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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과 40년
김 광 수
장모님과 함께 산지가 이제 40년이 훌쩍 넘었다. 결혼하고 일 년이 채 가기 전에 합가를 하고 지금까지 한집에서 살아왔으니 그동안의 사연들, 한 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합가를 한 사연은 이러하다. 어머니가 결혼 예정일 두 달을 앞두고 뇌일혈로 쓰러져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제 한번 편히 모셔보겠다는 이 자식의 간절한 소망을 뒤로 한 채 53세의 나이로 홀연히 하늘나라도 가셨다. 그때 나는 32살, 아내는 24살이었다. 처가 쪽도 장인이 먼저 돌아가셨고, 장모님이 어렵게 세 딸을 키우셨는데, 아내는 장녀였다. 이제 양가 부모 중 장모님만 남으셨다.
아내와 나는 고민했다. 우리는 부산에서, 나는 보험회사에, 아내는 은행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때 미혼인 여성이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결혼으로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자 처가 쪽에 당장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다. 장모님은 재래사장에서 속옷 가게를 하셨는데, 장사가 여의치 않았고, 대학생, 고등학생인 두 처제의 학비 조달에 당장 비상이 걸렸다. 나도 도움을 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고심 끝에 첫아이 출산을 앞두고 합가를 결정했다. 그리고 아내가 다른 수입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장모님과 한집 생활이 어언 40년이 지났다.
“아니 오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한 번 의논이라도 했어야죠.” 합가 직후, 여동생의 거친 항의를 받았다. 나는 당장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했다. 홀로 삼남매를 키우며 고생하신 어머니, 막내인 남동생은 초등생 때 파상풍으로 잃었고, 이심전심으로 의좋게 역경을 헤쳐 오며 다정하게 살아온 우리 남매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의지할 사람은 오빠 밖에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 오빠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합가’, 그것도 어느 모로 보아도 득 될 거 같지 않고, 또 처제를 둘이나 동반한 합가를 결행했으니… 여동생의 입장에서 이해가 되지 않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양가가 처한 현실에서 불가피한 선택라고 판단했으므로 동생과의 사전 의논을 피했다. 동생의 반대는 불을 보듯 확실하고, 동생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결행할 때 그 후유증은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은 먼저 결혼해 해운대에 있는 같은 아파트 단지의 옆 동에 살고 있었다. “오빠가 결혼하고 사람이 변했다” 여동생은 여러 번 그렇게 말했다. 그랬지만, 나의 여동생에 대한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아내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다를 뿐이지 어느 한 쪽을 사랑한다고 다른 한 쪽을 꼭 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오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겠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지 하고 속으로 다짐을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여동생이 시어머니 역을 자처하고 나서며 이틀이 멀다하고 와서 집안일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여동생은 손아래 시누이지만 아내보다 여섯 살이 많은 인생 선배이고 또 결혼 선배이다. 한두 달 시시콜콜 간섭이 계속되자 이번에는 아내가 못 견디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옆에서 그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장모님의 마음은 아마 아내보다 훨씬 불편했을 것이다. 내가 퇴근하면 그때도 잔소리가 계속되고 있는 때도 있었다. 여동생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상태를 더 방치하면 집안이 절단날 것 같았다. 나는 고민 했다. 이 상태를 지속해서는 안 되겠다. 내가 이 집안의 가장이다. 나는 단호하게 동생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간섭하지 마라. 죽이든 밥이든 우리 집안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 한다”
그 후 동생의 더 이상 간섭은 없었지만, 오빠에 대한 실망, 한없는 상실감으로 많은 괴로움을 겪었을 것이다. 명절 때나 때때로 만나는 기회가 있으면 끝날 때쯤이면 어김없이 나와 아내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꾹 참고 듣기를 수십 번은 더 했을 것이다. 언젠가 전화 통화를 하다 참다참다 안 되겠다 싶어 나도 크게 화를 내며 그동안 참아왔던 말들을 쏟아냈다. 20년, 30년이 지나서야 어느 정도 부드러운 관계를 회복했다. 더 이상 나에게 옛날의 서운함을 말하는 일은 없어졌다. 십 수 년 전부터는 건강을 걱정하고, 정을 나누고 마음 편히 잘 지내고 있다. 나는 때때로 미사 때 영성체 후 시간에 동생과 매제를 위해 기도를 한다.
