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권통치 시대
수양은 단종 주변인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그를 위협하여 퇴위시킨 후 상왕에 앉혔다. 하지만 이듬해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 사건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여 영월에 유폐시키고 1457년 금성대군이 다시 한 번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처형하고 단종도 은밀히 죽였다.
그는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강화 정책에 착수 한다. 우선 일종의 내각제인 세종 시절의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태종시대 시행하던 육조 직계제를 단행한다. 언론을 봉쇄하고자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그곳에 설치된 서적들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버렸다. 따라서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하여 승정원은 육조 기관의 사무 이외에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함께 관장하게 되었다. 이들 공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 자격으로 조정의 정무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었으니 그들은 평생 보장된 소 황제 들이었다.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 감시하기 위해 태종때 실시했던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니 왕권 강화에는 좋을지 모르나 백성들은 의무만 늘고 피신하거나 어떤 의논도 하기 어려워졌다.
언제 있을지 모를 역모에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 노력하여, 각 고을에 병기를 제조하게 했으며, 모든 읍과 병영의 둔전을 파악하고, 모든 도에 군적사를 파견하여 군정 누락을 조사 감시 하였다.
군사력을 가진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를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니 국방력이 크게 약화 되었다. 이와 같은 중앙 문신위주의 정책은 지방호족의 불만을 사 급기야 이시애의 난 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함길도에서 일어난 이 반란으로 한때 조선은 전운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2. 수양을 위한 변명
그의 통치기간 14년은 그런대로 학문적인 치적이 적지 않다. 그는 동국통감, 국조보감을 편찬해 전대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견지에서 재조명하고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4대의 治法과 政慕를 편집하여 후왕의 통치 법칙으로 삼게 하였다.
왕도 정치의 기준이 될 법제 마련에 힘써 최항으로 하여금 경제육전을 정비하게 했으며, 왕조 일대의 총체적법전인 경국대전의 찬술하였다. 경국대전은 성종 중기에 완성되었으나 국가의 기본이 되는 법률대전 이었다.
1460년에는 호전을 복구했으며, 1461년에는 형량을 규정한 형전을 개편, 완성했다. 종래의 정직관원 모두에게 나눠 주던 과전을 현직관원에게만 주는 직전 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의 업적을 이어받아 공법을 더 발전시켜 민간에 만연해 있던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누에 농업 장려를 위해 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는 등 훈민정음의 일반화에 노력했다. 나아가 향악, 신악 등 세종이 만든 음악을 주로 쓰게 하였으며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 오륜록을 편찬 윤리 기강을 바로 잡으려 했다.
명, 왜 등의 외국과는 유화 정책을 통해 변방의 안정을 꾀했으며 문화 사업도 활발히 벌여 역학계몽, 주역구결, 대명률강해, 금강경언해, 대장경 등을 인쇄 간행했고,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왕들이 지은 시들을 결집한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했다.
세조는 관제개편과 관리들의 기강확립을 통해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 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키려 하였다. 아버지의 가장 큰 업적인 한글과 향악을 크게 장려하여 대부분의 문서를 훈민정음으로 기록하게하고 음악은 향악만 쓰게 하기도 했다. 그는 진실로 아버지의 후계자로 백성들이 알아주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되고 싶어 했다.
3. 세조의 불교 육성
세조는 불교를 장려하여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역대 왕 중 최초로 부처에 절을 하고 큰 불사를 일으켜 원각사란 거대 사찰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의 불교 융성 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공신 대부분은 정통 유학자가 아니었고 신숙주등 정통 유학자들도 자신의 비행이 유학과는 정면 배치되므로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아버지 뜻을 정면 부정하고 형제와 조카, 계모 등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 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반대파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패륜행위를 불교는 눈감고 받아들여줄까? 원각사에서도 불온한 기운은 계속 일어나 부처가 돌아않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다. 물론 그에 반대하는 무리가 도처에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4. 정통성 없는 정부의 한계
세조의 정치운영 에서는 민의보다는 강권으로, 관리의 등용에서도 실력보다는 측근 중심의 인사로 일관한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대간과 의정부 기능을 완전히 축소하고 비서실인 승정원을 중심으로 국사를 운영했는데, 이 승정원과 육조를 모두 정난공신들이 장악하고 전횡하였다. 공신 중 행동대장격인 홍윤성은 작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여염집 유부녀를 빼앗아 정부인이 두 명이 되었으나 왕은 처벌은커녕 벼슬을 높여주고 이를 문서로 인정한다. 즉 공신들은 어떤 비난받을 일을 하여도 왕은 눈감을 수밖에 없는 로봇 신세가 되어갔다. 무척 비윤리적인 일을 함께 하다 보니 그들의 전횡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같은 일이 벌어져도 실세인 공신이냐 평범한 전문 관료냐에 따라 처벌이 크게 달라졌다. 국민들은 정부를 외면하고, 살아남은 관료들도 갈수록 국민에 배척당하는 것을 한탄하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국정의 올바른 길을 건의하고 공신의 전횡이 부당하다며 이를 시정하자는 일종의 항명 서명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 서명에는 신숙주 동생 등 여러 공신의 친척도 이름이 들어있었으니 그들이 얼마나 심적으로 괴로웠는지는 상상이 간다.
그래도 나라가 그런대로 운영된 것은 신숙주등 일부 공신들의 유능함과 아버지 때 좋은 관료가 아직 남아있는 이유에서이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예조판서, 군사통인 한명회는 병조판서, 재무통인 조석문은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직도 겸하여 종사 일을 일관성 있게 처리했다.
5. 수양의 최후
수많은 살육과 패륜을 저지르고 얻은 왕위, 그러나 그의 재임기간은 불과 14년이 되지 못한다.(그래도 50을 넘긴 세종의 아들은 그가 유일함) 늘 병마와 시달리고 죄책감에 술로 세월을 보냈다.
세조는 재임기간 전반기를 살인 하는 데에, 후반기를 죄책감에 시달리며 병을 앓는데 소비한다. 집권 10년이 넘으면서 이미 체력의 한계를 느껴 죽기 전에 미성년의 예종이 원만한 정사를 운영하기 위해 원로신하들에 의한 섭정인 원상 제도를 마련한다. 왕이 지명한 원로대신들이 왕의 비서실격인 승정원에 항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의논하여 서무를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제만 하는 단종 때 황표 정사와 비슷한 제도였다. 세조가 죽기 전에 원상으로 지목한 세 중신은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이었다.
뛰어난 지도자는 쿠데타를 하더라도 거사 성공 후 동지들을 제거하거나 이들의 전횡을 방지하는 장치를 마련한다. 그러나 세조는 죽을 때까지 이들에 의지하며 나아가 자신이 죽은 후까지 부탁한다.
세조는 단종이 정승들에게 포위되어있어 구출하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했는데 똑같이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이다. 이미 악화된 자신의 건강은 회복되기 어렵다고 생각한 그는 1468년 9월에 19세의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그 다음날 52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는 정희왕후 등 2명의 부인에게서 4남 1녀를 얻었으며 능은 남양주 광릉이다.
* 세조의 가계도
가) 정희왕후
장남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 -소혜왕후(인수대비 -한확의 딸)
차남 예종(해양대군) -장순왕후(한명회의 딸). 안순왕후(소혜왕후의6촌 동생)
장녀 의숙공주 - (하성부원군 정 현조-정인지의 자)
나) 근빈 박씨
서장남 덕원군(서)
서차남 창원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