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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사적
○ 서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국보 제1호)
중구 남대문로 4가 29번지에 있다.
서울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남대문은 그의 속칭이다. 태조5년(1396)에 창건되었던 것이지만 현존 건물은 세종30년(1448)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평 53.79평, 정면 5간(間), 측면 2간의 남대문은 현존하는 한국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우리나라 건축사상 가장 중요한 건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 서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보물 제1호)
종로구 종로 6가 69번지에 있다.
한양 도서의 정동(正東)에 위치하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속칭 동대문으로 불리운다. 이 문루는 태조 5년(1396)에 중수(重修)되었으나, 현존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개축된 것이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중앙부에 홍예문(虹 門)을 만들고 그 위에 중층(重層)의 문루를 세운 점 등은 서울 숭례문과 같은 수법이며 문밖으로 반월형의 옹성(甕城)을 돌린 것은 고종 6년에 개축한 것이다. 그리고 옹성 상부에는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다포계(多包系) 건물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
○ 서울성곽 (사적 제10호)
서울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3년(1394)만에 조선의 수도가 되었다. 태조는 그 이듬해 궁궐과 종묘·사직을 먼저 조성한 뒤에 도성축조도감을 열어 성 쌓기에 착수하였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다시피 했던 태조로서는 성곽이 수도방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성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포한 것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없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태조는 강조한 바 있다.
성안과 성밖을 구별하여 쌓은 한성의 성벽은 돌이나 흙으로 북악산등을 타고 낙산·동대문·남산을 거쳐서 인왕산 산등성이를 둘리는 총연장 18,1km로 쌓아졌다. 당시 서울의 총 인구가 5만명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성을 쌓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동원한 장정들의 수효는 4년간에 걸쳐 19만 7천여명에 이르렀다.
이 성에는 4대문을 두었는데,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숙청문을 두었다. 그리고 4소문으로는 동북에 동소문, 동남에 광희문, 서북에 창의문, 서남에 소의문을 두었다. 조선왕조 건설의 주역이었던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기본설계가 마련된 서울의 성벽은 둘레가 40리 남짓 되고, 그 후 세종 4년(1422)과 성종 10년(1479) 등 여러번에 걸쳐 중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관여하게 되면서 성문과 성벽을 하나 하나 허물어 버렸다.
현재 대문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남대문과 동대문, 숙청문(1976년 복원)이며, 소문으로는 창의문과 광희문(1975년 복원), 동소문(1994년 복원)이며, 성벽으로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남산·인왕산 일대이다.
○ 광주 풍납리토성(廣州 風納里土城, 사적 제11호)
송파구 풍납동 72-1번지에 있다. 풍납리토성은 백제초기의 유적으로서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이다. 천호대교의 남쪽 기점에 인접해서 위치한 이 토성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순수한 토성이다.
1925년 대홍수 때 토성의 서쪽 벽이 유실되었으나 1973∼1978년까지 토성 일부가 복원되었다. 1966년에 토성 내 포함층의 일부가 발굴되어 선사시대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친 토기의 분포상태를 알게 되었다.
○ 독립문(獨立門, 사적 제32호)
서대문구 현저동 941번지에 있다.
1894∼1895년에 갑오개혁으로 조선의 내정과 제도를 개혁하였으나 당시 청나라와 일본 및 러시아 등의 간섭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유지해 나가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민중들은 국왕과 대신들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외세의 간섭도 허락치 않겠다는 결의를 다짐하려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왕에 서 있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건립의 발의는 독립협회의 서재필(徐載弼)이 하였고 설계는 러시아인 [시바진]이 담당하였다. 독립문의 기공식은 1896년 11월 21일에 있었다.
○ 삼전도비(三田渡碑, 사적 제101호)
송파구 송파동 187번지에 있다.
인조 14년(1636) 청태종(淸太宗)이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였을 때 인조는 광주(廣州)의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싸웠다. 그러나 우리의 병력으로서는 청군의 위협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인조는 마침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태종의 군영이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에서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에서 이 사실을 비석에 새겨 삼전도에 남길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비석의 특색은 전면에는 한자로 새기고, 뒷면에는 만주문자와 몽고문자의 이중문자로 번역해서 전면을 둘로 나누어 조각한 것으로, 한 비에 3개국의 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유일한 비석이 되었다.
○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있다.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서울로 천도하면서 종묘(宗廟)를 짓게 한 다음 그 해 겨울에 북악산 아래에 왕궁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태조 4년(1395)에 완공하고 그 해 10월 28일 정식으로 경복궁에 들었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은 모두 불타서 재가 된 채 270여년간이나 폐허로 되어 오직 경회루의 돌기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후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재건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 완공시킨 바 있다.
처음 태조의 명에 따라서 정도전(鄭道傳)이 시경(詩經)의 구절을 따서 궁 전체의 이름을 경복궁이라 지었다. 조선 최후의 왕인 순종 융희 4년(1910)에 일제에 의해 경복궁의 여러 당(堂), 각(閣), 누(樓),정(亭), 행각(行閣), 회랑(廻廊)과 기관(機關)은 모두 헐리었고, 지금은 근정전(勤政殿), 경회루(慶會樓) 외의 몇몇 전당(殿堂)과 건춘문(建春文) 및 광화문(光化門)이 남아 있다.
근정전은 경복궁 안의 정전(正殿)으로 국왕의 즉위식 또는 공식적인 대례(大禮)가 거행되던 곳이며, 경회루는 왕의 사연장(賜宴場)으로 쓰이던 곳이다.
집옥재(集玉齋)는 각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고,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正門)으로 이 문 좌우쪽 높은 대좌 위에는 돌로 된 해태가 놓여 있는데 이는 근세의 미술대가로 알려진 이세욱(李世旭)의 작품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경복궁을 지은 후 궁전에 자주 화재가 일어났다. 이것은 조산(朝山)인 관악산이 화산(火山)인 까닭이라 해서 관악산에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집어넣는 한편 광화문 좌우편에 해태 한쌍을 앉혀 관악산의 화기를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해태의 시선은 관악산을 향하고 있다.
건춘문(建春文)은 경복궁의 동문으로써 이 문 안에는 이전에 왕세자가 있던 전당 춘궁(春宮)이 있었다. 이 문은 오직 종신(宗臣) 즉 왕족과 궁에 봉사하는 상궁들만 드나들었다. 이와는 달리 경복궁 서편에 있던 영추문(迎秋門:지금은 없다) 안에는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 규장각(奎章閣) 등 여러 관아가 있었고 따라서 이 문은 일반관리들이 사용하였다.
○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호)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에 있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하여 경복궁을 왕궁으로 삼고 있었으나, 정종은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태종이 즉위하자 왕 4년(1404)에 한성의 향교동에 이궁(離宮)을 짓게 하여 이듬해 5년에 완공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창덕궁이다.
