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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성의 동쪽에 위치하므로 성동구라 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대부분 한성부에 속한 성 외 (광희문 밖) 지역이었다, 1943년 4월 성동구가 되었고 1975년 10월 성동구의 일부가 강남구로 나누어졌다, 1988년 성동구 일부가 관진구로 신설 되었다,
@ 유래 동명 유래
(1) 1)금호동 2)도선동 3)마장동 4)사근동 @ 살꽃이 다리 전관교
(2) 5)왕십리동 6)성수동 7)송정동 8)옥수동
(3) 9)용답동 10)응봉동 11)행당동 12)홍익동
① 금호동(金湖洞) 도선동(道詵洞) 마장동(馬場洞) 사근동(沙斤洞)
☞ 금호동은 옛 한성부 관내에는 수철리(水鐵里)라는 마을 이름이 두 군데 있었다, 곧 마포구 신수동, 구수동의 수철리와 성동구의 수철리이다 성동구 수철리는 조선 중기 때 쇠를 녹여 무쇠 솥이나 농기구 등을 만들어 조정에 바치거나 시전에 내다 파는 야공(冶工)들이 모여 살았고, 대장간이 많았던 곳으로 그 움막이 있어 무쇠막, 무시막, 무수막이라고도 하였다, 그러 무로 마포의 수철리(무쇠막)와 구분하여 이곳은 동무수막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은 곧 한성부의 남부 두모방(豆毛坊)(성밖) 수철리계에 속하였던 곳으로 1914년 4월 1일 총독부령으로 경성부가 다시 확정될 때 이곳은 금호정이 되고 말았는데 여기서 금호라는 이름의 배경을 살펴보면 금(金)은 수철리의 철(鐵)에서 따왔고 호(湖)는 수철리의 수(氵)에서 변용한 것으로 본다, 금호동 법정동은 1가~4가까지 구분 되어있다,
※ 동네 특산물 = 한성부 서민(庶民)들 사이에 각 동네 특산물의 대한 전설이 전해 오는 말로는 잔다리는 게(蟹)장수,(게해(蟹)자) 누각골은 쌈장수, 구리개는 약방, 두뭇개는 콩나물장수, 홍제원은 인절미장수, 용머리는 무장수, 제터골(제기동)은 토란장수, 왕십리는 배추장수, 서빙고는 얼음장수, 동작리는 모래장수, 공덕리는 소주장수, 마포는 새우젓 장수, 이태원은 복숭아장수, 전성골은 저육장수, 숭동(명륜동)은 앵두장수 동대문 안은 객주, 자하문 밖은 화초장수, 갈우리(갈월동)은 청포장수, 수구문(관희문)은 끈목장수 와 함께 이곳은 물쇠골 솥 장수로 알려질 만큼 그들의 생업이 곧 무쇠 다루는 일이었다,
☞ 도선동은 신라 말기에 비기도참설(秘記圖讖說)을 들여온 도선국사의 이름을 따 도선동이라 하였다, 도선국사의 이름을 딴 것은 그가 무학봉에서 수도(修道)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조선 개국 당시 태조의 명으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왕십리에 와서 지세(地勢)를 살피고 있었는데 소를 타고 지나던 한 노인이 무학대사를 보고 서북쪽으로 10리를 살피고라고 도선대사가 나타나 그를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 10리에 속했으며 영조27년(1751)에는 동부 인창방(성외) 왕십리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년) 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 왕십리계 단지동이 되었다, 1914년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에 속했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일제식 명칭으로 변경함에 따라 경성부 하왕십리정이 되었다가, 1943년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성동구 하왕십리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하왕십리동에 속해 있었으며 1963년 서울특별시 조례 제353호에 의해 하왕십리동에서 분동하여 도선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 마장동의 남쪽 중랑천 건너에는 뚝섬이 있으며, 서초구에 서초동이 있다, 마장동은 조선 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養馬場)이 있었으므로 마장동이라 하였는데 제주도 같은 데서 말이 한양으로 올라오면 암놈은 지금의 자양동(紫陽洞)과 모진동(毛陣洞)으로 보내졌고, 수놈은 마장동의 말 목장에 보내서 길렀기 때문에 마장동이라 하였다, 지금은 살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마장동에 가축시장과 도살장이 들어선 것이 옛 말목장과 어떤 인연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더구나 뚝섬에는 경마장이 있던 곳이어서 옛날 말을 먹이던 뚝섬이 말의 경주장으로 된 게 꼭 우연 같지 않게 느껴진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에 속해 있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동서 동소문(외계) 마장리라고 하였다, 1911년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 마장리라고 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마장리라 하였다, 그 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성부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일제식 동명인 마장동이라 