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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너와 나의 쉼터 ♣ 원문보기 글쓴이: 농원
오늘의 우리는 과거 역사의 작품이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
역사를 모르면 인간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역사를 모르면 왜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가‘를 알 수 없다. 인생의 희망찬 미래를 열기 위한 진리의 눈을 뜰 수가 없다. 인생사를 대국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여는 지름길이 바로 역사를 아는 데에 달려 있다. 역사란 다름 아닌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지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룩한 문명 진화의 총체이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 역사가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모르면 현재를 진단할 수도 없고,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다., 지구촌의 정세를 훤히 꿰뚫어보는 국제정치의 대가라 해도, 인류의 원형 문화와 시원 역사를 모르고서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문명, 인류의 미래 문명을 알 수도 준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 놓고서 성(姓)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지금 한국인은 제 나라 역사도 모르는 정신적 미아로 살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살려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 된다. 그 중에서도 한민족의 창세역사와 원형문화를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뿌리 역사는 왜곡되어 잃어버리고 꼬리 역사만 배우고 있다. 우리의 뿌리 역사와 한(韓) 문화의 원형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일은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 모두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다.
중독, 왜독, 양독의 폐해그동안 우리의 시원 역사를 단절시키고 파괴한 여러 손길이 있었다. 그 가운데 첫째가,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과 그 왜곡 내용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우리 유학자들의 존주사대尊周事大 사상, ‘중독中毒’이다. 공자가 주창한 유교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요, 그 밖의 민족은 중국에 예속된 오랑캐에 불과하다는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제창한다.
유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은 고려와 조선의 존화(尊華) 사대주의자들은 이 중화주의 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역사에 끼친 해악은 너무나 심각하다.고려의 유학자들은 한민족의 국통(國統) 맥이 기자조선에서 위만조선, 남삼한, 신라로 연결되는 것으로 왜곡하였다. 그에 앞장 선 인물이 고려 중기 때 김부식이다. 그는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의 역사는 완전히 지워버린 반면, 같은 시대 신라 역사는 망하는 날까지 세세히 기술하였다.
그러면서도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사대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침략자 당나라 이세민을 “우리 당태종(我唐太宗)"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묘청, 정지상 등이 고토 회복을 위한 발판으로 벌인 서경천도 운동을 벌였을 때,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집권층 유학자들이 이것을 권력 장악을 위한 음모라고 몰아붙였다.
유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조선은 개국 초 춘추(공자)와 자치통감 강목(주자)만 사필(史筆)로 여기고, 한민족의 고유사서들은 이단이라 하여 모조리 압수 소각하였다. 태종은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던 고유사서들을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하여 소각하였으며, 세조에서 성종까지 3대에 걸쳐 전국 관찰사에게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이렇게 우리의 정통 사서들이 소실된 것은, 오늘날 우리 역사의 올바른 인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한민족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국측 사료와 이 땅의 사대주의 사서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광해군 때 청 태조 누루하치가 보낸 국서를 보면 조선의 사대 근성이 적나라하게 고발되어 있다. “요동은 본시 조선의 국토다. 지금 명나라 사람들이 그 땅을 빼앗았는데, 너희는 명나라가 원수인 것도 모르고 도리어 신복하고 있다”
고 조선을 꾸짖고 있다.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조선 유학자들이 보였던 열렬한 모화정신(慕華精神)이다. 이것은 진실로 한국사의 뿌리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망국멸족(亡國滅族)의 표본이다. 세종 때 최만리는 훈민정음 제정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조종(祖宗)” 이래 지성으로 중국을 사사(師事)하고 모두가 중국 제도를 본받아 왔는데 만약 훈민정음이 중국에 전해지는 날에는 사대모화에 부끄러운 일이라“하였다.
