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花山) 용주사(龍珠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1. 용주사의 연혁
이곳은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였다. 그러나 갈양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용주사의 범종(국보) 오른쪽 옆면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보면, 신라말 가지산문의 제2세였던 염거스님(~ 844)이 창건하였다.
고려 제4대 광종 21년(970), 혜거국사의 말씀에 따라 왕은 갈양사를 고려왕조의 원찰(願刹)로 승격시켜 국가의 축원도량으로 삼았다. 혜거국사는 이곳에서 조계종풍을 드날리다 974년 12월15일 입적하였다. 이후 고승대덕이 많이 배출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갈양사는 잦은 병난의 과정에서 절 자체가 소실되었을 것이다.
조선 제22대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1735∼1762)의 능인 현릉원에 가까운 이곳에 용주사를 창건하였다. 정조가 처음 절을 짓고자 장소를 찾았는데, 당시의 신하들이 이 갈양사터가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부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로써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현재 절의 모습은 창건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1983년 서정대 주지스님이 취임한 후 1985년 불음각의 신축을 시작으로 1986년에 중앙선원, 1987년에 매표소, 1988년에 효성각, 그리고 1993년에 천불전을 조성하면서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2. 용주사의 전각 및 성보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이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다. 용주사는 창건 이후 지금까지 가람의 구조가 크게 변모되지 않고, 창건 당시의 상량문을 비롯하여 발원문 등 용주사의 창건과 관련된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 칠성각과 제각, 승당과 선당, 천보루와 외삼문을 중심골격으로 가람을 이룬다.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에는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모셨다. 하단부, 즉 기단과 초석은 장대석 기단에 방형과 원형이 이중초석이다. 당시 일반사찰이 잡석 기단에 자연석 주초를 쓰고 있는 점과 크게 대조된다. 보통 장대석 기단과 이중초석은 관청건축에서도 비교적 격이 높은 건물에만 사용되었다. 그밖에 기단 상면을 전돌로 깔았고, 지붕의 취두와 용두, 학과 용을 새긴 막새기와 등에서 관 건축의 특성을 강하게 나타낸다. 따라서 대웅보전은 사원 건축의 보편성과 아울러 궁궐건축의 특수성도 함께 지닌다.
대웅보전의 왼편에는 칠성각과 향로전이 있었고, 오른편에는 6칸의 제각이 있었다. 그러나 칠성각은 시방칠등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향로전은 언젠가 소실된 후 본래 12칸이던 건물 규모를 6칸으로 축소하여 봉향각으로 다시 세웠다가 1993년에는 천불전으로 고쳐 지어졌다. 향로전은 노전(爐殿)이라고도 하는 불전의 부속건물로 불전의 일상예불과 주요 행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이러한 일상예불은 노전스님이 담당한다. 대웅보전 오른편에 제각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던 곳으로 추측되는 건물이나,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고, 지금은 서고로 쓰이는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 호성전, 또는 축성전으로 불렸던 이 제각의 소실은 용주사의 창건의미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 단에는 천보루와 승당 및 선당이 위치한다.
승당과 선당은 이 절의 중앙부에 □모양의 건축구조로 쌍둥이처럼 대칭을 이룬다. 두 건물은 각각 39칸으로, 적지 않은 대중이 이곳에서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승당과 선당은 지금 나유타료와 만수리실로 불린다.
아랫단의 삼문은 좌우로 줄행랑이 달려있어 마치 양반집 대가와 같기도 하다. 일반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서 삼문이라고 한다. 삼문 앞에서 화마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 두 마리가 버티고 있다.
1) 대웅보전
대웅보전의 삼세불상은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다. 수인은 석가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마왕 파순을 물리치는 항마촉지인, 약사여래는 오른손에 약그릇을 들고 왼손에 설법인,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서 대중에게 설법하는 설법인(또는 아미타구품인)을 하고 있다.
대웅보전의 후불탱화는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조성되었다. 인물이 표현에 음영법을 쓰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불화의 제작자에 대해서 과거부터 김홍도라고 알려져 왔다. 최근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이론도 있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라 종합하면, 왕명을 받은 김홍도의 주관 아래 화승 25인이 참여하여 제작하였다고 본다.
대웅보전에는 6각 당형(堂形)의 목조감실 2개가 있었다. 너비 81㎝, 높이 223㎝다. 감실은 감(龕)이라고도 하며, 불상 등을 안치하는 구조물이다. 원래의 감실은 축성전(祝聖殿)에 있었다. 이후 지장전에 거쳐 대웅보전에 있었다. 축성전이라는 명칭으로 보아 이곳에는 군왕의 위패가 있었을 것이다. 감실이 2개이므로 두 분의 위패를 모셨다고 하면, 사도세자와 그의 비인 혜경궁 홍씨의 위패일 가능성이 크다. 현재 효행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범종각
범종각의 범종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3) 홍살문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4) 부모은중경판
정조의 효성을 그대로 간직한 대표 성보물은 『불설부모은중경판』이다. 목판 42판, 석판 24판, 동판 7판으로 1796년(정조 20)에 간행하였다. 목판에는 한역본과 국역본 변상도, 석판에는 한역본, 동판에는 변상도가 각각 새겨져 있다. 경문과 변상도의 새김이 매우 정교하다. 이 중에서 변상도는 경전의 내용을 21장면으로 나타내었는데, 매우 정교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김홍도가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참고> 용주사 홈페이지
http://www.yongjoos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