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생
김대영
4월 밝은 햇살을 받으며 전세버스를 타고 문학여행을 떠났다. 코로나19로 집안에서만 지내다가 3년 만에 오른 여행길이다. 처음 보는 선배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같은 길을 걷는 문우이기 때문이리라. 책 읽고 글쓰는 것도 수행이라면 우리는 모두 같은 도를 닦는 도반들이다.
대구를 벗어나자 멀고 가까운 산과 길가의 나무들이 연두색과 녹색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신동재를 지나고, 산과 강과 논밭과 산기슭의 집들이 봄볕 아래 어우러진 길을 달려서 청송군 진보면에 도착하였다. 진보, 내 운명을 바꾼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개학일에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북부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안동에서 내렸다. 아무런 생각 없이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해가 저물었다. 낙동강 모래밭에서 잠을 잤다. 늦여름 밤, 이름 모를 물새가 밤새 울고 있었다.
다음 날은 빵 몇 개와 물을 마시면서 하루종일 걸었다. 날이 저물고 어둠이 찾아들었을 때 임하 장터에 닿았다. 장터 평상에서 잠을 잤다. 교련복을 입고 어깨에 메던 가방을 베게 삼아 잠을 청했는데, 잠이 들려고 하면 모기가 앵앵거리며 달려들었다.
집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 몸은 나른하고 기운이 없었다. 길을 따라 계속 걷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배가 고파 길가에 있는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먹었다. 저녁 어스름이 찾아들 때 진보에 닿았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아이가 자고 가라고 호의를 베풀었다. 제대로 먹지 않고 이틀을 버틴 탓에 밤새 설사를 했다. 아침을 먹고 약국에 갔다. 약사가 ‘이정’이라고 하면서 약을 지어줬다. 신통하게도 설사가 멎었다.
문학여행 첫 행선지는 객주문학관이다. 문학관을 찾기는 통영의 박경리문학관에 이어 두 번째다. 김주영 작가가 청송군 진보면 출신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문학관 입구 담장에 보상과 부상을 표현한 부조가 있고, 주차장에서 전시관으로 향하는 길목에도 보상과 부상을 조각한 조형물이 있다.
객주문학관은 폐교된 진보제일고 건물을 증·개축한 4,640㎡ 규모의 3층 건물이다. 김주영 작가의 대표 소설인 <객주>를 중심으로 작가의 문학 세계를 담은 전시관, 도서관 등을 갖춘 연수관, 부속건물인 창작관과 다용도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주영 작가가 전시관 입구까지 직접 마중을 나왔다. 올해 84세라고 하는데 무척 정정한 모습이다. 연수관 2층 강연장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주제의 강연을 듣고, 집필실인 여송헌(與松軒)을 둘러보고 작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소파에 앉으신 작가 주위에서 단체로 기념 촬영을 하고 몇 명이 같이 찍었다. 작가는 단둘이 사진 찍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포즈를 취해주셨다. 친필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섰는데, 전혀 귀찮아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대작가의 소탈한 모습에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1, 2전시실을 관람하였다. 작가 소개, <객주>의 집필 배경과 내용, 보부상의 생활 모습이 그림과 글,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길 위의 작가, 김주영’이라는 문구였다.
<객주>는 정의감이 넘치는 천봉삼 등 보부상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조선 후기의 생활 모습을 세밀하게 담아낸 전 10권의 대하소설이다. 작가는 <객주>를 쓰기 위해 5년간 사료를 수집하고, 3년간 장터를 순례했으며, 200여 명을 취재하였다. 장터에서 사람을 만나고, 장터에서 글을 쓰고, 다 쓴 글을 신문사에 보내는 생활을 하느라 한 달에 열흘 정도 밖에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길 위의 작가’가 보부상들의 ‘길 위의 인생’을 엮은 것이 <객주>이다.
진보에 도착한 다음 날,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제법 규모가 큰 중국집에 ‘뽀이’로 취직하였다. 저녁때가 다되어 방에 잠시 누웠는데, 주인아저씨가 ‘게으른 놈에게는 밥을 줄 수 없다’면서 당장 나가라고 했다. 쫓겨난 개처럼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시가지 끝자락에 자리잡은 ‘OO반점’이라는 중국집에 취직하였다.
나보다 키가 작은 주인아저씨가 ‘꼬마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보름 정도 일했다. 진보장이 서는 날이면 짜장면과 짬뽕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서 무척 바빴다. 반점에서 일하던 마지막 날 커다란 접시 두 개를 깼다. 주인아저씨가 ‘네가 한 달간 일해도 접시 두 개를 사지 못한다’고 했다. 접시 깬 것이 미안해서 중국집을 나왔다.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밤은 깊어가고 길은 점점 산길로 변해갔다. 이렇게 계속 걷다가는 이름 모를 길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가 바위에 앉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기도가 통했는지 트럭 한 대가 멈추더니 타라고 했다. 영덕으로 가는 트럭이었다. 그날 밤은 트럭 기사의 집에서 잤다. 다음 날 트럭 기사가 하양까지 태워주었다. 이십 리 길을 걸어서 고향 집에 도착했다.
다음 행선지에 가기 위해 전시관을 나왔다. 전시관과 연수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사과 조형물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작가는 글을 쓰겠다는 까마득한 후배들이 기특해 보였는지 임원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차장까지 걸어왔다. 조금은 더워지는 청송의 맑은 공기와 그림 같은 정원을 갖춘 객주문학관, 살아있는 전설이라 부를 수 있는 작가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는 다시 길 위로 나왔다.
김주영 작가는 16살 때, 공부하기 위해 진보에서 대구로 왔다. 나는 16살 때, 공부를 그만두기 위해 대구에서 진보로 갔다. 김주영 작가는 후세에 길이 남을 소설을 쓰기 위해 길을 걸었다. 나는 농사를 짓겠다는 허황된 생각으로 길을 걸었다. 진보에서 태어난 김주영 작가가 장터에서 장터로 걸어간 길은 성공의 길이었고, 학교를 그만두기 위해 안동에서 진보까지 걸어간 나의 길은 방황의 시작을 알리는 길이었다.
우리는 모두 인생길을 걷는다. 목표를 정하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생이 있고, 아무런 생각 없이 이리저리 걷다가 엉뚱한 곳에서 살아가는 인생도 있다. 아예 길을 걸을 생각 없이 한 곳에 주저앉아 지내는 인생도 있다. 나에게는 아직도 남은 인생길이 있다. 나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