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탐방 /광주 향림사 조실 천운 스님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취재정리.사기순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467년 내장사에 입산하였다. 1947년 지암 화상을 은사로 득도, 1958년 지암 화상을 계사로 구족계 및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전북 고창 도솔암에서 상수 화 상에게 사교과, 지암 화상에게 재교과를 수료하였다. 승주 송광사 자장선원에서 수선안거, 화순 용암사 선원에서 수선안거 5하 성만, 영암 도갑사에서 수선안거 등 제방에서 수행정진 하였다. 구례 화엄사와 천은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광주지구 갱생보호위원, 5.18광주 항쟁 이념계승사업회 고문, 사랑의 실천 국민운동본부 고문을 역임하였다.
현재 조계종 종립학교 광주 정광중고등학교 이사장, 22교구본사 대둔사 주지, 광주 향림사 조실, 광주 우산종합사회복지관장, 광주소년원 분류심사 종교지도위원으로 있다. 향림어린이 집, 향임유치원, 향림사 신용협동조합, 천운어린이집, 광주불교대학. 대학원을 설립하였으며, 끝없는 포교원력과 인간불사로 조계종 충무원장상을 비롯하여 법무부장관표창.내무부장관감 사장.광주직할시장표창.육군 전투병과학교장 감사패 등 다수를 수상하였다. 저서로 <봐서 행 하는 길><알고 가는 길><끝없는 행원><나의 辯><더불어 사는 삶><참회하는 마음으로 ><참다운 불교인이 되려면...>이 있으며, 역서로 <예수재의식><수륙재의식>등 다수가 있 다.
그날따라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새하얀눈이 수북이 쌓인 길, 뽀드득 뽀드득 눈 위에 새겨지 는 발자국, 아무리 계속 눈이 내려 발자국을 덮어도 족적은 남는 법이다. 그 족적이 크고 깊 을수록 덮으려 해도 덮을 수 없고, 그 향기를 감추려 해도 향기는 은은히 세상을 맑히기 마 련이다. 천운 큰스님, 일찍이 스님의 덕화에 대해 너무나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일까, 눈 속 의 발자국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까 짐짓 걱정스러웠다.
광주 광역시 서구 상무 2동 252-3번지, 새로 지은 듯한 5층 건물이 먼저 반긴다. 광주불교 대학.대학원, 향림출판사. 향림유치원. 향림사 힌용협동조합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건물이 활 기차다. 그런데 향림사 경내에 들어서면서부터 알 수 없는 진짜 팔팔한 살아 있는 생기가 느껴진다. 아이들의 밝은 목소리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집안에 애가 있어야 사람 사는 집 같다는데 절집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스님, 향림사 대중이 얼핏 보기에 50명은 족히 넘을 듯한데, 이 많은 대중들이 어떻게 화합 을 이루며 사는지 궁금합니다.
"부처님 품안에서 사니 자연스레 화합이 이루어지지요. 평소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게 있다 면 될 수 있으면 단점은 보지 말고 장점만 보자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장단점이 있게 마 련인데 단점만 자꾸 캐려들면 함께 못 삽니다. 이는 절집안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도 마찬가 지예요. 부부지간, 부모자식간에도 좋은 점을 보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지 미운점만 들추 다 보면 점점 미워져서 끝내는 파국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장점을 본다는 말씀이 모든 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모두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말 씀으로 들립니다.
> "부처님께서는 당신 혼자만 성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과 똑같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 중 생이 다 불성을 갖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고금의 어느 성인도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당신처럼 부처 될 수 있다고 간곡하게 설해주셨는데, 우리 중생들은 수억겁 전부터 익혀온 습관을 떨치지 못하고 중생놀음만 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기 자식 한둘 키우는 것도 힘들어하는데 30명이 넘는 남의 자식을 어떻게 키우시나 의아 했는데, 아이들을 부처님으로 보시고, 원력으로 키우시니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스님, 6.25사면 이후로 줄곧 아이들과 인연이 있으셨지요?
"전쟁 당시 군 복무 중에 전령생활을 했습니다. 전령으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고아원을 찾았지요. 한창 전쟁통이었는지라 고아가 말도 없이 많았습니다. 부모잃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려 자주 찾아보곤 했지요. 제대하고 나서 절에 찾아오는 고아들을 하나 둘 맡아 기르다 보니 점차 소문이 나서 아이들이 한 칠십명에 이른 적도 있었습니다."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 성싶습니다.
"전국의 우리 사형 사제들이 살이야 옷이야 보내주셔서 모자람 없이 기를 수 있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사내아이를 데려다 키우다 보니 앉아서 오줌을 누더라며 내게 보내신 일도 있는데 아이를 보내신 이후로도 끊임없이 도움을 주셨지요. 마포극락암 노장스님, 보문사 은영스님, 성불사 스님들을 위시해서 많은 신도님들의 보시로 이루어진 일이지 어디 저 혼자 한 일이겠습니까."
