코미네지의 밤, 공포의 츠야도
나는 침대 체질이 아니다.
부드럽게 상하운동을 하는 매트리스보다 딱딱한 맨바닥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체질이다.
빈번한 천막, 야영생활에는 가장 적합한 체질인데 선천적인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의식적으로 노력했는데 지금은 나그네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원시적이다.
게다가, 베개도 거부하는 체질이 되었다.
교통사고로 발생한 경추의 함몰 때문인데, 2년간의 집중 치료로 생활에 적응은 되었으나
어떤 베개도 벨 수 없다.
그럼에도 반년에 걸친 까미노의 침대생활에도 거뜬히 적응했는데 문제될 것이 있는가.
급조한 나무침대 이상의 선(善)이 없는 이 츠야도에서.
더구나 급작스런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밤에 체질과 호.불호를 가릴 처지인가.
나무벤치 위지만 두툼한 요를 깔아서 추위를 면했을 뿐 아니라 포근한 잠자리.
이 시간까지의 내 평생에 내가 급조한 잠자리 중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이시즈치산(石鎚山)으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게 하려는가.
공포의 벽력에 이은 뇌성이 간단없는데도 공복 후의 식사였기 때문인지 식곤증이 왔다.
초저녁에 잠이 들어 자정이 넘은 시각까지 100% 숙면이었으니까.
헨로상 생활에서 최초의 숙면이라는 고묘지 헨로야도의 기록이 단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다음 날에 깨지게 될 줄이야.
빈도가 줄었을 뿐 계속되고 있는 뇌성벽력과 거센 풍우.
이 거역할 수 없는 자연도 생리현상을 막을 수는 없다.
화장실 출입을 말하는데, 보지 않았어야 할 것을 보게 되었다.
손전등 불빛에 비췬 츠야도의 위치가 몰고온 공포는 천둥번개가 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경내 출입용 길가와 절벽에 수직으로 세운 가냘픈 두 앵글(angle) 기둥 위에 지은 츠야도.
어떤 이유로 기둥 하나가 조금만 기울어도 백척 단애 위의 컨테이너 박스에 다름아닌 이
집은 해발300m인 유나미휴게소 앞까지 사정없이 굴러갈 것이다.
장애물이 없다면.
수직450m를 구르는 동안에 완전히 분해되고 말 간이건물 안에서 시코쿠헨로 최고의 밤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건물임을 몰랐기 망정이지 알고도 그처럼 단잠에 취할 수는 없잖은가.
하지만 아는 것이 힘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힘도 되고 병(모르는 것이 약이니까)도 되는, 양극의 두 얼굴을 가진 '지'(知/아는
것)와 '부지'(不知/모르는 것).
이 때만은 단연코 후자였다.
모골이 송연해진 나는 벤치 침대를 끌어서 옮겼다.
한갓지다는 이유로 출입문에서 먼 쪽(낭떨어지)에 잡았는데 출입문 옆으로.
그러면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에 탈출이 가능한가.
이 집이 붕괴될 때 튀어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건물안에서는 위치에 관계없이 모두 0%다.
어차피, 붕괴된다면 구르고 구르는 동안에 일체가 분해되고 말 텐데도.
이 때(새 날/0시가 넘은 시각)로부터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미 숙면한 몇시간이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강렬한 자아비판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짐짓, 생사에 초연한 듯 하나 천박한 속물, 형편 없는 늙은이라는 혹독한 비판이다.
자기비판에는 타인과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더욱 가혹할 수 밖에 없다.
우스갯말 같으나 진지한 함의가 있는 '3대 거짓말' 중 1가 "늙은이의 빨리 죽고 싶다"란다.
('밑지고 판다'는 상인의 말, '결혼하지 않겠다는 노처녀의 말'과 함께)
삶은 온갖 경우를 망라해서 인간의 기본적 애착이다.
그러므로, 늙어갈 수록 삶에 집착하는 것은 본능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
또는, 진흙탕에서 꼬리를 끌면서 살아도 사후의 호강보다 좋다(曳尾塗中) 잖은가.
삶에 대한 초연한 모습은 의식적으로만 가능한, 숙련된 연기에 불과하다.
지진이 많은 나라답게 안전 사고에 대한 대비와 예방 대책이 치밀하고 철저한 일본땅에서
빈약하기 그지없는 앵글 기둥 위에 지은 집을 보다니.