장모님과 광고 쪽지
출근하기 전, “오늘, 금요일, (10시 미사), 요셉대”, 검은 글자가 선명한 흰 쪽지를 장모님이 기도하시는 책꽂이 앞에 붙인다. 다시 확인한다. “어머님, 오늘 금요일 미사 아시죠?” 그리고 나는 출근을 서두른다. 장모님과 함께 산지가 40년을 넘으며, 나도 이제 칠십 중반에 가까워졌다. 지난 몇 년을 아내의 취업으로 가정 경제를 꾸리며, 나는 필생의 책을 쓴다며 집에서 공부와 집필에 전념했다. 다시 지난해부터 안 되겠다 싶어 어렵게 직장을 구해 출근하게 되면서 새로 생긴 나의 일과이다.
장모님은 이제 팔십 중반이시고 거동이 불편해진지는 십 수 년이 되었지만, 몇 해 전부터는 기억력이 급속히 떨어지셨다. 스마트폰 전화 받기는 가능하다가 그것도 어려워진지가 한참 되었다. 이제 가스렌지 사용도, 전자렌지 사용도 어렵다. 20년 정도 사용한 세탁기 탈수는 아직 가능하다. 이제 아무리 해도 새로운 것은 기억이나 입력이 안 된다. 그렇다고 치매 증상으로 가지 않으니 천만다행이다.
장모님의 지상과제는 성당 미사에 가시는 것인데,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 알아야 한다. 달력이 있으면 해결될 것 같지만 아무리 달력이 벽에 버젓이 걸려 있어도 오늘이 며칠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해결책은 전에 쓰다 팽개쳐둔 구형 덮개폰이었다. 덮개를 열면 날짜와 요일이 나오는데, 충전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아내의 새벽 출근에 이어 나까지 출근하게 되면서 덮개폰을 보고 오늘 성당 가는 날인줄 기억했지만 정작 미사 시간이 가까워도 다시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해 미사에 가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광고 쪽지’였다. 장모님이 가장 잘 볼 수 있고, 눈길이 많이 가고, 꼭 눈길이 가야 하는 곳에 이 광고지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장모님의 지상명제는 미사참례이다. “오늘은 힘들어 미사 가지 못하겠구나” 하시다가도 미사 시간이 가까워지면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거의 빠지지 않고 준비를 서두르신다. 때로는 말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장모님께, ‘가시고 싶으시면 가시라’고 맡기고 있다. 특별히 신나는 외출이고 그나마 걸을 수 있는 운동일 뿐만 아니라 장모님을 지탱하고 있는 삶의 의미, 보람, 희망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 광고지는 식탁 위에 올려졌다. 하루 세 번 드시는 약통 옆, 큼직한 오렌지색 도자기 커피 잔 아래 흰 광고 쪽지는 놓여졌다. “오늘, 금요일, (10시 미사), 요셉대” 식후 커피나 약을 드시면서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이다. 이 위치 선택의 효과는 반년 정도 지속되었다. 그런데 기억력이 더 떨어지셨는지 어느 날부터 이 쪽지를 보지 못해 성당에 가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쪽지는 다시 종일 성경 읽고 기도하신다고 앉아계시는 책꽂이 앞으로 옮겨졌다. 현재까지 그 효과는 지속되고 있지만 약간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번 연속 붙이다 보니 스카치태프 접착력이 약해져 떨어지는 바람에 어느 날 미사에 불참하게 된 것이다. 매일 새 스카지태프로 갈면서 같은 사고는 아직은 더 발생하지 않고 있다.
이 광고 쪽지를 만들면서 광고 기법에 때한 조그만 통찰을 덤으로 얻었다. 첫째는 어떻게 해야 눈에 잘 띌까? 하는 것이다. 둘째, 소비자에 맞추어야 한다. 장모님께는 한 줄에 많은 글자가 들어가면 한 눈에 읽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앞의 광고는 네 줄에 걸쳐 배치되었다. 셋째, 식별이 잘 되게 괄호를 적절히 활용한다.
“오늘 / 금요일 / (10시 미사) / 요셉대” 그렇게 장모님께 네 줄 맞춤 광고가 만들어졌고 효과는 좋았다. 괄호를 잘 넣으면 구별과 가독력이 아주 높아진다는 사실, 나는 다른 곳에서도 이 기법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장모님 눈에 번쩍 띄는 내용인 “10시 미사”는 괄호 안에 있다.
