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는 하나의 스포츠가 아닌 "일본 문화와 전통" 그 자체. "
"일본의 스모 도장은 철저한 계급사회와 부익부 빈익빈이 지배하는 세계."
▌스모(相撲)란 무엇인가?
스모란 직경 4미터 55센치의 작은 원형의 흙판(점토질)에서 180센치에 140킬로를 능가하는 거구들이 상대방을 흙판 밖으로 밀어내거나 흙판내에서 상대방이 땅을 짚거나 넘어지도록 하기 위해 서로 공격하는 운동이다. 우선 몇가지 표면적인 것들만 보더라도 우리 민속씨름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선 시간제한이 없다는 것이고, 우리의 모래판에 해당하는 흙판도 우리 보다 훨씬 작을 뿐만 아니라 모래가 아닌 단단한 흙에서 경기를 임하는 것이 특이하다.
더욱이 샅바(마와시)를 잡고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샅바를 잡기 위한 싸움이 스모 경기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경기적인 측면에서도 상대방을 장외로 밀어내는 것이 승부수로 인정된다. (우리의 경우 기술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장외가 선포될 경우 다시 샅바를 잡고 경기를 재개한다.) 그런데 이러한 표면적인 것은 그야말로 스모를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매우 작은 부분이고, 우리가 스모 경기를 보면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스모가 하나의 스포츠가 아닌 "일본 문화와 전통" 그 자체라는 점이다. 사실, 스모의 전통과 규칙을 이해하게 되면 그만큼 일본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게 된다.
스모의 역사
일본 스모는 본래 일본 천황의 유흥을 위해 시작되었다. 물론, 스모라는 운동 자체의 유래를 따지고 들어가면 일본 고대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나 역사적 고증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현재와 같은 경기방식과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일본 헤이안시대인 734년, 793년, 1174년에 각각 쇼오부(聖武), 간무(桓武), 다까꾸라(高倉) 천황이 지켜보는 앞에서(이것을 일본에서는 덴란(天覽) 스모라고 함) 당대의 내노라하는 리끼시(力士)들이 승부를 겨룬 것이 그 효시이나, 현재와 같은 경기방식으로 정기적으로 대회가 개최되기 시작된 것은 에도시대인 1757년부터이다. 그러니까 약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실체적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일본인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나마도 그때 당시에는 경기방식, 경기규칙, 리끼시에 대한 처우 등이 그다지 정교하지 못했고, 현재의 시스템이 도입된 시기는 메이지시대인 1890년부터이다. 이때에 일본 최초의 요꼬즈나(橫綱)인 니시노우미(西海)가 탄생하였고, 1909년에 료오고꾸(兩國) 국기관이 스모 전용 체육관으로 개관하였고, 1925년에 재단법인 일본스모협회가 발족함으로써 그후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현재 스모경기에 사용되는 료오고꾸 국기관은 대대적인 리모델링끝에 1985년 재개관한 것이다.
스모 선수의 조건
스모 선수가 되기 위한 조건은 우선 신체적으로 키가 173센치, 체중이 75킬로를 넘어야 하며, 23세 미만이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이 15~17세 정도에 스모에 입문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이러한 신체적 기준 뿐만 아니라 일본스모협회에 등록된 해야(일본말로 방을 뜻하는 단어,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스모 도장)에 들어가야 하며, 거기서 출세식을 거쳐 첫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된다.
본래 일본 국적을 가진 자만이 스모에 입문할 수 있었으나, 1960년대에 들어와서 외국인에게도 그 문호를 개방했으며, 다까미야마라는 첫 미국인 스모 선수를 효시로 하여 1980년대 들어 외국인 선수들의 입문이 잇따랐으며 고니시끼가 첫 오오제끼, 아케보노가 첫 요꼬즈나에 등극한 이후로 외국인 선수들은 일본 스모계를 사실상 이끌어가기에 이르렀다. 현재 2명의 요꼬즈나 모두가 외국인 출신이다. 아사쇼오류는 몽고 출신이고, 무사시마루는 하와이 출신이다. 최근들어 한국인 최초의 마꾸우찌(幕內, 일종의 메이저리그) 선수가 탄생한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치 않다. (한국인 최초 스모 메이저리거는 바로 김성택, 일본식 리끼시명 가스가오-春日王이다.)