그 뿐 아니라 그 집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니.
더욱이, 기상이 양호한 평상시 아닌, 극히 불량한 밤에.
모두 기피한 탓인지 아둔하기 짝 없는 나홀로.
하긴, 그러니까 이같은 꼴이겠지.
한 순간에 이 하루의 족적이, 헨로상으로서의 행적은 물론 가족과 나눈 카톡과 페이스 북
까지도 각기 마지막 행위로 남겨질 수도 있다는 방정맞은 생각에 허무하고 허탈해 갔다.
그것은 내가 전혀 쓸모 없기 때문에 그 분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 분의 뜻이라면 항거하지 않겠으나 고작 이까짓 결말을 위해 그 분은 이제껏, 80년 넘게
노심초사하며 보갈피셨을까.
마침내 불안한 기운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멀리 물러가는 중인지 번개의 강도가 약해지고 고막을 찢을 듯 하던 뇌성도 멀어졌다.
유리창에 횡포를 부리던 비바람도 양순해졌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그 분 계시는데 무엇이 두려우냐.
두둑한 배짱을 되찾았고 침대도 안락을 회복했고 다시 깊은 수면에 들어갔다.
요코미네지
드문 경험이다.
세차고 줄기차게 비를 쏟아붓는 밤도, 한밤이 공포와 안온을 차례로 안겨준 것도 모두.
모기 없는 밤도 처음이고, 그래선지 아침 7시가 다가오는데도 더 자고 싶기도 처음이다.
끝이(헨로미치의) 보이려 하는 듯, 아른아른하는데도 집히는 것도 잡히는 것도 막연하나
간밤의 체험 하나만으로도 본전은 뽑은 듯이 뿌듯한 아침.
그러나, 그 많은 비를 쏟아내고도 여전히 무겁게 내려 앉아있는 하늘.
어제 비 때문에 못했던 경내 살피기를 했다.
슈크보가 없으므로 숙박한 헨로상이 있을리 없다.
츠야도 이용자는 나홀로다.
비는 그쳤지만 밤새 거창하게 내린 비 끝이라 새벽같이 올라올 헨로상이 있겠는가.
시코쿠88레이조 중에서는 3번째 고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난이도에서는 가장 어려운 구간
(ころがし/転がし)이라는데.
적막강산에 다름아닌 사찰을 홀로 돌아볼 수 밖에.
사찰 500m 밑까지는 임도가 조성되었으나 노폭이 좁아서 대형버스의 통행이 불가능하고
참배자들을 위한 유료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나 동절기에는 운휴한단다.
등산이 어려운 헨로상은 임도를 따라도 되지만 멀고 교통사고의 위험이 따르는 길이란다.
그래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헨로코로가시라 하는 듯.
"종횡으로 봉우리와 산언저리에 절 세워 널리 사람을 구하는 것일까"
찬불가(御詠歌)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서일본의 최고봉인 이시즈치산(石鎚山/1982m)의
허리(小松町石鎚甲), 해발750m에 위치한 요코미네지는 시코쿠88레이조 중 60번째다.
3번째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3번째 세키쇼지(關所寺)란다.
그러나, '3번째 높은 위치'에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해발700m를 넘는 레이조는 12번 쇼산지(700m)와 여기(60번/750m) 뿐이다.
남은 28개레이조 중에서는 66번 운벤지(雲邊寺/910m)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2번째가 되며, 헨로미치에는 800m안팎의 산봉이 몇개 더 있으나 코스의 선택에
비켜가는 유동성이 있으므로 비교의 의미가 없다.
우리는 세키쇼(關所)를 관문(關門)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요지(要地)를 의미하는데 일본 불교에서는 다른 뜻을 담고 있는 듯.
악행을 하거나 사심(邪心)을 가짐으로서 대사(코보)의 책망을 받은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는 지점을 세키쇼라 한다는 것.
세키쇼지(관소사)는 코보대사가 평상시 사람들의 행실을 체크하는 절이며, 시코쿠헨로88
레이조 중에서 각 현에 1곳씩 있는데 요코미네지가 3번째 세키쇼지(愛媛県)라는 것.
