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는 도장(圖章)보다 기도(祈禱)가 먼저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싶다는 꿈을 꾸실 겁니다.
세계 도처에 유명한 성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상당수의 성지들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전국 15개 교구에 167곳 (2019년 발행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개정판 기준)이 산재해 있다
니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이렇게나 많은 성지를 이미 다 돌아본 분들도 상당수 계실 것이고 또한 완주를 위한
계획을 세워 지금도 발품을 파는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성지순례의 붐(?) 속에 저와 제 아내(안젤라)도 의기투합하여 국내 성지순례(개정 전 111곳)에 나서 2년 만에 완주
하였습니다. 저는 성지의 외관을 카메라에 담고 안젤라는 성지의 내용을 글로 기록하도록 역할을 분담하였습니다.
한 번 순롓길에 나서면 1박 내지 2박이 보통이었으니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면서 한 번 순례할 때마다 한 곳이라도
더 방문하려고 종종걸음으로 다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지순례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지 안내 책(『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으로 순례 객들의 필독서인 셈인데, 저 역시 성지순례 시 한 번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습니다. 이 안내 책자에는 성지 방문 인증을 위한 작은 공간이 있어, 성지 한 곳 한 곳을 방문할 때마다
확인 도장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책의 안내에 따라 167군데 성지를 다 돌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보니 교구에서는 완주한 신자들에게 축복 장을 주고 격려해 주며
성지 순례를 장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지를 찾는 제 마음가짐은 어떤지, 순례 목적에 부응하고 있는지, 조금은 흐트러져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게 됩니다. 100여 년간의 박해로 인하여 뜨거운 순교의 피가 뿌려진 곳, 신앙 선조들의 삶과 그들의 신앙이 고이 간직되어 있는 곳, 그들이 잠든 무덤 앞에선 코끝이 시려옵니다. 각종 고문 도구들을 보면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지는 여느 관광지와는 확연히 다른 곳이고, 결코 가볍게 찾아가서는 안 될 곳입니다. 그런데 간혹 성지순례 자체보다는 방문 인증 도장만 찍고 돌아서는 것만 같은 분들을 보았습니다. 마치 경주하듯이 성지를 완주하는 모양새로 말이죠. 물론 성지를 찾는 각자의 방식이 있겠지만, 그래도 순례 도장부터 찾아서는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전에 있는 어느 수녀회 성당에 사진을 찍으러 간 적이 있습니다. 6·25 전쟁 때 십여 명의 신부님이 순교한 역사가
있는 성당입니다. 그 때 저를 보신 한 수녀님께서 성당에 오면 기도부터 해야 한다며 한마디 건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이든 성지든 성역에 들어서면 먼저 기도부터 해야 하는데, 모르긴 해도 저 역시 성지순례 중에 기도하기보다는 카메라 셔터에 먼저 손이 갔을 겁니다. 이제 나머지 찾아보지 못한 성지를 순례하게 되면 더욱 느린 걸음으로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셔터를 눌러야겠습니다.
글; 김세원 안셀모 / 울산대학교 미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