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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상 김근학 원문보기 글쓴이: 김근학
종훈(宗訓)의 유래와 의의를 재음미하다
◇ 종훈은 문중의 염원과 그리움이 담긴 것이다 ◇
종훈은 성씨의 시조(관조)나 역대 조상들이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행동이나 생활의 지침, 또는 문중의 도덕적 실천기준으로 삼는 가르침이다.
종훈의 제정은 시조나 선대 조상들이 수백 수천 년에 걸치어 연면한 문중의 역사와 문화에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며 전승되어오고 있는 그 문중의 얼과 정신, 즉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의, 인간 모든 행동의 근본인 효성, 국가 사회 발전을 위한 역할, 문중의 화합과 돈목 등에 기여한 행적 등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세세연연 영원히 이어갈 자손만대의 핵심적인 가치를 고스란히 담는 내용이어야 하는바, 우리나주김씨는 935년 신라 56대 마지막 임금이신 경순대왕의 경천순민의 대의를 실천하여 신라 천년사직을 손국할 당시의 백성들이나 고려 조선을 거쳐 현대의 후손들에 이르기까지도 존숭하며 기리고 있는 경순대왕의 계자(季子) 황왕자(湟王子) 범공선사(梵空禪師) 의영공(懿英公)의 만고에 푸른 충절과 효경심, 관조이신 나주군 문하시중 운발(雲發)의 제세안민의 고귀한 얼, 고려와 조선에 걸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활약한 기라성 같은 문무현관이 있었지만, 특히 월당공(月塘公)에 이어 참판공(參判公), 훈련공(訓練公), 취암공(鷲巖公), 구암공(龜巖公)에 이르기까지 도덕과 문장이 뛰어나며 충효와 절의를 지킨 위대한 조상들께서 당대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 까지 아름다운 명성과 자취를 세상에 날려 후세의 본보기가 됨에 따라 1832년 임진보를 편찬할 당시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선조님들께서 선조님들의 행적을 찾고 고증하여 보책의 서두에 “家傳忠孝 世守敦睦”여덟 글자를 처음으로 천명하고 후손들이 대대손손 이 거룩한 조상들의 얼과 정신을 기리고 준수하고 선양하도록 하여 왔으며, 이후부터 2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신라김씨 왕조의 적통후예인 우리 나주김씨 문중의 정신적 지표이며 가르침인 종훈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음은 임진보 머리글의 내용이다.
<임진보(1832) 나주김씨족보 머리글>
<원문>
“立譜收族 宗法遺意 有攝人心 俗厚風美 惟我羅州金氏 肇自月塘公 至參判公 訓練公 鷲巖公 龜巖公 道德文章 聯芳趾美 爲世矜式 琦歟諸賢 華慈一譜 八字弁卷 警世裕後焉”
(입보수족 종법유의 유섭인심 속후풍미 유아나주김씨 조자월당공 지참판공 훈련공 취암공 귀암공 도덕문장 연방지미 위세긍식 기여제현 화자일보 팔자병권 경세유후연)
<임진보(1832년)에 게재된 종훈>
家傳忠孝 世守敦睦
(가전충효 세수돈목)
<번역문>
“족보를 만들어 종족을 모으니 종법이 남긴 뜻은 인심을 추스르고 풍속을 후하고 아름답게 하는데 있다. 오직 우리 나주김씨는 월당공(月塘公)을 비롯하여 참판공(參判公), 훈련공(訓練公), 취암공(鷲巖公), 구암공(龜巖公)에 이르기까지 도덕과 문장과 충효와 절의로 나란히 아름다운 명성과 자취를 날려 세상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아름답도다. 여러 현인들을 이 한 족보에 모아 가전충효세수돈목(家傳忠孝世守敦睦)이라는 여덟 글자를 책머리에 적어 세상을 경계하고 후손을 넉넉하게 하고자 하노라”
임진보는 현존하는 최고의 나주김씨 족보인 병오보(1786)에 이어 1832년(순조32)에 참판공 휘 봉서(20세,청주진천파)후손인 상언(相彦 32세)과 그의 족질인 의척(義倜,33세, 지평공 휘 정현 은산 제천파)등에 의하여 2년여의 준비 끝에 편찬되게 된다.
