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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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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순서>
1. 들어가며
2. 왜 나를 알아야 하는가
3. 무엇이 ‘참 나’인가?
4. 부처님께서 출가한 이유
5.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
6. 깨달음을 얻는 방법
7.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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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반갑습니다. 방금 원장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정석준입니다. 지금은 초저녁 시간대지만 날씨가 무척 후덥지근하고 소나기가 언제 퍼 불지도 모르는데도, 이외 같이 저의 강의를 들으시려고 찾아주신데 대하여,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여러분들의 기대에 얼마나 부응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곳 예절원에 오시면서 오늘 강사는 어떤 분일까? 그리고 어떤 주제로 강의를 할까? 잔뜩 기대를 하고 오셨을 텐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듯이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고, 가볍게 들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오늘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릴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인문학에 관한 분야로써, 미국ㆍ프랑스ㆍ독일ㆍ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벌써부터 많은 관심을 가져 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오늘 강의의 주제(나는 누구인가)는 불교에서 많이 다루고 있는 문제인 만큼,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무종교인도 계실 것이고, 타종교인도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이번 기회에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케나다 리지이나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는 오강남 교수는 세계적인 종교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분의 말씀 중에,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종교를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맹신자(盲信者)가 되기 쉽습니다. 종교는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는 다종교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가족 간에도 종교를 달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명색이 대한불교 조계종 법사이지만 20대 초반부터 세계 주요종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책 『세계종교의 이해』는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세계 주요종교의 개요, 주요 경전, 주요 사상, 교리변천사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였고, 미트라교, 자이나교 등 세계의 군소 종교와,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 증산교 등은, 비교적 간략하게 기술하여, 세계종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책 『새로운 비교종교론』은 기독교, 불교, 유교, 도교의 세계관, 인간관, 인생관, 내세관이 어떻게 다른 지를 비교하여 알 수 있도록 정리하였는데,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힌바와 같이 이러한 시도는 제가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이 책 『불교의 체계적 정립』은 방대한 불교교리를 일목요연하게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며, 이 책 『불교대학 교재』는 불교대학 교재용으로 펴낸 것인데, 지금까지 9판이 발행되어, 우리나라 불교대학 교재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계종교의 이해』와 『불교의 체계적 정립』은 경주시립도관에도 비치되어 있고, 이곳 예절원에도 2권 두고 갈테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빌려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저도 강의를 많이 들어 봤습니다만, 들을 때는 그런대로 이해가 되었으나 제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 제가 하고자하는 깊은 뜻이 들어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라며, 강의 도중 강의를 열심히 들으시고 퀴즈문제를 맟주시는 두 분에게는 제가 쓴 칼럼·논설집 『화랑세기가 들려주는 신라사의 진실』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왜 나를 알아야 하는가?
부처님의 일생을 전하는 불전(佛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으로 법을 전하러 가시다가 도중에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 큰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고 계셨습니다. 바라나시 교외에 있는 그 숲에는 소풍객들이 즐겨 찾았는데, 그날도 상류층 젊은이 서른 명이 놀러 왔습니다. 모두들 아내와 함께 왔지만 한 남자는 미혼이라 기녀(妓女)를 데리고 왔는데, 그 여자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모두들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옷가지와 패물들을 훔쳐 도망을 쳐버린 것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젊은이들은 기녀를 찾기 위해 숲속을 뒤졌고, 나무 그늘에서 좌선을 하고 계신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한사람이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부처님, 화장을 짙게 하고, 옷가지와 패물을 들고 가는 여자를 보지 못했습니까?”
지그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부처님께서는 되물었습니다.
“왜 그 여인을 찾으시오?”
그들은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그 여자를 꽃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여자를 찾는 일과 자신을 찾는 일 중에 어느 것이 더 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그야 물론 도망간 여자를 찾기 보다는 나 자신을 찾는 일이 더 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 나의 가르침을 들으시오.”
