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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인문화회관 원문보기 글쓴이: bok chan na
광부로나 또는 간호사로 독일에 취업했던 한인들은 처음에는 낯선 문화와 언어가 다른 장벽에 묻혀서, 남다른 외로움을 감수해야 했었고, 또 고국은 너무 멀고 당시 청취할 수 있었던 국내 소식은 겨우 KBS 라디오 단파 방송을 밤 11 시경에나 단 한번 청취할 수 있었던 실정 이였다. 이런 환경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글로 된 소책자를 만들어, 그 정보를 서로 보급하려던 움직임이 차츰 일어난 것은 당연한 귀결 이였다.
그 러나 외국이란 특수한 환경 아래서 이와 같은 움직임을 완전하게 흡수 할 수 있었던 재정문제 해결의 어려움과 또한 한 가지 겹쳐서 우리나라 문자의 그 특수성 때문에 꼭 필요했던 한글 타자기나 인쇄 시설 미비라는 열악한 환경때문에 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초창기 몇 십년 동안에는 서로 엄두를 내지 못한 형편 이였거나, 그 결과 역시도 아주 미미했던 실적과 출판 사정 이였다.
‘재독 한인사회 출판 움직임과 그 성과’에서는 이들의 동포사회의 출판을 위한 끊임없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편집자주)
프랑크푸르트 한인회지 속간호를 발간한 정진호회장
나) 「프랑크푸르트 한인회지」 속간호 발행
정 진호 회장(이 주축이 되어서 발행되었던 이 회지는 「재독 프랑크푸르트 한인 회」가 1983 년 9 월 25 일에 재조직된 후, 「Verein Koreaner in Frankfurt e. V」 로 정식 독일 법원에다 1984 년 4 월 24 일자로 사단 법인으로 새로 등록한 것을 기념하려는 목적으로 발행한 것이다.
당 시 편집위원 이 종진, 김 복실, 안 동수(사진 기자)등이 한국 간호사들을 독일의 전국 각 지방 병원에다 처음으로 취업을 시킨 역사적인 크나큰 과업을 성취하였던 「한독협회(Koreanische-Deutsche Gesellschaft e.V)」이 수길 의학 박사를 방문, 그의 당시 노력과 성공담을 제 2 특집으로 취재하였었다.
그 리고 특히 제 1 특집으로는 프랑크푸르트 시 교육청(Stadtschulamt)에서 외국인들을 위한 교육 상담을 하던 한 승면 전 서울사대 교수와 독일 교육제도 전반에 관한 면담 기사를 통해서, 그때까지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생소하고 복잡한 구조였던 독일 초, 중, 고등학교와 직업 특수학교 교육 제도 전반을 집중 조사한 『Hessen 주 학교 교육제도 ABC』기사를 다루므로, 후일 학부형들에게 자녀들의 자세한 진학 안내를 할 수 있었던 남다른 편집을 하였었다.
또 한 이 무렵 뤼셀스하임의 오펠(Opel) 자동차회사 종업원 이였던 이 세희 사장이 새로 개업한 「이정 출판사」에서 이 책을 인쇄하기로 결정한 후, 그에 따른 인쇄 경험이 없었던 사실 때문에 당시 몇 가지의 매우 힘들었던 고비를 넘겨야 했었다. 이때부터 이 출판 인쇄 작업을 함께 도우며, 당시 편집 진들은 첫 사진 현상작업과 인쇄, 책 재판 작업에 이르는 전 과정을 스스로 해결했던 그 자체는 매우 특수한 경험 이였다. 왜냐하면 이때 인쇄 기술 문외한 이였던 우리들이 마치 번갯불에다 콩 구어 먹는 식으로 익혔던 그 인쇄 기술 자체는 보통 직업 기술 학교에서 대충 2-3 년을 차근하게 순차별로 따로 배우고 또 실습 과정을 거치는 특수한 기술 이였기 때문이다.
