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를 바로 알아야 나라가 바로선다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의 대대적 남침이 시작됐어요
대통령이 첫 보고를 받은 것은 오전 10시경.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미국 본토에서 군함을 구입해 하와이에 머물던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즉각 귀국을 지시하고(25일 오전 11시),
무초 미국 대사를 회동하며(오전 11시 35분),
장면 주미 대사에게 미국 원조를 빨리 받아내도록 지시하고(오후 1시)
비상 국무회의를 주재했지요(오후 2시).
미국의 지원이 공식화되지 않자 밤늦게 무초 대사를 다시 경무대로 불렀어요(밤 10시).
밤을 꼬박 새우면서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했지만
전속부관이 깨울 수 없다고 하자
“한국 있는 미국 시민도 죽어가는데 장군 잘 재우라”고 호통치고는(26일 새벽 3시),
무초 대사에게 전화해 대포와 전투기 지원을 요청했지요(새벽 4시 30분).
이튿날 오전 치안국을 방문해 전황을 확인하고 경무대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 상공에는 북한의 야크 전투기가 맴돌았어요(26일 오전).
전세는 급격히 악화됐지요
의정부가 함락되고 북한군의 서울 진입이 초읽기에 들어섰어요
대통령은 서울에 남겠다고 했지만 “국가 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라는 설득에 피란을 결정하지요
서울역을 출발(27일 새벽 3시 30분)하기 직전까지 주미 대사에게 전화해
트루먼 대통령 면담을 지시하고 맥아더 장군과의 통화를 시도했어요
27일 낮 대구에 도착했는데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이었지요
“내 평생 처음 판단을 잘못 했다”며 열차를 돌려 도로 올라갔어요
대전역에 도착한 시각이 27일 오후 4시 30분.
수원까지 가서 자동차로 서울에 들어갈 작정이었지요
미 대사관 참사관이 유엔 결의 소식과 트루먼의 긴급 무기 원조 명령을
알려오면서 대전에 머물게 됐어요
29일 맥아더 장군의 방한 소식에 미군 조종사가 모는 경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가 소령 때부터 알던 맥아더와 극적인 상봉을 했어요
대전으로 돌아오는데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두 번이나
북한 야크기의 추적을 받았지요
맥아더의 한강 방어선 시찰 이후 미국은 지상군 참전을 전격 결정했어요
6·25전쟁의 결정적 순간이었지요
대전으로 내려간 뒤부터 전쟁 내내 이승만 대통령은
권총 한 자루를 침실 머리 맡에 놓고 자는 습관이 생겼어요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는 “최후의 순간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
우리 둘을 하나님 곁으로 데려다 줄 티켓”이라고 말했지요(프란체스카 회고록).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7월 29일 밤 프란체스카 여사를 불러
“적이 대구 방어선을 뚫고 가까이 오면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한다”면서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떠나라고 했어요
여사는 “절대로 대통령의 짐이 되지 않겠다”며 함께 있겠다고 했고,
대통령은 “우리 아이(병사)들과 여기서 최후를 마치자”고 했지요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미국은 해외나 제주도 망명 정부를
계획했지만 대통령은 거부했어요
오히려 더우나 추우나, 적의 박격포가 떨어지는 상황에도
매주 전선을 방문하는 고령의 이승만을 보면서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정치가·애국자’라고 평가했지요
김일성과 스탈린의 6·25전쟁 계획은 한국을 침략하자마자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 이남을 차단해 국군을 격멸한 다음, 남한에 있던 20만명 이상의 ‘인민 봉기’로
정부를 전복하고 한 달 내 전쟁 종결을 목표로 했어요
위의 내용은 ‘북한 남침 이후 3일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을