전 6책의 이 족보에는 편찬을 주관한 相彦과 상언의 족숙 응순(應順,31세,청주진천파), 족질 진척(進倜33세, 지평공 후계)의 서문이 있고 은진 송씨 송치규(宋穉奎)의 서문이 있다.
이 보책은 후손에게 가르침의 준거가 되는 가전충효 세수돈목 이외에도 나주김씨 분파목록이 기록되어 있어 180 여 년 전 당시의 나주김씨 분포와 현황을 파악하는데 문헌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보책이다.
교통이 불편하고 많은 경비가 소요되는 봉건사회에서 이러한 훌륭한 보책을 만들어 남기신 조상님들의 훌륭함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이 머리글에 등장하는
* 월당공은 나주김씨 15세로서 고려말엽 대과에 급제하고 충숙왕 이 후 공민왕대에 걸쳐 성균관 대사성, 보문각 대제학 등을 역임 하시고 가정 이곡, 목은 이색 등 대학자들과 교유 하시면서 당대 문장이 독보적이던 문충공 대경(臺卿) 선조로서 그의 시가 동문선,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어 있고 경현사, 우산사에 배향되어 기려지고 있는 훌륭한 선조님이시다. 선조님이 찬한 동문선에 수록된 <가지사 판상운>은 2015년 중앙종친회에서 현장 보림사(구가지사) 성보박물관에 복원 게판해 많은 후손들이 기리도록 하였다
* 참판공은 나주김씨 20세로서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4대에 걸쳐 남양도호부사 군자감정 돈녕부정 절충장군 의흥위 호군 등 조정의 문무 내외 직을 두루 지내고 명신양리의 표상으로 목민관으로 있던 임지에서는 성적(聲績)이 많아 칭송이 자자했으므로 중종으로부터 치행의 으뜸으로 의복 일습을 하사받은바 있으며, 졸한 후 대학자이며 경세가로서 영의정을 지낸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이 비문을 찬하였고 병조참판으로 추증된 봉서(鳳瑞)공을 일컬으며,
*훈련공은 중종, 명종조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남정북벌로 보국안민하고 특히 1555년에 발발한 을묘왜변 시에 65세 나이로 방어사로 출전하여 전남 영암에서 왜적을 토멸한 혁혁한 공적으로 정국일등공신 (靖國一等功臣)에 책훈되신바 있으며 무반(武班)이지만 명종 2년(1547년) 명나라에 사신(진향사進香使)으로 다녀오는 등 훌륭한 학식과 경륜, 인품을 갖춘 명신으로 명종친림시연회에서 찬진한 서총대시로 유명한 21세 용주공 경석(景錫)을 이름인데 공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90회 정도에 달할 정도로 이름을 떨치었으며 ,
*취암공(鷲巖公)은 22세로 김제 군수 등 목민관을 역임하다 을묘왜변 시 중군장으로 참전 공을 세워 광주목사에 승차되고 호조판서에 추증된 22세 적(適) 선조를 말하는데 선조님께서도 우산사에 배향되어 기려지고 있다,
*구암공(龜巖公)은 정유재란에 정부인 나주나씨와 함께 순절하시어 선무원종1등공신(宣武原從1等功臣)으로 책훈되시고 부인 나주나씨는 조정으로부터 정절을 정려각(旌閭閣)으로 포상된 23세 충수(忠守)공을 말함이다.
어찌 열거한 다섯 분 선조만이 충효의 본보기이겠는가 !
