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활 중 가장 고형(古型)의 것으로 단궁(檀弓)이 있음은 알려진 바다. 중국의 옛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나 위서(魏書) 등에 의하면 한국의 예(濊) 땅에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생산된다 하였다. 여기서 ‘예’란 반도 내 동예(東濊) 쪽을 지칭한 듯하나 본래는 한국 중북부에서 만주 일원에 산재하던 민족 내지 정치집단으로 고조선과도 일정 수준 겹치는 개념이었다. 한편 낙랑은 중국인들이 한국을 범칭한 경우가 많아 필시 조선활 일반을 지칭한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단궁이 고조선계 활이란 통설(이중화, 『조선의 궁술』)의 근거로 무리는 없으며 특산물의 하나로 기록한 것을 보면 중국 상인들에게도 수출되는 명궁(名弓)이었던 듯하다. 중국의 전진왕 부견이 즉위할 때 고구려가 이 낙랑단궁을 선물한 사실로 미루어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국제적 명성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단궁의 단자는 박달나무 단자이므로 박달나무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리가 있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단순히 나무 재질만을 의미하기 보다는 고조선 문화권에 대한 상징성을 두루 가진 명칭이 아니었던가 한다. 고조선은 단군조선으로 비롯되니 하늘로부터 천신이 내려와 단나무(신단수) 아래에서 신앙촌을 열었으며 그 개국시조 또한 단군이었음은 다 아는 일이다.
여기서 ‘단’이란 한자로 檀이라고도 쓰고 壇이라고도 하거니와 기실 그 의미는 한국 고유말 ‘당’에서 연유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가 지금도 마을의 성산(聖山)은 당산(堂山)이라 하고 거기에 신성 나무를 당수(堂樹) 혹은 당나무라 하며 그 사제(司祭)는 지방에 따라 당굴이라 하고 중국의 해당 한자인 巫와 결합하여 무당(巫堂)이라고도 한다.
한편 나라 곳곳에 ‘당’이란 말조각이 붙은 지명이 무수하니 이들의 뿌리는 대개 토착신앙의 성역이었던 것이다. 서울 당산철교의 당산동은 말할 것도 없고 정주영 회장이 고속도로 뚫는데 가장 애를 먹었다는 옥천의 당재터널이라던가, 대구 내당동이 안당골에서 나온 말이라던가, 일일이 세기도 번거럽다.
또한 이는 알타이어에서 두루 사용되는 광명스런 하늘을 뜻하는 탱그리(Tengri)에서 연유했다고 해석되며 만주, 몽고, 알타이, 투르크를 가로질러 이와 연관된 지명이나 종족명 또한 허다한 터이다.
이같이 중요한 말뿌리를 내세운 활이란 점에서 단궁의 문화사적 의미는 자못 심오 원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단궁과 박달나무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박달나무는 참나무의 일종이지만 한문으로 단목(檀木)을 이름이니 단(檀)자를 곧 박달나무 단으로 읽는 터이다. 따라서 박달산의 나무이자 당산의 단목이라는 뜻도 되겠다. 박달은 한국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성역(聖山)으로서 ‘밝음의 언덕’, ‘광명의 산’이라는 뜻임도 알려진 일이다.
‘울고넘는 박달재’라는 대중가요의 발상지가 충북 제천에 있거니와 그곳에는 박달도령과 금봉이의 이별 설화를 스토리텔링화하여 사당을 만들고 청춘남녀에게 참배를 권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변형된 설화 조각으로 박달의 본질적 의미가 아니며 박달재는 충북 제천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 3대성의 하나인 박씨의 시조가 신라 창업군주 박혁거세이거니와 그 명호는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이라고 삼국유사에는 전한다. 박은 광명의 어근으로서 곧 광명의 임금이란 뜻이며 혁은 한자로 그를 재차 부연 설명한 것이며 거세는 당시 족장의 칭호 거수의 변형이라 함도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달은 고조선 서울이 아사달인 것처럼 언덕이나 땅의 명칭으로 두루 사용된 고어(古語)였다.
따라서 박달은 당산(堂山)과 유사한 성산(聖山)적 개념이지만 이에 광명의 성격을 좀더 부가한 또 하나의 고래(古來) 중요 말뿌리인 것이다.