아이들을 키우시면서 속상한 일도 있으셨을텐데요.
"애들은 엄마가 키워야 된다는 말이 햇수를 거듭할수록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아무리 잘 해 줘도 지 고향은 따로 있어요.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고향생각에 젖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아 이가 절반은 됩니다. 도통 정을 못 붙이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짠할 때가 많습니 다.
그래 저녁마다 개인면담을 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해주고 가급적이면 마음을 열러 놓고 살 수 있도록, 삶의 주인공이 되어 살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사중 스님네들에게도 아이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활기차게 클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당부합니다. 서로 욕하고 싸우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데 어쩌다 욕하는 모습을 볼라치면 회초리로 엄히 다스립니다. 우리 아 이들은 자유분방한 가운데에서도 예의가 몸에 배어 있고, 아주 순수하고 착해요. 사람은 끊 임없이 거듭거듭 변합니다. 물 속에 들어가면 옷이 젖고 불 속에 들어가면 옷이 타는 것과 같아 어떤 환경을 만나느냐에 다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새벽예불에 동참한 중고등학생들의 의젓한 모습이 다 그런 교육방침에서 우러나온 듯합니 다. 아이들이 마치 여법한 사미승 같아 사실 매우 놀랐습니다. 스님께서도 동진 출가하셨지 요?
"해방되던 그 이듬해 열여섯 살 때 출가를 했으니까 아주 어린 나이도 아니지요. 속가의 조 부님께서 무척 나를 귀여워하셨는데 한학을 배워 과거를 봐야 한다시며 서당을 보냈습니다.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고창중학교 다니던 친구가 자꾸 학교를 다니자고 꼬시는 겁니다. 조부님께 말씀드리자 완강하게 신식학교는 안된다고 하시길래 집을 나왔어요. 가출 을 한 셈인데 그 길로 내장사로 출가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큰 행운이었지요.
근대 불교교육의 선구자인 박한영 스님이 내장사 조실로 계셨는데 스님께서 다짜고짜로 '중 될 생각 없느냐?'고 하시길래 '아직 생각 못해봤습니다'하니 '밥이나 먹고 며칠 쉬면서 생 각 해봐라'하시며 껄걸 웃으셨습니다. 그렇게 내장사에서 사흘을 보냈는데 어찌나 잘해주시 는지 집생각도 안 나고 마치 고향집에 온것처럼 마음이 편안했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내 길인가 싶어 머리를 깎겠다고 했습니다.
햇수로 삼 년 동안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사미과와 절예법을 다 배웠는데, 당신 품에 안고 한자 한 자 짚어가며 불법의 오묘한 뜻을 가르쳐 주시던 일. 그 따뜻한 손길과 따뜻한 말씀 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후로 군대 갔다가 제대하면서 스님 곁에서 스님으로 살라야 겠다는 각오가 더욱 다져졌지요."
<끝없는 행원> 이라는 스님의 수상록에서 은사스님에 대한 사모의 정이 가득 담긴 글을 읽 고 감명을 받았습니다만.
"처음 불법으로 인도해주신 한영 스님께서 너무 연로하시어서 지암 종욱 스님(독립운동가, 조선불교 조계종 총무원장.동국대학교의 재단이사장.국회의원 역임)을 은사로 계를 받았지 요. 은사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대로 제 거울이 되어 지금까지도 저 자신을 추스리게 합 니다. 은사스님은 수행일과가 아주 철저하셨어요. 수행자가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는 것은 최 대의 도둑이라시며 삿된일이나 범속한 일상사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엄하게 경책하셨지 요.
은사스님게서는 남의 말을 안 하셨습니다. 장점을 얘기하시며 칭찬해주시는 적은 간혹 있었 어도 남의 단점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씀하시는 것을본 일이 없습니다. 잘하라고 늘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고 원력을 북돋워주셨지 남의 기를 죽이는 일이라곤 없으셨지요.
항상 편안한 얼굴로 상대방이 무엇이 필요한가를 미리 살피시고 불편한 일이 없도록 배려해 주셨지요. 상대에 따라 제자들의 연령과 근기에 다라 자상하게 지도해주셨습니다."