그 이외에 고려와 조선조에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신 수많은 충의 열사와 효자 열녀가 있었지만 임인보 편찬 시에는 자료 수집 등의 한계로 다 소개 못한 것뿐이다. 문중을 빛낸 훌륭한 어른들의 기록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겠다.
현대화 세계화 정보화 다원화 사회가 진행됨에 따라 전통적인 규범과 가치관이 무너져 버렸는데 우리의 종훈인 ‘가전충효 세수돈목’의 정신과 역사성과 전통성을 실리면서 젊은 세대가 이해하고 공감하는 좋은 방안은 없겠는지 많은 종친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하여 깊은 고민을 해보도록 하자.
우리 나주김씨의 종훈 가전충효 세수돈목은 중앙종친회를 비롯한 지역 종친회와 관련 단체에서 주최 주관하는 세향, 신년하례회 연찬회 등 모든 식순에 포함해 세번 재창함으로서 천년 왕손으로서 정체성과 정통성을 공고히 하고 종친간의 화합과 돈목을 다지는 구심체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종훈 제정 당시와 시대 상황이 천양지차로 바뀌었음을 감안하여 제주 인충공 종친회장인 35세 정택 종친의 제안으로 종훈 재창은 두 번은 원문 “가전충효 세수돈목”으로, 마지막 한번은 “충효정신 이어받고, 세세토록 돈목하자”로 하도록 바꾸고 시행해 오고 있는데 시의에 적절하게 능동적으로 대처한 것으로 잘한 일이다.
나주김씨 대동보(임진보, 1832년) 서문(원본 및 번역문)
族譜重刊跋
人之於祖 如木之本於根 水之源於淵 雖支條傍達 派流分岐 元初則一而已 以故世之欲尊祖重本者 必於譜牒上致力焉 蓋所以明其系之所自出 詳其派之所由 則于以敦孝悌講親睦 俾不至塗人之相忘 則其在立人紀扶世敎之道 顧不重耶
惟我金姓 本以敬順王後裔 逮至羅州君 因籍羅州 子姓詵詵 簪纓蟬聯 在在相望 若其歷朝淸顯傳家忠孝 悉載卷頁 今不必疊說 而靑史遺芳 至今照人耳目 蔚然爲海東名閥 豈不韙哉 近來同宗之親 不爲不多 而占科第尙名節者鮮矣 余竊悲祖先積累之德 旣而生此子孫 又使此子孫 中世之全盛 一何赫赫 後屬之微弱 一至此極也 抑亦使之窮乏其身 各自勉勵 思所以興復也歟 然則勉勵興復之道 惟在乎尊祖而敦宗 亦在敘譜錄而詳譜派也
去昨春與族兄進倜宗人相彦 議所以重刊增修之道 於是乎文告我諸宗 究問收單 發凡起例 因其舊制 增以新錄 一一潤色之 周歲而功訖 羅州之金 於斯而光顯矣 蘇老泉所謂人之觀我譜者 孝悌之心油然而生者 正謂此也
崇禎紀元後 四壬辰 仲春 日 後孫 義倜謹跋
<나주김씨 족보중간 발문>
사람에게 있어서 조상이란 마치 나무가 뿌리에 근본을 두고 물이 못에 근원을 둔 것과 같으므로 비록 가지가 옆으로 퍼지고 물줄기가 갈라져 나가더라도 그 시초는 하나일 따름이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조상을 높이고 근본을 중시하려는 자들은 반드시 족보를 만드는데 노력을 다한다. 그 계통이 흘러나온 출처를 밝히고 그 계파가 나온 바를 자세하게 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고 친목을 다짐으로써 잠시 길에서 스쳐간 사람처럼 서로 잊게 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즉 사람의 기강을 세우고 세교(世敎)를 부지하는 도리에 있어 도리어 중요하지 않겠는가.