이 궁에는 돈화문(敦化門)과 인정문(仁政門),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희정당(熙政堂), 낙선재(樂善齋), 대조전(大造殿) 등이 있고, 후원(後苑)과 같은 심오하고 아름다운 대원지(大苑池)를 가졌다. 일명 비원(秘苑)이라고도 불리어지는 창덕궁 후원에는 영화당(暎花堂), 부용정(芙蓉亭), 어수문(魚水門), 주합루(宙合樓) 등의 누각과 정자가 았다. 궁궐의 규모는 크고 화려하며 각 시대의 신구 건물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제도가 오늘날까지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창덕궁을 무대로 빚어진 잊을 수 없는 정변도 적지 않다. 사육신의 참형을 비롯해서 광해군이 반정군에게 쫓겨난 것도 이 궁이었다. 그리고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넣어 질식시킨 참변도 있엇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이 궁에서 일어났다.
○ 창경궁(昌慶宮, 사적 제123호)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에 있다.
조선시대 이궁(離宮)이었던 이 궁은 세종이 상왕(上王)인 태종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즉위년(1418)에 고려시대의 수강궁(壽康宮) 옛 터에 세운 것이다. 처음 이름은 수강궁이었으나, 성종 15년(1484)에 명정전(明政殿) 등 여러 궁궐을 크게 짓고 창경궁으로 고쳤다.
정조와 순조·현종 등 많은 왕들이 이 궁에서 태어났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불타서 광해군 8년(1616)에 복구하였지만 인조 즉위년(1623) 이괄의 난 때 불이 나서 수많은 전각들이 타 다시 중수되기도 하였다.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이고 명정전(明政殿)은 법전(法殿)이었다. 통명전은 창경궁 안의 정전(正殿)이면서 대조전(大造殿)과 함께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궁은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크게 변형되고 훼손되었으나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된 복원사업으로 동물원과 식물원이 과천으로 옮겨지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
중구 정동 1-23번지에 있다.
이 궁은 서울에 남아 잇는 궁궐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작다. 광해군이 이 행궁(行宮)에서 즉위하였고, 중화전(中和殿)과 내전(內殿)인 함녕전(咸寧殿) 등은 모두 1905년에 재건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1909년에 준공되었다. 이 궁의 터전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였다.
○ 경희궁(慶熙宮, 사적 제271호)
종로구 신문로 2가 1-126번지 일대이다.
경희궁의 원이름은 경덕궁(慶德宮)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지었다. 숙종이 이 궁에서 나서 승하하였고, 경종과 정조, 헌종이 모두 이 궁에서 즉위하였으니 원래 이궁(離宮)이었던 이 곳이 한동안은 본궁과 다름없이 쓰여졌다.
광해군이 이 궁을 짓게 된 동기는 음양지리설과 깊은 관계가 다. 즉 새문동(塞門洞:돈의문 부근)에 왕기(王氣)가 있다 해서 그 왕기를 누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새문동에는 광해군의 동생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元君)의 사삿집이 있었는데, 광해군은 바로 그곳을 빼앗아 궁궐을 지었지만 8년이 채 못되어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 종묘(宗廟, 사적 제125호)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있다.
일명 태묘(太廟)라고도 하는데, 본전(本殿)과 영녕전(永寧殿) 두 궁으로 되어 있다. 본전에는 역대 왕 중에서 공이 많은 왕의 위패를 모셨고 영녕전 즉 별묘(別廟)에는 본전에 모시지 않은 이들과 태조의 고조 4조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 전관교(전관교:살곶이다리, 사적 제160호)
성동구 행당동 58번지에 있다.
살곶이는 영남에서 새재(鳥嶺)를 넘어 충주·이천·광주를 지나 서울에 도달하는 길목이었다. 일찌기 세종 2년(1420) 5월에 상왕이었던 태종이 이곳에 다리를 놓도록 명하여 착공하였으며 성종 16년(1483)에 완성되었다.
이 다리는 처음 성종의 명명에 의하여 제반교(濟盤橋)라 하였고, 고종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이 다리를 헐어서 석재(石材)로 사용했으므로 지금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어쨌든 이 다리는 장안의 금천교(禁川校), 수표교(水標橋)와 함께 유명한 다리 중의 하나였다.
○ 서울 사직단(社稷壇, 사적 제121호)
종로구 사직동 1-28번지에 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한 태조는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배설하였다. 사직(社稷)은 국토의 신인 사(社)와 오곡(五穀)의 신인 직(稷)의 두 신위(神位)에게 제사드리는 곳으로 단을 쌓고 제사드리므로 사직단이라 하였다. 사직은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의 다른 명칭으로 종사(宗社)라고 표현되었다.
○ 우정총국(郵征總局, 사적 제213호)
종로구 견지동 397번지에 있다.
이곳은 옛날 북부(北部) 전동(典洞)이었고 전의감(典醫監)이 있었던 자리이다. 고종 21년(1884) 4월, 일본과 미국 시찰에서 돌아온 홍영식(洪英植)은 고종에게 기왕부터 내려오던 역전법(驛傳法)을 고쳐 우편제도를 새로 채택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에 우정총국을 세우고 홍영식 자신은 총판(總辦)이 되었다. 우정총국은 1884년 10월 17일 밤에 있었던 갑신정변(甲申政變)의 거사장소로써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만다.
○ 구 대한의원(大韓醫院) 본관(사적 제278호)
종로구 연건동 28-2번지에 있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편입되어 쓰여지고 있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 칙령 제9호에 따른 의정부(議政府) 직속의 대한의원 본관으로써 일찌기 창경궁의 외원(外苑)이었던 함춘원(含春苑)의 마두봉(馬頭峰) 언덕에 세워졌다.
○ 약현성당(藥峴聖堂, 사적 제252호)
중구 중림동 149-2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고종 24년(1887) 5월 30일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세워진 성당이다. 이 성당은 중국인 기술자들에 의하여 시공되어 고종 29년(1892) 9월에 준공되었다. 이 곳에 성당을 세운 것은 천주교도 수난 때 44명의 순교자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서소문 밖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
중구 정동 15-1번지에 있다.
고종 27년(1890)에 건축된 것으로 아관(俄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특히 고종이 1896년 2월 1일 세자(純宗)와 함께 이곳으로 옮겨 와서 이듬해 2월 20일 경운궁(慶運宮:德壽宮)으로 환궁할때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이를 일러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하였다. 고종이 이 공관에 머물동안 친일 김홍집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인 박정양내각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 구 벨기에영사관(사적 제254호)
관악구 남현동 1095-13번지에 있다. 원래 중구 회현동 2-78번지에 위치해 있었으나 1982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905년 일보인 기술자들에 의해 시공 준공되었다. 광복 후에 해군헌병대가 사용하더니 지금은 한국상업은행의 사료관으로 쓰여지고 있다.
○ 정동교회(貞洞敎會, 사적 제256호)
중구 정동 32-2번지에 있다.
