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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신춘 국제신문 당선작>
떠도는 섬
- 어느 독거노인의 죽음
유 헌
엎어진 숟가락처럼 섬 하나 놓여 있다
막걸리 쉰내 나는 툇마루만 남아서
밤마다 갯바람소리 환청에 떨고 있다
느릿느릿 애 터지게 바람이 불어온다
둘이 같이 살아보자 옆구리 토닥이던
파도가 밀려왔던 자리, 절벽이 생겨났다
무연히 쓸어보는 방바닥엔 흰머리 뿐
파도에 멍든 자리 동백꽃이 새살 돋고
창문을 더듬는 햇살, 하얗게 질려간다
칠 벗겨진 양철대문에 파도소리 출렁인다
그물코에 빠져나간 한숨들을 깁는가
오늘도 뱃고동소리 속절없이 지나간다
<당선소감>
마음 깊은 곳에 긴 두레박을 내려..
유 헌
어제는 참 포근했습니다. 거리를 헤매던 낙엽도 잠시 틈을 내 겨울 햇살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당선통보를 받고 하루가 지났습니다. 창밖에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목포항 앞바다는 출렁대는 물결로 허리가 아픕니다.
차가운 거리로 나섰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 바람이 지나 갑니다. 그런데 그 강풍조차도 차갑지 않고, 가슴을 파고들며 흩날리는 하얀 눈송이도 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슴은 벅찬 설렘으로 뜨겁습니다.
신춘문예 마감일 마지막까지 고치고 또 고친 원고뭉치를 보내고 우체국 문을 나서던 순간도 그랬습니다. 상기된 얼굴을 스쳐가는 겨울바람은 산마루를 돌아 나오는 건들마처럼 서늘했습니다. 먹물처럼 어두워진 깊은 하늘에서 빛나던 차가운 달빛은 차라리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었습니다.
그간 심하게 앓았던 시조를 향한 열병 때문이었을까요? 지난 며칠 동안은 추워도 춥지 않았습니다. 그 열정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습니다. 뜨거운 가슴을 타고 내리는 가락들을 4음보로 길어 올리는데 결코 소홀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게 신춘이라는 분에 넘친 텃밭을 내어 주신 ‘국제신문’과 심사위원님들께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긴 두레박을 내려 낮은 자세로 더 비우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아내에게는 참 미안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깊은 밤에도 벌떡 벌떡 일어나 생각의 파편들을 글로 옮기곤 했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아내는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고 하니까, 그간 제가 참 무던히도 요란을 떨었나 봅니다.
늘 치열한 문학정신을 일깨워 주신 한국문단의 거목, 소설가 천승세 선생님, 시조의 깊이를 알게 해준 박성민 시조시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말을 가장 우리말답게 담아낼 수 있는 정형의 그릇, 시조의 큰 바다에 돛을 올려 작은 배를 띄웁니다. 흔들림 없이 노를 젓겠습니다.
프로필
․ 57년 전남 장흥 출생
․ 2012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 2011 월간문학 시조 신인상
․ 2011 월간 한국수필 수필 등단
․ 목포MBC 국장
<심사평>
하나의 제재를 집요하게 이미지로 조형
우리의 모국어를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어갈 역량 있는 신인을 뽑는 신춘문예는 선자들의 가슴마저도 기대감으로 부풀게 한다. 금년도 국제신문 신춘문예 응모작들의 수준은 상당히 향상되어 있어서 매우 고무적이었다.
대다수의 작품들이 시조의 정형미학을 잘 체득하고 있어서 안도감을 가지고 심사에 임할 수 있었다. 우리는 보내온 작품들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읽어나갔다. 엄격하게 걸러내는 작업 끝에 최종적으로 세 분의 작품 '길 너머' '귀성 길' '떠도는 섬'이 남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문예지에 그대로 실어놓아도 조금도 손색없을 만큼 두드러진 작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길 너머'는 구도자적인 내면 탐색에 천착하고 있는 점이 높게 평가되었으나 '생의 봇짐' '득음'과 같은 관념적인 투어가 아직 가셔지질 못했다. 이렇게 하여 '귀성 길'과 '떠도는 섬'이 남아 마지막으로 경합을 하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은 충분히 당선권에 속하는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두 심사위원은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장시간 논의를 했다. '귀성 길'은 언어를 섬세하게 다듬는 기법이 탁월했으나 소재의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한 작품 속에 담고자하는 주제가 넘쳐 응축성이 미진한 감을 주었다.