(19번 立江寺/德島県, 27번 神峰寺/高知県, 66번 雲邊寺/香川県 등과 함께)
이 요코미네지의 창건자는 슈겐도(修驗道)의 개조인 엔노교자(役行者/役小角)란다.
슈겐도란 일본 고래의 산악신앙과 불교가 습합한 일본 특유의 종교다.
하쿠치(白雉) 2년(651), 엔노교자는 수행중에 현현한 자오곤겐(藏王權現)을 샤쿠나게(石
楠花/진달래과) 나무에 새겼다.
이어서 작은 당을 짓고 거기에 안치함으로서 창건이 이뤄졌다는 것.
엔랴쿠(延曆) 연간(782~806)에는 산로(參籠) 중에 있던 샤쿠센 선인(石仙仙人)의 기도로
뇌병이 치유된 간무천황(桓武/재위781~806)이 선인에게 보살(菩薩) 칭호를 내렸단다.
"코보대사가 샤쿠나게 나무에 새긴 대일여래가 본존으로 안치되어 있다"는 경내 안내판.
코보대사는 다이도(大同) 연간(806~810)에 액막이와 개운(開運)기원의 수법을 시행하는
중에 자오곤겐의 현현을 감득, 당우를 정비하여 레이조로 정했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쪽이 정설인지 헷갈리는 설. 설. 설.
신불습합의 별당사로 흥하고 있었으나 메이지 신정부의 폐불훼석령에 따라 폐사되었다가
메이자 42년에 들어서 단신도(檀信徒)의 협력으로 점차 재흥하게 되었단다.
산문을 통해서 올라오는 험한 등산길과는 전혀 다른, 반대 길로 하산해야 하는데 백팩이
있는 츠야도까지 다시 가서 아침 8시 반이 넘어서 츠야도를 나섰다.
시코쿠헨로 생활 34일째 아침인데 가장 늦게 출발한 아침이다.
몇 걸음 내려가다가 뒤돌아다 본 츠야도.
철렁, 가슴이 내려앉게 하는 듯 했다.
사카우치가 더 편한 구간
요코미네지 경내에서 500m 지점까지 히라노 임도(平野林道)가 개설되어 있다.
참배객들을 위한 차량(유료버스)과 소형 헨로 차량들의 유료도로로 활용되고 있단다.
61번코온지(響園寺)로 가는 아루키헨로미치는 요코미네지에서 1.2km의 무명도를 따라서
히라노 임도와 만났다가 바로 산길이 된다.
이 지점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오는(사카우치?) 중인 아루키 젊은이(53번레이조 직전에서
오셋타이를 함께 받고 우중에 동행했던)와 조우했다.
그와 동행2인의 짝을 이뤘던 영감은 어제 코쿠분지(59번)에서 만났는데.
영감은 사카우치 운운하며 떠났는데 청년도 헨로 방식을 바꿨나.
영감에 대해서는 냉담 이상인 것으로 미루어 어제 예상했던 대로 불미스럽게 헤어진 듯.
최고의 헨로코로가시와 달리 유순한 내리막길이다.
도목(倒木)들이 있고 계곡길의 일부가 훼손되기는 했으나 간밤의 가공스런 악천후에 비해
자연의 손상 정도가 심각하지 않아서 다행인 길.
하지만 어제 퍼붓는 빗속에 강행했더라면 완전한 수중전이었을 뻔한 헨로미치다.
등로는 고도450m를 오르는 빗변이 2.2km였는데, 고도290m에 3.3km(빗변)라면 구배각이
매우 완만하므로 전체적으로는 유순한 길.
평지에 다름아닌 해발60m에 위치한 코온지의 오노인(奧노院)까지 거리(빗변)는 7.6km다.
그러므로 경사각(角)이 코로가시 길의 반도 되지 않는 길이다.
그러니까, 이 구간은 사카우치(逆주행) 만이 선(善)인 헨로다.
어느 이정표가 맞는지 알 길이 없으나 붙박이 간이벤치들이 있는 지점을 요코미네지에서
3km, 코온지 오쿠노인(奧の院/白瀧)까지 3.9km라고 안내하는 이정목.
지도의 7.6km와는 700m 차이를 보이는데 내게는 무해무득한 숫자일 뿐이다.
44번다이호지에서 언급한대로 일본인 답지 않게 헨로미치의 관리가 전체적으로 소홀하다.