스모 대회 운영방식
스모는 1년에 6차례 일본내 각지방을 순회하면서 개최된다. 즉, 매년 홀수달에 약 15일간에 걸쳐서 경기가 진행이 되며, 도오꾜에서 3회를 비롯, 오오사까, 나고야, 후꾸오까에서 각 1회씩 개최한다. 체급별로 백두, 한라, 금강 등을 구별하는 우리 씨름과 달리 일본은 철저한 계급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다. 즉, 메이저리그에 해당하는 마꾸우찌(幕內)와 주우료(十兩), 그리고 그 밑으로 마이너리그에 해당하는 마꾸시따(幕下), 산단메(三段目), 조니단(序二段), 조노꾸치(序口)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메이저리그인 마꾸우찌와 주우료는 대회 15일간 매일 경기가 치루어지며, 마이너리그인 마꾸시따 이하는 격일제로 7일간 경기가 진행된다. 한 선수가 하루에 한 경기씩만 벌이며, 15일(혹은 7일)간의 성적을 토대로 최종우승자를 가리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는데에 있어서 특별대우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마이너리그 모든 경기에서 7전 전승을 계속 거두더라도 최소한 1년반은 지나야 메이저리그인 주우료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2년간 12개 대회에서 한번도 지지않고 전승을 거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대개의 경우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더라도 3~4년 걸릴 수 밖에 없다. 참고로 몽골 출신으로 금년 3월에 요꼬즈나에 등극한 아사쇼오류(朝靑龍)가 역대 최단기간 마꾸우찌 승진 기록을 세웠음에도 불구 만 2년이 걸렸다. 전통과 계층을 중요시하는 일본 문화가 스모 경기에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무명의 스타가 돌연 천하장사로 등극할 수 있는 우리의 민속씨름과는 사뭇 그 운영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요꼬즈나와 오오제끼(大關)에 승진하기 위한 조건이다. 마꾸우찌에는 요꼬즈나와 오오제끼 이외에도 세끼와께(關脇), 고무스비(小結), 마에가시라(前頭) 등의 계급이 있는데, 고무스비가 되기 위해서는 마메가시라 상위계급에서 9승 이상을 해야하며, 세끼와께가 되기 위해서는 마에가시라 기준으로 10승, 고무스비 기준으로 8~9승을 해야 승진할 수 있다.
오오제끼가 되기 위해서는 고무스비 이상의 지위에서 3개 대회 연속 10승 이상을 거두어야 할 뿐만 아니라 3개 대회 통산 33승 이상이 되어야 한다. 통상적으로 우승하기 위한 승수가 12~14승 정도임을 감안할 때에 이는 3개 대회 연속으로 우승권에 근접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아무리 통산 전적이 뛰어나더라도 3개 대회 연속 성적이 이같은 요건을 채우지 못할 경우 오오제끼 승진은 물건너간다.