개신교의 교회당으로는 국내 처음으로 지어진 것으로서 고종 23년(1896) 12월에 준공되었다.
○ 운현궁(雲峴宮, 사적 제257호)
종로구 운니동 98-50번지에 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사삿집으로써 고종이 출생해서 12살까지 살던 곳이다. 고종이 즉위한 이후 이 집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고,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 자신이 이 궁에서 납치당하기도 하였다 이 운현궁에는 창덕궁과 가깝게 내왕할 수 있는 임금 전용의 경근문(敬勤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勤門)이 있었다.
○ 명동성당(明洞聖堂, 사적 제258호)
중구 명동 2가 1-8번지에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主敎座)성당으로 종현(鐘峴)의 이름을 따서 종현성당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종 29년(1892) 8월 5일 착공되어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공사가 한때 중단되기도 했지만 1898년 5월 29일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설계는 프랑스 코스트(Coste)신부가 담당하였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조 교회당이며, 국내 유일의 순수한 고딕식 구조를 갖춘 건물이다.
○ 환구단( 丘壇, 사적 제157호)
중구 소공동 87-1번지에 있다.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말하는 것으로 원단(圓壇)이라고도 하는데 고종 34년(1898)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조선호텔의 남북쪽 정원에 황궁우(皇穹宇)란 팔각정으로 남아있지만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에게 하사된 저택자리였고, 선조 때는 왕자인 의안군(義安君)의 저택자리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남별궁(南別宮)이라 불러 중국사신의 영빈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
○ 한국은행 본관(사적 제280호)
중구 남대문로 3가 110번지에 있다.
본래 이 건물은 조선에 진출했던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 1908년 11월 착공되었던 것으로 1910년 일제강점이 이루어짐으로써 1911년 조선은행으로 바뀌게 되고 그 다음 해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6·25전쟁 때 내부가 불탔으나 1956년 복구되어 한국은행 본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 서울역사(驛舍, 사적 제284호)
중구 봉래동 2가 122번지에 있다.
한국에 처음 철도가 놓여진 것은 광무 3년(1899) 4월로, 일본인 회사인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착공했던 인천과 노량진간에 놓여진 철로였다. 지금의 서울역사는 1922년 6월에 착공되어 1925년 9월에 준공된 것이다.
○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石村洞 百濟初期積石塚, 사적 제243호)
송파구 석촌동 61-6번지에 있다.
석촌동(일명 돌마리) 일대는 백제시대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널무덤(土壙墓)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 사적 제243호로 지정된 것은 3호·4호 돌무지무덤이다.
백제초기의 가장 왕성했던 시기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는 피라밋 형태의 이 돌무지무덤은 바닥을 진흙으로 다지고 자갈돌을 깐 다음 그 위에 큰 널돌(板石)이나 절석(切石)을 한겹 깐 뒤 작은 돌들을 겹겹이 쌓아 네모꼴 기단을 만들어 층을 이루어 가면서 제작하는 기단식(基壇式) 돌무지무덤이다.
○ 암사동 선사주거지(岩寺洞 先史住居址, 사적 제267호)
강동구 암사동 155번지에 있다.
암사동 한강가 모래밭 언덕바지에 위치한 이 주거지는 빗살무늬토기시대인 신석기시대의 최대 집단 취락터이다. 이곳에 신석기시대의 움집들이 복원되어 있고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선사유적전시관 등이 있다.
○ 방이동 백제고분군(방이동 백제고분군, 사적 제270호)
송파구 방이동 산 47-4번지에 있다.
학계에 의하여 5세기경부터 백제말기까지의 묘제(墓制)로 밝혀진 이 고분들은 모두 구릉에 위치하였고 고구려 묘제에서 보이는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 몽촌토성(夢村土城, 사적 제297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
백제시대 토성인 몽촌토성은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서울·한양·단국·숭실대 등 4개 대학교의 발굴에 의해 그 대체적인 윤곽이 밝혀져 올림픽공원에 새로이 단장되었다.
이 성은 타원형의 야산 뒤에 진흙은 쌓아서 이룩한 성벽으로서 외곽 둘레가 약 2.5km이며 성의 둘레에는 방어용 해자(垓字)시설이 되어 있다. 이 성은 이웃해 있는 풍납리토성, 아차산성과 함께 적으로부터의 보호와 방어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던 토성이다.
○ 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호)
중구 장충동 2가 197번지(장충단공원 안)에 있다.
광무 4년(1900) 남소영(南小營) 자리에다 을미사변 때 순사(殉死)한 충신, 열사(烈士)를 위해 단을 모으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사당(祠堂) 자리는 6·25전쟁 때까지 서남쪽에 있었다.
이 비 표면의 [奬忠壇]이란 3자는 순종이 황태자 때 쓴 글씨이며, 비 뒷면의 143자는 민영환(閔泳煥)이 썼다.
○ 봉황각(鳳凰閣,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호)
강북구 우이동 254번지에 있다.
독립운동가인 손병희(孫秉熙)가 1912년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지도자를 훈련시키려 세운 건물로, 이때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4명이며 3·1운동의 주체가 되어 구국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 낙성대(落星垈,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호)
관악구 봉천동 산 48번지에 있다.
낙성대는 고려시대 귀주대첩의 명장 강감찬(姜邯贊)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강감찬장군이 태어날 때 별이 떨어졌다 하여 낙성대라 하였다. 서울시에서 1973∼1974년까지 이곳을 정화하면서 담장을 쌓고 사당 안국사(安國祠)를 지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삼층석탑이 있으며, 탑에는 강감찬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호)
종로구 숭인동 산 3번지에 있다.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동망봉(東望峰) 아래에는 정업원구기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동망봉은 단종이 강원도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후 그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아침 저녁으로 올라가 동쪽(영월쪽)을 바라보며 죽은 왕을 추모하였다는 곳이며, 정업원은 송씨가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일생을 거처한 곳이라 한다.
○ 용양봉저정(龍讓鳳 亭,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호)
동작구 본동 10-30번지에 있다.
정조 13년(1789)에 착공하여 2년 후에 완공된 건물로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묻힌 화산(華山, 현 水原) 현릉원(顯陵園)에 참배하러 다닐 때 노들강에 배다리(舟橋)를 세우고 건너가 잠시 어가(御駕)를 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 성제묘(聖帝廟,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7호)
중구 방산동 4-96번지에 있다.
성제묘는 관우(關羽)를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관왕묘(關王廟) 중의 하나이다. 이 건물은 일찍이 임진왜란 이후 서울에 세워진 남묘(南廟), 동묘(東廟)가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던 제도였던 것과는 달리 민간인에 의해 세워진 묘당(廟堂)이다.
○ 사육신묘(死六臣墓,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8호)
동작구 노량진동 185-2번지에 있다.