젊은이들이 자리에 앉자 부처님께서는 참된 자기를 찾는 법을 일러 주셨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스물아홉명의 젊은이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공자님의 언행을 모은 『논어』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공자님께 “선생님! 요사이 저희 마을에서는 이상한 일이 하나가 생겨서 화제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이상하여 화제가 되고 있단 말이냐?”
“한 사람이 저희 마을에 살다가 이사를 갔는데, 이사 갈 때 자기 아내를 데리고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저만 혼자 가버렸데요. 이사 간다는 말만하고, 주소도 가르쳐 주지 아니하여 그 아내가 찾아 갈 수가 없어서 울고만 있답니다. 그러니 그렇게 정신 빠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동네 사람들의 화제 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그리 우습단 말이냐, 이 세상 사람은 대개 자기 처는커녕 자기 자신도 잊어버리고 있지 아니하냐. 그러면서 남이 아내를 잊어버리고 혼자 간 것이 뭐가 그리 우습단 말이냐?”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맹자님의 말씀 중에도 “사람들은 해가 저물면 집을 나간 개나 닭은 찾을 줄 알아도 자기의 마음을 찾을 줄은 모른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길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너 자신을 알아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작 알아야 할 것은 나 자신입니다. 유행가 가사에 “그녀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라는 구절이 있지만,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녀가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지를 아는 일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면 설사 백년을 산다 해도 이는 마치 목동이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과 같고, 은행 창구에서 은행 아가씨가 하루 종일 돈을 세지만 그 돈은 자기 돈이 아닌 것처럼,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헛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참 나’인가?
옛날 어느 장군이 산적을 물리치고 승전고를 울리며 산을 내려오다가 산기슭에 절이 있는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다. 절에 들어선 장군은 큰 소리로 “주지스님 계십니까?”하고 주지 스님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열일곱 여덟 보이는 사미승이 방문을 열고 나와서 “주지 스님은 지금 출타중이고 안계십니다.”라고 대답 하였습니다. 그러자 장군이 “주지스님이 계시면 뭘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참 안됐다.”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니, 사미승이 그 말을 알아듣고 “주지스님에게 물으나 저에게 물으나 마찬가지입니다. 물을 것이 있으면 저에게 물어보시지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장군은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업보에 따라 극락에도 가고 지옥에도 떨어진다고 하는데 대체 지옥과 극락이 어디 있단 말이오?”하고 물었습니다.
장군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미승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장군의 왼쪽 뺨을 후려쳤습니다. 엉겁결에 뺨을 맞은 장군은 순식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수많은 산적을 물리치고 기세당당한 장군이 부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뺨을 맞았으니 화가 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장군은 얼굴을 붉히며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단숨에 스님의 목을 베려 들었습니다. 이 때 사미승은 맑고 평화로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님, 장군님은 저에게 극락과 지옥을 묻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먼저 지옥을 알려 드렸습니다. 제가 장군님의 뺨을 치니 장군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저를 죽이려고 칼을 빼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살해하려고 칼을 뽑아든 장군님의 분노한 마음, 그 자리가 곧 지옥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장군은 어이가 없어 뽑았던 칼을 다시 칼집에 넣으며 파안대소(破顔大笑)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시 스님은 말했습니다.
“장군님의 지금 마음 상태가 곧 극락입니다.”