'떠도는 섬'은 독거노인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제재를 집요하게 이미지로 조형하여 현실 문제를 부각시킨 점이 우리의 마음을 더 사로잡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리며 언어의 조탁에 더욱 힘쓸 것을 당부한다.
심사위원 정해송 전일희(이상 시조시인)
<신작>
수염이 자라는 공
유 헌
등산로 후미진 곳 바람 빠진 공이 있다
차가운 벤치 위에 하늘 보며 누운 남자
온몸이 팽팽할 때는 창공을 날던 기억
오십 개 동심원을 그리며 날아간 공
실직으로 아픈 날들 턱수염만 자라나고
깊은 밤 고개를 넘다 벼랑길로 떨어졌다
허리를 웅크린 공, 제 그림자 밟고 서서
컹컹컹 기침소리로 몸속에다 바람 넣는
남자는 떨어져야만
튕겨 오르는 공이었다
(계간 다층 2012 봄호/신춘문예 당선자 특집)
무릎에 부는 바람
유 헌
시장 통 모퉁이에 울 엄니 좌판 깔고
지나가는 발길들을 애처롭게 쫓고 있다
한나절 무릎마디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주린 배 움켜잡고 한 다발만 한 다발만
깊어진 주름 골짝 해가 설핏 넘어가고
푸성귀 다발 사이로 살어둠이 파고든다
머리 위 광주리에 풋사과가 굴러가고
신작로 휘적휘적 두 팔로 내 달린다
어머니 굽은 등줄기에
누렇게 타는 노을
(계간 다층 2012 봄호/신춘문예 당선자 특집)
홍어장수 문순득 표류기
유 헌
먹구름 떠받혀온 바람벽이 무너졌다
용오름 회오리가 깊은 하늘 삼킨 순간
우이도 곱다시 붉은 산다화로 일어섰다
소금기 절은 하늘 이울기를 몇 날인지
밤마다 사로자는 그루잠의 굽은 등뼈
먹물을 듬뿍 머금은 어둠이 번져간다
이방의 낯선 마음 헤아려서 묶었을까
햇귀가 스렁스렁 솟아나길 천 날이다
기울면 위태로운 게 나뿐 만은 아니리
유배의 책갈피에 묻혀버린 표해시말*
그믐의 어둔 밤을 흔들어 깨우고 간
표류는, 경계를 넘어
날선 침묵 잠재웠다
(계간 시조시학 2012 봄호/신춘문예 당선자 특집)
대추나무 경전(經典)
유헌
초여름 이른 아침 햇귀가 솟아난다
언덕바지 비탈길에 한 그루 대추나무
눈감은 불립문자로 바람에 기대섰다
잎사귀 피어나고 꽃대가 자라면서
둥글게 익어가던 어머니의 붉은 울음
어느새 취산꽃차례 묵언으로 돋는다
대추알 한 개가 연못에 떨어진다
축음기 음반으로 퍼지는 소리의 파문
어머니 손도장에도 번져가던 나이테
대추나무 가지마다 설법으로 꽃이 핀다
만공(滿空)을 채우며 허공(虛空)을 비우는 소리
어머니 손에 굴리던 염주알이 쏟아진다
(화중련 2012 상반기호/신춘문예 당선자 특집)
<월간문학 당선작>
노을치마 / 유헌
봉창에 달그림자 열브스레 차오르고
두물머리* 시린 버선발 만덕산 향하는데
상사련 구듭치는 강 구강포* 가슴 섞네
마재 너머 강진 땅 짭조름한 눈물걸음
촉초근한 눈시울은 한 쌍의 학이 되어
만덕산 된비알 넘고 두물머리 둥지 트네
깁고 엮은 애틋한 정 신혼의 단꿈 어린
병든 아내 낡은 치마 초당에 전해지니
천리길 적시는 울음 하피첩* 되었다네
세월은 가량없어 붉은 천 바랬으나
귤동 마을 대숲마다, 고샅고샅 어귀마다
진홍색 노을치마가 한으로 나부끼네
주)
*두물머리, 마재 : 경기도 남양주 정약용의 생가
*구강포 : 다산초당 아래 흐르는 강진만 포구
*하피첩 : 다산 정약용이 부인 홍씨가 보낸 6폭 붉은치마로 만든 첩
<당선소감>
가락과 여유의 돛을 달고..
