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월간붓다 발행인 영축총림 前주지. 구룡사 회주
법문 주제 : 지혜롭게 中道의 길을 가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모습이다
http://www.buddhatv.com/tv/tv_view.asp?no=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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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이 세상에 나온 지는 20여년. 언제부터인가 공공장소에는 차단기를 설치해야 하고 법당이나 회의장 등에서는 ‘휴대폰은 꺼주시거나 진동으로 해달라’는 말을 필수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 말은 이미 옛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요즘은 아이폰까지 나와서 점점 사이버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간격이 어떤 게 현실이고 어떤 게 가상세계인지 잘 구분이 안가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얼마 전에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을 보려고 5호선을 타고 신도림역에 간적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승객들을 눈여겨보니까 10명 중 9명은 휴대폰하고 놀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처자는 책을 보고 있었는데, 그도 역시 귀에는 이어폰이 꼽혀 있습니다. 아마 이어폰도 아이폰에서 음악을 다운 받아서 듣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많이 바뀌어가고 있는데, 앞으로는 또 무엇이 어떻게 변화될지 상상이 안 갑니다. 이처럼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는 세상의 일들을 여러분들은 다 수용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구경(法句經)》에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마음이 오므라들어서 협소해지기가 마치 마른 완두콩 송곳으로 찌르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심심심(心心心)이 난가심(難可尋)이요, 관시(寬時)에 변법계(偏法界)하고 착야(搾也)에 불용침(不容針)”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름철에 완두콩으로 밥 해 먹으면 얼마나 고소하고 맛있습니까? 그런 그 완두콩을 말려 놓으면 송곳으로 찔러도 찔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지는데, 배우지 않으면 마음이 그렇게 오므라든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라문교 승려 500명이 부처님께 찾아와서 묻습니다. “천하의 모든 작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체존재는 어떻게 해서 생긴 것입니까.” 이 세상이 창조주가 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 와서 묻는데 부처님은 무어라고 대답을 하셨겠습니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이구동성으로 “누구는 있고 누구는 없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살아있는 자는 있다고 하고 죽은 자는 없다고 하기 때문에 혹 있기도 하고 혹 없기도 하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그중에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습니까?” 『사람은 곡식에 의해서 생겨나고 또 살아가느니라.』 “곡식은 어디서 생겼습니까?” 『곡식은 네 가지 큰 것, 지수화풍(地水火風)에서 생겼느니라.』 “그렇면 지수화풍은 어디서 생겼습니까?” 『지수화풍은 허공에서 생겼느니라.』 “허공은 어디서 생겼습니까?” 『허공은 존재와 가지고 있는바가 없는데(우주)에서 생겼느니라.』 “그것(우주)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이것들은 자연에서 생겼느니라.』 “자연은 어디서 생겼습니까?” 『자연은 열반(涅槃)에서 생겼느니라.』 “열반은 어디서 생겼습니까?” 『어리석구나. 바라문이여!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일이 없는 법(法)이니라.』 “부처님이시여! 만약 열반의 진정한 맛을 표현 못하신다면 어떻게 열반이 영원하고 즐겁고 진정한 자아(부처)의 경지를 누리는 것이며 청정한 것인 줄 알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도리어 바라문 승려들에게 반문 하셨습니다. 『바라문이여. 내 이제 그대들에게 묻노니 중생의 삶은 괴로움이냐 즐거움이냐.』 “부처님이시여! 중생의 삶은 심히 괴롭습니다.” 『왜? 괴롭다고 생각하느냐.』 “중생들이 죽을 때 괴로워하는 것을 저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괴로워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을 보고 죽음은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죽음이 괴로움인 줄 알 수 있단 말이냐. 네가 이제 죽지 않고도 죽음이 괴로움인 줄 알듯, 내가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들이 나고 죽음이 없는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여 영원히 즐겁고 청정하고 자아를 매각하지 않음을 보고 열반이 항상 즐거움인 줄 아느니라.』 부처님의 이 반문에 어떤 이는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합니다.”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즐겁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또 어떤 이는 “괴롭습니다.”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들여다 보면,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입니다.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라는 번뇌와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의 오욕락(五慾樂)이라는 망상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현장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만 끊어서 해탈을 이루고 열반에 들면 누구나가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번뇌 망상이 어디에서 생기는 지도 모르면서 그저 희희낙락 할 때는 좋고 고통스러울 때는 괴롭고 하는 정도의 육체적인 현상으로만 평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괴롭다고 표현하는 것은 번뇌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기쁘다고 표현하는 것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경계까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정으로 불자(佛子)의 모습을 구현해 나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는 말은 맞습니다. 