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ergman (한국명: 박우만) 선교사의 생애
Bergman, Gerda O(한국명: 박우만)선교사의 생몰연도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는
1915년에 내한하여 대구선교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며 6·25사변 직후인 1950년 7월부터
1952년 1월까지 일본으로 건너가 토오쿄오 대학생들에게 영어성서를 가르치는 한편 요코스카
와 카와사키에서 전도사업에도 참여했다. 1952년 한국에서 은퇴하였으며 1959년 당시 일본
하마마츠에 거주하였다.
2. 헌신적인 복음 전도
한국에 최초로 들어온 여선교사인 스크랜톤여사를 시초로 하여 그 후 많은 여선교사들이 낮선 땅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15년 박우만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의 삶에 대한 많은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한국 땅의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헌신했던 삶과, 그로 인해서 맺어진 신앙의 유산들을 볼 수 있다. 예로 박우만 선교사를 따라 다니면서 전도부인을 하였던 박성희 권사(1899년생)의 신앙의 모습과 더불어 그의 증언을 통해서 박우만 선교사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볼 수 있다.
박성희 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박우만 선교사가 얼마나 주의 일에 엄격하게 충실하였으며, 오직 전도 사업만을 위해서 검소함과 헌신적인 복음 전도의 삶을 살았는가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박우만 선교사가 얼마나 헌신하며 검소한 삶을 살았는지 그것을 본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 진실을 알 수 없다고 증언하였다. 여성 혼자 이 멀고도 낯선 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개인적인 희생과 헌신을 전제로 하고 왔겠지만 그러나 그 희생은 너무나도 혹독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수고가 더욱 값지고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자신을 낮추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이 땅에 묻었으며 자신들의 자유와 행복을 우리를 위하여 다 바쳤던 것이다.
3. 한 영혼을 위한 섬김
박우만 선교사는 대구의 사역당시에 여성지도자이자, 순국열사였던 김마리아와도 신앙적인 관계를 맺어가고 있었다. 그는 김마리아가 1930년대 중반 이후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선 계기로 인해서 일제치하에 수감되어 병고의 생활을 하던 중 미국 선교사 방해법, 방해리, 어도만 박사등과 함께 매 주일 감옥을 찾아가서 예배를 보아 주고 갔다. 박우만 선교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그의 업적이나 생애에 대한 장황한 기록은 없으나, 그가 묵묵히 그리고 끊임없이 그의 복음의 씨앗을 심고, 영혼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안에 한 영혼을 위한 사랑과 열정이 담겨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4. 경북 최초의 여전도회 조직을 설립
1911년 3월 15일 대구 남문안교회(현 제일교회)에서 박우만(Gerda O.Bergman)선교 사의 후원으로 경북 최초의 여전도회 조직을 보게 되었고, 27) 1925년에 이르러서는 역시 박우만 선교사의 후원으로 경북 여전도회 연합회로까지 발전하였다, 전국적인 조직은 1928년 9월 9일 대구신정교회(현 서문교회)에서 조직되어 여성도들의 상호 친목, 신앙, 운동, 개인전도 장려 및 농촌교회 원조, 해외선교사 파송 등의 사업을 하였다. 여전도회는 남전도회와는 달리 일제의 주목을 비교적 적게 받았기 때문에 교회 안 에서의 이들 여전도회의 활동과 봉사는 교회에 큰 활력소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우리 교회 여전도회도 그 무렵에, 교회 봉사와 전도 사업, 연합 사업에 적극 참여했으며, 1939년 2월 24일(금) 오전 10시 반에는 세계부인기도회 순서에 의해 대구 시 내 부인 연합 기도회를 우리 교회에서 모여 기도에 힘썼다. 또한 박우만 선교사는 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와 전도에도 끊임없이 힘썼고, 또한 여성의 교육 활동에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육활동에도 참여하여 지도하였는데, 1918. 07. 22일 제 12대 신명여자고등학교 교장인 Harriet E. Pollard 교장의 1차 안식년으로 인해서 박우만 Gerda O. Bergman 선교사가 1년간 임시교장 취임하고 학생들을 맡아서 지도하였으며, 또한 1925년 8월 1일 교장인 Harriet E. Pollard 교장의 2차 안식년으로 인해서 박우만 Gerda O. Bergman 선교사가 두 번에 걸쳐서 임시교장 취임하고 학생들을 맡아서 지도하였다.
또한 그는 민족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그가 만났고 복음을 전했던 자들 중에 당시에 1930년대 중반 이후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선 계기로 인해서 일제치하에 수감되어 병고의 생활을 하던 여성 지도자이자, 순국열사였던 김마리아와도 신앙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는 수감 중에 있던 그에게 미국 선교사 방해법, 방해리, 어도만 박사등과 함께 매 주일 감옥을 찾아가서 예배를 보아 주고 갔다. 또한 그가 Harriet E. Pollard 교장의 1차 안식년으로 Gerda O. Bergman(박우만朴禹萬) 선교사가 1년간 임시교장 취임했던 그 시기에 1919. 03. 08년에 이재인 선생 지도 아래 전교생이 대구 3ㆍ8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생들을 지도할 무렵 그 또한 일제치하에서 핍박받던 민족을 향한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독려하였던 지도자였음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