내 고향은 장흥 회진포구 선학동 마을이다. 큰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형상의 산 밑 선학동에서 태어났다. 고향을 떠나온 이후에도 줄곧 선학동 아래 회진포구의 잔물결은 늘 내 마음속에 깃들어 호수처럼 출렁인다.
그런데 오늘은 그 잔잔한 가슴에 폭풍우를 만난 쪽빛 물결이 출렁출렁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고 있다. 노트북 자판 위의 손가락은 힘을 잃고 자꾸 길을 잘못 찾아 간다. 문밖에서 몸을 떠는 백목련 나무의 연초록 새잎처럼 시조시인으로서 세상과 맞닥뜨린 첫 순간이기 때문이어서일까? 잠시 풀빛 하늘을 떠가는 하얀 구름에 눈길을 싣는다. 아,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나는 어린 시절 강진으로 이사를 와 우두봉 아래 산골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구강포구 갯길을 걷고 가파른 만덕산 반달고개를 넘어 다산초당과 이웃한 백련사까지 소풍을 가곤했다. 그 어린 시절의 서정이 ‘노을치마’라는 시조를 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 봄비 머금은 바람 세차게 불어 다산초당 아래 귤동마을 대숲의 사각거리는 바람소리 요란하고, 강진 백련사 동백 숲에 붉은 꽃눈개비 휘날리고 있으리라. 지금쯤 노을치마는 어떤 빛깔로 나부끼고 있을까? 내일 주말엔 홀가분한 마음으로 만덕산 아래 다산초당을 찾으리라.
시조시인의 길을 내어 주신 월간문학 심사위원님들께 깊숙이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치열한 문학정신을 늘 깨우쳐 주신 한국문단의 거목 소설가 천승세 선생님과도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가락과 여유의 돛을 달고 시조의 바다로 쉼 없이 나아가렵니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심사평>
잘 풀어 쓴 무거운 글감
오늘의 시조의 현주소는 바로 등단의 문을 두드리는 문인들의 작품에서 밝혀진다. 『월간문학』신인작품상에 응모된 작품이 편수는 적었으나 시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숙련이 쌓인 내용들이어서 오히려 반가웠다.
당선작 「노을치마」(유헌)는 이 나라 역사에 가장 높은 학문의 봉우리를 지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귀양살이를 할 때 부인 홍씨가 입었던 노을치마(霞披)에 공규(空閨)의 정한을 담아 보낸 사실(史實)을 4수의 연작으로 구성하고 있다.
세상에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글감을 찾아서 시조로 옮겨 놓은 것도 시적 역량의 한 축을 세우는 일이거니와 무거운 소재를 오래 깎고 다듬어 낸 탁마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올려 놓은 뒷받침이 되었다. 함께 보내 온 시조들도 고른 수준을 가지고 있어 시조의 새 획을 엮어 갈 것을 믿는다.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으로는 「건축현장에서」(이애자)였는데 시조의 새로움을 보태기 위해 화학 기호를 쓴 것까지는 나무랄 게 없지만 종장 첫구의 'Co2 흡수량'을 놓은 것이 크게 걸렸다.