원래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6명 중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보(兪應孚)의 묘소가 있었으며, 1977·1978년의 묘역 정화공사 때 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의 가묘를 추봉하였다. 이때 단종복위운동 때 순절한 김문기(金文起)의 가묘도 마련되었다.
이들은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14세 된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세조가 되자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충성심을 변치 않다가 세조 2년(1456)에 사형을 당하였다.
○ 종친부(宗親府,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9호)
종로구 화동 1번지에 있다.
조선의 역대 왕의 어보(御譜), 어진영(御眞影)을 받들어 모시는 의촉(衣 )을 만들고 종실(宗室) 제군(諸君)의 봉작(封爵), 승습(承襲),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의 사무를 보던 곳이다.
○ 천정(天井:한우물,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0호)
금천구 시흥동 산 93번지에 있다.
시흥 동남쪽에 있는 호암산(虎巖山) 한 봉우리 위에 작은 연못 크기의 우물이 있는데 큰 우물이란 뜻으로 '한우물' 또는 '용보(龍洑)'라고 한다.
○ 지덕사 부 묘소(至德祠 附 墓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1호)
동작구 상도동 산 65-42번지에 있다.
태종의 장자(長子)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과 묘이다.
○ 청권사 부 묘소(淸權祠 附 墓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2호)
서초구 방배동 191번지에 있다.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녕대군(孝寧大君)의 사당과 묘이다.
○ 동십자각(東十字閣,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3호)
이 건물은 광화문에 연결되어 오는 경복궁 외궁성(外宮城)이 건춘문(建春門)을 향하여 꺾이는 부분에 세운 망루이다. 이와 같은 건축물은 서쪽에도 있어 서십자각(西十字閣)이라 불렀으나 일제 때 철거되었다.
○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4호)
은평구 역촌동 8-12번지에 있다.
이 비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소유했던 별장터임을 기리는 기념비로서 숙종 21년(1695) 7월에 세운 것이다.
○ 선농단(先農壇,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5호)
동대문구 용두동 1158-1번지에 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일컬어온 우리 나라는 원래 농본국(農本國)이어서 농사와 인연이 깊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主神)으로 하여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농사의 모범을 보이고자 왕이 직접 적전(籍田)에서 밭을 가는 친경(親耕) 행사를 하였다.
친경(親耕)은 조선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 3년(1909)에도 행하였으나 일제 때 폐지되었다. 이 단은 사방 4m 4m의 석축단(石築壇)으로 되어 있다.
○ 삼군부 청헌당(三軍府 淸憲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6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안에 있다.
이 건물은 조선말기의 건축양식으로서 삼군부 내의 일부분인 청헌당이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2년(1865)에 훈련도감(訓練都監)의 신영(新營)·남영(南營)·병마소(兵馬所)를 합하여 삼군(三軍)이라 하고 옛터(현 정부종합청사)에 삼군부의 청사를 세우고 초기의 제도대로 삼군부를 다시 부활시켜 정치는 의정부에서, 군사는 이곳 삼군부에서 맡아보게 하였다.
○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7호)
서대문구 홍은동 8번지에 있다.
이 불상은 높이 약 10m 이상 되는 자연암에 새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좌상(坐像)이다. 불암(佛岩)이라고도 일컫는 이 불상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신라시대 장의사(藏義寺)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장의사 경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석불은 조선 태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에도 여기서 기원하였으며 고종의 어머니 민씨(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의 복을 비는 치성을 드렸는데 이때부터 불상에 분을 바르기 시작하여 백불(白佛)이라 하였다.
○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8호)
중구 장충동 2가 197-1번지에 있다.
이 다리는 태종 6년(1406)에 600명을 동원, 인공으로 수로를 뚫은 개천(開川, 청계천)에 세웠던 다리 중의 하나로서 도성 안의 개천에 흐르는 수량(水量)을 측정하는 시설이다. 다리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平)이라는 수준(水準)을 새기고 물의 깊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수중주석표(水中主石標)'라 하고 있어 여기서 다리의 이름을 딴 것임을 알 수 있다.
○ 흥화문(興化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9호)
종로구 신문로 2가 경희궁에 있다.
이 문은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 정문이다. 본래 이곳은 인조의 생부(生父)인 원종(元宗)의 잠저(潛邸)가 있던 곳으로 광해군이 왕기(王氣)를 없애기 위하여 이 궁을 건설하였다 한다.
1910년 경희궁을 헐고 경성중학교(서울중고등학교)를 건립할 때 이 문은 남아 있다가 1932년 박문사(博文祠)에 이전되어 정문으로 삼았는데 그 후 이전된 영빈관(迎賓館)이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되어 영빈관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현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 무계정사(武溪精舍,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2호)
종로구 부암동 329-4번지에 있다.
암벽에 가로로 '무계동(武溪洞)'이라 새겨 놓은 글자가 있어 이곳이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정자였던 무계정사의 유지(遺址)임을 알 수 있다. 이 곳은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園)에서 노닐고 나서 그곳과 같은 자리라 생각하여 산정(山亭)을 세우고 글을 읊으며 활을 쏘았던 장소였다.
○ 대원군 별장(大院君 別莊,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3호)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에 있다.
창의문(彰義門) 밖 자하문고개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의 사랑채이다. 조선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사랑채로서 1958년 손재형(孫在馨)이 이곳에 가옥을 지을 때 석파정 경내에 있었던 이 집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4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있다.
이 여래좌상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상(本尊像)과 같은 양식의 불상이다. 경주의 남산 옛 절터에 있었던 것을 1927년 총독부관저가 신축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안치한 것이다.
○ 황학정(黃鶴亭,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5호)
종로구 사직동 산 1-1번지에 있다.
황학정이 있는 이 곳은 서촌(西村) 오사정(五射亭) 중의 하나인 필운동(弼雲洞) 등과정(登科亭)의 터이다. 윈래 이 황학정은 광무 2년(1898) 고종의 명에 의하여 경희궁 안에 왕비가 거처하던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지었던 것을 1922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으로 지금까지 궁술행사가 열리고 있다.
○ 석파정(石坡亭,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6호)
종로구 부암동 산 16-1번지에 있다.
철종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에 빼앗았다 하며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이다. 이 집을 석파정이라 한 것은 앞산이 모두 바위였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며 흥선대원군의 아호(雅號)를 석파(石坡)라 한 것도 이로 인하여 지어진 것이다.
○ 한글고비(古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7호)
노원구 하계동 산 12-2번지에 있다.
이 비는 중종 31년(1536)에 세워졌으며, 한글로 쓰여진 금석문이란 점에서 매우 희귀하며 글씨체가 훈민정음 당시의 것과 거의 같다. 쓰여진 내용으로 보아 효심이 지극했던 사람이 그 부모를 위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 선희궁지(宣禧宮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회재 제32호)
종로구 신교동 산 1-1번지에 있다.
이 궁터는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왕실의 사묘(祠廟)로서 지금도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다. 현재는 신교동 맹아학교터가 되었다.