동방의 명현이라 불리는 이퇴계는 명(明)을 ‘본조(本朝)’,즉 ‘내 나라의 조정’이라 부르며,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단군시대는 아득한 태고시대라 증명할 수 없고, 기자(箕子)가 봉해지고 나서야 겨우 문자를 통했으며, 삼국시대 이전은 별로 논할 만한 것이 없다“고 폄하하였다(대동야승(大東野乘) 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 이율곡 또한 명나라 군주를 ‘우리의 황상(皇上)이라 하고, 명나라 조정을 ’천조(天朝), 또는 ‘성조(聖朝)로 불렀다(율곡전서(栗谷全書) 본국청개종계주본(本國請改宗系奏本) 그리고 기자에 대해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지어, “기자께서 조선에 이르시어 우리 백성을 천한 오랑캐로 여기지 않고 후하게 길러주시고 부지런히 가르쳐주셨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에게 한없는 은혜를 받았으니 그것을 집집마다 노래하고 사람마다 잘 알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단군의 출현은 문헌상 상고할 수가 없다”라는 한 마디로 한민족의 상고 역사 전체를 부정하였다(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기자실기(箕子實記)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칭송을 받는 송시열은 “오로지 우리 동방은 기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다 변화되지는 않았고 … 기자께서 동쪽으로 오셔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숙종실록(肅宗實錄)' 7, 9]”라고 하였다.
송시열은 사대주의 성지 만동묘를 세우고 말년에는 아예 중국의 관복을 입고 다녔다.고려 때 송(宋)나라 사신이 기자묘(箕子墓)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그 때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하자,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箕子墓)와 기자 사당을 만들었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들을 기자(箕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기자 정전터와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다.
기자 정전터는 고구려시대 도시 구획 흔적이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조각만 나왔다.기자에 관한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고조선(번조선)의 국경지역인 산서성 태원(太原)으로 이주하였다. 망명지 조선 땅에서 6년 정도 살다가 고향 서화(지금의 하남성 서화현)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산동성 조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왕성두촌이라는 작은 마을의 들판에 작고 초라한 모습의 기자묘가 있다.)
김부식은 묘청의 북벌운동을 진압하고 낭가사상을 압살한 경력을 가진 삼국사기의 저자로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사용을 사대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하고 우리민족을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 “我唐太宗”이라고 칭하였다.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비아(非我)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으로 우리 역사를 편찬할 때 발해사(渤海史)를 논하지 않았을 정도로 중국을 지극 정성 섬기며 삼국사기 서술 주체가 중국이고, 객체가 한국이다. 그의 열렬한 모화(慕華)정신은 망국멸족(亡國滅族)의 사대사관의 전통이 되어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위징 등이 쓴 『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고구려(高句麗)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수양제가 장차 토벌을 하려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놓고는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帝將, 이걸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이처럼 "김부식은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그 이후의 모든 역사왜곡의 기본 원전이 되었다. 한국을 점령한 일본제국주의자들도 바로 이 책을 얼씨구나 하고 악용하여 소위 반도사관, 식민사관, 왜식사관을 날조해 낸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러한 사관에 따라 학교에서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조선조에서 석유환국(昔有桓國)의 환국을 자신이 주석을 달면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불교의 제석환국으로 바꾸고, 또한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백두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고 단군 왕검의 도읍지인 아사달(阿斯達)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는 등 배달국, 고조선의 광활한 영역을 반도 안으로 축소하였다. 당시 공자의 춘추와 주자의 강목만 사필(史筆)로 여기고 한민족 정통사서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압수 소각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철학,종교,문화의 중요한 자료들을 말살되었다.
주체적인 사관을 주장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서 죽임을 당하는 최악의 상황이였다. 그래서 우리역사가 사대주의 사관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되고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모든 역사가 왜곡이 되었다.
당대의 실학파 학자들은 어떠하였는가?