이 구간에도 당장 붕괴가 진행중인데도 조심해서 통과하라는 말 뿐이니.
간이화장실까지 갖춘 휴게소.
휴게소에서 시다시로(下城)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시다시로와 오쿠노인 방향이 갈린다.
시다시로는 남북조 시대에 축성되었다는 요새(要塞) 마보로시조(幻城)의 북쪽 성이란다.
(남쪽은 우와시로/上城)
곧 차도로 나와 코온지 오쿠노인에 들렀다.
난간을 붉은색으로 칠한 시라타키다리(白瀧橋)를 건너.
차도를 따라서 직진하다가 P턴 하듯 돌아서 가면 오쿠노인의 정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쇼와(昭和)8년(1933년)에 창건되었다니까 나보다 1살 더 먹은 절이다.
일천한 것 같기도 하고 오래된 듯도 한 오쿠노인.
역사가 짧은가 내가 늙었기 때문인가.
오쿠노인에서 100m에 불과한 위치에 휴게소가 또 있다.
코온지가 2.4km라는 지점이다.
지도와 이정표는 각기 7.7km와 7km가 되니까 700m 차는 여전한 위치다.
이 휴게소는 88레이조 헨로상의 휴게소일 뿐 아니라 오쿠노인 참배객의 휴게소란다.
휴게소 이후 헨로미치는 포장 소로를 따라서 오타니이케((大谷池)를 건너가는 마츠야먀
자동차도로 앞까지 간다.
이 지점에서 자동차도로 밑을 횡단하여 저수지의 우안(右岸)을 따라 북상하거나 우측 산
으로 오르는 길로 나뉘는 헨로미치.
나는 전자를 따랐다.
이 길도 오쿠노인 1km, 코온지 1.5km 이정목이 있는 저수지 우안 끝을 지난 후 곧 도로를
떠나 우측의 산록을 따른다.
불교 건축양식의 반역이며 혁명인 고온지
정오를 지나서 61번코온지에 당도했다.
요코미네지에서 오늘의 목표지 64번마에가미지(前神寺)까지 전 구간이 16km 미만이다.
그래서, 출발부터 늑장부렸으며 첫 도착지 코온지까지는 전체 거리의 5분의 3을 상회해서
만만디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다.
코온지는 쇼토쿠태자(聖德/574~622)가 31대천황 요메이(用明/585~587)의 질병 낫기를
기원하여 창건했단다.
태자의 꿈에 금옷 입은 백발 노옹이 하늘에서 내려와 "후다나시마(伊予之二名島/현 四國
愛媛縣)에 영지(靈地)가 있는데 그곳에 절을 지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한 말을 따라서.
본존으로 대일여래상을 안치했는데, 치유돤 천황은 이 산에 '쿄오인'(敎王院) 이라는 산호
(山號)를 내렸단다.
교키보살과 코보대사도 관계 있다는 절이다.
나라시대의 텐표연간(天平/729~749)에는 교키보살이 들러 당(堂)을 건립, 많은 신도들을
고민과 고통에서 구했다는 전설이 있단다.
헤이안시대, 다이도연간(大同/806~810)에 순교중인 코보대사는 이 산기슭에서 난산으로
고통중에 있는 임산부를 만났는데 기도하여 즉시 건강한 남아를 순산하게 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대사는 당(唐)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아주 작은 대일여래상을 본존의
가슴 속에 넣고 4서원(誓願/순산, 육아, 대역, 여인성불)과 기도의 비법을 사찰(香園寺)에
전하고 레이조로 정하였단다.
이 때문에 본존은 대일여래지만 협불(脇佛)의 코야스다이시(子安大師)에 신앙이 쏠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코온지는 일본불교 건축양식의 반역이며 혁명이다.
거대한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1층은 대강당, 2층은 본당과 대사당인 현대 건물이므로
7당가람에 항거했으며(반역) 전통적 개념을 일시에 깨버렸으니까.(혁명)
그럼에도 이방 늙은이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왈가왈부, 시비가 있을 법 한데 전혀 보지 못했으며 듣지도 못했으니까.
병화(兵禍)를 비롯해 각종 화재로 인해 소실과 재건을 거듭한 사찰이 부지기수지만 하나
같이 원형의 복원에 올인했는데 코온지의 이 혁명은 누가 주도했는가.