○ 도선사 석불(道詵寺 石佛,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4호)
강북구 우이동 산 69번지에 있다.
도선사의 마애불입상(磨崖佛立像)은 장대하고 우람한 불상형태와 어색한 구도, 사각형적이고 평판적인 모습에 비해 소박하고 친근미 나는 부처님의 경지를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 불상이 조선중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 당시의 소박한 불상미(佛像美)가 잘 나타나 있다.
○ 서울 성공회성당(聖公會聖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5호)
중구 정동 3번지에 있다.
본 성당은 1890년 한국에 온 초대 코오프(C.G.corfe)주교가 1922년에 착공하여 1926년 5월 2일에 헌당식(獻堂式)을 가졌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天道敎 中央大敎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6호)
종로구 경운동 88번지에 있다.
본 건물은 손병희(孫秉熙)가 건립을 계획하여 일본인 중촌흥자평(中村興資平)이 설계하고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시공하였다. 1918년 착공하여 1921년에 완공하였다. 전체적으로 어떤 일정한 양식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으나, 비교적 독특한 의장수법(意匠手法)을 지닌 건축물로서 한국 천도교의 중앙대교당이다.
○ 삼군부 총무당(三軍府 總武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7호)
성북구 돈암동 512-160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고종 5년(1868)에 건립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주당(主堂)이었던 총무당으로서 당초 광화문 앞 서쪽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 때에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서울시에서 1979년 공사를 착수하여 복원하였다.
○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8호)
은평구 진관내동 428번지에 있다.
이 비는 조선 정조가 그 25년(1781)에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면서 할아버지인 영조의 옛일을 생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세운 것이다.
비문은 영조가 세제(世弟)시절인 경종 원년(1720)에 부왕인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금암(黔巖)의 덕수천변(德水川邊)에 머물면서 이곳의 참장(站長)이 소도둑을 잡았다가 그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타일러 보낸 일을 목격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를 거울삼아 훌륭한 정치를 행하였다는 내용이다.
○ 화산군신도비(花山君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1호)
서대문구 북가좌동 73-3번지에 있다.
속칭 거북비로 통하는 이 신도비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화산군의 행적과 그 세계(世系)를 기록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낙창군(洛昌君)이 영조 23년(1747)에 건립한 것이다.
화산군의 이름은 곤(滾)인데, 선조의 일곱째 왕자인 인성군(仁城君) 공(拱)의 손자이다.
○ 세종대왕신도비(世宗大王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2호)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157번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내에 있다.
이 신도비의 원 위치는 세종의 초장지(初藏地)인 강남구 내곡동 산 13번지였으나 1974년 4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문(碑文)은 정인지(鄭麟趾)가 짓고 비음기(碑陰記)는 김조(金 )가 지었으며 글씨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썼다.
○ 연령군신도비(延齡君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3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안에 있다.
이 신도비의 원래 소재지는 금천현(衿川縣) 초당리(楚塘里), 지금의 영등포구 대방초등학교 교정이었다. 그 후 1940년 당시 경성지구 구역정리로 인하여 묘역은 충남 예산군 덕산으로 옮겨지고 현지에 이 신도비만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이 비는 [안국동별궁비(安國洞別宮碑)]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1967년 8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보존 중에 있다. 비문은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이명(李 命)이 지었고 글씨는 조태구(趙泰耉)가 썼다.
연령군은 숙종의 아들로서 숙종 25년(1699)에 나서 21세에 요절하였다.
○ 상봉동 오층석탑(上鳳洞 五層石塔,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4호)
중랑구 상봉동 344-1번지 한독약품주식회사 뜰에 옮겨져 있다. 이 탑은 전체의 높이가 820㎝나 되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오층탑으로서 본래는 전라북도 익산(益山)에 있던 것이다.
그 양식에 있어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과 같아서 백제말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 상봉동 석제태실신석(上鳳洞 石製胎室身石,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5호)
중랑구 상봉동 344-1번지 한독약품주식회사 뜰에 놓여져 있다.
높이가 114㎝로서 둥근 대석(臺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구성은 신석(身石)과 개석(蓋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확한 출처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왕실의 태(胎)를 묻었던 유품(遺品)으로 추정되고 있다.
○ 광평대군묘역 일원(廣平大君墓域 一圓,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8호)
강남구 수서동 산 10-1번지에 있다.
옛날에는 궁말 혹은 궁촌(宮村)이라 불리어졌던 수서동의 광수산(光秀山)에 자리하고 있는 이 묘역 일원은 서울 근교에 현존하는 왕손(王孫)의 묘역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유지되어 있다.
이 곳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내외의 묘소를 비롯하여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내외의 묘소와 광평대군의 아들인 영순군(永順君)의 묘 등 약 700여기에 달하는 묘들이 있다.
광평대군의 묘소는 본래는 광주 학당리(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가 초장지(初葬地)였으나 이곳에 성종의 선릉(宣陵)이 들어서게 되자 연산군 원년(1495)에 현재의 이곳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중명전(重明殿,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3호)
중구 정동 1-11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1900년대에 건축되었으나 1925년 화재로 외벽체만 남고 완전히 불타자 곧 복원, 준공한 2층 벽돌집이다.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은 외국사신들이 고종을 알현하는 알현장으로,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 어정(御井,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3호)
중구 훈정동 66-5번지에 있다. 이 우물의 축조연대는 조선초기로 추정되며, 임금이 종묘에 전배(殿拜)하러 나올 때 이 우물물을 마셨다 하여 '어수우물·어정(御井)'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 충헌김공신도비(忠憲金公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9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안에 있다.
이 비는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헌공(忠憲公) 김구(金構)의 신도비로서 영조 19년(1743)에 세워졌다.
이 비의 특징은 암·수막새기와를 드리운 기와지붕 모양의 개석(蓋石)과 다른 신도비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용·봉황·불로초·구름 등의 문양들이 다채롭게 새겨져 있는 점이다.
○ 봉은사 선불당(奉恩寺 選佛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4호)
강남구 삼성동 73번지에 있다.
선불당은 신라 원성왕 10년(794)에 창건된 봉은사 대웅전의 한단아래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일종의 대중 선방(禪房)으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9세기에 세워진 이 건물은 비록 연대가 오래지 않지만 이만한 크기의 거창한 선불당은 서울시내에 유례가 없으며 당시의 귀중한 목조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 화계사 대웅전(華溪寺 大雄殿,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5호)
강북구 수유동 487번지에 있다.
삼각산에 위치한 이 절은 중종 17년(1523) 신월(信月)스님이 창건하였다. 화계사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보아 1800년대 후반의 불전(佛殿)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단엄한 건물로 당시에 유행하던 법당양식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 봉원사 대웅전(奉元寺 大雄殿,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8호)
서대문구 봉원동 1번지에 있다.