극락과 지옥은 사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극락과 지옥을 왕래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지옥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극락]을 바라고 불행[지옥]을 싫어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마음을 바로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잘 쓸 수 있을까요? 마음을 잘 쓰려면 먼저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육신이 나인줄 알고, 이름이 나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육신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부모님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거울을 잘 안 봅니다. 왜냐구요.? 거울을 들여다보면 젊었을 때의 나는 온데간데 없고 이마는 벗겨지고,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왠 늙은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의 수는 보통 60조~100조개로 알려져 있으며, 각각 세포들은 수명이 다르고, 일정한 주기에 따라 재생이 되는데, 약 90% 이상이 매년 재생되고, 크게 5년을 주기로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재생한다고 연구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나와 20대의 나,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른데도 사람들은 불변의 내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육신이 나라면, 눈 내, 귀 내, 코 내, 입 내, 몸 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 내, 귀 내, 코 내, 입 내, 몸 내라고 말하지 않고, 내 눈, 내 귀, 내 코, 내 입, 내 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이 참 나[眞我]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름이 또한 나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름 또한 부모님이 지어 주신 것입니다. 요즈음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한동훈 신드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의 IQ는 175로 전세계 20명 안팍에 드는 천재로 알려져 있으며, 한꺼번에 3권의 책을 펼쳐 놓고 본다고 하며, 대학시절 21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야당의원들이 무슨 질문을 해도 그 질문의 허점을 파고들어 야당의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일약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동훈이가 아니고 서훈이라고 지었으면 한서훈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애들 이름은 할아버지 아니면 아버지가 주로 지었는데, 요즈음에는 이름을 잘 지어야 복도 많이 받고 출세도 한다고 하여 돈 주고 철학관에 가서 짓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 보니 각 문중마다 내려오던 항렬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름을 잘 지어야 복을 많이 받는다? 글세요?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 자식들 하는 일이 하도 안 풀려 철학관에 가서 물어 보았더니 “이름이 나빠 일이 잘 안 풀리니 개명을 하라.”고 하드랍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20여 년 전에 자기가 지어준 이름이라는 걸 잊어 먹었던 모양입니다.
요즈음 철학관에서는 이름을 짓되 사주에 맞게 지어야 한다고 한다는데, 잘 아시다시피 사주란 그 사람이 태어난 년 월, 일, 시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고, 성명학은 한자의 획 수로 그 사람의 운명을 풀이하는 것인데, 그 사람의 성과 이름의 첫 글자가 초운이고, 이름의 둘째 자와 끝 자가 중운이며, 이름 세 글자를 합한 획의 수가 말운이 되는데, 대체적으로 3, 5, 7, 9 등 양수[홀수]로 끝나는 획은 좋은 이름이고, 예외적으로 12획, 24획으로 끝나는 음수도 좋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주와 성명학은 별개분야인데, 사주에 맞게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억지로 꿰맞춘 궤변이며, 논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도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떤 이름이 좋은 이름일까요? 요즈음은 자기 PR시대이니까 이름이란 우선 부르기가 쉬워야 하고, 한번 들으면 기억하기 좋은 이름이 좋은 이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국회의원 시장 군수 경찰서장 등,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 중에는 지위가 자기인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퇴직 후에도 자기를 의원님 시장님 군수님 서장님이라고 안 불러 주면 인상을 찌그립니다. 촌동네 이장한 사람 중에도 전이장님이라고 안 불러 주면 서운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직위란 잠시 내가 그 직을 맡아 있을 뿐 영원히 그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이름도 내가 아니고, 이 몸뚱이도 내가 아니고, 직위도 내가 아니라면 무엇이 참 나일까요? 중국 당나라 때 회양선사(南嶽懷讓: 677~744)란 분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출가하여 참선수행을 열심히 했지만 내가 누군지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 넘고 물 건너 수 백리를 걸어 그 당시 선지식으로 유명한 6조(六祖) 혜능대사를 찾아갔습니다. 혜능대사에게 정중히 큰 절을 올리자 대사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는고?”
“숭산(崇山)에서 왔습니다.”
(숭산은 중국 5악 중 하나로 이곳에 쿵푸로 유명한 소림사가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그 한마디에 스님은 그만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떤 물건이 분명 왔기는 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 대사의 문하에서 8년을 보내며 ‘어떤 물건’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 어떤 물건’이 무엇이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대사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설사‘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
제자의 말을 들은 대사는 회양이 한 소식[깨달음]을 얻은 것을 알고, 인가(認可: 공부가 다 되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증언)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한 한 물건을 서산대사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한없이 신령스러워서,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무엇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없도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는 이것을 통상,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마음이 어떤 것인지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마음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코로 냄새 맡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고, 빛깔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존재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이 몸뚱이가 자동차라면 마음은 운전사와도 같습니다. 마음이 가자하면 가야하고, 서라하면 서야 하듯이, 나의 주인공은 이 육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둘째,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면벽참선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신광이라는 젊은이가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스님, 저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합니다. 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너의 불안한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내가 편안하게 해주리라.”
