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창군사에서 임술년농민항쟁...1997년. 조익현.
1862년 3월 21일, 봉기 우두머리----이시규(李時奎), 최남규(崔南奎), 이승문(李承文)
최남규__본관 흥해, 서면 세평촌에 살았고, 나이는 쉰셋.
이승문—본관 벽진, 동면 갈지촌에 살았고, 나이는 마흔 여듧이었다.
이시규—본관 서산.
이 항쟁에는 나뭇꾼들로 짜인 군인들이 중심—초군(樵軍)
농민군은 읍내 근처에 모여 이교(지방관청에 소속된 서리, 장교, 관노, 사령)의 집을 공격하여 16채를 불살았다. 이어서 관아로 쳐들어가 부세창고, 부세장부를 부수고 불살랐다.
부사 황종석은 거창농민봉기의 소식을 듣고는, 대구감영에 휴가를 얻어서, 거창은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서울로 도망쳤다. 읍권은 자연히 농민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거창농민봉기가 있은지 50여일 만인 5월 10일, 중앙에서 파견한 선무사 이참현이 거창에 다다랐다. 이에 농민들은 通文을 돌려, 다음 날이 읍내 장시일인 것을 이용하여 다시 모이자고 연락하였다. 삼반관속이 두려워서 도망하였고, 여기서 한 명이 용기를 내어 이 사실을 이참현에게 알려주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참현은 형식적인 효유 절차를 마친 뒤 서둘러 읍내를 빠져나가 성주로 향하였다. 加祚倉에서 점심식사를 할 무렵 5-6백명 정도의 농민들이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읍내 장시에 모였던 이들은 이참현이 빠져나간 것을 뒤늦게 알고, 살피재를 넘어 40여리 길을 뒤쫓아 왔던 것이다. 농민들은 결전 깍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강력하게 요구..그러나 이참현은 위급한 사태를 모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거창항쟁이 중앙에 알려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부사 황종석이 바로 서울로 도망치고서도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아서였다. 거창항쟁은 5월 28일, 감사 이돈영의 장계로 비로소 중앙에 알려지게 되었다. 즉시 황종석은 파면되었고, 주모자들은 先斬後啓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감영에서는 포졸을 풀어 주모자들을 체포하였다. 이시규, 최남규, 이승문 등이 잡혔다.
이 때 암행어사 이인명이, 거창에 들어와 이들에게 한 차례 형벌을 주었다. 그리고 중앙정부에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리려고 대구부로 압송하였다. 농민들은 읍내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압송하는 중도에 호송행차를 습격하였다. 그들은 호송장교를 때려 쫓아 버리고, 주모자들을 구출하여 사라져 버렸다. 이인명은 곧 각 진영에 포졸을 풀었으나 이들을 잡지 못하자 급히 감사, 병사에게 명령을 내려, 하루바삐 체포하여 목을 베라고 일렀다. 그리고 아직 항쟁의 열기가 식지 않은 것을 우려하여, 거창의 吏胥들을 처벌하였다. 이서 중 愼在文은 6천여 섬을, 章福榮은 2,500여섬을 제멋대로 쓰고서 그 이자를 해마다 농민들에게 거둬들이고 있었다.
이인명은 이들을 잡아들여 큰 벌을 준 뒤 대구부로 압송하였는데, 신재문은 도중에 도망하였다. 다시 그를 체포한 이인명은 중앙에 보고도 하지 않고, 진주 진영에 옮겨다가 곤장을 때려죽이고 말았다.
그는 중앙에 올라가, 7월 5일, 書啓와 別單을 올렸다. 여기에 따라 부사 황종석은 의금부에 체포당하여 심문을 받은 뒤, 곤장 1 백 대를 맞고, 상주목으로 정배당하였다.
한편 우병영에서는 이인명의 명령에 따라 교졸을 풀어 추적하여 겨우 최남규와 이승문을 잡았다. 이들은 구출된 뒤 두 달 가량이나 피신하였다. 그러나, 산속에 숨어 있다가 습격을 당해 이시규만 피하고 이승문과 최남규는 붙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진주 우병영에서는 이들을 진주목에 옮겨 가두고는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비변사에서는 이시규를 잡은 후에 처형아라고 하였으나 감영에서는 먼저 처벌하는 것이 낫다고 아여, 8월 10일 10시경 우병영 남문 밖 들판에서 두 사람의 목을 베었다.
이 외에도 이승규는 매을 맞아 숨졌고, 이유실 정배, 이경로 계하죄인, 오춘분과 박기식은ㅇ 형을 맞은 후 풀려나왔다. 이시규는 뒤에 체포되었으나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결국 거창농민항쟁은 여기서 끝났다. 읍내공격, 선무사, 이참현과의 싸움, 주도층이 체포당하고 난 뒤 다시 구출 싸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달 동안 이어졌던 항쟁은 병영의 병력이 동원되면서 더 이상 버텨나가지 못하였다.
그 후 71년만인 1932년, 이승문의 죽음은 탐관오리배의 학정에 항거한 의로운 순절이라 하여, 지방사람들이 그를 추모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거창읍 가지리 개화마을의 인민사와 白源齋가 바로 그것이다.
2. 거창의 역사, 신용균. 2015년. 214쪽.
1862년 철종 13년 3월 21일, 거창읍치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그때까지 지방관과 향리들의 수탈은 여전하였다. 당시 부사 황종석은 세금 1만 냥과 쌀 100석을 횡령하였고 신재문은 관청 곡식 6쳔여석, 장복영은 2천 5백 석을 포탈한 뒤, 지역민들에게 이자를 거두어 메우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부사 황종석이 농민봉기를 진압하러 진주에 간 틈을 이용하여 봉기하였다.
