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서문
제1장 고대교회의 에큐메니칼 신조
Ⅰ. 사도신경
Ⅱ. 니케아 신조
Ⅲ.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Ⅳ. 칼케돈 신조
Ⅴ. 고대 에큐메니칼 신조에 대한 결론
제2장 종교개혁기의 개혁교회 신앙고백
Ⅰ. 스위스와 독일의 개혁교회 신앙고백
1. 베른 신앙고백
2. 소교리문답
3.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4. 4개 도시 신앙고백
5.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
6. 취리히 일치신앙고백
7.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8. 제2스위스 신앙고백
ⅡI.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신앙고백
1. 프랑스 신앙고백
2. 네덜란드 신앙고백
3. 도르트 신앙고백
Ⅲ. 영어권의 개혁교회 신앙고백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들
Ⅳ. 종교개혁기 개혁교회 신앙고백에 대한 결론
1. 스위스와 독일의 개혁교회 신앙고백
2.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신앙고백
3. 영어권의 개혁교회 신앙고백
제3장 20세기 개혁교회 신앙고백
Ⅰ. 12개의 신앙조항
Ⅱ. 바르멘 신학선언
Ⅲ. 1967년 신앙고백
Ⅳ. 미국장로교회의 신앙선언
Ⅴ. 대한예수장료회 신앙고백서
Ⅵ.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
Ⅶ. 20세기 개혁교회 신앙고백에 대한 결론
총결론
신앙고백의 가치와 중요성
(부제: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 교회는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교회 밖으로는 세속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물질숭상주의의 극대화로 인한 도전이 가속화되고 있고, 안으로는 비성경적, 비신앙적, 반개혁주의적 사상과 이념과 프로그램들로 인해 교회의 정체성에 커다란 혼란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자의 경우보다 후자의 요인들로 인해 교회가 더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를 훼파시킨 것은 다름아닌 명목뿐인 복음주의다’라는 프란시스 쉐퍼의 말처럼 오늘날의 한국 교회 위기는 외적인데보다는 내적인데 그 주된 원인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국 장로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사를 돌아볼 때, 장로교회는 여느 개신교 교단이나 교파에 비교할수 없을 만큼 성경적이면서도 역사적인 근거와 유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분열과 반목의 대립속에 교단은 수십개로 분열되었고 분별없고 세속적인 교회 성장과 연합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 도입되면서 장로교 고유의 신학적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의 간판을 달고 있는 교회는 많으나 진정한 장로교회를 찾아보기 힘든 실정입니다. 이처럼 급작스런 장로교회의 퇴락현상은 어떤 이유때문일까요?
첫번째, 장로교회의 역사적 전통과 내용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회라면 어떠한 교회를 말하는 것인지? 장로교회가 담고 있는 신학적, 신앙적 내용이 무엇인지? 어떻게 장로교회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는지? 그렇다면 왜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는지? 이런 질문들은 장로교인이라면 당연히 물어야 하며 장로교회 목회자라면 당연히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장로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이런 물음에서 비켜서 있습니다. 오히려 교파간의 연합과 일치라는 시대적 요청과 신학적 상대화를 추구하는 목소리에 밀려 이러한 물음조차 부담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장로교회의 개혁된 신앙고백서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로교회를 특징짓는 독특한 구별점중 하나는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라는 것입니다. 모든장로교회의 스승과 같은 칼빈 선생은 “이 교리문답(신앙고백서)은 옛적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준수되어 왔고 교회가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포기된 적이 없는 전통적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만큼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객관적이고 성경적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하나님 말씀으로 바르게 돌아가는 일에 중요한 이정표로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퍼져나가는 곳마다 개혁된 신학의 산물로서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으며 교회의 이름으로 공포된 신앙고백서는 성도에게 있어서 신앙과 생활의 제2규준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종교개혁의 정신을 잇고 있는 장로교회(개혁교회)의 발흥과 전파는 이러한 신앙고백서의 전수와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정통 장로교회에는 성경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고 부요하게 하는 방식으로서 신앙고백서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내용을 올바르게 지키고 가르치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는 이런 전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몇해전 소위 한국에서 가장 부흥한 사례로 이해되고 있는 모장로교회는 더 이상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일수없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하였습니다. 이유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교회로서 더 이상 과거의 교리에 집착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인 장로교회에 대한 상당한 오해와 왜곡으로부터 생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으며 나아가 많은 장로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호응을 얻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가 역사적 정통 장로교회의 정신으로부터 얼마나 급격하게 멀어져 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장로 교회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개혁된 장로교회에서 신앙고백서를 중요하게 취급하게된 성경적 근거와 역사적 근거를 살펴보고, 신앙고백서의 현대적 의미를 고찰함으로써 잃어버린 역사적 장로교회의 전통과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본론.