번뇌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치우치고 얽매이고 빠져있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삶이 지혜 있는 자의 현명한 수행법이라는 말씀입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길을 다니다보면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글귀가 눈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요즘은 그 글귀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닦을 일도 없고, 조일 일도 없고, 기름칠 일도 없어서 그러는 모양입니다. 옛날에 대중처소에서 기계로 머리를 깎아보면, 기름 한 방울만 떨어트려놓으면 소리도 안 나고 뜯기지도 않고 여러 명이 한꺼번에 머리를 깎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름 한 방울 안 떨어트리면 조금만 지나도 기계가 뜨거워져서 머리를 깎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윤활유의 역할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활력적 요소, 비타민이요, 윤활유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각자의 삶이 훨씬 더 녹녹해지고 풍요로워 질 것 입니다. 불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전(三寶前)에 의지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울타리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계율(戒律)입니다. 울타리가 있으면 작은 짐승이 큰 짐승에게 잡아먹힐 일이 없는 것처럼, 마장(魔障)이나 장애(障碍), 혹은 유혹(誘惑)과 타락(墮落)의 늪에 빠지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불자라면 반드시 인과(因果)를 믿고 윤회(輪廻)를 부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경전을 입에서 줄줄줄 외워도 인과를 믿지 않는다면 그는 불자일 수 없습니다. 불자란 불법승 삼보전에 귀의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받아 지니고 인과를 믿고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 그 사람을 이름 해서 불자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표현해서 말을 하면 그게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삼보전에 의지하고 아뇩다라샴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을 불자라고 하는데, 여기서 보리심(菩提心)이라고 하는 것은 자비심(慈悲心), 이타심(利他心), 선근(善根)과 지혜(智慧)를 갖춘 이의 마음을 말합니다. 불보살의 마음은 근본이 자비심이고 그 자비심을 일으킨 한량이 없는 선행을 보살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이르기를, 『제법공상(諸法空相)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불구부정(不垢不瀞)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법이 불생이며 어떤 법이 불멸입니까? 무엇을 불생이라고 하고, 무엇을 불멸이라고 합니까? 생하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감하지도 않으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요, 이분논법으로 상대적인 것을 다 타파한 자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간직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어야 생명력이 있는 실상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표현하기를, 좋은 법이 사라지지 않는 것, 좋지 않는 법이 생겨나지 않는 것, 이것이 불생이고 이것이 불멸이라는 겁니다. 일어나지 말아야 될 것은 번뇌입니다. 번뇌 망상은 일어나면 안 됩니다. 왜냐면 고통과 괴로움이 수반되고 그것으로 견디기 힘든 오탁악세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면 좋은 법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보리심이고, 그것이 바로 이타심이고, 그것이 바로 자비심이고, 그것이 바로 연민심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을 헤아려주는 마음입니다. 좋지 않은 법이란 번뇌입니다. 좋은 법이란 번뇌 망상이 없는 마음입니다.
근간에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습니다. 청년 때도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눈에 띄고 각인되는 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 마음으로 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것은 내 경계대로 보고 느끼고 듣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허상의 허구적인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탐진치 삼독심만 없다면 좋지 않은 법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허튼 생각이 없으니 번뇌가 없을 때는 그 마음이 맑고 깨끗하고 청정해서 청정무구한 그 자리입니다. 앞에서 착야(窄也)에 불용침(不容鍼)이라고 했습니다. 옹색하고 오그라진 그 마음으로 뭘 헤아려보면 바늘 끝 하나도 세울 자리가 없는 게 좁아터진 우리네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마음으로 사는 게 진정한 내 모습이겠습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습니다. 이익이 없는 일은 눈썹도 까딱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이르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지혜 있는 이는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못한다고 합니다. 아는 건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할 수 없는 일만 찾아서 한다는 겁니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이르기를, 『살면서 인색하지 말고 성내거나 질투하지 말자. 이기심을 채우고자 등지지 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말자. 위험에 직면하면 두려워 말고 이익을 위해서 남을 모함하지도 말자. 객기 부려 만용 떨지 말고 허약해서 비겁하지 말며 지혜롭게 중도(中道)의 길을 가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모습이다. 사나우면 남들이 꺼려 멀리 하고 나약하면 남들이 나를 업신여기나니 사나움과 나약함을 버려 중도를 지켜라.』하셨습니다. (월간붓다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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