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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겨냥하여 부산한 즈음이다. 오늘의 자치단체장이란 왕조시대의 목민관일 것이다. 정약용은 질문한다. “백성을 위해서 목(牧)이 존재하는가, 백성이 목을 위해서 태어났는가?” 그는 근원에서 백성들의 생활상 필요와 자발적인 추대에 의해 여러 통치자와 권력이 발생했다고 답한다. 그러나 200년 전 조선의 수령들은 오만스럽게 자신을 뽐내고 태평스럽게 스스로 안일에 빠져서 자기가 목자라는 것을 망각한다 하였다. 그보다 100년 전 황종희(黃宗羲)도 말하였다. “우리가 나가서 벼슬하는 것은 천하를 위한 것이지 임금을 위한 것이 아니요, 만민을 위한 것이지 한 성씨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치란이란 한 성씨의 흥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만민의 근심과 즐거움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진단은 간명하며 동의도 용이하다. 우리 사회의 선거제도 역시 그에 기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상한 위민의 구호는 대개 형해만을 남기고 조만간 사라진다. 제도는 의젓하되 필시 정신이 실종된 탓이다. 당연히 각성은 양변에 모두 필요하다. 백성에 대한 목민관의 본질은 마땅히 백성도 견지해야 할 바이며, 인군에 대한 신하의 본분 또한 정작 백성이 먼저 성찰해야 옳다. 전근대의 치자가 천명의 대행자라 하나, 오늘의 그들은 민의에 복무한다. 왕정 시대의 천명조차도 민의에 따라 전변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오늘의 민주정치에서야 다시 말할 나위가 있으랴. 대저 난무하는 후보자들의 감언은 저열한 유권자들의 이설을 만나 비로소 은밀하게 화동한다. 단언하되, 이렇듯 감언과 이설은 결코 홀로 서지 않는다.
당 정관 7년 태종은 사형수 수백 명에게 돌아올 기일을 정하여 일시 방면한다.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형기에 맞춰 사지로 돌아온다. 죽을죄를 지은 극악한 죄수들이 놀랍게도 구차하게 삶을 구하지 아니하고 죽음 대하기를 마치 본향의 집으로 돌아가듯 한 것이다. 이에 태종은 그들을 모두 사면한다. 영합하는 사람들은, 비록 극악한 소인일지라도 은덕으로 대함에 군자로 거듭난 것이라 칭송한다. 즉 태종의 드문 덕화가 이적을 낳은 것이다. 그러나 300여 년 뒤 구양수(歐陽修)는 묻는다. “그들을 놓아 보낼 때 그들이 반드시 돌아와서 사면을 바랄 것이라 여겨 놓아준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 것이며, 그들이 방면되어 갈 때 제 발로 돌아오면 반드시 사면을 받으리라 여겨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 것인가!”
삼엄한 통찰이다. 구양수에게 이 사건은 상하가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도적질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놓여났다가 돌아온 그들을 죽여 용서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뒷날 다시 죄수들을 방면했을 때 그들이 또 돌아온다면 그때에야 은덕이 미친 줄을 알 수 있겠으나, 그 또한 있어서는 안될 변칙이라 한다. 결국 태종은 그의 공명심에 영합하는 이들의 칭예를 탐했을 뿐이다. 그가 진정 천하에 은덕을 베풀었다면 그의 치세 동안 극악한 대죄인이 그처럼 범람했을 까닭도 없다. 『당서』는 태종을 일러 ‘큰 것을 즐기고 공명을 좋아했다[好大喜功]’고 평했거니와, 사형수의 방면과 사면 역시 남달리 현시욕에 목말라하고 성군의 칭예에 급급해하는 그의 남루한 성정을 폭로하는 한 예증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란 중의를 모아 사람을 고르는 일이다. 고르는 이와 고름을 받고자 하는 이 사이에는 건강한 긴장이 필요하다. 실로 제도 본연의 철학에 대한 양변의 각성이 긴요하다. 이를 위해 사람을 천거하는 한유(韓愈)의 논리를 환기한다. 산의 나무와 저자의 말을 천만인이 모두 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그것이 곧 그 나무가 동량이 되지 못하고 그 말이 잘 달리는 말이 아닌 것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장석(匠石 : 전국시대의 대목공)과 백락(伯樂 : 말을 잘 준별했다 하는 주대의 인물)이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필시 재목감이 아니요 준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뒤집어서 보면, 천만인의 칭예가 무성하다 한들 백락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준마일리 없다. 요컨대 후보자와 유권자가 서로의 백락과 장석이 되기를 각별하게 희망한다.
