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마음의 실수 】
말실수가 말꼬리 잡듯 계속 이어지면 맛있는 커피가 앞에 있든, 날씨가 좋든, 처음 시작한 대화는 인상을 쓰게 되며 크게 다툼으로 까지 변질 되어간다. 상담소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 방법을 알면 좋겠다.’, ‘ 부부사이의 대화법을 배우고 싶다.’ 라며 문의하거나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는 수가 상당하다. 그들의 관심은 “대화법”에 있다. 필자는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필수로 ‘말하기’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사용했던 교과서나 강의 내용을 떠올려보면, ‘법칙’이라는 것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국어에 대해서는 이미 의무교육 기관인 초등학교 때 배웠으니, ‘법칙’이나 ‘원칙’이 내용에 절대적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 사람들은 ‘법칙’에 관심을 두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궁금증이 일지만, 짐작은 된다. 이는 상담소에 문의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환자의 신분으로 병원에 가면, 자신을 드러내어 진단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 자신의 언어로 열심히 얘기하거나 인터넷에서 본 내용 중 자신의 것과 일치되는 것 같은 내용을 접목시켜 역시 열심히 얘기한다. 이때는 ‘부끄럽다’는 감정이 배제된다. 비싼 돈을 낼 것이고 의사로부터 병명을 듣기 위한 목적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상담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병원을 갈 때와는 전혀 다른 입장인 것 같다.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같으나, 자신 스스로 진단을 내린 것에 대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도 정해서 묻기 때문이다. 병원에서처럼 “내가 지금 ∼∼상황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보다는 “이런 것 해줄 수 있습니까?”가 질문의 형태라고 보면 된다. 그렇게 찾은 적합한 단어가 “○○법”인 것 같다.
상담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데 있어 다양한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하고, 새로운 옷을 입히거나 헝클어진 곳을 재단장하는 선택을 돕는 것이 상담이라면,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발돋움을 하려 하기보다는, ‘몰랐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알게 되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상담소 문을 두드린다. 자기가 와서 배우고 그 정보를 가지고 상대를 가르치면 된다고 믿고 상담소를 찾아오는 것이다. 남편은 바빠서, 아이는 공부해야 하니까 라는 이유를 가지고 자신은 이론을 배우고자 하며 찾아온다. 워낙 ‘want'가 강해서 그렇게 해주마 하고 시작을 하면, 이내 “사실은 제가…”로 시작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이내 이론 수업은 뒷전이 되고 자신의 사례를 꺼내는 것이 종종 있는 일이다.
상담소를 오게 되면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어떤 동기부여가 있어 상담소를 오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도 아니다. 상담이라는 과정 속에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운을 뗀 것이다. 상담소는 잘잘못을 가리는 곳도 아니고, 과거를 덮어주는 곳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관계를 재정립해 주는 곳이 아니다. 상담소에 어떠한 기대를 하였든, 우린 모든 내담자를 마주하고 그들의 want를 귀담아 듣는다. 듣다보니 말실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느껴지고 말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도 한다. 마음과 다르게 튀어나오는 말에 본인도 힘들고 상대방의 상처도 느끼는 것 같고, ‘달라지자’, ‘그러지 말자’ 역시 “마음”은 먹으나, 그저 생각으로 끝나버리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에 좌절감을 느끼고 말실수 하는 자신에 둔감해져 버리는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말실수가 문제인 걸까? 상대가 상처 받는 것이 정말 말 때문일까? 말하는 방법만 바꾸면 문제가 해결되는 걸까? 물론, 하나의 대안은 된다. 말을 이쁘게 잘하면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정말은 말을 예쁘게 하려는 “마음씨”가 빚을 갚는 거라고 알려주고 싶다.
말실수를 고치려하기 보다는 마음을 먼저 바로 잡아야 된다. 그래야 ‘마음의 실수’를 하지 않게 된다. 하나의 예를 들면, 대부분 사람들이 바쁘기 때문에 못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날 마음이 없는 거란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마음의 길을 분명히 하면 마음씨를 이쁘게 준비할 수 있고 이를 말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대부분 서둘러 가려는 마음이 가득하다. ‘어서 서둘러 가야지~’라고 마음을 먹게 되니, 상대에게 미안해지고 늦어서 허둥거리는 자신의 모습에 속상해진다. 자신만의 최선을 다해 약속 장소로 가지만, 도착해서 펼쳐진 상황이 불만스럽기만 하다. 결국 말실수를 하고 만다. “너도 예전에 늦었었잖아.” 라고 말이다. 하! 이를 대화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말의 실수는 상대도 알아챌 수 있다. 말의 실수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할 수도 있다.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음의 실수는 나만 알 수 있고 바로 잡는 것도 나만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 자신에게 실수를 바로잡기 위한 기준이 필요하다. 마음을 제대로 쓰는 것이 결국 말로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의 갈피를 잡고 말을 하게 되면 신중한 말을 꺼낼 수 있지만,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정말 말실수에 불과한 것이 된다. 약속시간에 늦어서 “너도 예전에 늦었었잖아.”라는 말을 한 사람이 말실수만을 하지 않기 위한 기준을 세웠다면, 다음 번 약속에서의 모습은 어떤 행태를 보이게 될까? 무엇보다도 이미 약속 장소로 가는 그 사람의 마음은 “만남”에 대한 들뜸, 기대, 행복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로지 ‘늦지 않고!’, ‘저번의 그 말은 말실수 같으니 말실수 하지 말고!’, ‘어떻게든 늦지 않게!’가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정작 상대는 이 마음을 알고 있을까? 우리가 약속을 할 땐, 시간을 같이 보내며 즐거움을 공유하자는 것 일 텐데, 말실수를 한 번 했던 사람은 이미 상대에 대한 마음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자신의 신념만을 가지고 상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실수이다. 그날 맛있는 커피가 앞에 있든 먹음직스러운 쿠키가 있든, 오로지 욕먹을 짓을 하지 않았다는 명분 속에 의기양양한 모습 가득일 것이다. 늦었을 때 우리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나로 인한’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약속시간에 좀 늦은 것이 미안하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간 ‘늦어서 미안해’ 라고 만 알고 있었다면 이는 말실수며 마음의 실수인 것이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내가 올 거라고 믿어주어 고마워”가 마음을 표현한 말인 것이다. 내가 늦었는데, 상대가 늦은 것을 이유로 자리를 떠나버리지 않고 있어주었다는 것, 자신이 올 것을 신뢰하고 기다림을 자처했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대화법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관계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줄 수 있지만, 정작 마음을 어떻게 주고받을지에 대해 배우고 싶은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대화법의 효과를 보긴 어렵다. 방법은 그저 방법일 뿐이다. 마음이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 <행가래로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