-「이정 출판사」
최소한의 한글 인쇄 규모 시설 ****
이 세희 사장이 새로 개업한 「이정 출판사」에는 큰 냉장고 크기의 소형 로타식 프린트 인쇄기 한 대에다 인쇄 원판을 찍기 위한 최신형 발도르프의 레프로 카메라(Reprojekt-Kamera) 1 대와 대형 종이 절단기, 그리고 또한 한글을 찍을 수 있는 타자기와 같은 구조의 수동 청 타자기 한 대, 그리고 이 청 타자기에다 올려놓을 수 있는 약 3000 자 규모의 완성 한글 명조체 자판 12 호와 또 조금 큰 14 호 고딕체 자판, 그리고 또한 한문 3 천자를 모아 놓은 14 호 자판 1 대와, 그 나머지는 사무 용품 약간을 같이 갖춘 상태였다. 말하자면 최소한의 인쇄 규모 시설 이였다. 그런데 첫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우리 한국인들 그 누구도 직접 인쇄업에 종사한 유경험자가 없는데다가 다만 이 사장이 이 기계들을 구입하면서 판매 회사가 실시한 기계를 다루는 기술 강습을 약 1 주일 가량을 이수한 실력이 유일한 그 바탕 이였기 때문이다.
이 부문에 대해서 좀더 상세한 기술을 하려는 의도는 이때 편집 진들이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스스로 익힌 이 인쇄 기술이 결국 후 일 독일 한국인 사회에서 처음으로 주간 한글 신문이 뿌리를 내리는 움직임으로 다시 성장한 역사적인 첫 걸음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우리들에게 대두한 몇 가지의 새 기술들을 먼저 스스로 해결하여야 하였던 그 고충들은 퍽 남다른 것이었다.
- 인쇄 기술을 우리 스스로 익혀
명조체 청 타자자기의 한글 자판 모습
먼 저 대두한 것은 인쇄 원판을 굽기 위한 사진을 현상하는 가장 첫 기본 기술을 익혀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레프로 카메라 제작회사가 이를 새로 제작하며 처음으로 컴퓨터 작은 칩을 같이 내장하면서 모두 열 개로 된 번호 스위치를 나란히 나열하였는데, 즉 이 카메라는 이런 단추 번호를 어떤 방식으로 서로 같이 조합하면서 그 적정 순번에 따라 기계를 조정, 그때 그때의 필요한 작업을 조작하도록 한 구조로서, 이와 같은 기술에 전혀 익숙할 수 없었던 우리들은 약 3 일 동안이나 컴컴한 암실 속에 모여서 서로 머리를 조아리며 토론 연구하고, 또 거듭된 테스트를 하고 다시 실패하는 큰 고역을 치른 끝에야 겨우 사진 한 장을 완성하는데 성공한, 크게 실소할 만한 사실 자체다. 그러나 정말 감개가 무량했던 그 결과 때문에 편 집진 모두는 마치 승리의 개가를 부르듯 크게 환호하였던 일이다.
- 한글 청 타자기 사용법 결코 쉽지 않아
그 다음의 또 다른 큰 장벽은 청 타자기의 사용법 이였다. 이 수동 청 타자기는 한글 완성 명조체 글씨를 무려 3 천자나 모아놓은 청색 글자판에서 꼭 필요로 하는 글자를 그때마다 한자씩 찾아가며 마치 타자기의 롤라 위에다 감아 놓는 종이 위에다 툭탁 툭탁거리는 느린 동작과 수동으로 글자를 한자씩 찍도록 한 구조였다. 그런데 이 청 타자기는 비록 완성 한글을 가나다순과, 아야, 어여, 으이... 하는 식으로, 즉 사용 빈도가 많은 글자를 중앙 부문에다 먼저 나열하고 그 나머지 잘 쓰지 않는 글자는 외곽 부분으로 나열하면서, 또 순차별로 약 3 천자 가량을 자판 틀에다 함께 집중적으로 모아 놓아서, 즉 그때그때 필요한 단 한자의 글자를 찾기에는 매우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다 시 말하자면 마치 깨알과 같은 수 천자의 한글 글자 가운데서 보통 잘 쓰지 않는 어떤 글자를 찾으려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려 몇 분 동안이나 이리 저리로 사방을 찾아서 헤매야 하는 매우 큰 고충이 따랐다. 즉 이 기계는 우리나라에서 지난날에 인쇄소 식자공들이 인쇄를 위한 조판을 만들 때 한자 한자씩의 글자를 찾아다 일정한 조판 틀에다 짜던 그 과정을 응용하면서, 또 타자기와 똑같은 조작 방식으로 제작한 새로운 기계였다.