스님의 말씀을 듣고 산광이 불안한 마음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는 한참을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이제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신광은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불안한 마음, 괴로운 마음, 좋아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공연히 불안한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괴로운 마음을 일으키기기도 하며,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며,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셋째, 빛보다 빠른 것이 마음입니다. 빛은 1초 동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을 돈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빠른 것이 마음입니다. 빛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마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를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중국 만리장성을 구경하고 온 사람이, 만리장성을 생각하면 즉시 만리장성이 떠오르고, 초등학교 때 친구와 코피나게 싸웠던 생각을 하면 즉시 그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과거를 회상하거나 추억할 수 있고, 미래를 꿈꿀 수도 있습니다. 정말 요술 방망이가 마음입니다.
넷째, 마음은 위대한 창조자입니다. 여기에 있는 이 책상도, 마이크도, 이 예절원 건물도 누가 만든 것입니까? 마음이 설계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 손바닥보다 작은 스마트폰에는 오늘의 국내외 뉴스, 일기예보, 교통정보, 카메라 기능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선생님에게 묻고, 어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스마트 폰 검색창에 알고 싶은 것을 치면, 예컨대, 된장 담그는 방법이라고 치면 된장 담그는 방법이 나오고, 건강에 좋은 영양식은?이라고 치면 건강에 좋은 영양식이 나옵니다.
제 카페이름이 삼천대천세계인데, 검색창에 삼천대천세계를 치면, 그동안 제가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500여편의 글과 제가 쓴 7권의 책이 이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 스마트폰 속에는 내가 쓴 글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수천, 수만의 사람이 쓴 글도 자기 블로그나 카페에 들어있습니다. 이 속에 들어있는 것을 책으로 엮어낸다면 그 분량이 얼마나 될까요?
10년도 더 지났을 것입니다, 어느 신문에서 우리나라 만원짜리 지폐를 쌓으면 백두산 높이의 일곱배가 넘는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란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데, 오늘 강의에 오면서 검색창에서 그 기사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너무 오래된 기사여서 그런지 찾지를 못하고, 그 대신 금년 6월28일자 로, 우리나라 작년 해운 수출액이 역대 최고 금액인 383억 달러, 한화로 49조, 5천억원을 돌파했는데, 49조 5천억원을 만원짜리 지폐로 쌓으면, 그 높이가 8848미터로 세계에서 제일 높은 에베레스트산의 56개를 쌓아놓은 높이와 같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폰에 저장된 내용을 책으로 엮는다면 그 분량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입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이 스마트폰 속에 그렇게 엄청난 분량이 다 들어간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스마마트 폰을 누가 만들었지요?. 물론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창안하여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마음은 아파트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들고, 인공위성도 만들어 우주에 쏘아 보내기도 합니다. 마음은 좋은 사람도 만들고 미운 사람도 만들며, 행복도 만들고 불행도 만듭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재패한 황제였지만 내 생애 행복한 날은 6일밖에 없었다고 고백했고, 두 눈과 두 귀가 먹은 헬렌 켈러는 내 생애 불행한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다섯째, 마음은 마치 원숭이와 같아서 잠시도 그냥 머물러 있지 않고, 대상에 따라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일으킵니다. 또한 마음은 크게 쓰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덮고도 남고, 작게 쓰면 겨자씨보다도 작은 것이 또한 마음입니다.
여섯째, 마음은 눈ㆍ귀ㆍ코ㆍ혀ㆍ입ㆍ몸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하여,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고 맛을 보기도 하고 감촉하기도 하지만, 이 자리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을 수가 없는 것은 삼세(三世: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초월해 있습니다. 삼세를 초월한 것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은 생기는 일이 없습니다. 생기는 일이 없는 것에는 사라지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으며, 죽는 일도 없고 태어나는 일도 없습니다. 이해하기가 참 어렵지요?.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 분명 생사(生死)가 있는데, 왜 생사가 없다고 하였을까요?
중국 당나라 때 서당 지장선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선사에게 한 마을 선비가 찾아와서 여쭈었습니다.