하였으며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하여 성동구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마장동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사근동은 청계천을 끼고 있는 사근동의 동명은 신라 때 세워진 사근사(沙斤寺)가 현재의 한양대학교 축구장 부근에 있기 때문에 유래 되었고 또한 절이 낡아 이 마을을 사근절이라 불렀다, 조선초기에는 한성부 성저10리에 속했던 사근동은 갑오개혁(1894년) 때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사근리로 나타나고 한일합방 후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는 일제가 경성부 인창면 사근동이라 칭하였다, 얼마 전까지도 사근동은 미나리와 채소가 많이 재배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한양대학교가 세워진 곳에{치마바위}라고 하는 치마를 두른 모양의 큰 바위가 있었다, 이 치마바위는 일제 때 도로 확장을 하면서 폭파되었는데 붉은 피가 흘러 공사를 중지했다는 설도 있고 또 이곳이 풍수지리설에 의 하면 화신(火神)이 되므로 화재 예방책으로 이 바위에 검은 칠을 하였다고한다 그러나 이 바위 위에는 한양대학교 미술대학이 세워져 있다,
※ 살꽂이 다리 (전관교(箭串橋) 사근동에 대석교(大石橋)였던 전관교 “즉,, 살꽂이 다리가 있다, 세종11년(1420년)에 세종대왕이 태종의 영으로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 박자청(朴子淸)을 시켜 놓은 다리이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성종 때 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는 한양 길을 오가는 행인들을 유숙(留宿)케 하는 살꽂이원 ”즉,,전관원이 있었기에 다리 이름을 살 꽂이 다리라 하였던 것이다, 또한 다른 전설(傳說)이 있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의 난 때 둘째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전해 주고 함흥(咸興)으로 떠났다, 태종이 등극하자 부왕을 모셔오기 위하여 차사(差使)을 보내었으나 가는 차사마다 죽음을 당하여 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 한다 하여 함흥차사라는 일화가 있다,
마지막으로 무학대사가 설득(說得)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부왕을 맞을 준비를 하여 태종이 살꽃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갔는데 좌의정 하륜(河崙)이 그냥 마중하시면 위험 하오니 앞에다가 기둥을 얼기설기 세우서소 하여 기둥을 세우고 부왕을 마중하였더니 태조가 별안간 활을 태종을 쏘자 태종이 급히 기둥을 안고 피했으므로 화살이 기둥에 꼿혔다, 이에 태조가 막비천운(莫非天運)이로다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또 태종이 부왕께 잔을 올리는데, 미리 하륜이 일러 준 대로 직접 잔을 따라 올리지 않고 중간의 신하에게 잔을 바치게 하자 태조가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 놓으면서 “모두 천명(天命)이로다 하였다, 잔을 바치는 의식이 끝나자 태조는 태종에게 옥새(玉璽)를 꺼내서 내던지면서 ”옜다, 이놈! 네가 종당 탐내던 게 바로 이것이지,, 하였다고 하며 그로 인해 이곳을 살꽂이다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② 왕십리동(往十里洞) 성수동(聖水洞) 송정동(松亭洞) 옥수동(玉水洞)
☞ 왕십리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밖 10리에 속했으며 영조27년(1751년)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 왕십리라 했으며 고종2년 육조 조례에 의하면 왕십리 1, 2계(契)가 되어 상왕십리 지역은 왕십리 1계가 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때 다시 왕십리계로 통합되었다, 1911년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서울을 축소시키고 여러 동을 통합하여 자의로 각 동명을 만들 때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상왕십리라 하였다, 1936년 조선 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경성부에 편입되어 상왕십리정으로 개칭되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하여 성동구 관할 내에 속하였다 1946년 군정법령 제108호에 의해 경성부를 서울특별시로 고치고 이어 서울시 현장 제1조에 의하여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왕십리를 양분하여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왕십리의 유래 무학 대사가 조선의 도읍지를 정하려고 이곳을 살펴보는데 소를 모는 늙은이로 변신하여 나타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소를 몰고 오다가 『이랴, 이놈의 소가 미련하기가 마치 무학 같구나, 어째 바른 길을 두고 지름길로 가려드느냐』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무학도사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학은 소를 몰고 가는 그 노인을 얼른 뒤를 쫓아가 땅에 무릎을 끓고 절을 하면서 『죄송하지만 말씀 좀 여쭈어 보겠습니다!』하니 그 노인은 돌아다보지도 않은 채, 무슨 말이오? 하며 그대로 소를 몰고 가는 것이다,