박제가는 ‘북으로 청나라를 배우라’는 북학의(北學議)를 지어, 조선의 문물과 제도를 낮춰 비난하면서 중국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은 “ 명나라는 우리의 상국이다. 상국이 속국에게 내리는 물건은 비록 터럭같이 미미한 것일지라도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이 그 영광이 온 나라를 움직이고 경사가 만세에 끼칠 것이다”라고 하며 중국을 칭송하였다(연암집 행재잡록(行在雜錄)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높이 평가하는 실학파의 대표인물 정약용도 중국을 하늘같이 존중하는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조선이라는 명칭은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본디 기자가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라 하여 기자조선이 실존한 것처럼 말하였다.(여유당전서 지리집(地理集) 또한 “ 우리나라는 번국(藩國)이니 마땅히 제도가 작아야 한다”라며, 조선은 제후국이니 중국의 관제(官制)보다 규모가 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경세유표(經世遺表) 천관이조(天官吏曹) 옛날 유학자들의 의식이 다 이렇게 되어 있다. 유가문화의 썩어빠진 역사의식으로 인해 나라가 망해 버렸다.
伏草 최인(崔仁)은 이 같은 행태를 두고 ‘조선은 한일합병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전에 한중합병으로 망하였다’라고 일갈하였다. 조상의 비문 첫 머리에 유명조선(有明朝鮮:명나라에 속한 조선)을 내세우고, 조선 백성을 명(明)의 신민(臣民)이라 하고, 한문은 진서(眞書)로 존중하면서 한글은 언서(諺書)로 무시하였으니, 분명히 한중합병이라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 역사를 돌이켜보면, 참으로 혼 빠진 민족이 아니고 무엇인가.단재 신채호는 외래종교, 외래사상에 물들어 역사와 문화를 다 잃어버린 가련한 한민족에 대해 이렇게 통탄하였다.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함으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당나라 때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은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고 썼다.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중국에 의해 왜곡 조작된 기자조선의 실체‘
원래 은나라에 기자, 비자, 미자라는 세 분의 어진 현인이 있었는데, 은나라가 망하자 그 중 한 사람인 기자가 동방으로 가서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기史記』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이라고 하여, 주나라를 연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임명했다고 했다. 하지만 본래 기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의 이복형제로서 ‘기’라는 땅의 제후였다. 그는 은나라가 망한 뒤 벼슬을 않겠다 하고서 옛 고국으로 내려간 사람이다. 그런 그가 무슨 왕이 되었단 말인가. 사마천이 붓대를 갖고 그렇게 조작을 한 것이다.
‘단군조선’이란 말은 전혀 없고, 약 3,100년 전에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그런 거짓말 역사를 쓰고 있다. 이는 이 땅의 역사가 중국의 제후국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매도하기 위한 것이다.
일제에 의해 왜곡 조작된 위만조선의 실체
또 일본 사람들은 우리 조선 역사의 출발을 ‘위만조선’으로 말한다. 조선은 본래 독자적으로 나라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위만조선이 BCE 194년부터이니까, 조선의 역사는 약 2,200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리에 따라 고조선(BC 2333~BCE238)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진한(辰韓)은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이었고, 나머지 마한(馬韓), 번한(番韓)은 부단군을 두어 간접 통치했다. 진한(홍산 적봉 일대), 마한(한반도 일대), 번한(산동반도 일대)의 삼한(三韓)을 22대 색불루 단군때(BCE 1285 ~ BCE 1238) 삼조선 즉, 막조선, 진조선, 번조선으로 변경하였다. 위만(BCE 194)이 강탈한 땅은 번조선의 부단군 기준(BCE 221 ~ BCE 194)이 통치했던 곳이었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삼조선 중,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番朝鮮: 산동성일대)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신채호(1880∼1936) 선생은 ‘그것은 우리의 변방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1712∼1791)의『동사강목』에서는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 이후 조선의 역사에 대해, 지금의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이야기한다. 천하에 불의한 위만이란 자가 번조선의 왕위를 찬탈하고 정권을 잡은 것인데, 그가 나라를 세우고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정신 나간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진조선(眞朝鮮)은 44대 구물 단군때(BCE 425~BCE 397) 국호를 대부여로 개명하였다.