봉원사는 신라 진성여왕 3년(889)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현 위치의 봉원사는 영조 24년(1748)에 세워진 것이다.
봉원사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19세기 한성에 세워진 사찰 내 대웅전의 공통적 특징인 여러 층의 정면층단, 판벽, 천장양식 등을 나타내고 있는 대표적 건물로서 당시 한성 사찰의 주법당(主法堂)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사라진 명소
○ 국사당(國祠堂)
"남산 꼭대기에 국사당이 있었는 바, 이를 곧 목멱신사(木覓神祠)라 하였다."는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기록이 있다. 이로써 서울 남산(또는 목멱산) 꼭대기에 국사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 때는 이 곳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나 그래도 건물만은 남아있던 것을 1925년 일본인들에 의해 헐리고 말았다.
○ 남산봉수대(南山烽燧臺)
남산에는 일찍이 5개소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조선초기부터 고중 31년(1894) 갑오개혁 때 없어지기까지 근 5백년간 존속하였다.
남산의 봉수대는 일명 경봉수(京烽燧)라고도 하며, 전국 각지의 경보를 받아 병조(兵曹)에 종합 보고하는 중앙봉수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산봉수대는 1992년 [남산 제모습 찾기사업]의 일환으로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993년 7월 완공되었다.
○ 녹천정(鹿川亭)
남산 기슭 예장동에는 조선초기에 녹천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은 이곳을 소위 총독관사(總督官舍)로 정하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정자를 새로 꾸민 일도 있었지만 원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터잡은 곳이라 한다..
○ 청학동(靑鶴洞)
남산의 청학동은 조선초기 이래 삼청동(三淸洞), 인왕동(仁旺洞), 쌍계동(雙溪洞), 백운동(白雲洞)과 함께 도성 내에서 경치좋은 곳으로 이름 높던 곳이다. 이곳에는 일찍이 연산군 때의 천재시인 박은(朴誾), 그리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대제학 이행(李荇) 등이 별장을 가졌다. 이후 조선말까지 남산에는 숱한 시인 묵객들이 별장과 정자를 짓고 경관을 즐겼다.
○ 균역청터(均役廳址)
남학동(남학동)에 있는 일신초등학교 자리는 옛날 균역청이 있던 자리이다.
균역청은 영조 27년(1751)에 창설되었는데, 징병을 피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고 면제해 주는 사무를 집행하고 양반들이 노비를 팔고 사는데 세금을 부과하는 사무를 담당하였다. 그 외에도 소금과 어업에 대한 부가세 등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 영희전터(永禧殿址)
지금 중부경찰서 자리인 저동(苧洞) 2가 62번지 부근은 일찍이 영희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에는 원래 세조의 의숙공주(懿淑公主)의 저택이 있었다. 중종 때는 단경왕후(端敬王后)를 옮겨 살게 하였고, 광해군 2년에는 묘사(廟祠)로 꾸며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영위를 모시기도 하였다.
○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
이 곳은 영조 이래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南小營)이 있었고, 광무 4년(1900)에 장충단을 꾸민 이래로 장충단이라 불렀다. 고종은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식(李耕植)과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등 몸을 희생하여 절개를 지킨 장졸들의 영혼을 모시고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근린공원인 장충단공원은 1984년 9월 22일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에 흡수 합병되었다.
○ 남소영(南小營)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버티고개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는데, 남소문 옆에는 남소영이 건립되어 있었다. 남소영은 조선시대에 수도방위와 왕실호위를 맡은 분영(分營)이었다.
○ 태평관(太平館)
지금의 상공회의소 일대에는 조선초기에 건립된 태평관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남대문 안쪽의 서부 양생방(養生坊)으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중종 때의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선조 때의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이곳에서 성혼식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조 이전에 이미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전환국(典 局)
지금의 상공회의소 근처에 전환국이 있었다. 고종 22년(1885)에 처음으로 전환국을 설치하고 독일의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백동전(白銅錢)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주조된 백동전의 시초이다.
○ 선혜청(宣惠廳)
지금 남대문시장가 접해 있는 남창동(南倉洞)에는 일찍이 대동미(大同米)와 포전(布錢)을 받아들이고 내주던 선혜청이 있었다.
○ 혜민서(惠民署)
현재 외환은행 본점 동쪽인 을지로 2가 192번지는 조선시대 혜민서가 있던 자리이다. 혜민서는 태조 원년(1392)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설치되어 고종 19년(1882) 폐지될 때까지 서민의 질병치료를 담당하였던 의료기관이었다.
○ 훈련원(訓練院)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맞은 편에는 조선시대의 훈련원이 있었다. 훈련원은 태조 원년(1392)에 설치되어 고종 31년(1894)까지 5백년동안 유지되었던 기관이다. 무관들이 과거를 보기도 하였고 무예를 훈련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곳에서 과거를 보았다. 이 안에는 서울 장안에서 물맛 좋기로 이름났던 통우물(桶井)이 있었다.
○ 군기시(軍器寺)
지금의 서울특별시청사가 있는 자리에는 병기(兵器)와 기치(旗幟), 융장(戎仗) 등을 만들던 군기시가 있었다. 태조 때는 군기감(軍器監)이었는데, 태종 14년(1414)에 군기시로 고쳐 불렀다. 고종 31년(1894) 이 제도는 폐지되었다.
○ 덕안궁터(德安宮址)
중구 태평로 1가 조선일보사 자리는 고종 때의 덕안궁터이다. 본래 이 곳은 명례궁(明禮宮)이 있던 자리였는데, 광무 원년 (1897)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부터 덕수궁으로 돌아오자, 그 해 엄씨를 빈(嬪)으로 책봉하면서 명례궁 터전에 경선궁을 이룩하였다. 1912년 엄비가 돌아감에 따라 이 곳에 사묘(私廟)를 세우고 경선궁을 덕안궁으로 고쳐 불렀다.
○ 저경궁터(儲慶宮址)
남대문로 3가 111번지에는 저경궁이 있었다. 원래 이곳은 선조의 다섯째 왕자인 원종(元宗)이 살던 저택이었다. 그때는 송현궁(松峴宮)으로 불렀는데, 영조 31년(1755)에 인빈(仁嬪) 김씨의 사판(祠板)을 모시고부터 저경궁이라 불리었다.
○ 부녀시장(婦女市場)
동대문 동묘(東廟) 남서쪽에는 여인네들만 모이는 채소난전이 있었다. 부녀자들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채소난전이 서게 된 것은 단종의 왕비인 송비(宋妃)가 단종이 영월에서 세상을 떠난 후 정업원(淨業院)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인네들이 그 근방에 채소난전이 서게 하여 채소를 송비에게 몰래 바치곤 하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 낙천정터(樂天亭址)
광진구 자양동에서 동남쪽으로 한강변을 끼고 거슬러 올라간 산 위에 낙천정이 있었다.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이궁(離宮)을 짓고 정자를 꾸몄는데 이를 낙천정이라 하였다. 이 산을 일명 발산(鉢山)이라고도 부르고 그 동북쪽 기슭을 대궐터로 부른 이유가 그 까닭이다.