코온지 주차장에서 제2주차장을 지난다.
T자 길에서 우측 이정표(61香園寺0.2km/62보수사1.2km)의 지시 따라 3시방향으로 잠시
전진한 후 논을 끼고 좌회전하여 가면 미시마진자(三島神社) 앞에 이른다.
신호등교차로인 이 지점에서 11번국도를 동진하면 10분 안에 왼쪽의 호주지에 당도한다.
요코미네지에서 9.7km 코온지, 코온지에서 1.3km 호주지까지ㅣ2.4km 되는 3사찰은 모두
사이조 시(西条市) 코마츠 초(小松町)에 위치해 있다.
사이초시 코마츠초로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코마츠는 시(市)였단다.
고온지~키치조지, 성취석과 마리아관음상
코온지에서 1.4km 호주지(宝寿寺)에 이르는 헨로미치는 11번국도를 따른다.
호주지뿐 아니라 1.4km 다음에 있는 키치조지(吉祥寺)까지도 이 국도다.
지도에는 헨로미치가 국도 외에 다양하게 있다.
국도 이전의 옛길이 이미 헨로였는데 국도로 업그레이드 된 것인지 오리지널 헨로는 국도
외의 길이었는데 편리한 국도를 선호하게 된 것인지 나는 모른다.(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현재 여러 개의 헨로미치가 있다는 것.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헨로는 하나다.
헨로미치도 당연히 하나다.
천재지변이나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서 미치가 바뀐다 해도 그것은 하나여야 한다.
시코쿠헨로처럼 여러 개의 길 중에서 택일한다면 그것은 순례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코보대사가 걸었던 길이라는 헨로가 이처럼 여럿이 되어 지리멸렬하다면 어느 길
도 헨로가 아니며 따라서 코보대사에 대한 모독이니까.
옛 코마츠 시청 소재지였던 타운답게 구획정리가 잘 되어 있는 다운타운.
코마츠 다리를 건너 500m 안팎인 호주지에 당도한 시각은 오후 1시15분.
코마츠초는 60번~62번의 3개 레이조를 가진 마을이다.
14번에서 17번까지 4레이조가 있는 토쿠시마겐 코쿠후초(德島縣國府町)에 이어 7번~9번
레이조(土成町)와 함께.
텐표연간(天平/729~749)에 쇼무천황(聖武/재위724~749)의 칙원에 따라 도지(道慈)율사
에 의해서 창건되었다는 사찰이다.
쇼무천황은 이치노미야(一の宮/각국의 대표 神社)를 짓게 했다
그 때, 이 곳에 이요의 이치노미야가 건립되어 칙명을 받은 도지율사가 호라쿠쇼(法樂所)
로서의 별당사(별당사)를 창건한 것이 시초가 되었단다.
이 때 천황이 '콩코묘사이쇼오교'(金光明最勝王經)를 봉납함으로서 사명(寺名)을 콩고호
지(金剛寶寺)라 했다는 것.
코보대사가 이 지방을 방문한 때는 다이도(大同)연간(806~810).
대사는 이 절에 오래 머물면서 쇼무천황의 비(妃)인 코묘황후(光明)의 모습을 본뜬 '십일
면관세음보살상을 조각해 본존으로 하고 사명을 호주지로 바꾸고 레이조로 정했단다.
그 무렵에, 난산(難産)으로 고생하고 있는 코쿠시(國司/지방관)의 부인으로 하여금 순산
하도록 본존에 기원함으로서 남아를 무사히 출산했단다.
이로 인하여 순산의 관음보살이라고 싱앙하게 되었으며 많은 임산부들이 모여든단다.
호주지에서 동진하는 11번국도를 따라서 1.4km 전방, 국도의 좌측에 위치한 키치조지(吉
祥寺)에 당도한 시각은 14시 50분.
사이조 시 히미오츠(西条市氷見乙) 소재 63번레이조다.
58번셍유지에서 나와 1.000y오셋타이를 받기 직전의 소규모 키치조지와는 동명이사다.
코닌연간(弘仁/810~824), 이 지방 순교(巡敎) 중에 빛을 발하고 있는 히노키(檜/노송) 한
그루를 본 코보대사.