몇 년 전 성당 마당에서 성전으로 오르는 계단 난간을 잡고 불편한 자세로 아슬아슬하게 오르고 있는 장모님이 얼마나 불안했던지 몇 신자에게서 무책임하게 저렇게 혼자 다니시게 한다고 질책 같은 충고를 듣기도 했다. 나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골프 선수가 필드에서 퍼팅을 하다 쓰러져 죽은 것이 소원일 수 있고, 어떤 예술가는 작업장에서 혼신의 노력을 쏟다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란다면, 장모님도 그와 같을 것이다. 미사 가시는 길에 쓰러져 하늘나라로 바로 가신다고, 그것은 하등 겁낼 일이 아니라고…
죽을 뻔 한 사건
장모님은 결혼 때만 해도 사십대이셨다. 지금처럼 거동이 불편하게 나빠지신 것은 결혼 몇 년 후에 있었던 죽을 뻔 했던 사건의 영향 때문이다. 처음은 감기 같아 일주일 정도 동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상태가 심상찮아 큰 처제가 간호사로 있는 부산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다. 뇌막염이란 진단을 받고 며칠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처제로부터 위독하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내가 병실로 달려갔을 때는 의사가 목을 절개한 후 긴급 호흡 장치를 달고 중환자실로 급히 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간절한 기도가 나왔다. “주님, 일찍 남편을 여의고, 세 딸을 기르며 고생하신 우리 장모님, 살려주세요!”
중환자실로 갈 때 인사불성이 되셨다. 그날부터 처제와 나는 교대로 중환자실에서 간병을 시작했다. 국립병원이고 엄격했지만 그때만 해도 조금은 융통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처제가 간호사로 있어 특별 배려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중환자실에서 장모님을 밤낮으로 돌볼 수 있었다. 옆 자리는 하루가 멀다고 죽어서 나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모님 목에 가래를 쉬지 않고 제거하는 것이었다. 당직 간호사 말은 이삼십 분에 한 번 정도 제거하면 된다고 했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장모님… 가르륵, 가르륵…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가래는 목구멍을 막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렇게 3분만 숨이 막히면 금세 돌아가실 것 같아 나는 부지런히 흡착 기구로 가래를 뽑아냈다. 5일이 지나 장모님은 기적적(?)으로 되살아 나셨다.
5일 간의 인사불성으로 장모님은 후유증을 얻었다. 시신경의 일부가 죽어 앞을 바라볼 때 벽을 세워 놓은 것처럼 왼쪽이 깡그리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정면에서 왼쪽으로 15도 정도의 위치에 전봇대가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증상은 세월이 지나면서 좀 완화되기는 했지만 장모님이 겪어야 할 많은 사고를 가져왔다.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넘어짐 사고들
장모님의 시야 한 쪽이 절벽처럼 가려지는 후유증은 각종 사고들을 불러 왔는데, 초기는 벽이나 전봇대와 부딪치는 사고였다. 택시와의 충돌도 한두 번 있었지만 큰 사고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연례행사처럼 가장 많은 사고는 미끄러짐과 넘어짐 사고였다. 빙판이나 눈길에 미끄러진 횟수는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겨울이 오면 가슴조리며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냈다. 아파트 주변의 빙판도 여러 가지이다. 물이 고여 언 빙판, 눈이 밟혀 만들어진 빙판, 얼음이 녹다 다시 언 빙판, 겨울 내 흙이 덮어 있다 이른 봄에 슬쩍 나타나는 빙판. 내가 퇴근 때 이 빙판을 발견하고 설마하고 지나쳤다 다음날 장모님이 결국 당하셨다.