사교과, 대교과까지 마치시고 제방선원에서 참선수행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참선수행의 맛 이랄까, 아무튼 산중에서 수행하는 기쁨이 포교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포교에 진력해오신 데에는 은사스님의 영향도 크셨을 것 같습 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은사스님께서는 자기 수행을 뒤로 미루고 사중이나 종단에서 소임 을 보는 스님들을 늘 격려해주셨지요. 선방에 다니던 내가 화엄사에서 주지소임을 보게 된 것도 은사스님을 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수행과 포교는 두 길이 아닙니다. 수행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포교를 할 수 있겠습니 까? 승려의 본분은 수행이니 만큼 한날 한시도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참선은 한마디로 나를 밝히는 공부라고 할 수 있는데 나 하나도 밝히지 못하고 어찌 중생을 제도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머리에 불길이 떨어진것처럼 용맹정진하는 방법, 일상생활 속에서 수 행하는 법은 은연중에 은사스님으로부터 훈습됐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도 은사스님에 대한 고마움이 지금껏 절실합니다."
스님의 수많은 공적들이 다 수행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쎄요, 물러서는 마음 없이 정진하다 보면 매사에 여여한 마음, 고요한마음이 됩니다. 수 행을 하다보면 '이일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하는 갈림길에서 선별력이 생기고, 일단 결 정한 일에 대해서는 추진력이 생깁니다. 결과를 미리 예측한 일인지라 일마다 성공을 한 편 이고, 그 다음에는 처음 세웠던 뜻대로 일이 잘이루어졌는지 다시 면밀히 검토해보는 작업 과 아울러 원만히 회향될 수 있도록 끝마무리가지 잘 살피면 대체로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 기 마련입니다."
수행하고 포교해오시면서 힘드셨던 일은 없으셨습니까?
"그쎄요. 매사를 수행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다지 괴로웠다거나 힘들었던 기억은 없습니 다. 혹여 누가 좋지 않은 소리를 해도 웃어버리고, 칭찬을 해도 웃어버릴 뿐입니다. 시비를 될 수 있으면 없애려고 남의 얘기는 안 하고, 종단의 시시껄렁한 일에는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26년 전에 처음 향림사를 창건하고 포교하는데, 기도 위주가 아닌 설법 뒤주로 법회를 이끌 어갔습니다. 직접 찬불가를 가르치고, 절에 애들이 왁자지껄하니 '중이 무슨 노래를 부르냐.
예수교 비슷한 거 아니냐'며 오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3년뒤인가 상무대에 군법당이 들어서면서 법회를 신식으로 하는 것을보고 '우리 스님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 습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포교를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지 요. 초창기 향림사 창건 당시의 일 말고는 이렇다 할 우여곡절이 별반 없습니다."
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직접 체험하셨고, 부모 인연이 박한 아이들과 수십년을 살아오 시는 동안에 애달픈 일이 있었을 듯한데요.
"광주 시립묘지에 5.18영령들을 매장해주는데 마음이 한없이 착잡하더군요. 일정 때 인공 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 때마다 겪은 민중의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염불소리 는 절로 처량해졌지요. 힘 없고 돈 없고 약한 사람들은 당하기만 하는 인생이라 생각하니 이 사바세계가 어느 때나 부처님의 말씀으로 하나될 것인가. 맑고 깨끗한 세상. 불국토가 이 뤄질 것인가 싶어 발원하고 또 발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광주 시민들도 모두를 용서하 고 분심도 놓아버리고 내가 자유를 수호했다는 상(相)도 놓아버려야 할것입니다.
아이들 문제는 내가 항상 짊어지고 있는 화두입니다. 요즘 청소년문제뿐만 아니라 노인문제 도 극심합니다. 다 사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잘못된 사상이 판을 쳐 서 가족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양상입니다. 가족이 없으면 국가도 없습니다.
만 가지 선행의 기점이 효인데 핵가족이 보편화되고 있는 요즘에는 불효가 당연시되고 잇는 풍토입니다. 불효한 부모 밑에서 큰 아이들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모 형제 모르고 오로지 저만 아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사회에서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인과법, 모든 이들이 서로서로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인연법을 깨친 우리 불자들이 나서서 잘못 돌아가고 있는 이 세상 풍토를 제대로 잡아나가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배금적인 서양의 못된 것들만 배워서 스스로를 망치고 가정을 파괴하고 급기야 나라까지 망치는 오늘의 현실을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지 않으면 참말로 큰일입니다."
스님, 끝으로 요즈음 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립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중소기업가들을 만나도 월급쟁이를 만나도 다들 속시원한 표정이 아니더군요.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입니다. 특히 물질이면 만사가 해결된 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물질이 흔들리니 갈 팡질팡하기 마련이지요. 여태까지 착각하고 살았던 것을 자각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습니 다.
우리가 부처가 되어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이기는 극기생활을 말함입니다. 모든 욕망을 이기고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러저러한 상실감 때 문에 절망하고 욕심과 번뇌망상 때문에 좌절하다 보면 약 먹고 자살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성을 발견하고 인생의 참된 의미가 부와 명예와 향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 보는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