우리 김씨는 본래 경순왕의 후예로서 나주군(羅州君)에 봉해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하였다. 자손들이 번성하면서 높은 벼슬을 하신 분이 연달아 나와 족보 안 곳곳에 보인다. 역대 조정에서 청현직(淸顯職)을 지내신 분과, 대대로 전해오는 충효로 이름난 분들은 모두 책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 여러 번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청사(靑史)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겨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을 환하게 밝히고 성대하게 동방의 이름난 문벌이 되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서 동종(同宗)인 친족의 숫자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급제하거나 명예와 절개를 높인 사람은 드물다. 내가 가만히 슬퍼하노니, 조상들이 쌓아놓은 덕으로 이미 이 자손들이 태어났으며, 또한 이 자손들로 하여금 중세 때에는 크게 번성함이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혁혁하더니 그 뒤로는 계속 미약하여 끝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아니면 또한 그 몸을 궁핍하게 하여 각자 힘써서 문중을 부흥시킬 것을 생각하게 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힘써서 문중을 부흥시키는 방법은 오직 조상을 높이고 종중을 돈독하게 하는 데 있고 또한 보록(譜錄)을 서술하여 보파(譜派)를 자세히 밝히는데 있다.
지난 봄 족형 진척(進倜), 종인(宗人) 상언(相彦)과 함께 족보를 중간하고 증수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에 우리 여러 종인들에게 글로써 통고하고, 단자(單子)를 모으는 방법을 연구하고 물어서 범례를 만들고, 옛날에 하던 체제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록을 보태어 하나하나 다듬어 일 년 만에 일을 마쳤다. 나주 김씨가 이에 빛이 드러났으니 소로천(蘇老泉)의 이른바 ‘우리 족보를 보는 사람들은 효제의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것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숭정 기원후 네 번째 임진년 중춘 ○일에 후손 의척(義倜)이 삼가 발문을 쓴다.
羅州金氏族譜重刊序 4-1
我東族姓之蕃 金爲之最 而多出於新羅敬順王 羅州氏卽其一也 其譜系傳世 自高麗大將軍安老縣主始簪組蟬聯 而文章武略若月塘公之著名於東文選 訓鍊公之立功於討倭寇 儘是赫赫 其餘治郡有聲績而蒙褒典 扈駕著勳勞而受錄卷 伐不絶書 至如水使公之無憾於上功之不以實 及退老于別墅 梅窩揭扁而琴酒自娛 長篇短什 與人唱酬 其恬淡無物累 又豈可以武官視者耶 觀於一時諸名勝題詠 足以想得其槩矣 嗚呼 金氏旣收族而各知其來處矣 能相與敦睦而致勉於無添 則孝悌之心 油然而生 當如蘇氏之云 而亦庶乎張子所謂朝廷大有所益者哉 譜將刊 日濬相彦來請余爲序 取閱其譜 余傍先牧使公 其外甥也 不敢以不文辭而以病遷就 濬欲再來而遽歿 遂爲之愴涕而略書此焉
崇禎紀元後 四辛卯 仲春 日 恩津 宋穉圭 序
나주김씨(羅州金氏) 족보 중간 서문 4-1
우리 동방 종족의 성씨 중 번화하기로는 김씨가 가장 번화하며, 대부분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에서 비롯되었는데, 나주 김씨도 그중 하나이다. 그 보계(譜系)가 대대로 전해지다가, 고려대장군(高麗大將軍) 안로현주(安老縣主)에 이르러 비로소 고관대작이 나오게 되었으며, 문장과 무략(武略)에 뛰어난 분으로 월당공(月塘公)이 동문선(東文選)에 이름을 올렸고, 훈련공(訓鍊公)께서는 왜구(倭寇)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으니 모두 참으로 혁혁(赫赫)하였다.