“스님, 천당이 있습니까?”
“있지요.”
“지옥이 있습니까?”
“있지요?.”
“생사가 있습니까?”
“있지요.”
이렇게 뭐든지 묻는 대로 다 있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선비는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께서 지금 말씀을 잘못하고 계신 게 아닙니까?”
“나는 잘못 말하는 것이 없습니다.”
“실은 며칠 전에 경산선사를 찾아뵈었는데, 경산선사의 말씀이 ”본래 천당도 없고 지옥도 없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없는 것이다. 참다운 진리에는 본래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모두 다 있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에 서당 지장선사는 다시 반문을 하였습니다.
“경산스님한테 상투가 있었습니까?”
“스님에게 무슨 상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에게는 상투가 있습니까?”
“저에게는 상투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경산선사에게는 상투가 없고 당신에게는 상투가 없습니다. 경산선사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와 천당ㆍ지옥이 모두 없는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없다고 한 것이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당신에게는 생사와 천당ㆍ지옥이 그대로 다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진리를 체달해야 합니다. 생사의 고통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가 없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은 전도(顚倒)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업(業)을 짓고, 그 업으로 인하여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속에 해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꿈속의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꿈입니다. 꿈속에서는 분명히 태어나고 죽는 일이 있으나 진리의 세계에는 본래 나고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사의 꿈속에서 하루빨리 깨어나야 합니다.
일곱째, 마음의 본성은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따라서 부처나 중생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하에서 도를 깨달으시고 제1성(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기이기하고 기이하도다. 일체 중생의 본성이 부처와 조금도 차이가 없구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부처의 마음이 따로 있고, 중생의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본바탕은 부처나 중생, 심지어 저 꼬물거리는 미물까지도 똑 같다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부처님은 마음을 깨달으신 분이고, 중생은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미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천태지의 대사는 『법화론』에서 “한 생각 깨달은 마음이 부처이고 한 생각 자비한 마음이 보살이며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이 아라한이고 한 생각 정직한 마음이 인간이며 한 생각 투쟁한 마음이 아수라이고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이 축생이며 한 생각 탐욕한 마음이 아귀이고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지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코로 냄새 맡을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는 마음, 빛깔도 없고 모양도 없는 마음,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主人公)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깨친 이을 부처라 하고, 마음이 우매한 이를 중생이라 하며, 마음을 깨달으면 삼계육도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안락을 누리게 되나, 마음이 미혹하면 생사의 바다에서 해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한 이유
잘 아시다시피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나라의 태자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는 그 모든 것-재물, 명예, 권세 등-을 다 갗추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왜 출가를 하셨을까요?
부처님이 출가하신 이유를 불전(佛典)에서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하여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부처님이 성도하기 이전 이름)가 어느 날 동대문을 나섰다가 늙은 사람을 보고, 남대문을 나서서는 병든 사람, 북대문을 나서서는 죽은 사람을 보고 '나고 늙고 병들어 마침내 죽는 것이 인간이 처한 한계상황이라면 여기에 무슨 궁극적이 행복이 있을 것인가? 내가 이 문제-생사일대사의 문제([生死一大事問題)-를 해결하여야겠다'라고 생각하시고 부왕 몰래 왕궁을 나와, 6년 이란 긴 세월 동안 각고의 수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시고 이 문제(생사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면, 부처님은 늙지 않아야 할 것이고 병들지 않아야 할 것이며 죽지 않아야 할 것인데, 부처님도 우리들과 다름없이 역시 늙으셨고 병고도 있었고 열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생사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은 본무생사(本無生死)의 도리, 즉 이 육신에는 생사가 있으나 마음에는 생사가 없다는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결국 마음이 무엇인가를 깨쳤다는 말입니다. 