아울러 사람을 찾아 대낮에 등불을 들고 헤맨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고뇌를 기억한다. 사람다운 사람을 찾는 일의 간고함이 어찌 오늘이라 하여 다를 것인가. 연초에 중국 영파시에 있는 고려사관(高麗使館) 유지를 들렀다. 영파시는 그곳에 고려청(高麗廳)을 복원하고, 전근대 한ㆍ 중 교류를 주제로 한 전시관을 정비해 두었다. 맨 처음 자리한 장보고 전시 벽 바탕에는 그를 평한 당나라 두목(杜牧)의 글이 깔려 있다. “옛 말에 이르기를 ‘나라에 한 사람만 있어도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저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녕 그 나라가 망할 즈음에 어진 이를 쓰지 않기 때문이니, 만일 그런 이를 쓸 수만 있다면 한 사람만으로도 넉넉한 것이다.” 두목에게 장보고는 바로 그 ‘한 사람’이었다.
참으로 한 사람의 사람다운 사람이 나라를 나라이게 한다. 올해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대한제국은 종국을 고하고 말았다. 물론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다.” 하며 분사한 박제상이 신라를 신라이게 한 것처럼, “한 숟갈의 밥이나 한 모금의 물도 모두 왜적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거부한 최익현도 조선을 조선이게 한 정신이다. 그러나 합방의 ‘공로작’과 ‘은사금’에 기꺼워 한 관료들을 보면, 두목이 이른바 “정녕 그 나라가 망할 즈음에 어진 이를 쓰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을 징험한다. 합방령을 접한 그 날 황현은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의 역사 품어 헤아리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탄식하고 절명하였으니, 그 역시 사람다운 사람이고자 고투한 분이다.
그렇다면 1910년 그 겨울 60여 명의 식솔을 거두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이회영 여섯 형제분은 뒷날의 독립을 예비한 근원이었다. 조선의 재상 열 명을 배출한 ‘삼한갑족’에서 영근 이회영 일문은 의로운 탄환이었다. 그들은 고구려의 거룩한 왕들이 누워 있는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의열단거사, 조선의용대, 대한광복군 등 일제 36년 간 이어온 항일전쟁을 거의 모두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3000여 명의 독립군들이 일구어냈다. 사람다운 사람 하나가 온 백성을 사람이게 한 것이다. 이로써 이회영은 스스로 또 하나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으니, 그 뿌리에서 몸을 받은 깃발 하나가 옳게 나부낄 때 해일 같은 감동이 백만 천만의 사람들을 사람이게 한다.
안중근도 이회영과 함께 그 ‘한 사람’이다. 100년 전 3월 안중근 선생은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회영 선생도 그곳에서 불귀의 넋이 되었고, 신채호 선생 역시 뒤를 이어 그 차디찬 이국의 영어에서 고단한 몸을 눕히고 말았다. 최근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를 다시 엮은 이기영 열화당 대표는 안중근 정신을 ‘신독(愼獨)’으로 가늠하였다. “감춘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고, 조그마한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는 데서 삼간다.”라고 한 『중용』에서 유래한 말이다. 『대학』은 이를 또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라 한다. 안중근 선생의 유해는 정처를 잃고 암중에 부유하고 있으나, 선생의 정신은 100년을 거듭하여 겨레 가운데 찬연한 영생의 궤적이 굵고 선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어탁수(一魚濁水)’라는 말이 있다. 한 마리 물고기가 물을 흐리게 한다는 뜻으로,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집단 전체나 여러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침을 비유하는 말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방죽을 흐려 놓는다.”는 말도 같은 의미의 속담이다. 그러나 미꾸라지가 증거한 것은 겉보기에 안온한 수평을 유지하고 있는 맑은 방죽 물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더러움을 은폐하고 있는가 하는 본질의 문제였다. 감춘다 하여 끝내 드러나지 않을 리 없으며, 드러내지 않으면 더러움은 오히려 더 깊어진다. 물론 더러운 방죽에 연꽃이 순결하다. 그러므로 송의 주돈이(周敦頤)는 연꽃을 일러 ‘꽃 가운데 군자’라 하였다. 그러나 이즈음 우리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연꽃 ‘한 송이’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용기 있게 증언하는 물고기 ‘한 마리’를 고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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