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19 팬데믹 시간 속에 피어오른 또 한 번의 화양연화
2020년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던 그 시각에 나는 달콤한 단꿈에 취해 있었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은 나를 향해 반짝이는 느낌이었고, 별들이 쏟아내는 수많은 불빛은 내 맘에 불을 지펴 숨겨져 있던 열정도 뜨거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19 다음 숫자로 20이 오는 것은 당연한 순차인데 10을 밀어내고 붙을 20 즉, 새로운 10년의 시작에서 오는 기대감이 컸다. 새 밀레니엄의 시작 시점을 정확히 2001년 1월 1일이라고는 하지만, 1999년에서 2000년이 되던 그 당시처럼 내게는 2020년 시작의 느낌이 그랬다. 기분 좋은 변화의 상큼한 바람이 아무런 까닭 없이 불어올 것만 같아 설렘을 가장한 흥분은 새해 벽두부터 나를 휘감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올 시월 내 생일에는 특별한 선물이 준비되어 있다. 환갑이라는 근사한 이름표가 수여될 예정이다.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하기 전에 시간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환기하게 해주기 위함일 것이다. 내가 이정표를 향해 순조롭게 운행하고 있는지… 현재의 내 모습을 반추해볼 때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지… 내 삶을 되돌아보고 재정비하기 위한 시작점으로 환갑이라는 인생의 의미 있는 정거장을 생일선물로 받는 것 같다. 그리고 몇 해 동안 미뤄왔던 글들도 정리해서 이야기 집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 역시 새해 들어 더 확고했었다.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그대로 해낼 거라는 들뜬 자신감은 떠나보내는 2019년 안에 후회와 아쉬움과 미련을 전혀 남겨 두지 않았다. 그렇게 2020년 새해의 아침은 내게 특별했다. 하지만 새해가 시작된 지 불과 사흘 만에 불안과 긴장이 감도는 우려의 사건이 각 언론매체의 헤드라인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군의 폭격으로 국제정세에 그다지 밝지 않은 내겐 낯설고 생소한 이란의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곧이어 이란의 미사일 보복 공격이 발 빠르게 이어졌다. 이에 대응하는 미국이 혹여 중동의 화약고를 도발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나는 예의 깊게 뉴스에 관심을 가졌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사건은 전 세계를 충격과 혼란으로 집어삼킬 또 다른 거대한 혼돈의 서막으로 올해의 향방을 가늠하는 복선이 아니었나 싶다.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가 일촉즉발의 중동으로 몰려있던 그 시간에 중국의 우한이라는 도시에서는 원인 모를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된 폐렴 환자의 소식이 자그마하게 뉴스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관심을 두지 않던 한 사람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로 인해 세계의 전염병으로 팬데믹을 선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채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 첫 감염자가 나온 이래 9개월이 다 되어 가는 현시점에서 전 세계의 감염자 숫자는 2,500만이 넘었고, 이로 인한 사망자는 90만을 향해 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중동지역과 아프리카의 크고 작은 내전과 외전을 잠시 휴전으로 끌어낼 만큼 위력이 대단했다. 감염되는 숫자와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확산하고 퍼져 급기야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이 등장하고 곧 세계 각 나라마다 국경을 닫으며 자국민 보호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나 또한 정부의 방역 방침을 따르다 보니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누리던 평범한 나의 일상을 포기하고 거리 두기를 실행해야만 했다. 일테면 사람들은 한집에 살고 계시지 않는 부모님의 생일 케이크조차 직접 건네지 못하고, 현관문 밖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축하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함께 사는 가족이나 친지 외에 방문이나 모임도 하지 말고 이를 어길 시에는 법적 조치가 있을 거라는 말도 돌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에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여태껏 알아 왔던 것과 달라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장자가 사용한 관용구로 단생산사(團生散死)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누구나 한두 번쯤 들어 봤음 직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뜻이다. 비장한 각오로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어록으로도 많이 회자되고, 신탁통치로 국론이 분열되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 역시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했던 말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뉴스에서 코로19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제시된 말이 ‘흩어지면 살고 모이면 죽는다,’라는 문구이다. 