돌맹이나 보도블럭에 걸려 넘어지거나 야시장을 밝힌 전기줄에 걸려 넘어짐도 있었다. 한 번은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저녁 미사에 급히 가시다 입고 계신 긴 치마를 밟아 넘어져 다치기도 하셨다. 언쩬가 둘째딸, 큰 처제 집에 갔다 부산역 앞 지하도에서 고인 물에 미끄러져 큰 대자로 나가떨어지셨는데 뇌진탕 일어날만한 큰 충격을 받으셨다. 시리즈처럼 떠오르는 장모님의 미끄러짐 사고들…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이처럼 다양한 미끄럼 사고 횟수들이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장모님이 부엌 밖 베란다에 폐기름을 그릇에 모았는데, 저녁 무렵 베란다로 나가시다 살짝 미끄러지면서 기름 그릇이 쏟아졌고 엉겁결에 장모님은 브라인드 커텐 줄을 잡았는데 몸은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고 바닥에 쏟아진 기름은 더욱 회전을 지속하게 해 수 분 동안 줄을 잡고 곡예를 하셨다고 했다. 그날 저녁 가족들은 웃음도 울음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장모님의 넘어지지 않으신 그 투혼을 높이 평가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모님의 거동을 결정적으로 어렵게 한 추락 사고가 발생했다. 이제 연세도 있고 집안일만 해도 벅차니 장지까지는 가시지 말라는 충고를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날 장례미사 후 용인 공원묘지까지 동행을 하셨다. 하관이 시작될 무렵 교우들이 관 주위로 모이면서 장모님은 퍼 올린 흙더미 위에 올랐는데 그 흙이 아래로 밀리면서 장모님은 중심을 잃고 축대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아래 비석 위에 떨어졌다면 아마 허리가 두 동강이 날 높이였다. 오늘 장례를 두 번 치르지 않나 하는 위급 상황이 발생했고, 장모님은 급거 후송되셨다. 척추 아래 부분이 조금 어긋나는 정도의 부상을 입으셔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큰 수술은 받지 않고 회복은 되셨지만 그 후유증은 자세가 바르지 않고 자주 통증이 있고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최대의 갈등
장모님이 척추를 다치시고, 일흔을 넘기시면서 기력도 많이 약해지셨다. 수십 년을 함께 살다보니 장모님의 몸 상태나 건강관리에 대해 나는 거의 도가 통했다고 할까. 집안일을 과하게 하시면 몸살이 나셨고, 또 기도를 지나치게 하셔도 몸살이 나셨다. 몸살이 나면 현관문에서 방문까지도 기어서 이동을 해야 했고, 몇 번은 이제 돌아가시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최대 과제는 어떻게 장모님의 과로를 막느냐에 모아졌다.
첫째는 설거지를 못하시게 막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하고 선언을 했지만 장모님은 기회만 나면 싱크대 앞에 있었다. 평생 몸에 밴 습관이 하루아침에 고쳐지랴. 나는 장모님 손에 낀 고무장갑을 강제로 벗겼다. 아마 이러기를 수십 번도 더 했다. 처음 몇 번은 부드럽게 벗겼지만 나는 화가 나 점점 거칠게 벗기게 되었고, 말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한 3년을 다투고 나니 조금은 나아졌다. 내가 집에 있을 때는 그러지 않지만 집만 비웠다하면 그동안 못할 일까지 찾아내 하셨다.
둘째는 빨래였다. 장모님 자신의 손수건이나 내의 정도 손빨래 하시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세탁기 바구니에 담아 놓은 빨래까지 손빨래를 하시려고 해서 미리 세탁기를 돌려 버리기도 했다. 언젠가 몸살이 나셨는데 나는 그 원인이 빨래라고 생각하고 “어머님 죽고 싶으세요?”하고 따졌다. 지난 번 설거지까지 들먹이며 장모님을 마구 몰아세웠다. 내가 너무 심했던 모양이다.
아내에게 내가 장모님을 미워한다고 하신다는 것이었다. 내일 나가신다면서 차비를 요구한다는 거였다. 아내도 병이 나든지 말든지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나를 원망하는 말투였다. 싸우다 지친 나는 나가서 둘째 딸 집으로 가시든지 정말 차비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났다. 그러다 곰곰 생각하니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가까스로 장모님의 가출은 봉합이 되었다. 그러면서 수 년 동안 장모님을 일 못하시게 싸우듯이 말리면서 나의 태도도 불손해졌고 말투도 많이 거칠어졌음을 돌아보며 반성했다.
치매로 가지 않는 이유
매주 금요일은 성당에서 10시 미사 후 노인대학인 요셉대가 열리는 날이다. 요셉대에서는 노래반, 요가반, 웃음반, 스마트폰 반 등을 운영한다. 몇 년 전 노인들의 감성을 기른다고 ‘추억의 명화’를 상영한 적이 있었다. 요셉대 운영진들은 학생들이 좋아할 거고 이 프로그램이 아주 성공적일 거라고 조금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 실패였다. 첫 영화는 “그대를 사랑합니다”였다. 둘째 편은 그 당시 천만 관객이 몰린 ‘변호인’이었다. 첫 영화는 시작 때 50여명이던 학생이 끝날 때는 고작 5명만 남았고, 둘째 번 영화는 마지막에 3명이 남았다 세 번 째 영화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는 마지막에 한 명의 학생만 남았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그 세 편에 마지막까지 남은 학생 중에 장모님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다른 노인 학생들이 재미없다고 도중에 자리를 뜨는 그 영화들을 장모님은 끝까지 볼 수 있었을까? 한동안 나의 숙제였는데, 한참 후에 나는 그 답을 찾았다. 장모님이 앉아서 기도만 하시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두꺼운 ‘주석성서’를 읽고 계셨다. 깨알 같은 주석이 있는 그 성서는 깊이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장모님은 밑줄까지 그으시며 한 두 줄을 음미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그 한두 줄의 의미가 나름대로 이해가 되시니까 읽으시는 거다. 영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해가 되니까 끝까지 보실 수 있는 거다.
