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Smyrna, 이즈미르, izmir)
(계시록 2: 8-11) “서머나 교회 지도자에게 이렇게 써서 보내어라. ‘처음과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말씀이다. 네가 당하는 고난과 가난한 사정을 내가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 네가 참부자이다! 너를 욕하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다. 그러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악마가 너희들을 시험하려 너희 중 몇몇을 감옥에 가두고 십 일 동안, 고난을 겪게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더라도 끝까지 충성하여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줄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라. 승리하는 자는 두 번째 죽음으로 말미암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즈미르는 초대 교회가 있던 도시, 서머나(Smyrna)의 현재 이름입니다. 이 도시의 이름은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이즈미르(Izmir)로 바뀌었습니다. BC 700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 최대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쓴 호머의 고향으로써 이곳에서는 BC 3,000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즈미르는 “에게 해의 진주, 아시아의 사랑, 아시아의 꽃, 아시아의 면류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항구도시였습니다.
그 후 BC 1,100년경부터 이오니아 그리스인에 의해서 번영해 오다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거대한 성채가 세워지는 등의 발전을 거듭하여 왔으며, 비잔틴 시대에 이르면서 가장 활발한 항구도시가 되었습니다.
현재 터키의 3대 대도시 중 하나이기도 한 이 도시는 터키에서 두 번째 가는 항구도시이기도 합니다. 이 아름다운 항구도시는 부드럽게 휘어지는 해변을 따라 잘 정돈된 도로들과 푸른 공원들이 늘어서 있어 그 정취가 각별하게 아름답습니다.
에게 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가장 잘 살려 아름답게 꾸며진 도시이며 온화한 기후에 많은 고급 호텔들이 있고 상업과 산업이 발달되어 있는 도시입니다. 에게 해의 맑은 바닷물이 곱게 포개지는 끝없는 해안선은 올리브 나무숲과 기암괴석과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원시해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답고 목가적으로 여유로운 해변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더욱 한가로워 보입니다.

1415년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후, 1535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술레이만이 프랑스와 맺어진 최초의 상업조약에 따라 외국인 특히 유럽인 상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거리의 모습이나 건물들이 유럽식으로 많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때 이곳은 그리스 군의 침공을 받아 그리스에 의해 점령당하였지만,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군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함으로써 다시 터키인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즈미르는 이런 변화무쌍한 역사 속에서도 그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에 계속 번영하여 왔습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도시 곳곳에 기독교 유적을 많이 남겨 놓았으나, 아랍의 이슬람교도 및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인하여 기독교 유적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차례의 지진과 빠른 도시화의 영향으로 거의 모든 고대 유적들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의 서머나(Smyrna)에는 사도 바울의 전도 활동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세워졌으며, 사도 요한의 제자였으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그의 나이 86세에 순교하였던 곳에 폴리캅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언급하였을 때는 이 교회의 감독 폴리갑이 순교하기 6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여러 가지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전통주의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극심한 황제숭배를 강요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더불어서 경제적으로 심한 빈곤 상태에 처해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에게 죽도록 충성함으로써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던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은 교회가 환난을 당할 때 체포되어 그 곳 로마 총독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그의 나이 86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로마 총독은 그의 나이가 고령임을 고려하여 “내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지난 86년 동안 나는 예수님을 섬겼소.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나를 버린 일이 없소. 어떻게 그를 모른다고 하여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 있겠소?”
그는 이 유명한 말을 남기고 화형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자 폴리갑을 기념하기 위해 1960년 프랑스 교구에서 재건한 교회가 바로 폴리갑 기념교회입니다.
![관련 이미지]()
폴리갑 기념교회는 “SEN POLIKARP”이라고 쓰인 팻말 옆으로 난 작은 층계의 계단을 내려가 있었습니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교회 내부는 대리석 기둥으로 받혀져 웅장하게 보였고, 교회 안에는 폴리갑의 화형(火刑)을 묘사한 성화와 폴리갑의 생애와 관련된 성화가 그려져 있어 경건한 분위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 성화들은 이 교회당을 보수할 때 프랑스 화가 “레이몽 페레”가 그린 것인데, 불길에 싸인 폴리갑을 향해 한 사나이가 칼을 들고 달려들고 있고, 칼을 든 사람의 뒤에는 또 한 사람의 순교자가 손이 묶인 채 체념한 표정으로 화형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화형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화가 자신인 페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가 자신도 폴리갑의 뒤를 잇는 순교자로 묘사한 것입니다. 폴리갑의 눈길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데, 페레 자신의 눈길은 땅을 향하고 있어 두 사람의 표정을 대조적으로 그린 것이 흥미롭습니다.
![폴리캅 기념 교회, 이즈미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현재 이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예배와 순례의 장소로서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슬람교가 압도적인 터키에 오늘날 폴리갑 기념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아타투르크 거리의 민주광장에는 터키 공화국을 세운 아타투르크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야간에는 이즈미르 항구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공원 주변을 가득 메우게 됩니다. 또 이즈미르 해변에 있는 코낙 광장에는 높이 25 m의 시계탑은 도시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고대 아고라 (Agora)
서머나의 아고라는 알렉산더 대왕의 지시로 만들어진 고대 시장으로 AD 178년의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아고라 유적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 다시 만들어진 것입니다.

코린트 양식의 기둥과 돌 조각, 그리고 지하 구조물이 남아 있는데 지금은 북쪽과 남쪽에 부분적으로만 발굴되어 있습니다. 아고라의 북쪽 부분에는 3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공회당이 있는데, 이 3 개의 구역들은 경사진 지붕을 받치고 있었던 기둥들에 의해 나누어졌습니다.
지하로부터 터져 나오는 샘에는 지금도 깨끗한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돔으로 덮혀 있었던 메인 스트리트(중앙 도로)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 포세이돈 신전은 현재 그 기둥만이 남아 있고, 테미테르의 동상이 이오니아 문명의 번영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아고라의 지하층에는 지금도 어떤 샘으로부터 물이 흐르고 있는데, BC 4세기에 알레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한 이후에 건설되 곳입니다.
고고학 박물관, 민속 박물관 (Arkeoloji Muzesi, Ethnografya Muzesi)
고고학 박물관에는 아프로디테, 헤라, 헤르메스 등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발굴된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품들과 귀금속, 석관, 사람의 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현대적인 건물이지만 전시품은 많지 않아서 금방 돌아 볼 수가 있습니다.
같은 곳에 있는 민속 박물관은 고고학 박물관에 비해 훨씬 흥미로우며 카페트와 카페트를 만드는 기구, 무기, 여자들의 의상과 장신구, 고대의 주방 세트, 오스만 제국의 침실 등이 꾸며져 있습니다. 천에 무늬 새기는 과정, 나무 신 만드는 과정, 도자기 만드는 모습 등도 전시되어 있어 볼 수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