양반 이시규, 최남규, 이승문 등은 먼저 통문을 돌려 농민들을 모았다. 그날은 읍내 영천 장날이었다. 봉기한 군중은 먼저 향리들의 집을 불살랐다. 이어서 도호부 관아로 몰려가 관청 장부에 불을 질러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부사 황종석은 대구를 거쳐 서울로 도망쳤다. 지역민들은 향촌을 장악하고 향회를 통해 스스로 통치하였다.
그해 5월 10일, 중아에서 파견한 선무사가 거창에 도착하였다. 지역민들은 이튿날인 장날 함께 모여서 선무사에게 폐정개혁을 요구하기로 하고 통문을 돌렸다. 이에 겁먹은 선무사는 성주를 향해서 가조로 꽁무니를 뺐다, 봉기군 수백 명은 점심때쯤 선무사를 따라잡았다. 그들은 가조의 조세창고 앞에서 선무사에게 토지세 감면을 요구하였다. 선무사는 자기는 잘 모른다고 발뺌하는데 급급하였다.
한편, 5월 28일 경상도 관찰사의 보고로 사정을 알게된 정부는 부사 황종석을 파면하고 경상감영군으로 봉기를 진압하라고 지시하였다. 관군은 농민봉기 주모자를 체포하였다. 암행어사 이인명은 이시규, 이승문, 최남규를 대구로 압송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농민들은 관군에 직접 저항하였다. 그들은 관군을 습격하여 쫓아 버리고 봉기 지도자를 구출하였다. 암행어사 이인명은 관군을 풀어 주모자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농민들에게 사로잡혀 향청의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농민들에게 애걸하여 5일 후 겨우 풀려났다.
이로부터 두 달 후 이승문, 최남규는 관군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8월 10일 진주에 있는 우병영에서 처형당하였다. 이시규도 후에 체포되었다. 탐학했던 부사 황종석은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 갔으며, 향리 신재문과 장복영은 진주 경상우병영에서 장살되었다.
**주동자 이시규
3. 조재원
1862년 가조 지역에서도 농민항쟁의 여파가 계속되어, 가조 창고가 불태워지고, 이교나 관권과 결탁한 요호부민층 또는 토호층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김기수, 김기부 등 상산 김씨들이 7월에 거창부사에게, 9월과 11월에는 감사(순상) 이돈영에게 소지 올림.---김경팔---전에 좌수을 역임한 사람,
김경룡---下加南面 執綱
김용경---웅양면 집강
인민사 기문---돌린 글을 집필했다고 우두머리라는 案이 이루어져 공은 그 이름이 덮어 씌어 오랫동안 유설(감옥)에서 곤욕을 겪다가 항양에서 운명했.....
4. 김영석
거창 민란은 1862년 봄(2월?)에 거창부사 황종석이 진주 민란을 안핵하기 위하여 자리를 비운 사이에 민란이 일어난 것으로 보여진다. 이시규(李時奎)․ 최남기(崔南紀)․ 이승문(李承文) 등이 통문을 돌려 농민들을 모아 민란이 발생한 것이다. 이승문은 벽진이씨로 동면 갈치촌에 살았고 나이는 48세. 최남기는 흥해최씨로 서면 세평촌에 거주, 나이는 54세. 이시규는 서산이씨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음.
환곡을 비싼 값에 매각하고 다른 고을의 싼 곡식으로 채워 이득을 보는 이무(移貿)와 관아에서 경저리(京邸吏)나 영저리(營邸吏)에게 진 빚인 저채(邸債) 및 환호(還戶) 등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통문을 돌리고 농민들을 모아서 관아를 습격하고 아전․포교의 집을 포함하여 민가 40호를 부수거나 불태웠다.
부사 황종석은 진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당황한 나머지 말미를 얻어 상경하였고. 5월 10일 선무사 이참현(李參鉉)이 거창에 도착 하였으며, 농민들은 통문을 돌려 읍내 장날인 다음날 모이자고 연락. 삼반관속(三班官屬)은 모두 도망하려다가 중지 하였고, 다음날 륜음(綸音) 낭독 하였으며, 40리 떨어진 가조창에서 점심. 5-600명의 농민들이 난입하여 결전 문제 해결을 요구 하였다. 취한(醉漢-고령 거주 정규환)이 나타나 결전 13량은 타당하다고 하다가 구타를 당함.
5월 28일 감사 이돈영의 장계로 중앙에 알려지고 부사 황종석은 파면되고 주모자들은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명을 내림. 감영에서 포졸을 풀어 주모자 체포. 암행어사 이인명(李寅命)이 주동자 이시규․ 최남기․ 이승문 등 세 사람을 붙들어 대구 감영으로 압송하는 길에 그들의 족당(族黨)이 탈취해갔으나 곧 최남기․ 이승문은 잡혀 진주로 보내져 효수되었고, 포리 신재문(逋吏 愼在文-6000여 석 포탈)․ 장복영(章福榮-2500석 포탈) 등은 장형(杖刑)에 처해졌다. 이인명은 7월 5일 서계와 별단을 올림. 황종석은 의금부에 체포되어 심문 후 곤장 100대를 맞고 상주목에 정배 되었다.
5. 거창군지, 1979년, 142p
1862년 임술년 2월 진주민란
5월 壬戌變亂
이승모와 그의 사촌형 이승진(이 承震) 함께 난을 주도.
난을 치루는 중에 이승모는 죽었고, 이승진은 체포되어 진주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아들 李奉和는 그 부친의 시신을 가져와 고향의 선산에 묻었다.
백원재의 인민사기, 同 上계문등에 의함. 국사대사전 87 p
6. 거창향지 1982년 93p
5월에 항거騷動 발생.
이승모, 이승진 등의 주동으로....
이승모는 난동 중 죽었고, 이승진은 진주로 끌려가 참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