○ 전관원터(箭串院址)
살곶이다리에서 서북쪽 지금의 성동교 서북쪽에 전관원이 있었다. 서울 근교에는 전관원과 함께 동쪽에 보제원(普濟院), 북쪽에 홍제원(弘濟院), 남쪽에 이태원(梨泰院)의 4개의 원(院)이 있었다.
원은 역로(驛路)에 부수되는 역(驛)과 같은 것으로, 공문서의 전달과 관청에서 쓰는 물품의 운송이라든지 공무를 띠고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던 곳이다.
○ 독서당터(讀書堂址)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 일대는 옛날에 두뭇개(豆毛浦)로 불리었다. 이곳 응봉(鷹峯) 아래에는 중종 12년(1512)에 지은 독서당이 있었다. 독서당이란 본래 세종이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 옛정 장의사(藏義寺)에서 독서에 전념케 한 것이 그 시초였다. 그러나 독서당이라 불리우기는 성종이 용산에 독서당을 마련하고 부터였다.
○ 동빙고(東氷庫)
지금의 옥수동에는 동빙고가 있었다. 이곳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궁중의 제사용으로 썼다. 서빙고동에는 서빙고가 있었다.
○ 동·서활인서터(東·西活人署址)
동·서활인서는 태조 원년(1392) 설치되어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의료기관이었다. 활인서는 서민들의 질병치료를 담당하였는데, 특히 전염병 치료를 전담하였다. 이와 함께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들을 위한 구제사업도 행하였다.
동활인서의 위치는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전의 돈암장 자리)이며, 서활인서는 처음 마포구 아현동 267번지 아현중학교 자리에 있다가 조선말에 중구 신당동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 경기감영터(京畿監營址)
지금의 서대문적십자병원과 서대문우체국이 있는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서대문 밖으로써 경기감영이 있었다. 태조 2년(1393)에 설치되었는데 속칭 포정사(布政司)로 부르기도 하였다.
경기감영의 선화당(宣化堂)은 건양 원년(1896)에 수원으로 옮겨가면서 군영(軍營)이나 한성부의 일부로 쓰이기도 했다.
○ 연희궁터(衍禧宮址)
서대문구 연희동 연희입체교차로 부근에는 연희궁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종이 왕위를 물러난 뒤 일시 머물렀으며 세종은 그 8년(1426)에 이 궁에 옮겨 살다가 이듬해 3월 창덕궁으로 되돌아간 일도 있었다. 또 연산군은 그 11년(1505)에 창의문 밖에 탕춘대(蕩春臺)를 꾸미고 연희궁을 연회장소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 망원정터(望遠亭址)
마포구 망원동 137, 207-1 번지 일대 양화나루 서쪽 언덕에 있었다. 태종의 아들이며 세종의 형인 효녕대군이 세운 정자로 세종 6년(1424)에 건립되었다.
경치가 매우 좋아 중국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되었으나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 군자감터(軍資監址)
원효로 3가 1번지에 있었다. 군자감은 조선시대에 전국의 군전(軍田)으로부터 곡식을 받아들여서 군용으로 쓰기 위해 곡식을 비축하는 사무를 맡아보던 기관이었다. 군자감은 태조때 창건되었는데, 분감(分監은) 남대문 안에 두었고 용산강 북쪽에 강감(江監)을 두었다.
○ 새남터(沙南基)
용산역을 지나서 한강철교에 이르기 직전에 천주교도들이 세운 기념탑이 있다. 이 기념탑이 서 있는 부근 서부이촌동 일대는 조선시대 사형장이던 새남터였다. 고종 3년(1866)에 대원군에 의해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 한강진(漢江鎭)
한남동에는 조선시대의 한강진이 있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강상류에 송파진(松坡鎭)이 있었고, 하류에 양화진(楊花鎭), 그리고 중간에 한강진이 있었다. 이 진영들은 한강의 대안인 노량진(鷺梁鎭)과 개성의 남쪽인 임진도(臨津渡)와 함께 서울을 경비하는 5대 요지였다.
○ 제천정터(濟天亭址)
한남당과 보광동 사이 아래 기슭에는 조선시대의 제천정이 있었다. 제천정 터전의 정자는 모두 나라의 소유였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이 곳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 마포(麻浦, 삼개)
한강은 조선시대 중부지방의 수상교통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 부근의 한강은 5강(五江)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는데, 뚝섬·노량·용산·마포·양화진이 이에 해당된다.
이 중 마포, 즉 삼개는 오늘날 마포구 마포동 일대의 한강수역을 의미하며 용산과 양화진 사이에 있었다. 이 곳 마포에는 삼남지방의 곡식을 비롯하여 서해안에서 들어오는 소금과 어물 등이 집적되었다. 또한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李之 )이 이 지역에서 움막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주변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유명하였다.
3. 유명인물이 살던 곳
○ 세종이 탄생한 곳
현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 일대이다. 1956년 12월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와 한글학회가 공동으로 이곳을 답사하여 고증하였다.
○ 효녕대군(孝寧大君)의 주택지
효녕대군의 저택은 현 종로구 부암동 329번지의 4호이다. 옛 인왕산 아래 무계동(武溪洞)에 있었다. 이곳은 비해당(匪懈堂)이 있었다.
○ 인원왕후(仁元王后)가 탄생한 곳
종로구 궁정동 1번지 대은암(大隱岩)이 있는 부근은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가 태어난 곳이다.
○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태어난 곳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중앙일보사 사옥 맞은편 순화빌딩의 주차장 터이다. 인현왕후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 15세 때 숙종의 계비가 되었는데 20세까지 왕자를 낳지 못해 숙종에게 장희빈(張禧嬪)을 후궁으로 천거하였으나 장희빈의 모함으로 6년동안 안국동 감고당(感古堂)에서 칩거하였다.
○ 조대비(趙大妃)가 태어난 곳
성동구 옥수동 295번지 옥정초등학교 뒤쪽에는 헌종의 모후(母后)인 조대비의 생가가 있었다.
○ 강감찬(姜邯贊)장군이 태어난 곳
관악구 봉천동 218번지로 지금 낙성대공원 북쪽으로 약 100m되는 지점이다. 강감찬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40만 대군을 대파시켜 국위를 떨친 장군이다.
○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살던 곳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 마른내 일대이다. 이곳에는 서애 유성룡도 같이 살았다 한다.
○ 권율(權慄)장군이 살던 곳
서대문구 행림동 1번지 부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도원수(都元帥)였고 행주(幸州)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에겐 아들이 없었으므로 사위였던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에게 이 집터를 물려주었다.