요꼬즈나가 되기 위해서는 오오제끼의 지위에서 2개 대회 연속으로 우승을 해야 한다. 역대 요꼬즈나 중에서 통산 우승이 2회인데 요꼬즈나가 된 사람도 있는 반면, 통산 우승이 5회임에도 요꼬즈나가 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바로 2개 대회 연속이라는 조건을 달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오제끼가 되기 위한 조건도 위와같이 까다로운데 요꼬즈나는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은 3~4년간 계속해서 최정상급의 성적을 유지해야만 승진할 수 있는 오오제끼와 요꼬즈나에 대해 선망의 차원을 넘어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일본 스모에 남아있는 전통들
일본 스모에 있어서 그 전통적인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경기심판인 교오지(行司)이다. 요꼬즈나가 출전하는 경기의 심판만 보는 기무라쇼오노스께, 오오제끼가 출전하는 경기의 심판만 보는 시끼모리이노스께를 비롯, 각 계급별로 별도의 심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수백년전의 전통의상을 그대로 입을 뿐만 아니라 말투와 행동도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서 해오고 있다. "핫끼요이, 노꽀따"라는 심판의 경기중 구호는 바로 수백년간 이어져온 일본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무라쇼오노스께와 시끼모리이노스께는 지금까지 세습제로 운영되어오고 있다. 즉, 심판을 지망하는 자를 외부에서 양자로 들여 가업을 잇도록 하는 방식으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65세 정년이 되면 은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철저한 계급제로 운영되는 스모 도장
스모 도장에 해당하는 헤야(部屋)는 그야말로 철저한 봉건적 신분사회이다. 도장 내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선수는 쯔께비또(付人)와 데시(弟子)를 거의 자신의 몸종 부리듯이 한다. 통상적으로 요꼬즈나나 오오제끼의 지위에 오르면 쯔께비또와 데시를 합쳐서 6~7명의 대군단을 이끌게 된다. 이들간의 계급문화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먹는 것, 용변보는 것, 잠자는 것, 외출하는 것 등 모든 것에 있어서 철저한 차별이 존재하며, 항명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계급이 낮은 선수는 빨래, 청소, 식사준비, 설겆이, 잡일 등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되기에 운동 연습할 시간이 거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빨리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는 이상 상위 계급으로의 승진은 사실상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일본의 스모 도장은 철저한 계급사회와 부익부 빈익빈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보면 될 것이다.
빛나는 스모의 기록들
역대 통산 최다 우승자는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다이호(大鵬)로 32회 우승의 급자탑을 쌓았다. 당시에는 1년에 5개 대회 밖에 개최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실로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는 52연승이라는 최다연승 기록을 근 20년간 보유했었을 뿐만 아니라 역대 최다 15전 전승 우승(11회)의 기록도 갖고 있다.
통산 2위 기록은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치요노후지(千代富士)로 31회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다이호가 190센치에 180킬로라는 거한이었던데에 반해 치요노후지는 185센치에 130킬로라는 가냘픈(?) 체구로 자신 보다 수십킬로 더나가는 선수들을 뛰어난 기술로 굴복시킴으로써 일본인의 자존심을 최대한 높인 선수로 기억에 남아있다.
통산 3위 기록은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기따노우미(北海)이다. 27회 우승이라는 기록 이외에도 그는 최연소 오오제끼, 최연소 요꼬즈나 등의 기록을 세워 다까노하나에게 깨질 때까지 무려 20년간 그 기록을 이어왔다.
통산 4위 기록은 1990년~2000년대를 풍미했던 명문 스모 집안 출신 다까노하나(貴花)이다. 요꼬즈나였던 큰아버지와 오오제끼였던 아버지 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그는 각종 최연소 기록을 세우는 가운데 22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우리에게는 영화배우 미야자와 리에와의 로맹스로 더 유명하다. 그의 수려한 외모와 귀공자다운 행동은 한때 일본 젊은 여성들 모두를 광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다까노하나는 형인 와까노하나와의 사상 첫 형제 요꼬즈나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들이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리는데에 있어 서로간에 얽힌 묘한 인연이 있어 일본 스모는 더욱 그 흥미를 더해왔다. 20세의 기따노우미는 당대 최고의 요꼬즈나 다이호를 물리침으로서 세상에 존재를 알리게 되고, 다이호는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한다. 치요노후지는 130킬로의 왜소한 체구로 거구인 180킬로인 기따노우미를 당당하게 물리쳐서 세상의 주목을 받았으며, 기따노우미는 바로 이 경기를 끝으로 스모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다까노하나는 치요노후지와의 경기에서 승리함으로써 화려한 데뷔를 고하는 동시에 치요노후지 역시 무대 뒤로 사라지게 된다.
사족으로 이야기하자면 요꼬즈나의 1년 연봉은 약 30억원(3억엔)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우승상금, 후원비, 광고출연료 등을 모두 합치면 50억원 이상이 된다. 그러나, 돈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명예이며, 요꼬즈나는 일본 천황을 배석자 없이 단독으로 만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존경과 신뢰를 한몸에 받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화'로서의 상징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김인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