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질문은 왜 의심해야 하는가?― 홍대용의 『소학문의』가 AI 시대에 던지는 교육의 질문
지난 글에서 『소학』은 지식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책이라고 이야기했다. 퇴계는 『소학』에서 마음을 세우는 공부를 보았고, 율곡은 삶으로 이어지는 실천의 출발을 찾았으며, 송시열은 『소학』을 평생 강론하며 "배운 것을 살아내는 일"을 교육의 본질로 삼았다.
그렇다면 『소학』은 완전한 책이었을까.
18세기 실학자 홍대용은 이 질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기보다 먼저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런가?"
그가 남긴 『소학문의(小學問疑)』는 제목부터 특별하다.
'문의(問疑)'란 '의심을 묻는다'는 뜻이다. 이미 정답으로 받아들여진 내용을 다시 질문하고, 그 의미를 스스로 따져 묻겠다는 선언이다. 이것은 권위를 부정하기 위한 반항이 아니라, 배움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학자의 태도였다.
홍대용은 『소학』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소학』를 더 진지하게 읽었다.
그는 형식적인 예절과 암기 중심의 학습이 교육의 본래 목적을 가릴 수 있다고 보았다. 덕은 글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하며, 배움은 현실 세계를 이해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육예(六藝)를 다시 주목했다.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이 여섯 가지는 단순한 교과목이 아니다. 몸과 마음, 지성과 기술을 함께 기르는 전인교육의 틀이었다. 홍대용은 배움이 책상 위에서 끝나지 않고 생활과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오늘날 AI 시대에도 낯설지 않다.
생성형 AI는 질문을 받으면 그럴듯한 답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답이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지,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 사회적 맥락에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사용자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홍대용의 '문의' 정신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좋은 학습자는 정답을 가장 빨리 찾는 사람이 아니다.
정답을 다시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오늘날 학교는 학생들에게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고자 한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은 학습자가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탐구하고 판단하며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가 되기를 기대한다. AI 리터러시 역시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 AI의 답을 그대로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출처를 확인하고 근거를 비교하며 자신의 판단을 형성하는 능력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교육학에서도 이어진다. 교육학자 Lee S. Shulman은 교사의 전문성이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이해하고 질문하도록 돕는 교수내용지식(PCK)에 있다고 설명했다. 교사는 답을 알려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사고를 확장하도록 이끄는 전문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홍대용이 강조한 '묻는 공부'와도 맞닿아 있다.
홍대용은 『소학문의』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 준다. 질문은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은 이해를 더욱 깊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AI는 앞으로도 더 많은 답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답을 소비하는 사람을 기르는 일이 아니다.
답을 다시 묻고, 근거를 살피며, 더 나은 이해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을 기르는 일이다.
홍대용이 『소학』을 읽으며 던진 "왜?"라는 물음은 250년이 지난 오늘, 생성형 AI 앞에 선 우리에게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교육의 질문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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