그 러나 전문 식자 기술을 익히지 못한 초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어려운 사용 방식 이여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였다. 이런 사정으로 결국 단 몇 줄로 된 단순한 한글 문장을 처음의 작정 되로 편집하려고 해도 어떤 경우에는, 무려 한 시간 가량의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도 그러나 별반 큰 진척을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점들이 바로 적정 분야의 전문 기술자도 없는 환경에서, 매우 독특한 구조를 가진 우리나라의 한글을 사용하는데 따르는 어려움이었고, 또한 이 열악한 환경을 스스로 극복해 보겠다고 처음 작정한 당시 우리들의 노력에 뒤따른 그 한계와 남다른 장해 요인이었다.
그 런데 오늘날과 같이 컴퓨터가 있어서 모든 인쇄, 편집 공정까지 한글 문서 프로그램 하나로 아주 간단히 처리할 수 있게된 현실 그 이전이었던 당시에 우리들이 경험한 매우 특별한 고충 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모든 책 편집을 일일이 손으로 써서 그 기초 작업 자체를 완벽하도록 이미 모두 끝낸 상태여서, 책에다 같이 삽입하였던 관련 사진들을 먼저 처리하면서 인쇄 원판을 굽는 최종 작업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그 이 후로는 더 큰 어려움은 또다시 따르지는 않았다.
재독 프랑크푸르트 한인회지 속간 18호〉 표지와 내용
- 매우 값진 첫 열매: 프랑크푸르트한인회지 속간호
결 국 인쇄를 시작한지 약 1 달만에 회지의 전 인쇄 작업과 책 제본까지 끝내서, 이를 배본한 결과는 각계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인쇄로 발행했던 그 어떤 단체의 회지라던가, 다른 책을 직접 인쇄까지 하여 발간했던 그 같은 기록이 전혀 없었던 독일 한인 사회의 너무나 열악한 환경 이였기 때문 이였다.“누가 처리해 주십시오” 라며 특별히 부탁하지 않았던 이 험난한 작업을 자체적으로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결한 모든 회원들은 외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우리 글로만 엮어진 아담한 책을 꾸며 놓은 뿌듯하고 남다른 기쁨은 큰 것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우리들의 인쇄 기술만으로 첫 번째의 책을 무난히 발간하였던 남다른 첫 기록이 된다.
다) 첫 한글판「이정 신문( I Jeong-Koreanischen Nachrichten Europa Zeitung)」
「교민들의 권익 보호」를 내세운 창간 이념
전 신문을 발행한 이세희 전 프랑크푸르트한인회장
프랑크푸르트 한인회지 「한인」속간 호를 인쇄 출판했던 「이정 출판사」이 세희 사장은 1984 년 8 월 1 일자로 다시 『이정 신문(I Jeong-Shinmun Mangan Str.10 6090 Ruesselsheim)』 창간호를 발행하면서 마침 토요일 이였던 이날을 기해서 정 창 「프랑크푸르트」총영사와 마인츠의 「한독 협회」장 이 수길 박사, 전 이 완희 「재독 한인 연합회」 회장과 그 임원 진, 그리고 정 진호 「프랑크푸르트 한인회장」 등 약 1 백 50 여명의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문사 앞마당에서 조촐한 행사를 치르며, 유럽에서는 역사적인 첫 한글판 『이정 신문』을 새로 출범시키며, 이때의 사시로서 「교민 권익의 옹호. 제 2 세 국민 교육의 선봉과 신속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라는 기치를 내세웠다.
