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5월 31일
내 병은 점점 악화하지만 돈이 없어 병원을 못 가고 있다. 석양이 저물어 가는데 이제는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아파 자리에 쓰러져 신음을 했다. 죽을 것 같이 아프다. 그러나 죽음은 두렵지 않다. 허나 궁지에 빠져 허덕일 식구가 불쌍할 뿐이다.
남편이 돈 500원을 꾸었다고 병원에 가자고 한다. 부축을 받아가며 이 병원 저 병원으로 갔으나 진통제만 맞고 밤 11시가 되어 집으로 왔다. 식구들은 깊은 잠에 빠져 코를 골고 있다. 머리맡에는 퉁퉁 불은 눌은밥 반 그릇과 간장이 놓여 있다. 저걸 먹으면 내일 조반 지을 힘이 날까 하며 먹어보려 했으나 맥이 다 빠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1963년 6월 1일 토요일
내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나 죽겠다는 소리만 내질렀다. 무슨 병인지 숨이 턱턱 막히고 수족이 뻣뻣해진다. 혼수생태다. 영우 어머니가 오고 정숙이네 식구들이 오고 진이는 학교도 못 갔다. 부축을 받아가며 차에 올라 충무로 이통훈 외과에 갔다. 차가 뛸 때마다 아픔은 말할 수 없었다. 의사는 진찰하더니 수술이 급하다 말하고 나를 수술대로 옮겨간다. 내가 평소에 제일 무서워하던 게 수술이다.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를 수술대에 누이고 팔을 십자 모양 벌린 다음 끈으로 맨다. 주사 한 대 놓고 코에 산소호흡 줄을 끼는데 완전히 마취가 되어 다섯 시간 잠들어 있었다.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누군가 나에게 애처로운 소리로 정신 차리라고 눈 좀 떠보라고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처음엔 이제 수술하나 보다 하고 있었더니 이미 수술이 끝난 후였다. 겨우 눈을 떠서 보니 여러 사람들이 눈이 빨갛게 울고 있다. 내 양팔엔 링거 주사와 피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다. 배를 더듬어 보니 붕대와 고무호스 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진이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내가 불쌍하다고 울고 있다. 나는 이제 죽으면 눈물을 흘려줄 사람이 있으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병명은 ‘자궁외 임신’이었다.
1963년 6월 4일
의사 선생님은 날더러 주스나 과일을 먹으라고 하는데 돈이 없고 보니 먹고 싶다는 말도 못한다. 짬짬이 눈을 감고 통증을 참으려 애를 쓸 뿐이다.
저녁에 형부가 오셨다. 나는 왜 그런지 눈물이 나와 울었다. 나도 모르게 서러웠다. 형부는 주머니에서 돈 오백 원을 꺼내 구미에 맞는 걸 사 먹으라고 주신다. 나는 미안하면서도 눈이 훤했다.
창밖에선 조용한 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낙숫물 소리에 쓸쓸하고 서글퍼진다. 내가 수술을 안 했으면 지금쯤 땅속에 들어가 태연하게 잠들고 있겠지 생각하니 한층 슬픈 감정이 솟았다. 벗, 안녕.
1963년 6월 9일
간호원이 “1호실 아주머니.” 하고 부른다. 나는 실 뽑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아프면 어쩌나 했는데 긴장과는 달리 심하게 아프지는 않고 따끔거릴 뿐이다. 의사는 퇴원해도 된다고 한다. 반가웠으나 문제는 돈이다. 입원비가 13,000원이라고 한다. 앞이 캄캄하다. 언니도 오고 형부도 오셨다. 형부는 동냥이라도 해서 약값을 갚아야지 어쩔 셈이냐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셨다. 의사한테 사정이나 말해보겠다면서.
얼마 후 입원비를 6,000원으로 싸게 해준다는 말을 듣고 참으로 감사했으나 이거조차도 못 낼 형편이라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만 쏟아졌다. 집세를 빼서 갚기로 하고 우선 형부가 3,000원을 대체해주셨다. 병원을 나서니 의사 선생님 내외분과 간호원이 전송 나와 나는 너무도 고마워 눈물이 쏟아지는 대로 엉엉 울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이통훈 외과 원장 선생님, 우리는 당신을 명의라고 불렀지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뚝뚝하긴 하셨지만 환자를 잘 돌보고 수술을 잘하시어 우린 정릉으로 이사 갔어도 급하면 충무로로 달려갔지요. 모든 게 어설프던 시절이라지만 당신은 그 많은 치료비를 삭감해주셨네요. 퇴원 날엔 선생님의 내외분과 간호사까지 나와 전송해 주셨다니 요즘 같은 세상에선 꿈같기만 한 일입니다.
이통훈 선생님. 지금도 살아 계신가요? 아니면 하늘나라 가셨나요? 제가 매일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 중엔 은인들을 위한 기도가 있는데요, 이 글을 쓰는 저도 지금 엄마처럼 눈물이 흐르고 있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우연히 검색한던 중 반가운 글을 만남합니다
혹시 퇴계로 대한극장 건너편에 위치한 작은 골목안 병원아닌가요?
이통훈 박사님 구라파로
이민가신걸로 알고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