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서야담(溪西野談)
계서야담(溪西野談)은 조선 후기에 이희준(李羲準)이 편찬한 문헌설화집으로 야담을 기록한 책이다. ‘계서’는 그의 형인 희평(羲平)의 호이며, 이 책도 희준의 찬이 아니라 희평의 찬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 명(名) 재상
유성룡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
유성룡(柳成龍)에게는 바보 숙부(痴叔•치숙) 한사람이 있었다. 그는 콩과 보리를 가려 볼 줄 모를 정도로 바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숙부가 柳成龍에게 바둑을 한 판 두자고 했다.
柳成龍은 실제로 당대 조선의 국수(國手)라 할 만한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아버지 항렬 되는 사람의 말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두었는데 막상 바둑이 시작되자 유성룡은 바보 숙부에게 초반부터 몰리기 시작하여 한쪽 귀를 겨우 살렸을 뿐 나머지는 몰살 당하는 참패를 했다.
바보 숙부는 대승을 거둔 뒤 껄껄 웃으며
"그래도 재주가 대단하네. 조선 팔도가 다 짓밟히지는 않으니 다시 일으킬 수 있겠구나." 라고 말했다.
이에 柳成龍은 숙부가 거짓 바보 행세를 해 왔을 뿐,
異人(이인)이라는 것을 알고 의관을 정제하고 절을 올리고 무엇이든지 가르치면 그 말에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숙부는 아무 날 한 중이 찾아와 하룻밤 자고 가자고 할 것인데, 재우지 말고 자기한테로 보내라고 했다.
실제 그날, 한 중이 와 재워주기를 청하자
柳成龍은 그를 숙부에게 보냈는데 숙부는 중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네 본색을 말하라고 하니
그가 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조선을 치러 나오기 전에 柳成龍을 죽이려고 보낸 자객이라는 자복을 받았다.
그리하여 柳成龍은 죽음을 모면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의 자리에서 사실상 국난을 극복하는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고 부르던 그, 異人(이인)이 위기의 조선을 구했다는 것이다.
오성(鰲城) 이항복과 한음(漢蔭) 이덕형의 우정(友情)
오성(鰲城)은 바로 이항복(李恒福 : 1556-1618 : 명종 11 - 광해군 10) 선생이며, 그의 아호(雅號)는 백사(白沙)이다.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로서 장인(丈人)인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과 더불어 전란(戰亂) 극복에 힘쓴 결과, 호종(扈從) 1등 공신(功臣)에다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봉작(封爵)되어, 그때부터 세상에서는 그를 오성대감(鰲城大監)이라 불렀다.
나중에 최종 벼슬은 영의정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나, 광해군(光海君)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변호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를 적극 반대하여,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으며, 귀양지에서 별세하였다. 사후(死後)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오성이 함경도로 귀양 가는 길에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선인 철령(鐵嶺) 고개를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어 읊어, 후일(後日) 이 시조 내용을 광해군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철령(鐵嶺) 높은 봉(峰)을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어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 본들 어떠리.
출전(出典) : 진본 청구영언
오성 이항복 선생의 절친한 친구가 바로 한음(漢蔭) 이덕형(李德馨) 선생이다.
이덕형(李德馨 : 1561-1613 : 명종 16-광해군 5)은 아호가 한음(漢蔭)이며, 오성 이항복과 같은 해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선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며, 명군(明軍)이 오자 그들을 맞이하여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고, 서울 수복의 공으로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이후 영의정까지 역임하였으나, 광해군 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옹호한 죄(罪)로 파직되어 병사(病死)하다. 그의 죽음을 들은 광해군은 울면서 한음을 복관(復官)시켰다고 한다. 한음의 시호(諡號)는 문익공(文翼公)이다.
일찍이 한음(漢蔭)이 명(明)나라로 구원병(救援兵)을 청하러 갈 때 그와 오성(鰲城)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오성(鰲城)은 친구 한음을 전송(餞送)하면서,
“이번에 만일 명나라 군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으면 그대는 나의 시체를 용만[龍灣 : 우리나라 의주(義州)]에서 찾게나.”
한음은 대답하기를,
“아닐세. 만일에 명나라에서 원병(援兵)을 내보내지 않는다 하거든 자네는 나의 시체를 노룡[蘆龍 ; 명나라 황성(皇城)]에서 찾도록 하게.”
말을 마친 두 사람을 굳은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고 한다.
서로의 사후(死後)까지 부탁하며 비장하게 작별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우정과 우국지정이 얼마나 대단하였던가를 읽을 수 있다.