장모님은 오래 전 시신경의 일부를 잃었고, 즉각 기억력 등 기억력 감퇴가 심하고, 거동이 불편해 활동도 제대로 못하신다. 운동은 가까운 성당에 전에는 지팡이, 지금은 가트에 의지해 가까스로 다니시는 게 전부다. 치매로 진행될 여러 조건을 갖고 있으면서 몇 차례 돌아가실 위기를 맞으면서도 오늘도 성당에 다닐 수 있는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 힘이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서, 기도서 등 내용을 음미하는 글을 매일매일 읽는 활발한 두뇌 활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뇌가 일부 손상되었지만 다른 활발한 두뇌 활동이 그 결손을 메우기 때문에 결정적 악화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의 기도
수년 전, 장모님을 큰 처제가 모셔가 한 달 정도 부산에 갔다 온 일이 있었다. 그 때도 아내는 새벽 출근을 했고, 장모님 식사 수발 등에서 해방되었다. 장모님과 함께 하는 식사는 항상 국이 있어야 했으므로, 나는 된장국, 콩나물국, 감자국에는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반찬도 기본적으로는 아내가 만들어 두지만 장모님을 위해 이것저것 챙기다 보면 제법 구색을 갖추어 먹게 된다. 며칠 지나면서 국도 귀찮다고 끓이지 않고 반찬도 챙기지 않다보니 식사가 부실해졌다. 그리고 식사 시간도 불규칙해졌다. 장모님을 모시고 있는 게 꼭 귀찮은 일 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 년 전, 장모님이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않으시더니 인사불성이 되셨다. 가장 큰 문제가 대소변을 처리하는 문제다. 아무리 수십 년을 같이 산 사위이지만 대소변을 처리한다고 신체의 은밀한 부위를 손대기는 쉽지 않았다. 요실금 기저귀가 해결책이었다. 출근한 아내가 저녁에 돌아와 갈아주면 내가 크게 곤란한 일은 넘길 수 있었다. 이제 하늘나라로 가실 때가 된 모양인가… 부산에 있는 처제에게도 연락하고 수십 년 전 계약해둔 양산 공원묘지 계약서도 꺼내보고, 자주 다니는 내과의사를 만나 사망진단서도 의논했다.
인사불성 삼 일째, 나도 모르게 간절한 기도가 나왔다. “주님, 장모님을 언제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대소변만 혼자 처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며칠이 지나 장모님은 일어나셨고 오늘까지 성당에는 혼자 다녀오신다. 수십 년 전,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급히 이송될 때 “우리 장모님을 살려 주세요!” 한 나의 기도는 응답 받아 수십 년을 더 사셨다. 이번의 나의 기도도 응답 받았다. “주님 고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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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광수선배님
신앙심이 대단하십니다.
장모님과 40년 어려운 일이실텐데
대단하십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남기항님, 고맙습이다.
결혼 2달 앞두고 어머님이 갑짜기 돌아가시고,
양가 부모님은 장모님만 남으시고... 고심 끝에 처제들과 함께 한집안으로 꾸렸지요.
애들 태어나고 기르는 동안 장모님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지요.
이제 그 큰 노고를 갚아가는 중이지요.
늘 건강히시고 귀국하는 기회가 있으면 꼭 연락주세요.
아직은 소주 한 병은 거뜬히 마실 수 있어요 ~~~
金형^
일부나마 가족사를
알게 되었네요^
대단하십니다^
부모님을
모시면서 일어나는
大小事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서
남기항사장을 보는구요^
건강하시고
다복하시라 믿으요^
나는
고향 永同에 오르내며
작은
農夫로 지나고 있다오^
오랫만입니다.!!!
이렇게 카페에서 만나니
기분이 새롭습니다..
오늘 산우회 수원 화성 둘레길 번개팅에
오시는지요?
마음 비우고
농부로 살아가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만나면
언재나
대화가 풍부하고
즐거운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