배달국(BCE 3897 ~ BCE 2333)을 계승하여 초대 단군왕검께서 BCE 2333년 전에 아사달(하얼빈)에 나라를 연 것이 고조선이다. 단군조선은 BCE 232년 해모수의 북부여로 계승되고, 북부여는 다시 고구려(BCE 58년)와 대진국(발해,AD 668년)으로 국통맥이 이어진다. 고조선의 시조 초대 단군왕검은 웅족(熊族)으로 배달국 말기인 BCE 2370년 5월 2일에 탄생하셨다. 이후에 배달국 말기의 9환족을 통일하여 아사달(흑룡강성 하얼빈)에 도읍(BC 2333)하였다.
9년 홍수때 단군께서 우임금에게 도움을 준 기록
당시 요순시대의 중국천지가 9년 간 계속된 대홍수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동방 고조선의 천자 단군성조는 105세 되시던 갑술(BCE 2267)년에 태자 부루를 중국 양자강 남방에 위치한 도산(塗山)에 보내 도산 회의를 주재하도록 하고 고조선의 제후였던 순이 특파한 우(禹)에게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비법”을 전수케 하셨다.『吳越春秋』,『歷代神仙通鑑』갑술 67년(BCE 2267년)에 초대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 후에 우임금)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경계도 따져 정했다.『檀君世記』
일제에 의해 왜곡 조작된 한사군의 실상조선의 역사가 중국의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역사말살의 학설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사군漢四郡 대동강설’이다.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네 개의 식민 구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어떠한가? BCE 108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 우거를 멸하려고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다.
전쟁 초기에는 우거왕의 일방적인 승리가 이어졌지만, 장기전으로 가면서 내부의 반란에 의해 결국 왕검성은 무너지게 된다. 우거의 정권은 조선의 왕위를 찬탈해서 만든 한족 정권이기 때문에, 니계尼谿에서 상相이라는 벼슬을 하던 참參이 주동이 되어 우거를 죽여 버렸다. 그러고서 조선의 유민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나라 군에 대항하여 피 터지는 조선족의 독립전쟁을 한 것이다. 당시 조선족의 독립운동이 워낙 강력하게 일어나서 그곳에 자기네들의 사군四郡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런데 『三聖記삼성기』 上篇상에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또 있다. 한 무제가 우거의 왕검성만 정벌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옛 고조선 지역인 만주의 북부여(BCE 239 ~ BCE 58)까지 완전히 먹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동방 한민족사에 최대의 위기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때 군사를 일으켜 의연히 일어난 구국의 인물이 서압록 위에 살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왕대나무에 왕대가 난다고, 진조선(眞朝鮮)의 47대 고열가 단군(BCE 295 ~ BCE 238)의 직계 후손인 고두막한이 나서서 한 무제를 물리쳤다.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한『사기』의 내용을 보면 한 무제는 고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에게 5만7000명의 대군을 주었다. 두 장군은 1년이 넘는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귀국했다. 그러자 한 무제는 좌장군 순체는 사형시킨 후 시신을 조리돌리는 기시(棄市)형(棄市刑, 목을 자르고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형)을 내렸고, 누선장군 양복도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막대한 속전(贖錢)을 바치자 목숨은 살려주되 귀족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위산(衛山)은 고조선과 강화협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이미 사형 당했으며, 제남(濟南)태수 공손수(公孫遂)도 마음대로 군사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형 당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마천의 이 기록을 보더라도, 결코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닌 패전인 것이다. 사마천(BCE 135년~ BCE 90년)은 이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내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이 있었다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쳤고, 한국인은 이것을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다녔다.