그 외에 고을을 훌륭하게 다스려 상을 받거나, 임금을 모신 공로가 뛰어나 녹권(錄卷)을 받는 일이 대대로 기록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수사공(水使公)의 경우, 사실대로 공이 올려지지 못하여도 아무 유감을 갖지 않았고, 늙어서 별서(別墅)에 물러나서는 매와(梅窩)라고 편액을 걸고 가야금과 술로 즐기면서, 장단편의 시를 지어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일 같은 것을 볼 때, 그 담담하고 외물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 어찌 무관(武官)으로 비교될 수 있겠는가. 한 때 여러 명승(名勝)지를 구경하고 지은 시를 보면 그 대강이나마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아! 김씨들이 (이 족보를 간행함으로써) 그 종족을 수단(收單 : 여러 사람의 이름을 쓴 單子를 거두어 들이는 일)하여 각각의 유래를 알게 되었으니, 능히 서로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고, 그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힘쓴다면 효제(孝悌)의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마땅히 소씨(蘇氏)가 말한 것처럼 될 것이며, 장자(張子)가 이른 것처럼 ‘조정(朝廷)에 크게 유익한 바가 있다.’는 말에 가까워질 것이다.
족보가 장차 간행되려 할 즈음, 일준(日濬)과 상언(相彦)이 나에게 와 서문을 써주기를 청하였다. 그 족보를 살펴보니 나의 방계 선조이신 목사공이 그 외조카인지라 감히 글을 잘 못 짓는다는 핑계로 사양을 하진 못하였으나, 병으로 늦어졌더니 일준이 다시 오려고 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마침내 그 때문에 슬피 눈물을 흘리며 대략 이 글을 쓴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네번째 신묘년(辛卯年) 중춘(仲春) ○일에 은진(恩津) 송치규(宋穉圭)는 서문(序文)을 쓴다.
族譜重刊序 4-2
猗我羅州之金氏 系出新羅 若稽東史文獻足懲 矧乎 敬順大王 揖遜之後 蔭德廣被 簪纓世爀 而源遠流長 支分派別 則至親而至於疎 至近而至於遠 將爲路人 豈不悲哉 詩曰無念爾祖 聿修厥德 禮曰 同姓從宗合族屬 然則念祖修德之訓 固莫如修譜 從宗合族之義 亦莫如合譜 余於是雖是鹵莽 油然自發合族敦宗之心 設譜鋟榟之計 之東之西 周爰咨諏 於南於北 詢謀僉同 上審鼻祖之盛烈 下遵宗族之厚誼 能相與敦睦而勉乎無忝 則念祖修德自此篤矣 從宗合族益復切矣 惟我宗族復豈有路人之歎乎 斯豈非疎者親 遠者近耶 嗚呼 今此修譜 詳審大譜而以書舊蹟之泯焉 亦不無少補云
崇禎紀元後 四壬辰 仲春 後孫 相彦謹序
족보중간 서문 4-2
아아, 우리 나주 김씨(羅州 金氏)는 계통이 신라(新羅)로부터 나왔으니, 우리 역사 문헌들을 살펴보면 얼마든지 증거를 들 수 있다. 하물며 경순대왕(敬順大王)께서 왕위에서 물러나신 후 그 음덕(蔭德)을 널리 입어 고관대작들이 대대로 빛났음에랴.
그러나 근원이 오래 되고 흐름이 멀어지자 가지가 나뉘고 흐름이 달라져 지친(至親)이 소원하게 되고 가깝던 사람이 멀어져 장차 길에 다니는 사람처럼 되게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덕(德)을 닦을지어다.[無念爾祖 聿修厥德]” 라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동성(同姓)은 종(宗)을 좇아서 족속(族屬)을 합친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덕을 닦으라는 가르침으로는 족보를 수간(修刊)하는 것만한 일이 없고, 종을 좇아 족속을 합치는 뜻으로는 족보를 수합(收合)하는 것만한 일이 없다.