심사위원 이근배
<한국수필>
받침 없는 편지
유 헌
40여 년 전 초등학교 시절, 나는 아침 등교 전에 뭔가 성에 차지 않는 일이 생긴 날은 어김없이 못된 반항심으로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돌이켜 보면 철부지도 그런 철부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 때 어머니에게 불만을 거침없이 나타내는 내 행동 중의 하나는 아침밥을 거른 채 도시락을 팽개치고 학교에 가는 거였다. 그런 날 어머니는 어김없이 십리 길을 걸어 학교로 점심 도시락을 가져오곤 하셨다.
꽁보리밥 도시락을 들고 교실 안을 기웃거리시는 어머니는 밭일을 하시다 시간 맞춰 부랴부랴 달려 오셨을 것이다. 때가 절은 일 바지에 헝클어진 덩덕새머리, 여름 뙤약볕에 거무죽죽 탄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어린 마음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었다. 교실 유리창 밖으로 얼보이는 어머니를 피해 줄달음질로 도망가 어디든 숨고 싶었던 못난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초등학교 친구 K는 졸업한지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잊을만하면 전화를 걸어온다. 울산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 생전에는 늘 “어머니 잘 계시지?”하고 어머니 안부부터 물었다. K가 어머니를 먼저 찾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K가 얘기하기 전 까지는 단지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에 가끔 나에게 전화를 하는 줄 알았다. 난 어머니의 모습이 부끄러워 얼굴이 홍당무가 될 정도였었는데 친구의 눈에 도시락을 갖고 오신 나의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졌던 모양이다. K는 고아원 아이였다.
내 친구 K의 가장 부러웠던 기억으로 남아 계시는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세상을 뜨셨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아쉬움을 넘어 절절한 뉘우침마저 포개진다.
평소 어머니의 혈압이 높아 실살스럽게 약 먹는 일을 챙기는 아내와 외고집으로 맞서는 어머니는 심심찮게 타시락거렸었다. “아픈 곳도 없는데 왜 귀찮게 약을 먹어야 하느냐.”며 약 먹기를 마다하시는 어머니와 그 적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머쓱 굳어 버리는 아내 틈에 껴들어 나도 “어머니, 약을 제대로 드시지 않아 쓰러지면 그때는 아예 못 일어나실 지도 몰라요.”라며 사뭇 통사정을 해보지만 어머니는 “이런 좋은 세상에 무슨 그런 병이 있느냐.”며 믿지 못하는 눈치셨다. 어머니는 자신이 의사이고 약사이셨으니까. 그래도 아내는 꼬박꼬박 아침 식사 후 혈압 약을 식탁에 올렸고 시어머니가 드시는 걸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초겨울 어머니가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시느라 사나흘 집을 비우실 일이 생겼었다. 물론 어머니는 아내가 꼼꼼히 챙겨드린 혈압약과 매일 꼭 드셔야 한다는 며느리의 당부를 간직하고 집을 떠나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며칠 후 안면마비 상태로 돌아오셨다. 약을 드시지 않아 버린 것 같았다. 입술만 겨우 달싹거릴 뿐 안타까운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만 봤다.
어머니는 1년여의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하얀 눈이 서러운 겨울 우리 곁을 떠나셨다.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는 동안 한마디 말씀도 못하시고 우리와는 눈만 맞추셨다. 맘속으론 많은 얘기를 하셨을 것이다. 정말 그 말만은 꼭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먼 길을 떠나신 후 어머니의 빈방 진열장 위에서 백만 원이라는 큰돈이 발견됐다. 어머니는 돈을 꼬깃꼬깃 종이로 싸고 겹겹이 비닐로 묶어 손이 닿지 않는 본인만의 비밀금고에 보관해 두셨던 것이다. 유독 작은 키의 어머니가 그 높은 곳에 용돈을 아껴 돈을 맡기신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 당신보다는 언젠가 자식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시지 않았을까. 중환자실에 누워 얼마나 그 얘기를 하고 싶었을까. 진열장 꼭대기 깊숙한 곳에 백만 원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손자가 대학 들어가면 뭐라도 사주라고……. 안타까운 비밀을 간직한 채 눈을 감으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절애단장絶崖斷腸의 피가 선뜩 식는다.