\ 북부여(BC 239 ~ BC 58)가 단군조선(단군조선BC2333~BC238)을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삼성기」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北扶餘記」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北扶餘記)」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BCE 108 ~ BCE 60)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이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고대사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날조한 기록상의 첫번째 인물인 2100년 전 한나라 무제(BCE 141~BCE 87) 때의 사관, 사마천( BCE 135 ~ BCE 90 )은 중국 25사의 첫머리인 [사기(史記)]를 편찬했다.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전에 방영했던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BC 239 ~ BC195)와 주몽(BC58 ~ BC19)은 무려 12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BC59~BC58)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BC 239 ~ BC 58)는 47세 고열가 단군조선(BC 295~BC 238)과 고구려(BC 58 ~ AD 668)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 한민족을 제대로 알려면, 한민족 정신의 뿌리를 알려면 부여사를 알아야 한다. 한무제를 물리친 후 고두막한高豆莫汗은 졸본에 나라를 열어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고 칭하였다. 이는 ‘동방 신교의 대광명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졸본부여를 동명부여라고도 한다. 바로 동명왕이 고두막한이고 고두막한이 동명왕인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 다 말살되어 지금 고주몽이 동명왕으로 알려져 있다. 동명왕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해부루 단군을 동쪽으로 몰아내고 5세 단군(BCE 108 ~ BCE 60)으로 등극을 했다. 이로써 북부여의 후기 시대[後北夫餘]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6세 고무서 단군(BCE 59 ~ BCE 58) 때에 이르러 북부여는 막을 내린다. 한편 왕위에서 밀려난 해부루 단군은, 국상 아란불과 함께 우수리강 지역의 가섭원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을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라고 하며, 금와와 대소로 왕통이 이어졌다.
그러면 세상에서 동명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고주몽은 어떤 인물인가?
그분은 고구려의 창업 시조이다. 원래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고무서(BCE 59 ~ BCE 58)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북부여의 BCE 58년에 7세 단군이 되었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변경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668년에 망했다고 배워왔다. 그러니 고구려 역사는 기껏해야 700년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신라의 고운 최치원의 글을 보면, ‘중국에서도 고구려 역사를 900년으로 알고 있더라’고 했다.
어떻게 해서 900년이 되는 것일까? 『三聖記삼성기』 上상에 그 해답의 실마리가 되는 놀라운 내용이 있다. “사해모수祠解慕漱하여 위태조爲太祖라”, ‘해모수를 태조로 하여 제사를 모셨다’는 것이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것이 BCE 239년이니까 668년까지, 900년이 조금 넘는 역사가 나오는 것이다.일본의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의 시원역사가 뿌리째 뽑혀버렸다.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글자 한자를 바꿔서 7천 년 역사를 싹 제거해 버렸다. ‘너희들 역사는 다 신화의 역사다. 환인, 환웅, 단군은 다 신화의 인물이다’라는 것이다. 이 식민사관의 ‘왜독倭毒’에서 우리는 아직도 전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시책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에,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보면, ‘51종 20여 만 권 정도를 가져갔다’
일본인들은 서적 약탈뿐 아니라 1922년 12월 달에 ‘조선사편수회’ 즉,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1938년까지 본문만 35권이 되는『조선사(朝鮮史)』를 일본인들이 만든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 이병도는 今西龍(이마니시류)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 일등 공로자가 된다.
이병도의 화려한 약력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을 지냈고, 34년 진단학회(震 檀學會) 창립에 참여,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5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듬해 국사편찬위원, 56년 진단학회 이 사장, 60년 교육부장관 역임 등. 역사 날조에 앞장섰던 사람이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교육부장관까지 했으니 우리 역사가 해방 후에도 바로잡힐 리가 없다. 그리고 그 밑에서 역사를 배운 후학들은 도대체 어떤 역사를 배웠겠는가? 또 강단 주류학파로 일컬어지는 그들이 지금도 사학계를 주도하고 있다.
서양의 실증주의 사학에 의한 ‘양독洋毒’
이 과학주의, 실증주의 사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유물로 증명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2,700년이므로, 우리의 역사는 고작 2,700년 밖에 안 된다고 주장한다. 가령 3백년 전에 살았던 10대 조상의 무덤을 파보면 특수한 경우를 빼놓고는 그 무덤 속에서 유골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경우 그 무덤에서 유골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족보의 기록을 믿을 수 없으니 10대조 할아버지가 실존한 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이렇듯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인 ‘중독’, 일제 식민사관의 ‘왜독’, 서양 실증주의에 의한 ‘양독’의 폐해로 우리의 역사는 그 상처가 너무도 깊다. 『단군 조선은 신화다』, 이것이 그들이 펴낸 책제목이다
하지만 역사의 실상은 어떠한가?