내가 이에 비록 재주는 거칠지만 종족을 수합하여 종중을 돈독하게 하려는 마음이 절로 뭉게뭉게 피어올라 족보를 편찬할 계획을 세워서, 동서로 다니면서 두루 자문을 얻고 남북에서도 모두들 동참하기를 꾀하였다. 위로는 비조(鼻祖)의 훌륭한 업적을 찾고 아래로는 종족들의 도타운 우의(友誼)를 좇아서 능히 서로 돈목(敦睦)하고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힘쓰게 하였으니,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덕을 닦는 일이 이로부터 독실해질 것이요, 종중을 좇아 종족을 합치는 일이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 종족들이 어찌 또다시 길에 다니는 사람처럼 되었다고 탄식할 일이 있겠으며, 이 어찌 소원하였던 사람이 가까워지고 멀던 사람이 가까워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아아, 이번에 족보를 냄에 대보(大譜)를 상세히 살펴서, 옛 사적에서 민멸되었던 것을 기록하는 데에도 역시 작은 보탬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리라.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네번째 임진년(壬辰年) 중춘(仲春)에 후손 상언(相彦)이 삼가 서문(序文)을 쓴다.
族譜重刊序 4-3
惟我羅州之金卽敬順王後裔也 世世簪纓聯綿 忠孝炳烈 則豈非先祖種德遺化也 然而弱子孱孫散在他方 不知某名某字 不知某族某派 則烏在其宗族之誼乎 嗟我蔑如之人 忘其孤陋 略陳其義 一齊修譜 惟我同祖之人 一自修譜之後 疎者愈親 遠者愈近 不忘其源源之誼 則亦庶乎其補宗之道云
崇禎紀元後 四壬辰 仲春 日 後孫應順 謹識
족보중간 서문 4-3
우리 나주김씨는 경순왕의 후예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분이 잇달아 나오고 충효가 빛났으니 이 어찌 선조가 심어놓으신 공덕과 남긴 교화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잔약한 후손들이 다른 지방에 흩어져 살면서 무슨 이름과 무슨 자(字)를 쓴 분이 계신지도 모르고 어느 종족인지 어느 분파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그 종족으로서의 정의(情誼)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못남을 잊고 그 족보의 의미를 대략 서술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족보를 정비하였다. 같은 조상을 둔 우리들이 한번 족보를 정비한 후로, 소원하였던 자는 더욱 친해지고 사이가 멀었던 자는 더욱 가까워져서 그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의(情誼)를 잊지 않는다면 또한 종족의 번성을 도우는 방법에 가까울 것이다.
숭정(崇禎) 기원 후 네 번째 임진년(壬辰年) 중춘(仲春) 〇일에 후손 응순(應順)은 삼가 기록한다.
族譜重刊序 4-4
東方之金 自新羅始有 而敬順王爲我鼻祖 卽後唐天成年也 有季子讓禪入海印爲山人 槩其淸操 不讓孤竹 延陵國人 以是稱季子 子諱雲發 封羅州君 因籍羅州焉 其後有諱得章 封大將 子諱克淳 官大將 而封安老縣主 有諱臺卿 號月塘 事著東文選 與三隱齊名 子諱可久 官禮儀判書 次子諱千久 際戊午亂 死節 以其六指 故裹而葬之 有一子諱廷顯 官持平也 有諱景錫 正德乙卯討平倭寇 官至敦寧府事 有曾孫 諱鎭 號梅軒 以湖南水使 丁丙子亂 與季弟寒松公諱釴 扈駕錄功 有諱適 號鷲巖 有書院 子諱忠秀 官戶參 在壬辰亂 錄券一等 此大槩也 若其勳名事業 炳燿竹帛者 今不可一一枚擧 而或以淸白文章 或以忠孝節義 爲一世所標準 爲後昆所矜式者 厥維多矣 東方之人數大姓 我金氏未嘗不與焉 但其子孫散處四方 近世無大顯者 雖有譜錄而頗其年所 亦未得詳知其派流 余甚恨之 再昨春 與宗人相彦 族弟義倜 議所以重刊之道 乃次其世系 序其族派 遂成一家之乘 則吾宗之慶 莫大於此 噫 玉杯無當 雖華而不用 金輿無質 雖美而難行 今我宗黨之同譜者 其肯體原始重本之意歟