글을 배우신 적이 없었던 어머니는 당신의 방 벽에 걸린 달력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이후의 하루하루를 연필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 두시기도 하셨다. 생전에 아버지를 대할 때 조금은 덜 살갑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가 몇 년 동안 병중에 계시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게 절실하고 큰 줄은 몰랐었다. 난 그런 어머니의 상실감과 쓸쓸함을 미쳐 헤아려드리지 못한 불효자였던 것이다.
팔십 평생을 까막눈으로 사셨던 어머님은 생전에 노인학교를 열심히 다니셨는데 거기서 깨우친 한글 실력으로 목포에 사는 여동생 집을 찾아갔다가 아무도 없자 ‘박일심 하머이 아다 가다’란 쪽지를 아파트 현관문에 붙여놓고 가셨던 모양이다. 손자를 생각해 본인을 할머니라고 쓰셨는지 아니면 주변에서 할머니 할머니 하니까 그렇게 적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받침이 빠지고 맞춤법이 틀린 그 쪽지는 동생이 나에게 건네 줘 지금도 우리 집에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유품 중의 하나로 어머니가 그리워 애통터질 때면 꺼내놓고 보곤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모든 게 후회로 돌아온다. 친척 집에서 쓰러지시기 전에 어머니가 조금 이상하다는 전화를 받았었고 그 때 이미 뇌 혈전증의 전조 증상이 나타났던 것 같은데 나는 “빨리 집으로 오시라고 하세요.”라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었다. 그곳의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 응급조치만 받았어도 중환자실에서 힘들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남기신 백만 원은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가 좋아하실 일에 보태고 싶었지만 그것도 차일피일 미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살다보면 요긴하게 쓰일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십리길 강진 장에 푸성귀 몇 다발 팔러나가 해질 무렵 몇 개의 풋사과, 가래떡과 바꾸신 후 의기양양 팔을 휘저으시며 신작로를 돌아오시던 어머니. 늘 배고픔에 시달리는 자식들에게 뭔가 맛있는 걸 먹이고 싶어 과일 장수와 떡 파는 아주머니에게 통사정했을 어머니의 애처로운 눈동자를 생각하면 어머니는 그대로 눈물이시다.
어머니를 단 한번 만이라도 뵐 수만 있다면, 맘 놓고 울 수만 있다면……. 그 눈물의 장강長江 속으로 나도 받침 없는 편지를 쓴다. ‘어마 보고 시어요, 우고 시어요.’
아내의 눈물 / 유헌
유헌
남자들 둘이 모이면 군대 얘기를 한다고 했던가. 그런데 나는 불행하게도 그런 기억이 없다. 시력이 좋지 않아 일찌감치 군 면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군대라는 곳에 가보고 싶은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을 강진 우두봉 아래 작은 산골 마을에서 보낸 탓인지 내성적으로 자랐던 것 같다. 낯선 사람 앞에서 얘기하는 건 정말 싫었고 특히 남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두려움을 넘어 숨이 멎을 정도였다.
성장해서도 그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에 가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 순진하고 단순한 생각이었던 같기도 하다.
장남은 공익 근무를 했다. 아빠는 면제를 받았고 큰 아들은 이등병 제대를 했으니 조금은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다행스럽게도 작은 아들이 현역 판정을 받고 군 복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 입소한 그날부터 우리 부부의 아픔도 시작됐다. 여리게만 느껴졌던 작은 아들의 입영 때문이었을까. 군에 간 아들 생각에 아내와 나의 가슴은 늘 아려왔다. 매일 밤 입대한 아들을 둔 부모들이 자주 찾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들락거리기도 했다.
노심초사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훈련소에 아들을 맡기고 눈물을 흘리던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아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러 날이 훌쩍 지나간 것이다.