무학은 다시 쫓아가면서, 지금 듣자 하오니 소한테 무학같이 미련하다고 하셨는데 저의 생각(生覺)에는 이곳이 도읍지(都邑地)로 가장 알 맞는 것 같아 결정을 하였는데 어디 더 좋은 곳이 있으며 소승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간청을 하였다, 그런 것을 내가 어찌 안단 말 이오 하고 그 노인은 그냥 소를 몰고 가려고 하는 것을 무학은 다시 절을 하고 엎드려 강청했다, 그 노인은 그제 서야 걸음을 멈추고 여기에서 십리만 더 가 시오 하고 손을 들어 가르쳐 주어 마침내 궁궐의 자리를 정했다는 전설이 있어 왕십리라 부른다고 한다,
☞ 성수동은 조선시대에는 뚝섬 전관, 전교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영조27년(1751년) 수성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두모방(豆毛坊) 전관2계(箭串二契) 전관동 이었다, 전관이란 곧 우리말의 살곶이를 말한다, 경술국치(1910년) 이후 이곳은 둑도(뚝섬)2계가 되었고 다시 둑도면 서 둑도리가 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서울시 행정구역 확정 때 서울시에 편입되었으며 1950년 3월 15일 지금의 이름인 성수동으로 바뀌었다,
당시 성수동으로 바뀐 내력을 보면 성수동 110번지 천주교 성당자리에 조선시대에 성덕정(聖德亭)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또 이곳에 새로 만들어진 수원지가 있으므로 성덕정과 수원지에서 머리글자를 취하여 성수동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수동이라는 이름은 일제 때의 서둑도리 나 둑도면 과는 관계가 없다, 다만 성수리는 이름이 해방 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비록 살곶이 나 뚝섬(임금이 직접 나와서 둑기(纛旗)를 꽂으므로 둑도라 한다, #독(纛)자는 둑독자)과 같이 조선시대 임금의 사냥터로 알려진 이 일대의 옛 이름이 동 이름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어서 여기에 적는 것이다, 법정동 성수동은 성수1가 1동, 성수1가 2동 성수2가 1동, 성수2가 3동으로 구분 되어있다,
☞ 송정동 이 동의 동명유래는 문헌이나 구비설화로 내려오는 것은 없어 그 유래를 알 길이 없으나 다만 송정동 앞에 송마장벌 또는 양마장평으로 불리는 들판이 있는데 이곳에 양마장 솔마장과 관계가 있어 숫말장 즉 숫말을 기르는 곳이라 하여 숫마장으로 부르던 것이 차츰 전음(轉音)되어 송마장으로 되고, 다시 한자로 바꾸어 송정(松亭)을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의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년) 때에는 한성부 남부 두모방(성외) 전관계 장내능동이 되었다, 일제 감정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한성부 두모면 장내능동이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령 제7호에 의해 경성부 행정구역을 새로 정할 때 경기도 고양군 둑도면 송정리라 하였다, 그 뒤 1949년 대통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동구에 속하였으며 1950년 서울시 조례 제10호에 의해 송정리를 송정동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옥수동은 조선 후기에 한성부 남부 두모방(성밖) 두모포계(豆毛浦契)에 속한 곳이다, 이 일대는 조선조 때 두맷개, 두물개로도 불렀는데, 그 까닭은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과 북쪽에서 흘러오는 중랑천이 옥수동 앞에서 합해지므로 두 물이 합해지는 개(浦)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한자의 두모포는 두못개에 한자를 차자(借字)한 것에 불과하다 지금의 옥수동이란 이름은 이곳 339번지에 그전에 옥정수(玉井水)라는 유명한 우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옥수동 8번지를 빙곳골, 핑곳골 또는 빙고동이라 부른다, 이곳은 본래 동빙고가 있던 자리로서, 지금은 교회가 세워져 있다, 빙고동은 조선시대에 제사용 얼음을 보관하였다가 궁중에 진상하던 곳이다,
1936년 4월 1일 일제가 경성부를 대폭 확대 개편할 때 그전 고양군 한지면 두모리를 옥수정으로 고쳤고 그 이름이 오늘날의 옥수동이 되었다, 옥정수란 우물은 4, 19 이 후 옥수로(玉水路)가 개통되면서 그 이름만 도로에 넘겨주고 우물은 사라져 버렸다, 옥수동 앞의 한강에는 저자도(楮子島)라는 큰 섬이 있어서 경치가 좋고 낚시터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또 가뭄이 들면 나라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이 섬은 한강 개발과 압구정동의 아파트 신축 때 모래자갈을 파내어 지금은 사라져 버렸으며 닥나무가 많아서 닥점 이라는 마을도 있었던 곳이다, 옥수동은 현재 1동과 2동으로 되어있다,