그럼 신라시대 원효대사는 어떻게 해서 깨달음을 얻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요즈음에는 미국에 유학을 갔다 와야 알아주는 시대지만 원효스님 당시에는 당나라 유학을 해야 대접받는 시대였던 모양입니다. 당나라로 가는 길은 육로와 해로가 있었는데,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은 육로로 가기 위해 고구려 접경지역을 넘다가 첩자로 몰려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신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지금의 경기도 남양만 부근에서 배를 타고 가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해가 뜨면 길을 걷고, 해가 지면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자고….그러든 어느 날은 무덤가에서 스러져 잠이 들고 말았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얼마나 좋은지 마치 감로수와 같았습니다. 이튿날 잠이 깨어보니 안방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무덤가였고 먹었던 물은 해골바가지에 든 물이었습니다. 해골에 든 물을 마셨다는 생각을 하자 원효는, 온 속이 뒤틀리면서 그만 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원효는 견성대오(見性大悟하여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습니다.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이요-마음이 일어나니 모든 법이 생기고,
심멸즉 종종법멸(心滅卽種種법멸)이라-마음이 사라지니 모든 것이 사라지네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이니-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모든 것은 오직 알음알이 이니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로다-마음 밖에 일체법이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해골바가지의 물이나 유리 컵 속의 물이나 다 같은 물입니다. 물 자체에는 깨끗함이나 더러움이 없습니다. 해골바가지에 든 물은 더럽고, 유리컵에 든 물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 마음입니다. 원효는 모든 것은 내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토하는 순간 깨달았던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굳이 당나라 유학을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에 머무르면서 불경을 주해(註解)하는 저술활동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요석공주가 분황사에 들러 원효대사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원효대사가 인물이 그렇게 잘났던 모양입니다. 요석공주는 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딸인데, 백제와의 전투에서 일찍이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가 되어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원효에게 반한 요석공주가 말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그만 자리에 눕게 되어버렸습니다.
요석공주가 원효를 짝사랑하여 상사병에 걸려 다 죽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원효는 “내가 불제자가 된 것은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인데, 나로 인해서 죽어가는 여자를 보고 모른 채한다면 이는 참 불제자의 도리가 아니다. 내가 비록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요석공주를 구제하는 것이 마땅한 일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나에게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깍으리.”하며 떠들고 다녔습니다.
아무도 그 말의 뜻을 몰랐으나, 태종 무열왕 만이 알고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貴婦人)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라며, 궁리(宮吏: 관원)에게 원효를 요석공주가 있는 요석궁에 데려가라 명하였습니다. 관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원효가 이미 요석궁 앞에 있는 다리에서 일부러 떨어져 옷을 적시니, 관리가 원효를 요석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하였습니다.
지금 교리 앞에 있었던 다리인데, 이 다리를 35대 경덕왕 때 헐고, 월정교라는 크고 아름다운 다리를 새로 놓았고, 최근 경주시에서는 700억을 들여 복원하였습니다. 월정교가 어떤 교량인지 확실한 고증도 되지 않았는데도 다리 위로 궁궐처럼 큰 목조건물을 지었습니다. 요즈음은 뭐든지 크고 화려해야 해야 알아주는 시대라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요석궁에서 7일 동안 머무른 원효는 온다간다는 말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생긴 아이가 설총인데, 요석공주는 설총을 업고 원효를 찾아 다녔지만 원효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동침한 것을 두고, 원효가 색[여자]을 탐하였기 때문이라고 말들을 많이 하지만, 그 실은 자기로 인하여 죽어가는 요석공주를 구제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원효는 파계한 이후, 속인(俗人)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고, 이름을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뜻의 무애(無㝵)라 하고, 큰 박 하나를 들고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쳐서, 가난한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원효가 불교에 끼친 영향이 참으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효스님이 요석공주와 동침하여 파계하자 파계승이라 하여 스님사회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요즈음 말로하면 왕따를 당하였는데, 마침 당나라에서 『금강삼매경』이란 불경을 보내왔는데, 아무도 해설하는 스님이 없었습니다. 이에 혜공스님이 임금님께 원효스님을 천거하였습니다.