아들이 처음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던 날이 생각난다. 교관이 입대 장정들을 연병장에 모아놓고 훈시를 했다. 휴대폰, 담배 등 소지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남김없이 뒤쪽 계단에 앉아 계시는 부모님께 맡기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까까머리 장정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아들도 우리에게 왔다. 짧은 순간 아내는 아들을 끌어안고 또 눈물을 글썽였다. 아들은 다시 돌아갔다.
빈손인데 아들이 왜 나왔느냐고 아내에게 묻자 가까이서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아들에게 그냥 나오라고 미리 말해뒀다고 했다. 소지품 반납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아내는 어디서 들었던 모양이다.
열병식을 마친 장정들이 연병장에 모이지 않고 운동장 저편으로 차례차례 멀어져 갔다. 사라져 가는 아들을 먼발치서 바라보는 그 심정이란 자식을 군에 보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아들이 훈련소에 있는 동안 참 많은 걸 느꼈다. 가끔 인터넷 『나팔소리』라는 곳에 접속해 훈련병을 둔 여러 부모들의 속마음도 읽었다. ‘자대로 가기 위해 아들이 훈련소에서 나오는 날, 훈련소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행진 중일 때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다’거나 ‘논산역에 미리 가 있다가 운이 좋으면 잠시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다’는 등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들의 마음은 눈물이 날 정도였고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들을 훈련소에 보낸 이후 나의 자식뿐만 아니라 ‘모든 아들딸들이 참 소중하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아들도 훈련 기간 내내 가족에 대한 그리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소중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삼복더위가 꼬리를 감춰가던 8월 어느 날, 드디어 군에 간 아들에게서 첫 전화가 왔다. 논산에서의 5주 훈련을 마치고 육군정보통신학교 후반기 교육에 들어간 것이다. 아내는 떨리는 음성으로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잘 있고 교육도 열심히 받겠다고 아들은 얘기하고 있었다. 전화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정해진 날에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간 후 아들이 벌써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모양이다. 뒤에 순서를 기다리는 동료들이 있는 것 같아 아내는 긴 통화는 하지 못하고 마무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아내는 아들에게 "밥 잘 먹고……."라고 얘기하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면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갑작스런 아내의 행동에 놀라 "그렇게 울먹이면서 전화를 끊으면 아들 마음이 어떻겠느냐."고 나무랐다.
그렇지만 그건 아내의 잘못이 아니었다. “밥 잘 먹고……." 이렇게 얘기하자 아들 녀석이 "엄마도(식사 잘해)……." 그러면서 음성이 울먹이듯이 변하더란 것이다. 그 순간 전화는 끊어졌다. 안타까움에 아내가 울었고 나도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예전엔 "밥 잘 먹어."라고 얘기하면 그냥 "예, 알았어요.” 하고 말았는데, 아들은 이제 엄마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후 그 아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전날 맞춰 둔 떡을 찾고 몸에 좋다는 세발낙지를 챙겨 아침 일찍 목포를 출발했다. 고속도로변엔 때 이른 낙엽이 뒹굴고, 파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하늘은 잔잔한 호수되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가는 도중 내내 아내와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체중이 많이 줄었다는데 어떻게 변해 있을까?’ ‘자대가 특전사라는데 마음은 괜찮을까?’ ‘집에서 하는 말소리가 옆에서도 듣기 힘들 정도인데 만나면 충성 구호를 외치며 경례를 할 것인가?’ 등 등
드디어 대전 유성에 위치한 육군정보통신학교 면회장에 도착했다. 거기 나와 있던 행정병에게 얘기했더니 10분 정도 기다리란다. 면회실 옆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에는 비치파라솔이 준비돼 있었고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벌써 만남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3명의 군인들이 절도 있게 나무 그늘 밑에 마련된 책상 앞에 다가가 신고를 하고 있었다. 아내가 그들 사이에 아들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들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거기에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뚜벅뚜벅 환한 미소로 우리에게 다가와 ‘충성’ 이렇게 외쳤다. 그렇게 감격의 만남은 이뤄졌다. 살이 빠진데다 모자를 눌러써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고 자세에는 의젓함이 배어 있었다. 군 입대 70일 만에 아들은 그렇게 변해 있었다.