군사학자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씨가 논문으로,
소책자로 기술한 내용이지요
정부 수립 2년밖에 안 된 신생 국가가
조직도 미비하고 전차와 전투기도 한 대 없는
심각한 전력(戰力) 열세 속에서 침략을 당했는데,
국제 정세에 혜안 있던 75세의 노(老)대통령이 어떤 전시(戰時) 외교로
미국과 유엔의 지원과 참전을 신속하게 끌어내
대한민국을 수호했는지를 볼 수가 있어요
6·25전쟁 내내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北進) 통일의 의지를 피력했지요
맥아더 후임의 매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확전론에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이승만 때문에) 내 머리털이 많이 빠지게 됐다”고 토로했을 정도였어요
북이 먼저 무력으로 38선을 파괴했으니 존속시킬 이유도 없다면서
국익과 통일에 단호했는데 한국 내 일부 세력은 한강다리 끊고
남쪽으로 도주한 ‘비겁한 런승만’ 이라고 뒤집어 씌워 노대통령을 폄하해 왔지요
생각의 자유라는 외피를 쓰고 갖가지 궤변과 왜곡이 독버섯처럼 번져
젊은 세대의 역사관까지 흐려놓는 이념 전쟁이 우리 사회에 소리 없이 확산됐는데
너무 오래동안 눈 감고 입 닫아 온것이 사실이지요
미화할 필요도 없었어요
사실 그대로만 알리면 되는 것이었지요
1875년에 태어나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엄혹한 시기를 살아온
초대 대통령의 90평생 궤적을 직시하는 것 자체가 역사의 교훈이었어요
대중적 각성의 101분을 제공해준 김덕영 감독의 용기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 영화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어요
제일 황당하게 와닿았던 장면은 한강다리 끊고
도망간 ‘런(run)승만’으로 조롱받고 폄하되고 있다는 대목이지요
김덕영 감독이 3여 년간 제작하면서 101분 필름에 다 보여주지 못한
미반영 분량이 훨씬 많을 것이지요
이승만 전 대통령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건국전쟁’(1일 개봉)이
75만 관객(19일 현재)을 동원했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다큐 ‘길위에 김대중’(1월 10일 개봉)은
누적 관객 12만명에 그치고 있지요
그렇지만 관객수 1만명을 넘기 쉽지 않은 다큐로선 두 작품 다
흔치 않은 흥행이라 할수 있어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여야 정치인 및 연예인들의 잇딴 관람과 후기도 흥행을 부채질했지요
‘건국전쟁’은 개봉 시기부터 맞불 작전을 폈어요
김덕영 감독은 지난달 언론시사회 때 “원래 3월 1일 개봉하려다
한달 앞당겼다. 곳곳에서 파란색(더불어민주당 대표색),
‘다시 김대중’이란 기치가 나오고,
영화(‘길위에 김대중’)까지 나와서”라고 밝혔지요
보수‧진보 정치인을 다룬 다큐가 이례적으로 맞대결을 하게 된 배경이지요
12‧12 군사반란을 극화한 ‘서울의 봄’이 1300만 관객을 동원하고
‘길위에 김대중’까지 개봉한 가운데,
모처럼 보수권에서도 ‘건국전쟁’ 관람 열기가 일었어요
167개로 출발한 ‘건국전쟁’ 상영관 수는 설 연휴를 기점으로 늘기 시작해
현재는 900여개에 달하고 있지요
한 극장 관계자는 “‘건국전쟁’은 개봉 2주차인 연휴 기간
좌석판매율(배정된 좌석수 대비 판매 좌석 비율)이 같은 기간
전체 영화 평균 좌석판매율의 2배에 가까웠다
관객 수요가 높다고 판단해 스크린을 편성했다”면서
다큐멘타리 역사상 최고의 흥행작이 될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서슴없이 말했지요
정말 대단한 열기라 아니할수 없어요
이제야 나라가 바로서는 듯한 기분이 드는것은 왜 일까요?
오는 22일 개봉할 '기적의 시작'도 큰 기대를 주고 있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조동렬 *-
▲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뉴욕 맨해튼 '영웅의 거리' 자동차 행진을 하는 모습이지요
이를 담은 동영상이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70년만에 대중 공개됐어요
▲ 1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CGV 여의도에서 영화 '건국전쟁' 무대인사가 진행됐어요
김덕용 감독이 무대인사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