중국에서 최근 80년 동안 만리장성의 북쪽 너머에 있는 요하와 대능하 지역을 발굴했다. 거기서 5,500년에서 최고 9,000년 된 유물들이 나왔다. 황제문화의 상징인 용龍 조각물과 헤아릴 수 없는 옥기玉器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이 요하문명이 만리장성 안에 있는 황하문명보다도 몇 천 년이나 앞선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뿌리 문화, 동북아의 원형 문화가 드러난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의 학계와 정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요동, 요서, 만주 지역은 본래 자기네의 활동무대가 아니라, 동방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東夷족의 중심무대였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동북아의 창세문화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즉각적으로(2002년), 저 유명한 동북공죤北工程을 착수하였다. 그동안 중국인들은 만리장성 밖은 오랑캐들만 사는 곳이라고 하더니, 만리장성 밖 내몽고 적봉지역에서 7,000년~8,000년 전의 토기와 문화유적들이 쏟아져 나오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여기가 바로 중국 한(漢)족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대만의 사학자 서량지(徐亮之)교수는 그의 저서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은나라, 주나라 무렵의 동이족(東夷族)의 활동범위는 중국 산동반도, 하북성(북경 등지), 발해연안, 하남성, 강소성(상해 등지), 안휘성, 호북성, 요동반도, 조선반도 등이며 그 활동 중심지는 산동반도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중국학자 이제(李濟)는 물론 부사년(傅斯年)도 단군 조선족(東夷)의 문화라고 인정한 용산문화(흑도문화)가 감숙성 옆의 섬서성 지역까지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충분히 입증되어지는 사실이다.
배달국 시대의 주요인물과 업적
태호복희太昊伏犧 (BCE 3528 ~ BCE 3413):「태백일사」의「신시본기」기록에 의하면 제5대 태우의 환웅천황(BCE 3519 ~ BCE 3419)의 12번 째 막내 아들이다. ‘태호太昊’는 복희의 호이며 ‘크게 밝다(대광명)’는 뜻한다. 송화강에서 하도(河圖)를 계시받아 지금의 대한민국의 태극기의 팔괘를 최초로 그으신 분이다. 태극·음양·오행·팔괘의 창시자이다.따라서 주역은 중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뒤에 역학을 계승 발절시켜 나간 성인들이 문왕, 주공, 공자, 소강절, 김일부 인데, 모두 동이족 혈통 출신이다. 주역周易이라 불리게 된 것은 복희 8괘가 후일 신농씨를 거쳐 주周나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염제신농(BCE 3218 ~ BCE 3078)씨는 백가지의 약초를 맛보아 동양의학을 창시하여 경농과 의학의 창시자로 불리었다. 즉 그는 중국의 농업 ·의약 ·음악 ·점서(占筮) ·경제의 조신(祖神)이며, 중국문화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염제신농은 배달국 제8대 안부련 환웅(BCE 3240 ~ BCE 3167)의 신하로서 웅씨족의 후손이었던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중국 섬서성 강수(姜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강(姜)씨로 정하였다.