준비해 간 음식을 먹으며 그간의 이런 저런 군 생활에 대해 얘기했다. 집에서 통화할 때 아들은 떡을 먹고 싶다고 했다. 우린 떡을 동료들에게 주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내무반에 음식을 가져갈 수는 없고 군에서 맞은 첫 추석에 송편이 나왔었는데 그걸 맛있게 먹었던 것 같았다. 집에 있을 땐 좋아하지 않았던 떡을 그렇게 맛있게 먹다니.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6시간 반을 보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허용된 면회 시간이 끝나고 작별의 순간이 다가오자 아쉬움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아들은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주차장으로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가볍게 포옹을 해주고 자동차 안으로 들어왔다. 아내도 뒤따라 차를 탔다. 나는 아내에게 “아들 손이라도 한번 잡아주지 왜 그냥 들어오느냐?”고 얘기했다. 아내는 자동차 안에서 자리에 앉으려다 다시 나갔다. 아들의 손을 잡아주고 포옹을 했다. 오랫동안……. 그리고 차안으로 들어오는데 거의 울음 폭발 직전이었다. 나도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충성’하는 아들의 음성이 차창 밖에서 들려왔다. 우리는 울음을 참느라 아들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굽은 길을 돌아오면서 차를 멈추고 주차장을 바라봤다. 아들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엄마가 손을 흔들자 아들도 따라 흔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운대를 빠져 나왔다.
호남고속도를 달려 집으로 오는 길에 아내에게 “처음에 왜 아들 손도 잡아주지 않고 자동차 안으로 그냥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손을 잡고 안아주고 그러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대로 들어왔었다.”고 말했다. 우린 아들과 그렇게 헤어졌다. 호남고속도로 지평선 너머로 그리움 짙은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노을치마 / 유 헌
긴 겨울이 가고 새봄이 얼굴을 내민다. 희끗희끗한 잔설이 꼬리를 감춘 언덕 너머 산모롱이에 파릇한 새움이 돋고 갈매기 등을 타고 건너온 바람은 물오른 가지에 앉아 여유를 부린다.
구강포의 봄은 저 멀리 마량포구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을 앞세우고 만덕산 자락에 도착하나 보다. 백련사 아래 동백 군락지에는 붉디붉은 산다화 피고지고 숲속 나뭇가지를 오르내리는 직박구리는 아침부터 숨이 차다.
풀빛이 차오르는 이른 봄날, 강진 도암면 만덕산 허리를 감고 도는 백련사 샛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동글동글 나무를 잘라 만든 통나무 계단을 10여분 오르니 고갯마루가 나온다.
200여 년 전, 오늘 같은 이런 봄날에 다산선생도 지금의 이 오솔길을 걸으며 사색의 시간을 보냈을까. 당대 최고의 명승 혜장선사와 함께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이어주는 이 산등성이 길을 오가며 세상을 얘기하고 선문답을 주고받았을까. 다산선생은 이곳 언덕에 올라 숨을 고른 후 초당으로 향하는 내리막을 길벗 삼아 하루하루 걷는 여유를 즐겼을지도 모른다.
고갯길 굴참나무 가지사이로 하얀 구름이 흘러간다. 문득 “요즘 사람 옛적 달 못 보았으나, 요즘 달 옛 사람을 비추었으리. 옛 사람 요즘 사람 모두 흐르는 물 같으나, 달 보는 그 마음은 모두 같으리” 라는 이태백의 칠언시 ‘대주문월對酒問月’의 앞머리가 떠올랐다. 나는 200년 전 저 구름 못 보았으나 지금의 저 구름은 혹시 다산선생과 만난 적 있지 않았을까. 대시인의 말처럼 구름을 바라보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을까. 나는 감히 다산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있었다.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자생하는 작설 찻잎에 길손의 시선이 머문다. 짙은 남빛을 띤 붉은색, 자색紫色이다. 참새의 혀를 닮아 작설차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초당 주변에 차나무를 심고 녹찻바람을 즐겼을 다산을 생각한다. 다산의 깊은 마음에 언감생심 다가갈 수는 없다.