당시 원효는 상주에서 초토사라는 조그만 절을 짓고 은거하고 있었는데,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시자가 황소를 끌고. 황소 등에 타고 상주에서 경주로 오는 동안 금강삼매경론(경을 해설한 것을 론이라 하고, 론을 해설한 것을 소라 함) 5권을 지었는데, 분황사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원효를 시기하던 스님들이 이를 훔쳐가 버리고 말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다시 『금강삼매경론약소』 3권을 지었습니다.
황룡사(황룡사는 왕실의 평안과 번창을 비는 왕실사찰이었음)에서 임금과 왕족, 문무백관, 신라의 고승들이 모인자리에서 『금강삼매경론』 법회가 열렸는데, 원효의 첫마디가 “아흔아홉 개의 석가래를 뽑을 때는 내가 그 속에 끼어들지 못하더니, 이제 한 개의 대들보를 뽑을 때, 내가 뽑혔구나!"라고 하여, 허세만 부리던 스님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원효스님은 수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100부, 240여권에 이른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은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앞서 말씀드린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 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 저술입니다. 한 사람이 240여권이나 되는 저술을 남겼다는 것은 세계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방법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우리의 본래 마음을 찾기 위한 수행법으로) 간경ㆍ염불ㆍ주력ㆍ참선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중생의 근기[수준]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서 나는 어떤 방법으로 수행을 하면 좋을까?에 대한 대답은 내 근기, 내 수준에 맞는 방법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참선 수행법에도 관법ㆍ묵조선ㆍ간화선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관법(위빠사나)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조용히 관하는 수행법이고, 묵조선은 일체의 사량(思量)과 분별을 끊고,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묵묵히 한 곳에 집중하여 닦는 수행법이며,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법입니다. 화두란 말씀 화(話)자, 머리 두(頭)자, 즉 ‘말의 머리’란 뜻으로, 화두에 의심을 일으키고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관공서의 문서ㆍ법령과 같이 준엄한 것이라고 해서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공안에는 1700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간화선법에 의한 참선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한 수행자가 조주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이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고 답했습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었는데,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였는가? 이것을 의심하고 의심하는 것이 화두 참선법입니다.
화두 참선 중에 다른 망념이 끼어들면 절대 안 됩니다. 오직 한 생각,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었는데 어째서 ‘뜰 앞에 잣나무“라고 했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그 의심이 타파되면 확철대오(確徹大悟) 한다는 것이 참선 수행법입니다.
그럼 여기서 화두 참선으로 도를 깨친 구정스님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통일신라 말기 때의 일입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비단 장사를 하여 생계를 꾸려가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비단을 짊어지고 오대산의 진고개를 넘어가다가 고갯마루에서 쉬고 있는데, 노스님 한 분이 길 옆 풀섶에서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린 채 꼼짝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노스님의 모습을 매우 이상이 여긴 청년은 가까이 다가가서 여쭈었습니다.
“스님,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중생들에게 공양을 하고 있는 중일세.”
“어떤 중생에게 무슨 공양을 베푸십니까?”
“옷 속에 있는 이와 벼룩에게 피를 먹이고 있네.”
“그런데 왜 사지(四肢)를 벌리고 꼼짝하지 않고 서 계십니까?”
“내가 움직이면 이나 벼룩이 피를 빨아 먹는데 불편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나 벼룩이 피를 빠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서 있는 것이라네.”
스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은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스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윽고 오대산 동쪽 봉우리 밑의 관음암(觀音庵)에 도착한 스님은 청년을 돌아보며 물었습니다.
“어인 일로 나를 따라 왔는가?”
“저도 수행하여 스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부디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내 제자가 되려면 내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예, 스님이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청년의 굳은 결심을 확인한 노스님은 그의 출가를 허락하고, 가장 먼저 부엌에 있는 큰 가마솥을 거는 일부터 시켰습니다. 청년은 흙과 짚을 섞어 이긴 다음, 부뚜막을 만들고 솥을 걸었습니다. 하루가 족히 걸려 일이 겨우 마감되었을 무렵, 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난 스님은 호통부터 쳤습니다.
“이놈아, 솥을 이렇게 걸어서야 어디 쓰겠느냐? 한쪽으로 틀어졌으니 다시 걸도록 해라.”