두 사람은 광해군 때 영창대군 제거와 인목대비 폐출 사건 때 이를 반대한 대표적 충신이었고, 오성이 탄핵을 당해 북청(北靑)으로 귀양길에 오르게 되자 평생의 지기(知己)를 잃게 된 한음은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을 알고 그와 헤어진 후 연일 귀가(歸家)할 때마다 친구를 생각하고 술을 마시며 울었다고 한다.
이 때 그가 지은 시조(時調)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큰 盞(잔)에 가득 부어 醉(취)토록 머금어서
萬古英雄(만고영웅)을 손꼽아 헤어보니
아마도 劉伶(유령) 李白(이백)이 내 벗인가 하노라
출전(出典) : 진본 청구영언 100
이렇듯이 오성(鰲城)과 한음(漢蔭)은 서로의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이나 났지만 평생토록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우정을 나누었다.
그들의 유별나게 돈독했던 우정에 관한 숱한 일화(逸話)들은 지금까지도 야담(野談)으로 각종 책(冊)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객지(客地)에서 만난 사이에 서로 마음이 통하면 10년 미만(未滿) 차이의 범위 내에서 벗으로 지냈으며, 10년 차이가 넘어야 나이 많은 사람에게 형(兄) 대접을 하였다. 이는 공자(孔子)님과 주자(朱子)님도 인정하신 관례이기 때문에, 과거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는 이 전통을 오래도록 지켜 내려왔다.
권율장군의 사위 오성 이항복 대감
권율 대감의 이웃집에 의협심 깊고 장난 끼 많은 한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의 집에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가지가 권율대감의 집 담 위로 뻗어 나와 있었다.
가을이면 가지에 먹음직스런 단감이 주렁주렁 가지가 휘도록 달렸다.
대감 집종들은 감을 맘대로 따갔다.
감나무 집 청년은 화가 났다.
어느 날 권율 대감이 사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장지문 틈으로 어떤 녀석이 주먹을 퍽 들이 밀면서 대감님 이 주먹이 대감님 주먹입니까 제 주먹입니까? 물었다.
대감은 별 녀석 다 봤다면서
“이놈아 그것은 네 주먹이지 어째서 내주먹이냐”고 했다.
이렇게 해서 옆집 청년은 자기 집 감나무에 달린 감은 자기 집 것임을 분명히 했다.
권율 대감은 무남독녀 외딸을 이 청년에게 시집보내고 장인이 됐다.
이가 바로 임진왜란의 일등공신 오성 이항복이다.
오성과 한음은 조선 해학諧謔문화의 태두
오성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과 친구였고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긴 해학의 거두다.
어전회의를 할 때에도 오성은 장인인 권율대감을 넌 짓이 해학적인 농담으로 놀리곤 했는데
임금은 그럴 때마다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다며 오성을 칭찬했다.
옛날에는 대궐에서 일하던 궁녀가 출궁해 남자를 만나면 두 남녀를 간통죄로 다스렸다.
도승지(비서실장)로 있는 이항복 대감 집에서 일하는 남자종이 출궁한 궁녀와 눈이 맞아 두 남녀는 간통죄로 감옥에 가게 됐다.
임금은 이항복을 입궐하라고 했다.
이항복은 자기종의 간통죄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일부러 늦게 입궐했다.
임금은 늦은 까닭을 물었다.
이 항복은 입궐하는 길에 사람들이 웅기중기 모여 있어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가 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빈대와 모기에 대한 만담을 하는데 그 얘기를 듣다 늦었다면서 거기서 들은 애기를 임금에게 했다.
빈대는 본래 남의 피를 빨아먹기만 하고 항문이 없어 배설을 못하는 미물인데 마침 한 빈대가 배가 터지도록 피를 빨아먹고 “내배 터지면 나 죽 는다” 면서 옆에 있는 모기더러 “네가 갖고 있는 침으로 내 배를 찔러 구멍을 뚫어 달라”고 애원을 하자
모기는 “너 큰일 날 소리 하는구나 도승지 이항복의 남자 종이 본래부터 뚫려있던 배꼽아래 출궁한 궁녀의 구멍을 뚫었다고 감옥에 가게 됐는데 본시 있지도 않던 구멍을 네 배에 뚫으면 내 죄가 훨씬 더 무거울 텐데 내가 어떻게 네 배에 구멍을 뚫겠느냐
나를 죽일 소리 일랑 아예 하지도 말라”며 모기는 활짝 날라 가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이항복은 선조 임금에게 이야기가 하도 자미 있어 다 듣고 오느라 지체 되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임금은 경의 이야기는 동방삭(東方朔)의 해학보다 재미있다며 박장대소했다.
그리고 경의 종 간통죄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한 것 아니냐며 종의 죄를 사면해 주었다.
재미있는 야담은 임금도 좋아하고 백성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