이 일대에 영기(靈氣)가 가득함을 직감하고 이 영목(노송))에 본존으로 할 비샤몬텐상(毘
沙門天像/불교에서 天部의 佛神)을 조각했다.
협시(脇侍)로 키치조텐상(吉祥天像)과 젠니시도지상(善膩師童子像)까지 조각하여 안치,
빈고(貧苦)로부터의 구제를 기원하여 당우를 건립한 것이 키치조지의 창건이란다.
시코쿠88레이조에 안치한 본존은 최다의 관세음보살(30)과 약사여래(24)에 이어 아미타
여래, 석가여래와 지장보살, 부동명왕, 허공장보살 순이며 1곳뿐인 레이조도 4곳이다.
그 중 1곳이 비샤몬텐상을 모신 63번키치조지다.
비샤몬텐은 불교에서 천부(天部)의 불신으로 사천왕 중 한 존(尊)으로 꼽히는 무신(武神)
이란다(持國天, 增長天, 廣目天과 함께)
비샤몬텐과 키치조텐, 젠니시도지 등 삼체(三體)는 불교에서는 드물게 가족관계란다.
부부관계인 이체(二體/毘沙門天과 吉祥天)와 자식(젠니시도지) 관계로.
본당 지근에는 흥미로운 전설을 가진, 성취석(成就石)이라는 이름의 구명 뚫린 돌이 있다.
본당 앞에서 눈을 감고 금강장(杖)을 짚고 이 돌의 위치까지 걸어가서 돌 구멍(직경30cm)
으로 지팡이를 던진다.
그 지팡이가 구멍을 관통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나.
비공개 사보(寺寶)라 볼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사연을 지닌 '마리아관음상'이 있다.
센코쿠(戰國/1467?~1573?) ~ 아스치모모야마 시대(安土挑山/1573~1603)에 토사 앞바다
에서 난파한 스페인 선박을 초소카베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土佐國戰國大名)가 구했다.
구출된 선박의 선장은 감사의 표시로 높이 30cm쯤 되며 미려한 고려백자 마리아상(像)을
모토치카에게 선물했다.
마리아상을 모르는 모토치카는 키치조텐 처럼 아름다운 관음상으로 생각하고 잘 모셨다.
그 덕분에 에도시대(江戶/德川幕府)의 기독교 금지령에도 무사했다는 것.
한데,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상이 수난을 면하게 된 사연은 말해 주지만 모토치카가 받은
선물이 키치조지의 보물이 된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타카오 성(高尾城)의 카네코모토이에(金子元宅)가 모토치카로부터 물려받아, 후에
키치조지에 맡긴 것"이라고 전해 온다는데 사계의 연구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단다.
선박의 조난과 마리아상의 기증과 양도 등의 시기와 당사자들 간에 납득되지 않는 점들이
있다는 것.
이시즈치잔콘지키인(石鎚山金色院) 마에카미지(前神寺)
키치조지를 떠난 시각은 오후 3시 5분.
64번마에가미지(前神寺)는 63번키치조지에서 11번국도를 따라 3km쯤 동진한 후 200m쯤
남하하면 되지만 그 길은 헨로가 아니란다.
키치조지에서 동진하는(좌측) 11번국도의 첫 신호등4거리(朝日町交差点)에서 우측 슈퍼
마컷을 끼고 우로 돈 후 첫 4거리의 동진길(좌측), 사누키카이도((讚岐街道)가 헨로라고.
이미 언급했음에도 반복하는데, 까미노에 견주면 이해되지 않는 헨로와 헨로미치다.
지도(헨로미치保存協力會編)에 표시된 아루키 헨로미치가 오리지널 헨로가 되려면 11번
국도도, 국도 이전의 옛길도 없어야 한다.,
현재의 지도에 표시된 아루키 헨로미치 외에는 모든 길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국도변의 62번과 63번레이조의 존재(創建)가 가능할까?
이 구간의 사누키카이도는 인도가 없는 좁은 길이다.
차량의 교행이 어려운 마을길에 다름아닌 길.
도로변 공원(新御堂公園)의 동쪽 모서리, 실개천에 불과한 이카리 강(猪狩川橋)을 건너 곧
우축에 '타고리지조/오쿠보시로베에의 사당'(たごり地藏/大久保四郞兵衛の祠)이 있다.