노스님은 짚고 있던 지팡이로 솥을 밀어 내려앉혀 버렸습니다. 스스로가 판단하기에는 조금도 틀어진 곳이 없었지만, 청년은 스님의 분부에 따라 불평 한 마디 없이 새로 솥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솥을 걸고 허물어 다시 걸기를 아홉 번, 드디어 노스님은 청년의 구도심(求道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솥을 아홉 번 고쳐 걸었다’는 뜻에서 ‘구정(九鼎)’이라는 법명을 내렸으며, 자신이 중국에서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로 추앙받았던 무염선사(無染禪師, 801~888)임을 비로소 밝혔습니다.
그 뒤 어느 날, 원래 글을 알지 못했던 구정스님은 무염선사를 찾아가 간절히 여쭈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즉심즉불(卽心卽佛)이니라.”
워낙 무식한 구정스님이었는지라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의 즉심즉불을 ‘짚신즉불’이라는 말로 잘못 알아듣고 말았습니다.
‘집신이 불?, 집신이 부처라고?’ 뭔가 이상하게는 느꼈지만 스승을 지극히 존경하고 있었던 구정스님이었기에 그 말을 무조건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스님은 부처님 같으신 분인데 허튼 소리를 할리가 만무하다. 부처를 물었는데, 어째서 짚신이라고 대답을 하셨는고? 짚신이 어째서 부처인고? 어째서…?”
그날부터 구정스님은 자기가 신던 짚신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자나 깨나 ‘이 짚신이 어째서 부처인고?’하는 생각을 놓아버릴 줄 몰랐습니다.
하루는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 짐 한 다음, 짚신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짚신아 어째서 네가 부처냐? 짚신아 어째서 네가 부처냐?”하며 소리를 지르다가 홀연히 짚신의 끈이 뚝 끊어지는 순간 확철대오(廓澈大悟)하였습니다. 도를 구하는 구정스님의 지극한 마음, 그와 같은 구도의 일념이 깨달음을 이루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왜 나를 알아야 하는가, 무엇이 ‘참 나’인가? 부처님께서 출가한 이유,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 깨달음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여기서 퀴즈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질문 1, 부처님께서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신 이유를 아시는 분? 예, 맞았습니다.
질문 2, 원효대사 황용사에 임금님과 왕족, 문무대신을 모아놓고 강의한 논서의 제목은? 예, 맞았습니다.
두 분 앞으로 나오세요.
맺음말
끝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옛말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조사를 해보니 사람들은 하루 평균 5만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 5만 가지 생각 중 95% 이상은 걱정거리이고, 또 그런 걱정거리 중 90%이상은 현재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가상의 걱정이라고 합니다. ‘걱정도 팔자'라는 옛말이 하나도 허튼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삶은 하루도 걱정 근심이 없는 날이 없는데, 도인들의 삶은 우리와 무엇이 다를까요?
어떤 사람이 큰 스님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스님 도가 무엇입니까?”그러니까 그 스님이 “배고프면 밥 먹고 졸음이 오면 잠잔다. 이것이 나의 도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그러면 모두 도가 높고 참선을 많이 한 스님과 같은 것입니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 “다른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도 백가지 생각을 하고 있으며, 잠 잘 때에도 천 가지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와는 전혀 다르다.”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도인의 삶과 우리 중생들의 삶이 차이가 납니다. 도인의 삶이란 밥을 먹을 때는 밥 먹고, 잠을 잘 때는 잠자고, 갈 때는 가고 올 때는 오는 것으로 족해서, 매사가 자연스럽고 걸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갈 적에는 오는 걸 생각하고, 오면서도 가는 걸 생각하고, 밥 먹으면서도 온갖 걱정에 사로잡혀 있고, 잠을 자면서도 공연한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서 걱정 근심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 우리 보통 사람들의 삶입니다.
과거는 지나가 버렸습니다.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오지 않는 미래에 연연하지도 말고, 쓸데없는 걱정도 말고, 가끔은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고, 새소리 물소리도 들어가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을 살으시기 바라며, 오늘 강의를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 7.17, 경주전통예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