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이 죽은 후에 문제가 생겼다. 직계 자식 없이 죽은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겨우 7촌 이상의 왕족이 몇 명 있었다. 그런데 본디 왕가의 법도상으로는 선왕의 직계 아들이 없을 경우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뻘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실세를 이루고 있던 안동 김 씨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을 다음 왕으로 결정 짓는다. 원래 철종의 아버지와 형은 역모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한다. 철종 본인 또한 그 역모에 휘말렸기 때문에 강화로 유배를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철종이 아이러니하게도 다음 왕이 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들의 왕으로 모신 열아홉 살 철종에 대해 제대로 예우를 해줄 리가 만무하다. 본래 철종도 초기에는 제대로 정치를 해보려고 노력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선 어디에도 왕의 뜻을 따라줄 신하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철종이 세도가들의 백성 수탈을 막기 위한 개혁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이, 왕권을 행사한 마지막 시도였다고 한다. 철종은 큰 좌절에 빠졌으며, 그때부터 허수아비 왕권에 대한 불만과 왕위 유지에 대한 불안감을 잊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주색(酒色)을 일삼았다고 전한다.
아닌 게 아니라 철종 때의 ‘왕조실록’에는 어의들이 임금을 진료했다는 기록이, 다른 왕들보다 몇 배나 많게 나온다. 더욱이 그 내용을 살펴보면, 특별한 병증이나 치료에 대한 언급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철종 12년 10월29일의 ‘왕조실록’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언제나처럼 어의들이 진료를 마친 후, 좌의정 조두순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천만 가지 일들이 우려되고 급박하지 않음이 없습니다마는, 성궁(聖躬)을 보전하고 아끼는 것이 가장 크고 먼저 하여야 할 제일의 도리입니다. 바로 말씀하오면 음식을 절제하시고 기거(起居)를 조심하여, 임금의 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용을 살펴보면 철종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언급하면서 그중에서 특별히 음식과 잠자리를 언급했음을 볼 수 있다. 역시 주색이 너무 과했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신하가 왕에게 직접 주색이 과하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으니, 에둘러 말한 것이다. 야사를 보면, 철종이 말년에 폐를 심하게 앓고 각혈까지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동의보감’을 보면, 무릇 열이 나면서 기침을 하고 가래나 피를 토하면서 오후부터 밤에 이르기까지 미열이 나고 얼굴이 붉어지면서 입술이 빨개지거나 소변 색깔이 빨갛고 오줌이 시원치 않은 증상을 음허화동(陰虛火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몸속의 음기와 진액성분이 허해지면서 상대적으로 화열의 기운이 몸속에 더 많아져서 위로 그 불의 기운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 이러한 음허화동의 환자가 열에 하나도 살지 못하는 이유를 적어 놓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병의 회복을 위해서는 첫 번째로는 지혜롭고 밝은 의사를 만나야 하고 두 번째로는 복약(服藥)을 부지런히 해야 하고, 세 번째로는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하니, 그 금기는 다름 아닌 술과 여색,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철종은 이 중 하나도 지키지 못했으니 살아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철종은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