소전少典의 아들 중에 첫째가 염제신농씨이고, 둘째가 '욱勖'이다. 욱勖의 10세손이 황제헌원(BCE 2692 ~ BCE 2592) 이다(사기 오제본기) 강감금단(綱鑑金丹)에 따르면 고시씨(高矢氏: 초대 배달환웅(BCE 3897 ~ BCE 3804) 때의 주곡관(主穀官)으로 농업을 주관하였다. 그후 고조선 시대에도 고시라는 분이 농사일을 주관하였다. 이후 수천 년 동안 들에서 농사짓고 산에서 나무하던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는 항상 음식을 던지며 "고시례" 또는 "고수레" 하고 고시씨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하여 형성된 풍습이 면면히 전해 내려온 것이다.)의 방계 후손인 소호금천少昊金天(BCE 2598 ~ BCE 2514)은 황제헌원의 맏아들로 황제를 이어 임금이 된 오제五帝 중의 한 사람이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 소호제少昊帝의 字는 청양靑陽이며 성姓은 희姬씨이다. 이가 곧 현효(玄효)이며 궁상窮桑을 다스리다가 제위帝位에 올라 곡부曲阜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고, 사마천의 사기에도 헌원의 맏아들이 현효, 청양 이라 했으며 그 주석에서도 현효(청양)가 곧 소호라 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에는 오제에서 빠져 있어 황제의 계통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소호는 헌원의 계통을 이은 전욱고양과 대립 관계에 있었고, 오직 태호복희의 법을 닦았기 때문에 소호少昊라 부른 것이다.
즉 태호복희의 다음 가는 사람이란 뜻에서 소호少昊라 하고, 금덕金德에 의해 임금이 되어 금천金天이라 하였다(강감금단(綱鑑金丹), 중국고금 지명 대사전), 쉬량즈(徐亮之)는, 소호씨가 동이의 종족이고 독립적인 지반과 문화를 갖고 서방족과 화합하여 정치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혈통상으로는 헌원과 전혀 무관하다고 지적하면서 후대에 한족이 소호를 헌원의 혈통 계보에 끌어다 맞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쉬량즈,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246,251 쪽)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 (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중국: 초사-배달국 14대 자오지 치우천황(BCE 2706 ~ 2598): 배달문화의 최고 전성기- 도읍을 청구(산동반도)로 옮겼다. 중국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 절강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통일하였다.중국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는 황제 헌원(기원전 2692~2593년)과 그 유명한 탁록(하북성)에서 10년간 73회의 전투를 벌였다.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치우천황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했고, 그를 무신(武神)의 원조로 섬기게 되었다.한고조 유방도 무신의 원조(兵主)인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낸 후 군사를 일으켜 항우에게 이긴 뒤에는 치우천황의 사당을 장안(지금의 서안)에 짓고 제를 올렸다.당시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紫府) 선사는 황제헌원에게「삼황내문」을 전하고창힐에게는 문자를 가르쳐 줌으로써 한족의 황하문명의 뿌리역할을 하였다.신교의 대도를 전수받은 황제 헌원은 ‘황노학(黃老學)’ 이라 불리는 도교의 시조가 되었다.
우리 한민족은 인류 최초의 시원역사인 환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신시 배달국을 열어 동방문명의 뿌리가 되었으며, 중국 한족이 그토록 자랑하던 황하문명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소위 발해연안 문화인 홍산문화, 요하문화, 우하량문화가 그 확실한 증거다.이 배달국을 이어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으로 국통맥이 이어져 한민족 상고문화의 최고 전성기인 47대 단군(2,096년)의 찬란한 역사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 한족과 일본에 의한 상고역사의 왜곡으로 이러한 우리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하여 한민족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안타깝고 서글픈 역사현실인가!
우리나라에서 사대주의의 시작은 ‘신라에서 A.D. 650년, 당나라 고종, 영휘(永輝) 원년에 연호를 갖다 쓰면서 사대주의가 실제 시작됐다’ 고 볼 수 있다. 이 연호를 썼다는 것은, ‘속국(屬國)’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A.D. 649년에 당태종 이세민이 양만춘 장군이 쏜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서 죽는다. 그 해에 고종이 등극을 했는데, 그 때를 즉위년이라고 하고, 그 다음 해, 650년을 ‘원년(元年)’이라고 하고 개원을 하는데 이 때부터 ‘영휘(永輝)’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연호를 신라에서 갖다 써 가지고, 사대주의의 뿌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통일신라시대 때는 당나라, 그 다음 고려시대 때는 송나라, 조선시대에 와 가지고는 명나라, 청나라. 이렇게 연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 국시처럼 돼버린 것이다. 이것이 사대주의이며, 이렇게 되다 보니까 역사를 쓰는 역사학자들이, 아(我)의 입장에서,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우리 역사를 쓰는 게 아니라, 중국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쓰게 된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얘기라 아니할 수 없다.