그
리고 이 신문을 첫 출범시킨 이 사장은 지난날 자신이 스스로 체험한 사실 중에는 당시 독일 각지에서는 그 출처를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북한 노동신문과 거의 유사한 주장과 또 북한측의 악랄한 선전을 그대로 모방한 불온 바라들이 남발하고 있는 데다, 동시에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해외에서 고국의 정치 현실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악성 유인물들이 각지방 병원 기숙사에다 무작위로
뿌려지므로, 이 무렵에 새로 갓 취업하였던 젊은 한국 간호사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사실에 분개하는 한편, 보다 건실한 자체 신문을
스스로 제작하고, 발행하겠다는 취지와 결심으로 유럽이라는 악 조건에서도 이 신문을 창간한다고 첫 인사로 밝히고 있다.
1984 년 8 월 이정 신문의 창간 호
이 와 같은 그의 고발 자체는 당시 그만큼 한인 사회 속에는 여러 갈 레의 불안 요소를 안고 있었던 실태였는데, 그는 또한 이 신문의 제호였던 『이정』이란 논어에 있는 말씀으로 「사람이 마음을 곧게 갖고 바르게 하면, 그 사람에게 이로움이 있다.」는 뜻을 그대로 따서 신문 제호로 「이정」으로 인용하고, 명명한 사실과 함께, 당시 약 1 만 5 천명 가량의 식구를 가진 한인 가족들의 복지 언론과 2 세들에 대한 한글 교육의 중대성을 지적하면서, 그 길잡이 역할을 자청했던 점들은 감히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선구자적 사명 의식으로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 러나 이 사실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크게 도외시한, 즉 적정한 전문 기술자도 없었던 상태(신문에 관한 전문 기술인 이 이때에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현실) 속에서 개인 몇몇의 과욕과 노력만으로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과감하나, 동시에 너무 무리한 첫 출발 이였다. 그리고 이 신문사는 이 사장이 국내에서 한글 식자기를 구입하는 그 과정에서 우연하게 만난, 역시 미국에서 자체로 발행하고 있었던 「대한 신문」의 한국 주재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내에 체재하였던 조 길옥 기자가 그의 경험과 기술을 지원해 주기로 한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시작한 첫 사업 이였다.
〈재독 프랑크푸르트 한인회지 속간 18호〉 표지와 내용
손 으로 일일이 써서 약 3 개월 간의 편집과정 동안 취재까지 직접 하여서 단행본으로 1984년 8 월에 발행되었던 이 「프랑크푸르트 한인회지 「한인」은 당시 이 지역에 정착한 한국 회사들의 광고를 수집, 그 출판 비로 약 5000 DM 을 조성하면서 총 115P 분량에다 약 1 천부를 발행하여서 회원들에게 비매품으로 보급했던, 당시의 실정으로는 거의 획기적인 작업 이였다.
첫댓글 프랑크푸르트 한인회지 「한인」속간 호를 인쇄 출판했던 「이정 출판사」이 세희 사장은 1984 년 8 월 1 일자로 다시 『이정 신문(I Jeong-Shinmun Mangan Str.10 6090 Ruesselsheim)』 창간호---- 이세희 사장님과는 우리들은 뤼셀스하임에서 오펠에 같이 다니고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밤샘으로 바둑두는 시간을 가진 추억이 있다. 83년 하반기 부터 인쇄기 보러 같이 마인즈 비스바덴 프랑크푸어트 등등 인근 도시를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쉬운 것은 신문사를 말리는 부인과 이혼의 아품도 겪으면서 이정신문을 발행하신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