그러나 절해고도나 다름없는 강진 땅에 귀양 가 있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적막한 세월을 보냈을 홍씨부인의 마음을, 역사가 기록하는 사실史實을 통해 조금은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홍씨부인은 아마 자색姿色을 갖춘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다홍치마 곱게 차려입고 한 살 아래의 청년 다산과 봄이 오는 길목에서 혼례를 치른다.
세월은 흘러 결혼생활 25년이 되던 해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다산은 귀양길에 오르고, 홍씨부인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어쩌면 살아서 만나지 못할 유배지의 남편을 기다리다 병이 들었을 것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강변의 외딴집 초가, 시름에 잠겨 있을 홍씨부인을 생각해 보라. 주변은 빈 가슴을 파고드는 바람소리 뿐 흐르는 물소리도 숨을 죽인 듯 적막에 쌓여 있었을 것이다. 그 차가운 어둠을 뚫고 때마침 강 너머에서 초승달이 떠오른다. 달빛은 빨려들 듯 봉창으로 스며들고 여인은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어 버선발로 마당으로 나선다.
그리고 천리 길 남쪽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몇 발자국 다가간다. “여보오~” 짧지만 길게 외마디 소리를 외치며 그대로 빈 뜰에 쓰러진다. 그때 강물은 남으로 흐르고 흘러 만덕산 아래 구강포구에 이른다. 간절한 부부의 두 마음은 가슴과 가슴으로 이어져 뜨겁게 해후한다.
그로부터 며칠 후 조선 순조 1810년 초가을, 다산 선생의 전남 강진 유배지에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빛바랜 노을색 비단치마가 인편으로 도착한다. 나는 그 순간을 상상해 『노을치마』라는 4수로 된 연시조를 지어 발표한 적이 있다.
봉창에 달그림자 열브스레 차오르고
두물머리 시린 버선발 만덕산 향하는데
상사련 구듭치는 강 구강포 가슴 섞네
(중략)
깁고 엮은 애틋한 정 신혼의 단꿈 어린
병든 아내 낡은 치마 초당에 전해지니
천리 길 적시는 울음 하피첩 되었다네
(하략)
(월간문학 6월호)
다산은 병든 아내가 보내온 낡은 치마를 정성스럽게 재단하여 자그만 서첩을 만들고 아들에게 당부하는 글을 적어 고향으로 보낸다. 유배지에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보낸 그 서첩을 색이 바래 노을처럼 변한 치마에 적었다고 해서 ‘하피첩’이라고 부른다. 다산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 먼 곳에서 마음을 담아 보냈구나. 오랜 세월에 붉은 빛은 바랬는데, 늙은 내 모습 같아 처량하구나.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드니......’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언덕을 넘으며 200년 전 한 여인의 애틋한 마음을 읽는다. 산 높고 물 선 귀양지에서 하릴없는 일생을 보내고 있을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보낸 깊은 뜻은 무엇이었을까. 병이 들어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노을치마를 보냈을지 궁금증이 더해진다. 한때나마 행복했던 신혼의 단꿈을 기억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마음을 전하려 했음일까. 어떤 생각이었든 간에 백 마디 말보다는 훨씬 더 깊고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의 안타까운 표현이었으리라.
요즘 부부간에 툭하면 큰소리로 다투고 심지어는 아예 갈라서는 경우까지 있다. 오죽하면 정부에서 ‘부부의 날’이라는 기념일까지 만들었을까. ‘부부의 날’은 가정의 달 5월에 둘이 하나 된다는 의미의 5월 21일로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부부간의 사랑을 어찌 법으로 묶을 수 있겠는가. 결국은 서로의 마음이다. 200년 전 다산선생과 홍씨부인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를 떠올리면, 지금 내 곁의 아내와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