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생활 33개월 중 12개월은 수도방위사령부에서 보냈고 21개월을 3군단에서
때웠습니다. 그중 33개월의 반을 잠실, 동작, 방내 철정 검문소에서 보냈으니,
제가 역마살이 끼긴 한 것 같습니다. 덕분에 헌병 병과의 전 커리큘럼 중
대부분을 경험한 것 같아요. 아마도 저 같은 케이스는 아주 드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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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방사는 행사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개인생활이 불가능하다고 봐야합니다.
예컨대, 공황 행사, 노량진, 서울 역 순찰, 정도입니다. 나머지 시간은 전투복 입고
보병처럼 폭동진압을 하느라 0뺑이를 칩니다. 그래서 검문소 파견을 학수고대
했습니다. 졸병 때 잠실 검문소를 나갔다 왔더니 진짜로 본부에 들어가기 싫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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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은 건지 2개월 만에 다시 동작 검문소로 파견을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군대생활 풀린 줄 알았어요. 하루 12시간 근무를 해도 민간인을 볼 수 있어서 꿀
보직에 말뚝 박고 싶었어요. '보안대 초소 단독 침투' 사건이후로 저는 이미 중대,
대대까지 이름이 알려졌어요. 일병 계급장을 달고 요새말로 말하면 셀럽이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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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별거 아니 구나 했어요. 웬걸, 천방지축 하다가 고 참 폭행 건으로 징계위원
회에 회부되면서, 453기 최초로 영창을 가게 됩니다. W백매고서 102보충대까지
기어들어갔고 거기서 신병들과 한 무더기로 소양강을 건너 강원도 '3군단 휴양소'
로 전출을 왔다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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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좁아서 강원도까지 내려온 김 일병 신세가 걱정됩니다. 까지껏 이판사판
공사판 입니다. 어떻게 되겠지요. 본부에서 내 위치 찾느라 고생 꽤나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파견지를 나간 곳이 바로 이곳 인제군 두촌 면 ‘철정 검문소’입니다.
마이가리 병장(상병)달고 4개월을 보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강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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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소 주변에(5분 거리) '현리병원'이 있었고, 인제 원통 길을 향하는 44번 국도와
어둔리-내촌-상남-현리로 이어지는 아홉 사리 길이 한계령 고개만큼 고불고불
했을 것입니다. 국군현리병원(1984)-국군철정병원(1992)-국군 홍천병원(2010)
으로 명칭이 바뀐 현리병원은 간호장교들이 가끔 눈에 띄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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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승용차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휴가를 나가는 군인들이 검문소를
버스정유장처럼 이용했어요. 근무 때 여군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근무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고 참 중에 실제로 여군과 연애에 성공한 헌병이 있었어요.
일반적으로는 4시간짜리 근무를 두 번 서고 나면 자유시간인데 간혹 무장 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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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본부의 긴급 출동 지시를 받으면 주로 내촌이나 상남까지 지원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상남은 경찰지구대를 임시 초소로 사용했습니다. 오전에 아홉 사리
고개를 넘어 오다가 상봉 기념 촬영을 했어요. 주말인데도 차 한대가 없을 만큼
도로가 을씨년스럽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도로 때문인가, 코비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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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85)는 3군단, 예하 2사단, 12사단, 21사단, 22사단까지 모두 44번 국도를
타고 휴가를 나가야 했습니다. 10분거리에 76훈련단와 홍천이 있었기 때문에
철정 검문소의 존재감은 권력이었습니다. 금강운수나 대한 여객은 정규 노선이고
가끔 지나가는 수학여행 차들까지 모두 검문대상이었어요. 언젠간 금강운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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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갔다가 어머니 패밀리들을 만나는 기적 같은 행운을 잡은 적도 있어요.
이때는 근무시간이 기다려졌던 것 같아요. 초소장이 고 상사였는데 우리는 ‘고포‘
라고 불렀어요. 왜 그런 별명이 붙었겠어요? 교육을 하도 많이 시켜서 그랬어요.
근무 관련한 악명은 방내 초소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패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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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정 검문소 주변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고, 신작로 건너에 홍천 강줄기인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미니 대교 정도의 사이즈로 기억합니다. ‘소비조합’이라는
꽤 큰 구멍가게가 있었어요. 그래봤자 야간에 하늘에서 본다면 검문소 불빛
하나 달랑보이는 풍경일 것입니다 만. 22살 피 끓는 청춘을, 수학여행 소녀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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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문편지 답장이나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늘 님, 저를 살리시려거든
새 줄을 내려주소서! 하고 기도를 했더니 글쎄 소비조합에 여학생이 있는 겁니다.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들이 댔어요. 소비조합 해진이네 고모라고 합디다.
나이 21살, 장안 대 2학년. 장안대가 어디 붙어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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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쥐 들락거리듯이 열라 들락거렸어요. 쪽지를 써서 담배랑 맞바꿨어요. 아슬아슬
한 장면이 몇 번 있었지만 들키지 않고 연애질을 했어요. 여름 방학이 끝나고 편지
한통이 왔어요. 우리는 이미 사귀는 사이가 되었어요. 제대할 때까지 기다리겠대요.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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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가 확 바뀌긴 했어도 검문소는 더 크고 멋지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어요,
서울은 검문소가 재다 없어졌는데 이곳은 구멍가게 두 곳 다 마트로 번성했네요.
검문소 바로 옆에 근사한 고기집도 생겼고요. 지금 제가 신호대기 하고 있는 이
다리가 통신병 대가리 깼던 다리 밑일 것입니다. 이때도 신문 안 나고 넘어간 건
상천하지의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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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진이 고모 되십니까?” “누구시더라?” 40년 만인데 놀랍게도 기억을 해냅니다.
초등학교는 폐교를 했고 전 검문소는 민간에 매각을 해서 현재 미장원, 타이어
가게가 들어와 있다고 브리핑을 해줬습니다. “해진이 고모는 잘 살아요?”
"시집을어디로 갔어요? “ ”예, 아가씨 잘 살아요. 부산으로 갔어요. “ '꿀물'을 따
줘서 담배 한 보루 사는 걸로 답례했습니다.
후, 내가 만약 승0를 만나지 않고 현0를 만났으면 어찌 됐을까?
2020.11.27.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