단합과 단결과 화합의 상징 문구로 사용되던 전자와 다르게 사람 간의 거리를 두고 흩어져야만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하고 지금의 유행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하니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어찌 되었든 방역 지침대로 사람 간의 접촉을 줄이고, 최소한의 생필품을 구하기 위한 마트와 집으로만 행동반경이 좁혀지다 보니 겨울 동면에 들어가는 동물처럼 생각지 않은 칩거 생활이 자연스럽게 아들아이와 내게도 시작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자신의 방에서 컴퓨터와 함께 재택근무를 하게 된 작은 아들은 내게 점심시간을 정해주며 그 외의 시간에는 회사에 갔다 생각하고 없는 듯이 여겨 달라고 했다. 퇴근 시간 이후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엄마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영화도 보며 여가 시간을 보낼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얼떨결에 나는 아침 점심 저녁 삼시 세끼를 내 배에 채우는 일상부터 자리를 잡아, 나가야만 했다
아들은 정확하게 점심시간과 퇴근 시간을 지켰으며 나는 설거지 후에 다음 끼니를 준비해야만 하는 엄마의 의무와 책임을 오랜만에 시간 속에 온전하게 채워 넣었다. 시간과의 약속에 성실하게 대하다 보니 시간의 답례로 어느새 내게도 조금씩 자투리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게 코로나19로부터 생긴 일상 안에서의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신비로운 체험을 선물로 안겨 주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선언되어 정부의 지침을 따른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외출을 자제하다 보니 예년 같으면 예쁜 꽃 화분들이 군락을 이루며 들어 서 있을 베란다가 휑하니, 쓸쓸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꽃 화분을 들여놓을까?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는 곳마다 거리 두기로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보니 사실 장 보러 가는 일도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문득, 며칠 전에 부엌 바닥에 떨어진 팝콘 옥수수 알갱이 4알이 떠올랐다. 별 뜻 없이 무심코 젖은 휴지에 싸 두었는데, 신기하게도 여린 싹이 돋아나와 있었다. 가끔 튀겨 먹던 팝콘 옥수수 알갱이에도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놀라운 사랑을 품고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때마침 싱크대 한쪽에는 미처 버리지 못한 빨간 피망의 씨앗들이 꼭지에 말라붙은 채로 매달려 있었다.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라 99%의 기대감 없이 식탁 옆에 있는 산세비에리아 화분의 가장자리에 빙 둘러 가며 피망 씨를 흙 안에 묻어 보았다. 혹시나 하는 1%의 가능성에 거는 기대감이 때론 99%의 불 확신보다 더 강렬할 때가 있다. 그래서 싹이 난 옥수수 두 알갱이를 작은 화분에 넣고 흙을 덮어 두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쪽파와 대파도 뿌리 부분만 잘라 화분에 꾸 욱 눌러 밀어 넣었다. 흙을 만진 손맛의 행복한 느낌을 기억하는 열 손가락이 이때부터 바빠지기 시작했다. 물컵에 꽂아둔 스킨답서스의 끊어진 줄기 아랫부분에 하얀 뿌리가 제법 뻗어 나와 있어서 부지런히 흙에 심어 보았다. 육십 평생 단 한 차례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일이지만 1%에서 출발한 기대감은 물을 주는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비례하며 커져 갔다. 내친김에 한인 마트에서 깻잎 모종 두 개와 홈디포에서 크고 작은 화분과 커다란 흙 부대를 잔뜩 사들였다. 앙증맞은 코스모스를 비롯하여 보랏빛 수국이며 곱고 예쁜 색상의 꽃 화분들을 새 가족으로 맞아들이고 옮겨 심으며 제대로 터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흘리는 땀방울에 흙냄새가 곁들여지니 그럴듯한 텃밭이 베란다에 생겼다.
경이롭고 신비로운 생명의 탄생에 감사와 감탄이 연이어 터지는 동안 코로나19의 사회적 거리 두기는 한층 더 강화되어 아들아이의 재택근무도 연장이 되었다. 처음엔 올라가기도 전에 높은 산을 바라보고 지레 겁을 먹던 산행길처럼 삼시 세끼의 장벽이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상차림의 요령을 익혀가면서 내가 의외로 탁월한 손맛을 지녔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 이렇게 요리를 잘하던 사람이었나 하는 의구심은 감탄을 자아내며 치켜든 아들아이의 엄지손가락으로 매번 사그라들었다. 그 덕분에 되려 아들과의 외식이 잦아졌다. 짜장면과 짬뽕을 먹기도 하고, 황실 장미 접시에 근사하게 올려진 카르보나라와 부드러운 크림 스파게티를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먹기도 했다. 시원한 냉메밀국수와 어묵이 들어간 우동이 생각나면 일식집을 찾았고, 닭볶음과 백숙이 먹고 싶으면 23층 스카이라운지 한식당에서 먹었다. 묵은 신 김치에 돼지고기를 싸서 쪄 먹는 김치찜도 먹고, 잔치 국수와 비빔 냉면도 먹었다. 코로나19는 외식이 잦던 울 집의 생활패턴을 바꾸어 놓았다. 아들의 입맛 요구에 의해 울 집의 식탁은 중화요리 식당이 되기도 하고, 일식집과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되기도 했다. 산 정상을 깎아 조성된 듯 고지대의 버나비 23층에 270도의 멋진 경치를 지닌 우리 집 베란다에서의 식사는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외식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주었다. 끼니마다 외식의 즐거움을 아들과 집에서 즐기다 보니 예상치 못한 변화도 생겼다. 허리엔 마치 힘껏 불어넣어 공기에 부풀어 오른 고무 튜브 같은 것이 둘리고, 신년 초기에 갖던 달콤한 단꿈은 전혀 생각지 않던 아들과의 행복한 시간으로 채워져 갔다.