텐쇼(天正) 13 년 (1585), 천하통일을 목표로 한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을 받은
코바야카와타카카게(小早川隆景/西国大名)가 시코쿠를 공격했다.
오쿠보시로베에는 지방군에 가담, 소수의 병력으로 2만이라는 압도적 군세(軍勢)와 싸운
용맹한 무장이라는데 초라한 사당이다.
외화내빈, 허장성세 일변도인 우리와 달리 헨로에서 무수히 접하고 있는 그들의 외허내실
(外虛內實)만은 감동적이다.
소규모 다리를 건넌 후 노노이치집회소(野々市集会所)를 지나면 '사적 천인총입구'(史跡
千人塚入口) 안내판이 우측 골목을 가리키고 있다.
거쳐온 사당의 주인공과 마리아관음상의 관계자들(長宗我部元親,金子元宅) 등 2천여명에
불과한 이요(伊予) 지방군이 2만 또는 3만이라는 시코쿠 정벌군과 이 지역 노노이치하라
((野々市原)에서 싸웠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참패, 전멸한 이요군의 무덤이란다.
어느 지점에선지 노노이치에서 나라노키(楢木) 마을로 바뀌었다.
십자로의 작은 다리와 또 하나의 작은 다리 토요교(豊橋)를 건너 폴리스 박스(Police Box
/西條警察署 橘 駐在所)를 지났다.
폴리스박스는 일제때도 주재소였는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주재소의 일본인 순사(순경)에
적개심을 가졌었다.
어린 아이가 애국심에서 그랬겠는가.
하도 고집스럽고 다소곳하지 않으니까 겁을 주려고 지나가는 일본인 순사를 부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눈이 부시도록 하얗고 땅에 닿도록 긴 칼을 허리에 찬 거만한 순사의 칼집을
두손으로 붙둘고 늘어졌다.
기겁을 한 그 순사는 그 후로 내 집 앞을 지나가려 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인 순사는 유.무죄와 관계 없이 무서운 존재였다.
그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흉조(凶兆)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런 일본인 순사로 하여금 쩔쩔매게 했다 하여 마을에서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유년기를 회상하게 한 주재소에 이어서 타치바나 공민관(橘公民館), 아미다지(阿彌陀寺/
新西國25番靈場淸水寺),사이초시청소년육성센터 등이 집중되어 있는 사거리를 지났다.
니시이즈미오츠(西泉乙) 마을에 들면서 더 좁아진 사누키카이도를 따라 진자(丹民部守神
社)를 지난 후 V자 갈림길에서 마에카미지까지 우측 사누키카이도를 따랐다.
키치조지에서 마에카미지까지 헨로미치 3.2km중 3km가 사누키카이도를 따른다.
니시다코(西田甲)로 바뀐 마을의 이시즈치진자(石鎚神社) 입구를 지나 스노우치코(洲
之內甲)에 자리한 64번마에카미지(前神寺)에 당도한 시각은 오후 3시 55분.
"이시즈치잔콘지키인(石鎚山金色院) 마에카미지는 칸무천황(桓武/재위781~806)의 칙원
에 따라 건립되었다.
메이지(明治) 초기까지는 현 이시즈치진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신정부의 신불분리정책에
따라 폐사(廢寺)되었다.
그 후 메이지11년 현 위치에 마에카미지(前上寺)라는 이름으로 재흥(再興)이 허락되었다.
원래의 호칭, 마에카미지(前神寺)로 허락되기는 메이지22년이었다.
여기는 이시즈치산 동쪽 요배소로, 이시즈치파슈겐도(修驗道)의 본산으로서 전국에 30만
이 넘는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
마에카미지 입구에 있는 안내판의 글이다.
창건자는 슈겐도의 개조인 엔노교자(役行者).
텐무천황(天武/재위673~86) 시기에 이시즈치산에서 수행중일 때 현현하여 중생을 고통
에서 구제하라는 석가여래와 아미타여래를 조각, 안치함으로서 창건되었다는 것.
그 후, 간무천황(桓武/재위781~806)의 질병이 기원으로 쾌유됨으로서 칠당가람을 건립
하고, 칙원사가 되었다.
'콘지키인 마에가미지'라는 사명을 하사했고 55대 몬도쿠천황(文德/재위850~58) 외 많은
천황이 귀의한 사찰이란다.
