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업계는 STX그룹의 하이닉스반도체 인수전 참여에 대해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STX 재무상황으로 볼 때 무리수를 둔것이 확실하고 스스로도 모를 리 없다는 진단이다.
일각에서는 STX가 정책금융공사와 산업은행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참여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복수경쟁으로 하이닉스 인수가격을 높이려고 채권은행들의 종용으로 STX가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STX가 이 역할을 대가로 은행들로부터 모종의 반대급부를 얻으려는 것 아니냐는 추론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2009년 8월21일 STX그룹의 최고재무책임자인 변용희 부사장은 기업설명회에참석한 후 기자와 만나 "추가 M&A를 검토하고 있지도 않고 당분간 계획도 없다. 확대된 사업을 안정화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STX는 이듬해 초대우건설 인수를 검토했다가 시장의 호된 비판을 받고 포기했고 대한조선 인수도 검토했다가 접었다.
STX가 왜 똑같은 전철을 밟으려 할까, 금융업계가 제기하는 의문이다.
▲STX '현금이 3.5조'..업계 '차입금이 11조' = STX 관계자들은 보유 현금성 자산이 3조원을 넘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인수 예상가격이 2조원에서 3조원에 이르는 하이닉스를 중동 펀드와 절반씩 나눌 예정이어서 시장에서 우려하는 유동성 위기는 없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한신정평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STX그룹의 연결기준 현금성 자산은3조4천440억원에 이른다. 자산대비 현금성 자산 비중은 14.6%로 현대차(21.2%)보다는 작지만 삼성전자(11.9%)보다는 높다.
그러나 문제는 현금성 자산이 인수자금으로 활용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지난해 말 그룹 연결 차입금이 10조9천814억원에 이르는데다 이 가운데 단기성 차입금이 절반이 넘는 5조9천512억원에 달한다. 부채비율은 458.4%, 차입금의존도는46.1%이다. 부채비율은 2009년도 말보다 45.9%포인트 떨어졌지만, 차입금의존도는 5.0%포인트 올랐다. 2007년 말 1조7천257억원이었던 차입금이 2008년 말 6조839억원, 2009년 말 10조5천679억원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연결 영업이익이 4천279억원으로 이자비용 5천161억원을 갚기도 버거웠다. 현금창출력(EBITDA)이 9천401억원에 불과해 단기간 내 장사한 돈으로 빚을 줄이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더군다나 STX는 차입금 감축 등 재무 안정화를 위해 지난해 말까지 끝마치기로 약속했던 STX중공업과 STX에너지, STX유럽, STX다롄의 Pre-IPO와 IPO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약속대로 진행됐다면 2조5천억원의 자금이 유입될 예정이었다.
한 대형증권사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는 "조선·해운 사업 비중이 큰 만큼 어느 정도 부채비율이 높은 것은 이해하겠지만, 그동안 차입금을 줄이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인수금융 잘될까 = STX유럽은 지난 8일 STX OSV 보유 지분 18.27%를 시간외거래로 투자펀드인 옥지프(Och-Ziff)사에 약 2천500억원을 받고 넘겼다. 무차입으로 인수하겠다는 게 허언이 아니라는 뜻이다.
STX가 이처럼 현금성 자산과 우량 자산을 활용해 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고 밝히자 일부 계열사의 Pre-IPO가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바로 IPO를 추진하기에는 M&A 일정상 시간이 촉박하다.
변 부사장은 15일 연합인포맥스와 전화통화에서 "인수금융에 대해 확정된 바 없고 시장의 추측일 뿐"이라면서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오래전부터 추진해온 계열사 지분 매각이 쉽겠느냐는 것이다. 2008년 하반기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로 조선·해운 경기가 최악의 국면을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시장에 STX그룹 리스크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연합인포맥스 리그테이블의 발행스프레드(화면 8452, 8455)에 따르면 올 상반기에 회사채를 발행한 STX조선해양은 같은 등급의 민간시가평가금리보다 107bp, STX팬오션은 72bp, STX에너지와 STX솔라는 각각 67bp의 높은 가산금리를 붙여야 했다. STX보다 높은 스프레드를 보인 곳은 대부분 건설사뿐이다. 그룹 리스크가 큰 데다 지급보증으로 얽혀 있어 우량 여부를 떠나 높은 가산금리를 요구받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STX는 인수본능을 숨기지 않았다.
최근 2년간 연합인포맥스 리그테이블에 집계된 것만 3건(자문사 포함 딜 한정)이다. 건별로 수백억원에 불과한 해외 광구 지분 인수 건이지만 STX는 M&A로 커왔던 기업답게 꾸준히 바이어로 등장했다.
증권사의 한 법인영업 담당자는 "하이닉스 인수 검토로 STX 계열에 대한 리스크가 커진 만큼, 실적을 떠나 더 높은 가산금리를 요구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며 "따라서 STX가 원하는 가격에 지분을 팔기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인수자금을 마련하더라도 차입금 감축에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장 비판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수로 컸지만..혹시 '페이스메이커'(?) = STX는 M&A로 성장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쌍용중공업의 임원이었던 강덕수 현 STX그룹 회장은 한누리컨소시엄을 구성해 2000년 쌍용중공업(현 STX엔진)의 지분 34.5%를 163억원에 인수해 최대주주로 올라섰고 이듬해에 STX를 공식출범시켰다.
이후 2001년 대동조선(STX조선해양), 2002년 산단에너지(STX에너지), 2004년 범양상선(STX팬오션)을 차례로 인수했다.
2007년에는 세계 2위의 크루즈선 건조업체인 노르웨이의 아커야즈(STX유럽)를 전격 인수해 유럽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당시 유럽 크루즈선 건조업체가 아커야즈를 되찾아오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 조선공업단지 투자와 함께 STX그룹의 차입금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금융위기로 조선.해운 시황이 부진에 빠졌다. 대우건설 M&A에서 발을 빼자 당분간 STX가 대형 딜에 불참할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STX가 이번 하이닉스 인수전에서 채권은행들과 물 밑에서 모종의 합의를통해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맡은 것 아니냐는 얘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페이스메이커'는 중거리 이상의 달리기 경주 등에서 일정 구간을 일정한 속도로 달리며 선수가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하는 도우미를 일컫는다.
정책금융공사는 하이닉스 지분(2.58%)을 산은으로부터 넘겨받은 채권단이고 산은은 STX 주채권은행이자 하이닉스 매각 주간사다.
그러나 산은 측은 이에 대해 "하이닉스 지분 매각 건은 우리와 관련이 없다"고 일축했고, 정책금융공사는 "STX나 SK텔레콤 모두 자사가 원해서 인수의향서를 낸 것으로 우리가 STX를 끌어들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STX 측도 "인수의향서까지 냈는데 인수의지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이같은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