저녁 식사 후에는 아들의 권유로 함께 영화를 매일 한편씩 보기도 했다. 시리즈별로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과 호빗, 스타워즈 그리고 마블 시리즈까지 섭렵하니 두 달이 후딱 지나갔다. 대개의 부모님은 그다지 선호하는 영화가 아니라서 함께 즐기기 어려운 데 반하여 내가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습에 아들아이는 친구들이 부러워한다고 했다. 사실, 나도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다. 한국을 비롯하여 다른 국가들은 뭘 하는지 늘 지구를 구하는 주인공은 미국이라 아들의 시선에 맞추지 않는 한 나 스스로 찾아보기는 어려운 영화들이다. 그런데도 저녁마다 아들과 나란히 앉아 팝콘을 튀겨 먹으며 영화를 보는 이유는 따로 있다. 물론, 아들이 하는 일이 영화의 장면마다 필요한 컴퓨터 작업이고, 가끔 엔딩 자막에서 아들의 이름을 찾는 재미는 준다. 요란한 사운드에 화려하다 못해 산란하기까지 한 우주 전쟁 영화에 내가 열심을 내는 것은 아들이 내 옆에 앉아있는 그 시간이 참 좋다. 그러고 보니, 요즘의 나와 비슷한 상황이 아주 오래전에도 있었다. 마치 시간의 평행선에 놓여있는 것처럼 나와 아들 사이에 똑같은 시간이 존재했었다. 그렇지만, 한 지붕 아래 늘 내 시선 안에 담아 둘 수 있던 아들과의 시간은 아쉽게도 정말 짧았다. 말문이 트이고 배움의 길로 집 밖을 나서던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아들아이와 나는 자연스럽게 코로나19 사태가 오기 전까지 서로 다른 일상을 시간에 묻혀 살았다. 그런데 팬데믹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아들과의 시간을 뜻밖에 되 갖게 되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언젠가 현 상황이 끝나고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팬데믹이 선포되고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창밖에 나뭇잎들도 어느새 다홍빛으로 물들어 가며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건만 시간이 갈수록 감염자는 더 늘어나고 나라 안팎의 사정 역시 더 안 좋은 상황으로 이어지니 안타깝고 답답하다. 그러나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돌이켜 보면 내겐 좋은 일도 있었다. 코로나19로 팬데믹이 선포되던 올 3월, 한국에서 제1회 삼행시 문학상 공모에 안경이란 작품으로 금상을 수상했다. 당선작은 교보문고 전자 북으로도 발간되었으니 나름 문학 활동도 열심히 한 셈이다. 게다가 버킷리스트 한 가지도 실행해서 감사가 이어지는 좋은 결과도 얻었다. 60번째 생일인 환갑을 맞는 해로 2020년 올해부터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을 제정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청소년들에게 나의 용돈을 나눠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밴쿠버의 각 교회 목사님들의 자발적인 홍보와 신문사의 협조로 많은 청소년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쁨으로 감사로 써 내려간 청소년들의 글을 읽으며 올봄에는 나 또한 즐거움이 배가 되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비록, 사회적 거리 두기로 수상자들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전자 상장과 당선 상금은 E-Transfer로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었다. 자칫하면 나의 의가 드러났을지 모를 일에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 바라볼 수 있어서 오히려 의미 있는 더욱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코로나19로부터 달라진 또 다른 일상이 이제는 나의 평범한 일상이 되어 있다. 물론, 나도 이전처럼 가까운 지인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하고, 식사하고, 웃던 시절이 그립다. 그렇지만, 생각지 못한 아들과 함께 한 시간이 있고, 예상하지 못한 신비롭고 아름다운 생명의 탄생 순간들도 지켜봤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나도 모르던 나의 잠재력을 하나씩 끌어내며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다. 베란다 텃밭에는 옥수수 두 자루와 새끼손가락만 한 피망이 매달려 나의 추억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미래의 추억을 만드는 것은 오늘 이 시간 이 순간의 내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팬데믹이 끝나면 지금 이 시간 역시 감사로 물든 옛 추억의 기억이 되어 또 다른 일상을 즐기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뜻밖에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지금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떠오르지 않는 희미한 옛 시간의 추억들은 사라지고 내 인생의 또 한 번의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찾아온 거라고 믿고 싶다. 세상은 기적을 꿈꾸는 자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멋진 곳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부터라도 시간에 의해 끌려가는 삶이 아닌 내 주관에 의한 함께 가는 시간을 만들어 가봐야겠다. 마치 오늘이 내일인 양 그렇게….
-2020년 9월 가을의 시간이 주어진 오늘 이 시간을 감사하며 -
첫댓글 2020년 현대시문학 겨울호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