○ 정도전(鄭道傳)의 집터
조선 개국 공신이었던 정도전의 옛집은 종로구 수송동 146번지(종로구청자리)였다. 태종에게 몰려 죽음을 당한 후에는 집을 헐고, 비단·포목·인삼·의복을 대궐에 납품하는 기관인 제용감(濟用監)과 말을 관리하고 사육하는 관청인 사복시(司僕寺)가 들어섰다.
○ 유관(柳寬)의 집터
종로구 창신동사거리 창신초등학교 골목 안의 우산각골(雨傘閣里)은 청백리(淸白吏)로서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이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하루는 비가 와서 지붕이 새고 있었으므로 방안에서 우산을 받치고 있던 유관이 부인에게 "우리는 우산이 있어서 비를 피하고 있지만 우산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낭패는 어찌 하겠소"라고 백성들을 걱정하였다 한다. 이 곳을 우산각골로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 성삼문(成三問)의 집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의 집은 종로구 화동 1번지(정독도서관 뒤)에 있었다. 집터에 비석이 있었으나 광복 이전에 없어졌다.
○ 권람(權擥)의 집터
세조 때의 문신 권람의 집은 지금 남산 1호터널 입구 서쪽에 위치하였다.
○ 김정희(金正喜)의 집터
종로구 통의동 7번지 창의궁(彰義宮) 자리였다. 김정희는 조선말기의 금석학자(金石學者)이며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 김종서(金宗瑞)의 집터
서대문구 충정로 1가와 의주로 1가 사이에 있었다.
○ 남이(南怡)장군의 집터
종로구 연건동 126번지에 있었다.
○ 맹사성(孟思誠)의 집터
종로구 정독도서관에서 가회동으로 넘어가는 삼청동 35-119 일대 맹현(孟峴)에 있었다. 조선초기에 청렴과 덕행으로 이름났던 맹사성은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공무가 끝나면 이 곳의 초라한 집으로 돌아갔다.
○ 정철(鄭澈)의 집터
종로구 청운동 123번지 청운초등학교 근처이다. 그는 조선조 시가사상(詩歌史上)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쌍벽을 이룬 시가문학의 거장이었다.
○ 조광조(趙光祖)의 집터
종로구 운니동 18번지 교동초등학교 부근이다.
중종 때의 유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사림파(士林派)의 영수이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고, 상소(上疏)하는 사람을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 이안눌(李安訥)의 집터
중구 필동 3가 동국대학교 내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에 수행하였고 청백리였다. 시문학(詩文學)의 대가였다.
○ 손순효(孫舜孝)의 집터
성종 때 우찬성(右贊成)을 지낸 청백리로 중구 명동 2가 1번지에 살았다. 그는 손님이 찾아오면 막걸리를 대접하였는데 항상 안주가 없었으므로 성종이 가끔 내시를 시켜 음식을 보내주곤 하였다.
○ 유성룡(柳成龍)의 집터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 부근이다. 이 부근을 옛날에는 마른내(乾川洞)라 하였다. 생민동(生民洞)에 흘러내리는 개천이 비가 내리지 않는 동안 항상 메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곳 앞길이 마른내길이다. 이곳에는 단종 때 김종서, 정인지, 선조 때의 원균, 이순신 등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 이덕형(李德馨)의 집터
용산구 도동(桃洞)과 동자동(東子洞) 경계의 송경재가 그곳이다. 현재 중구 남대문로5가 대우재단빌딩 자리이다. 그는 선조,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명망이 높았다.
○ 이율곡(李栗谷)의 집터
종로구 관훈동 197번지에 살았다. 태어나기는 강릉 외가였다. 이곳에는 그 후에 조선말기에 사동대신(寺洞大臣)으로 알려진 김병학(金炳學)의 대저택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이율곡은 이곳에서 4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 이지함(李之 )의 집터
지금의 마포대교 북쪽 입체교차로 유수지 옆이다. 고서(古書)인 {토정비결(土亭秘訣)}로 널리 알려진 이지함은 재산을 탐하지 않고 고결한 언행으로 일생을 마쳤다.
○ 이퇴계(李退溪)의 집터
중구 서소문동 57번지 일대 구 중앙일보사옥 건너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일대를 학다리골이라 하였는데, 당시에는 이곳이 서울의 명승지였다.
○ 정광필(鄭光弼)의 집터
중구 회현동 1가 14번지이다. 그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 옛터를 중심으로 그의 동래 정씨 후손들이 계속 살아왔으므로 회현동(會賢洞)이란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그는 연산군이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자 이를 간언하다가 귀양갔으나 중종반정으로 복귀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 송시열(宋時烈)의 집터
종로구 명륜동 1가 2번지이다. 그는 현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 양성지(梁誠之)의 집터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이다. 그는 성종 때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 이완(李浣)의 집터
종로구 인사동 222번지이다. 효종 때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추진했던 이완대장의 집을 그가 죽은지 20년후에 민종도(閔宗道)가 빼앗아 들어간 후에 심은 오얏나무의 열매가 맺지 않았다고 한다.
○ 김좌근(金左根)의 집터
종로구 경운동 66번지이다. 김좌근이 아들 병기(炳冀)와 함께 이 곳에서 세도정치를 하였는데, 이곳이 교동(校洞)의 일부였으므로 그를 교동대감으로 불렀다.
○ 김홍근(金興根)의 집터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태화관(泰和館)터이다. 그 뒤에는 이완용이 살기도 하였다. 김홍근은 철종실록을 편찬했고, 안동김씨의 배경으로 방자한 행동을 하다가 귀양가기도 하였다.
○ 윤선도(尹善道)의 집터
중구 명동 명동성당 부근이다. 이곳은 옛부터 명당터로 이름난 곳이었다. 윤선도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인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는데 그가 지은 시가(詩歌)는 뛰어나다.
○ 민영익(閔泳翊)의 집터
종로구 관훈동 198번지 18호이다. 그는 민승호(閔升鎬)의 아들로 미국전권대사,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원래 이 집터는 죽동궁(竹洞宮)으로 순조의 첫째 사위 김현근(金賢根)의 집이었다.
○ 민영환(閔泳煥)의 집터
종로구 견지동 27번지 2호이다. 그는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외부(外部)·학부(學部)·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을 역임하다가 광무 9년(1905) 을사조약이 맺어져 나라의 주권이 빼앗기자 자결하였다.
○ 박승종(朴承宗)의 집터
중구 예장동 2번지이다. 그는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냈다. 당시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키자 극력 반대한 의리있는 정치가였다.
○ 박영효(朴泳孝)의 집터
종로구 관훈동 30번지 1호 경인미술관 자리이다. 철종의 사위이다.
○ 김상옥(金相玉)의 집터
종로 5가 동대문 부근이다. 그는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후암동과 효제동에서 혈전을 전개하였다. 그의 묘는 국립묘지에 있다.
○ 김옥균(金玉均)의 집터
종로구 화동 106번지(전 경기고등학교 교정)이다. 그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했던 개화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