배달국은 동방문명의 뿌리: 교화敎化 시대환웅 천황께서는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개천의 3대 이념을 토대로 민중들에게 신교神敎의 경전이었던,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설設하였다.배달국 시대는 교화의 시대로서 초대 거발환 배달환웅은 화백(고대의 민주주의 제도)으로 선정을 베풀면서 역법(달력)을 만들어 1년을 365일로 정했으며, BCE 3898년,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했는데,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녹도(鹿圖)문자라고 불렀다. 또한 음양, 오행, 팔괘, 십간십이지 및 청동기와 불을 발견하였다.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배달문화의 생생한 증거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의 장례의식은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인데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묘실벽을 짜는 석관묘(돌널무덤)가 대능하 상류지역 요녕성 우하량유적에서 발굴되었다.반면에 중국의 화하족은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였고 주(周)나라시대에 들어서 나무로 관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하였다.
역사에서 홍산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BCE 2333 ~ BCE 238)이며 고조선의 전단계인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배달국(BCE 3897 ~ BCE 2333)의 문명이라고 볼 수 있다. 홍산문명의 발견으로 중국은 황하중심 문명 전파론을 철회하게 되었다.돌을 이용해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 이후 부여, 고구려 그리고 백제에도 계속해서 계승되는 한(韓)민족 고유의 풍습이기도 하다. 이 곳 홍산문화는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헌원과 전쟁을 했던 치우의 근거지로 지적이 되는 곳이다.
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남, 산서와 산동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홍산문화 이후 하가점-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광범하게 확산되는데 홍산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문화는 고조선의 문화이다.<환단고기>에서 나오는 환국이 바로 홍산문화(BC.4500~BC.2500)이고 홍산문화는 흥륭와문화, 신락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배달국 초대 환웅천황인 배달국의 1세 거불단 환웅桓雄 ( BC 3897 ~ BC 3804 ) 께서는 7세 지위리 환인(BC 3897)으로 부터 종통의 증표인 천부(天符)와 인(印)을 전수받아 국가 통치제도의 기본 조직인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비롯한 문명개척단 3000명(제세핵랑군)을 거느리고 동방 태백산(백두산)아래 신시(神市)에 와서 토착족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을 통합하여 배달국을 건국하였다.
1세 거불단 환웅(桓雄)은 신교(神敎: 以神設敎)를 기반으로 백성들에게 천부경과 삼일신고(天經神誥)를 가르치고 삼신상제(三神上帝)님의 진리로 백성을 교화하였다. 이로써 동방 한민족사의 최초의 도시국가인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신시(神市)를 열고 민족사의 첫 기원을 열었다.(AD 5909년前, 2012년 기준)단군조선(BC2333~BC238)의 건국이념으로 알고 있는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개천의 3대 건국이념은 본래 환국의 7세 지위리 환인(BCE 3897)께서 환웅에게 내려 주신 배달국의 건국 이념이다(태백일사 三神五帝本紀)' 또한 지금의 개천절(음력 10월 3일)은 단군조선 건국일이 아니라 배달국 건국일이다.
14세 자오지 환웅(치우천황: BC 2707 ~ BC 2598)은 바로 동방의 배달국을 다스리면서 당시 우리의 영토를 가장 넓게 개척한 배달국의 14세 자오지 환웅 천황이다. 자오지 환웅(치우천황)은 황제헌원과의 10여 년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 '탁록 대전투'에서 치우천황의 군대는 갈로산에서 쇠를 캐어 금속무기를 만들었는데 이 내용이 춘추전국시대에 기록된 [관자]에 전해져 온다. 마침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武神의 시조가 되어 수천 년 동안 중국 한족에게까지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출처 : http://team.hani.co.kr/korea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