신곤슈(眞言宗)이시즈치파의 총본산이며 슈게도의 근본도량(道場).
사찰 경내에서 젊은이를 또 만났다.
아침에, 60번요코미네지에서 내려갈 때 교행했기 때문에 사카우치(anti-clockwise) 주행
이려니 했는데 다시 순방향으로 돌아섰는가.
예약한 여관으로 가겠다는 그와 헤어진 후 경내를 두루 살폈으나 츠야도는 물론 슈쿠보도
없는 사찰에 헨로상이 머물만한 곳이 있을 리 없다.
황홀하게 수놓고 있는 아름다운 밤하늘, 금남호남정맥의 마지막 밤을 불러오다
해가 아직 제법 있는16시 55분, 해 안에 더 걸을 요량으로 마에카미지를 떠났다.
다음 레이조(65번)가 45km로 남은 23개 레이조 중에서 가장 긴 구간이기 때문에 내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야 하니까.
그러나, 마에카미지에서 500m도 가지 못하고 전진을 접었다.
시(市) 지정 대피소, 노인휴게집 입구 광장의 정자가 맘에 들었거니와 선점하고 있는 헨로
상의 정감 있는 권유에 따르게 된 것이다.
합숙한 적이 있는 헨로상이다.
28일 전인 9월 8일, 19번타츠에지를 지나 젠콘야도 주코코주안에서 합숙한 미하라(三原).
일본인으로는 흔치 않은 장신의 호인형이며 쿄토 출신으로 60세(2014년 당시)라는 그.
사카우치(逆코스) 순례중이라 했는데 현 위치에서 재회한 것은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센다츠(先達/안내자)용이라는 황색 오사메후다(納札)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괴이쩍고.
까미노를 배회하는 소위 홈리스(homeless/노숙자)를 접촉한 적이 있는데 그와 같은 류?
시코쿠헨로에도 그런 부류가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아무려면 어떠나.
유형에 관계 없이, 전번에도 무척 호의적이었는데 이번에도 나를 편하게 해주려는 의도로
자기의 천막을 상당한 거리가 있는 정자 밖으로 옮긴 그다.
정자는 아니지만 간이 지붕이 있는 주차장이라 밤새 비가 내려도 걱정은 없겠지만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 격이 되어 몹시 미안했다.
밤이 깊어진 시각.
구름은 곳곳에 널려 있지만 초저녁과 달리 하늘이 높아졌고 크고 작은 별들도 총총했다.
이 밤과 내일 하루를 안심해도 좋을 듯 싶은 하늘.
금남호남정맥의 마지막 밤 생각을 불러온 하늘이다.
고가의 숙소에 들었다면 황홀하게 수놓고 있는 저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는가.
마치 저 황홀한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많은 돈을 낸 꼴이 되니까.
비싼 값을 지불하고도 저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야에 달리는 열차는 아마도 토쿄(東京)를 떠나는 신칸센(新幹線) 열차가 세토대교(瀨戶
大橋)를 건너 요산센(予讚線) 우와지마(宇和島)까지 오가는 긴 장거리 열차리라.
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방안에 누워서도, 달리는 소리만으로도 상하행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데 작은 역의 무정차 열차라 시각 외에는 알 길이 없다.
병명도 없는 병(病)이 재발하여 걷기는 커녕 일어서지도 못하던 시절에, 시골 어느 암자에
유폐되어 있을 때 열차 소리가 들려온 후에는 한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다.
약속할 아무도 없으므로 약속한 일이 없고, 따라서 찾아올 아무도 없는데도 막연히 기다려
기를 반복하는 동안에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 정차했다가 서서히 출발하는 소리의 강약이 비법이다.
긴급대피(피난)소 덕을 보는가.
놀랍게도 WIFI가 작동하여 심야인데도 집에 전화를 했다.
집 마당의 감이 나무에 달린채 익었단다.
내가 돌아가면 익어있겠거니 했는데 어느새?
헨로에서 이따금 감을 따먹기는 해도 특출하게 당도가 높은 내 집 당감만 못했는데 군침이
도는 밤이 깊어갔다.
1개월 남짓 사이에 날씨가 엄청 달라졌다.
내복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특히 통비닐 속 야영이기 때문에 낮과 달리 밤에는 절실하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