※ 얼음 저장하던 곳 이곳에 얼음을 저장할 때는 지금은 없어진 저자도(楮子島) 부근의 개천(청계천) 하류의 얼음은 피하고, 깨끗한 상류의 얼음을 겨울철에 저장했다, 그리고 매년 8월이면 이 빙고의 천장과 울타리를 고치고 수리한 후, 겨울에 얼음을 채취할 때는 끈을 얼음에 동여매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강가에는 장작불을 피워서 인부들이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하였다,
빙고(氷庫)는 위아래와 사방을 덮어 얼음이 녹지 않도록 하였고, 매년 종묘사직의 제례 때 이곳에 보관해 둔 얼음을 사용했다, 이 얼음 창고는 연산군 때 용산구(동빙고동과 서빙고동)로 옮겨졌다, 또 옥수동 산 1번지에는 사한단(祠寒壇)을 두어서 수우신(水雨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얼음이 얼게 해달라고 동빙제(凍氷祭)를 지냈다, 이곳의 제사는 음력 섣달 상순에 얼음을 채취할 때 올렸고 춘분이 되어 얼음 창고의 문을 열 때 여기에 제사를 지내 후 얼음을 내주기 시작했다,
③ 용답동(龍踏洞) 응봉동(應峰洞) 행당동(杏堂洞) 홍익동(弘益洞)
☞ 용답동은 1975년 서울특별시 조례 제979호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두동(龍頭洞)과 답십리동(踏十里洞)의 각 일부를 합하여 머리글자인 용(龍)자와 답(踏)자를 따서 새 동을 만들면서 용답동이라 하였다, 이때 성동구의 중곡동, 능동, 군자동의 일부를 분할하여 동대문구 장안동으로 하고 남쪽으로 들어온 동대문구의 용두동, 답십동의 일부를 성동구 용답동으로 하였다,
☞ 응봉동은 이곳 한강변에 솟아 있는 응봉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응봉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이 이곳에서 매를 날려 사냥을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은 산의 모습이 매(매응(鷹)자)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거나, 매=뫼(뫼산(山)자)의 뜻으로 매봉이라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곳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 성저10리에 속하였으며 조선중엽 영조27년에 나온 수성책자(守城冊子)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남부 두모방(豆毛坊) 신촌리계(新村里契)로 나타나 한성부 5부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한일합방 이후 경성부 두모면 신촌리로 불리다가 1914년 4월 1일에는 경기도 고양군에 속하여 한지면 신촌리로 개칭되었으며 1936년 구제도 실시에 따라 성동구에 속하였고 해방 후 일제식 동명일소에 따라1946년 10월1일 응봉동으로 개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응봉동 지역이 조선시대 신촌 즉 새말 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살곳이 다리부근에 있던 10여호를 매봉 밑에다 새로 터를 잡아 이전하였다, 하여 새말 또는 한자로 신촌이라고 하였다,
☞ 행당동은 조선 후기 때부터 칭해 내려온 것으로 행당 초등학교 동쪽 산 일대에는 아기씨당이 위치한 곳에 옛 부터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아 행당동이라 하였다, 조선 초에는 한성부 성저10리에 속했는데 이 마을이 질퍽한 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진편리 또는 진판리라 하였으며 영조 때에는 한성부 남부 두모방 신촌리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년) 때에는 한성부 남서 두모방(성외) 신촌리계 행당리동 전관1, 2계의 전관동으로 되었다, 1911년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하여 경성부 두모면 행당리 전관동으로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행당리 전관동이 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경성부에 소속시켜 행당동이 되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163호에 의해 앞서 동대문 출장소가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뉘어져 행당동은 성동구에 속하였다, 1964년 서울시 헌장 제1조에 의하여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행당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기씨당의 주신은 결혼을 하지 않은 고귀한 신이며 매년 10월 초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 홍익동은 홍익이란 곧 우리나라 시조 단군(檀君)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뜻하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홍익동은 1959년부터 사용하였다 (성동구 12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