오늘날 국궁의 유일 대표격이 된 각궁(角弓)은 단군조선에서 부여-삼한시대까지는 보이지 않다가 삼국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등장하였다. 이름이 암시하듯 짐승의 뿔을 활체에 붙여 탄성(彈性)을 강화하고 활의 귀족적, 고급품적 성격을 강화하였던 것같다.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이 황제로 등극할 때 고구려가 각궁(角弓)을 선물하였다는 기록처럼 진귀 명품적 성격도 가졌던 듯하다. 그러나 후대에 활 제작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보편 대중화되고 결국 한국 활을 주류를 점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각궁은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제조 기법은 다양하나 동서양활에 널리 응응된 것임도 주지의 사실이다. 제작에 주로 사용되는 무소뿔은 외국의 짐승 것이므로 한국활의 고유성을 상징하는데 다소 취약의 소지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두루 염두에 둘 때 한국활의 가장 원류되는 단궁의 원형 복원과 경기 방법의 개발은 앞으로 연구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나 한다.
말하자면 국궁계가 각궁 일변도에서 벗어나 조상의 다양한 활, 그 중에서도 최 원류되는 단궁의 실체와 그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 민족 무도(武道)의 본질 발양에 가일층 공헌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첫댓글 단궁의 원형 복원과 경기방법의 개발 연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2월 13일에 열린다는 국궁연 세미나에 참석하고 싶은데...지방이라서 힘들 것 같고...자료 파일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檀자가 박달나무 단자이므로 활의 재료가 박달나무였을 것이라는 추정은 동의하기 여려운 점이 있습니다. 박달나무는 단단하기 짝이없어서 야구 방망이나 다듬방망이 재료로 쓰였다고 합니다. 각궁의 전통 줌통도 참나무이고요. 활채의 주재료는 대나무인 것만 보아도 박달나무와는 거리가 멉니다. 저는 밝음의 의미라는 신채호 선생의 의견도 동의않고 있습니다.
박달은 몽골어와 연관성이 높은 단어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bator는 영웅, 전사의 의미이지요. 단지 한자로 차음한 것이라고 봅니다. 몽골이나 만주에서 무소뿔을 구하기 어려웠고 뿔이 큰 산양뿔로 활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한
고조선을 세운 단군(檀君)왕검때 부터 사용된 활(弓)을 일러 단궁(檀弓)이라고 했을것이라는 생각은 어떤가요?
단궁을 박달나무로 만들었다는 것은 제가 아니라 현재 여러 책들에 그렇게 쓰여있음을 전한 것이고 그 개연성을 인정한 정도입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단군문화권 전반과의 관계를 좀더 중시해서 보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이를 위에서 장황히 언급했구요. 권위있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당 글에는 "고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된 활. 박달나무로 만들었다. 고대 동예족(東濊族)의 특산물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하였고 (네이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콘텐츠닷컴에는 "박달나무로 만들었다고 하여 단궁이라 하며 우리나라 목궁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네이버 / 문화콘텐츠닷컴)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檀자를 꼭 박달나무로만 생각해야 하는지, 또한 박달나무는 요즘 생물학계에서 정의하는 그런 참나무 수종으로만 생각해야하는지 등도 재고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상고시대 한국인들이 오늘날처럼 엄밀한 개념 규정 하에 이런 용어를 사용했다고 단언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후대에 한국 목궁은 산뽕나무와 산비마자를 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조선의 궁술'에서는 단목에서 이쪽으로 변화된 것으로 이해했으나, 단목의 의미를 참나무에 국한할 수 없다면 애초 단궁의 재질이 상기 수종을 포함했을 개연성도 서둘러 차단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박이 광명의 어근임은 여러 학자들이 공인하는 사실로서 재언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박달이란 말이 그 광명의 뜻으로 쓰인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으나 저로서는 구태어 예외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몽고도 알타이 어족으로 한국어와 밀접하므로 같은 어근이 많음은 당연하나 위에서 예로 드신 언어와의 관련성은 잘 알지 못하므로 논외로 하겠습니다.
단군왕검은 환단고기 류의 책에서는 1대 단군에서부터 쭉 왕통계보를 이어가나 학계에서는 그런 정도로까지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단군왕검때부터 사용된 활"이라 할 경우 논쟁의 소지가 커질 수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수준이 무난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우리가 서기에 2333년을 더하여 단기로 쓰고 개천절을 두어 단군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날을 기리듯이 민족 상징성의 측면에서는 설향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단순 간이한 설명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