崇禎紀元後 四壬辰 仲春 日 後孫進倜 謹序
족보중간 서문 4-4
우리나라 김씨 성은 신라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경순왕이 우리 비조(鼻祖)가 되니 즉 후당(後唐) 천성(天成)년간이다. 계자(季子)가 왕위를 사양하고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산인(山人 중)이 되었는데 대개 그 맑은 지조가 고죽(孤竹)이나 연릉국(延陵國) 사람보다 못하지 않았기에 계자(季子)라고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운발(雲發)이 나주군(羅州君)에 봉해짐에 따라 나주를 관향으로 하였다. 그 뒤에 득장(得章)이 대장(大將)에 봉해졌고, 아들 극순(克淳)은 벼슬이 대장(大將)이었으며 안로현주(安老縣主)에 봉해졌다. 대경(臺卿)의 호는 월당(月塘)으로 행적이 동문선(東文選)에 드러나 있으며 삼은(三隱)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했다. 아들 가구(可久)는 관직이 예의판서(禮儀判書)였으며, 둘째 아들 천구(千久)는 무오년 난리에 절개를 지키다가 돌아가셨는데 그가 육손[六指]이었으므로 (시체를 알아보고는) 수습해 와서 장례를 지냈다. 아들 정현(廷顯)이 있었는데 관직이 지평(持平)이었다. 경석(景錫)은 정덕(正德) 을묘년에 왜구를 토벌 평정하여 관직이 돈녕부사(敦寧府事)에 이르렀으며, 증손 진(鎭)은 호가 매헌(梅軒)인데 호남수사(湖南水使)로서 병자호란을 만나 막내 동생 한송공(寒松公) 익(釴)과 함께 임금을 호종(扈從)하였으므로 공적이 녹권(錄券)에 기록되어 있다.
적(適)은 호가 취암(鷲巖)으로 서원(書院)에 배향되어 있으며, 아들 충수(忠秀)는 벼슬이 호참(戶參)이며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녹권 일등에 올라 있다. 이것이 대략적인 사적이며, 그 훈명(勳名)과 사업(事業)이 사책(史冊)에 환하게 실려 있는 것들을 지금 일일이 들어 거론하지 못한다. 혹은 청백리나 문장으로, 혹은 충효와 절의로 한 세대의 표준이 되거나 후손의 본보기가 되는 분은 아주 많다. 우리나라에서 사람 수가 많은 성씨로 우리 김씨가 포함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만 그 자손들이 사방에 흩어져 살면서 근세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없었으며, 비록 보록(譜錄)이 있지만 연대가 오래되어 그 파류를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내가 이를 매우 한스럽게 여겨 재작년 봄에 종인(宗人) 상언(相彦), 족제 의척(義倜)과 족보를 중간(重刊)하는 방법에 대해 의논하고, 이에 그 세계(世系)에 대해 차서를 매기고 그 족파에 대해 순서를 잡아서 마침내 한 집안의 역사를 편찬하였으니, 우리 종족의 경사가 이보다 큰 것은 없다. 아. 옥으로 만든 술잔이라도 쓰일 곳이 온당하지 않으면 비록 화려하더라도 쓸 데가 없고 금으로 장식한 수레라도 바탕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비록 아름답더라도 굴러가기 어려우니, 이제 우리 종당(宗黨)의 족보를 같이하는 자는 근원을 찾고 근본을 중시하는 뜻을 기꺼이 체득해야 할 것이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네번째 임진년(壬辰年) 중춘(仲春) 〇일에 후손 진척(進倜)이 서문(序文)을 쓴다.
2019년11월12일
사단법인범공선사숭선연구회장
나주김씨종친회중앙회 고문
36세 지상 깅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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