1. 신앙고백서의 근거
신앙고백이란 보통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수락이며 또한 신앙에 대한 실제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선택의 사항이 아니라 신앙을 고백하는 자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이미 성경에서부터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제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답변 즉 “신앙고백”이 얼마나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이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구약이나 신약에 나타난 신앙고백은 지금과 같은 기록이나 문서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주로 고백적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특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성경적 근거
(1)구약
① (출19:7-8)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위의 사건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매우 장엄한 분위기를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매우 신중하고 엄중한 사건 속에 “신앙고백”에 대한 형태가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은 (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에 대한 고백의 결과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출19:11)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② (신26:5-9)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위의 말씀은 시내산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던 모세가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중요성을 언급하는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반드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를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은혜임을 신앙적으로 고백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야 했던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의 고백과 또한 그것을 자손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야 하는 교리문답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말씀에도 잘 제시되고 있습니다.
(신4: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 속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신31:11-13)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위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신조(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을 통해서 성경을 이해하며 배워 가는 것은 인간이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씀 가운데 세우시기 위해서 말씀을 바르게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세워 주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성경을 정확하게 배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거룩한 교회의 규칙이라는 것입니다.
(2)신약
① (마16:15-16)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 내용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지를 묻고 계시며, 또한 그 대답으로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은 세례의식을 행할 전형적인 고백이 되었으며 이것이 후에는 삼위일체의 형태로 자리를 갖추게 된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신앙고백의 기초로서 이 말씀을 핵심적인 말씀을 인정하고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2) 역사적 근거
초기 교부시대부터 중세시대, 종교개혁시대, 그리고 지금까지 참된 신앙을 간직해 온 자들은 이러한 성경적 근거 위에서 늘 신앙고백을 바르게 고백하였고 또한 후대에는 이것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 기록과 문서적인 형태로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특히 16-17세기는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등을 통해서 성경의 교리를 교회 안에서 체계적으로 가르치려고 했던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장로교회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의 표현은 칼빈 목사의 영향에 힘입어 더욱 분명하고 정확하게 자리잡게 되었는데, 칼빈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교회교육의 중심 과제로 보기도 하였으며, 그 중요성에 대한 표현은 영국의 한 성주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리교육이 없이 유지될 수 없다. 이것은 선한 씨앗이 죽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는 것처럼 왕성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랫동안 붕괴되지 아니하고 튼튼히 서 있는 집을 짓기를 원한다면 아이들이 아주 인상깊게 이 신앙교육서를 통하여 믿음에로 이끌어지도록 염려하고 돌보시오"
칼빈은 제네바에서 국회에 제출한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제의서」에서 이 부분을 강력하게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는 성찬식과 시편을 찬양할 것, 그리고 어린이들의 교육에 관한 교리문답서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교리문답의 중요성을 언급하였습니다. 다음의 제2차 제네바 교리문답서 서문의 말도 유명한 말입니다.
"성경의 순수함을 보존케 하기 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어린 시절의 아이들에게 신앙고백을 가르치게 하여 저들로 믿는 내용을 깨닫게 함이 극히 필요하니, 이와 같이 함으로서 참된 성경적 내용이 변질되지 아니하고 보존될 것이며 또한 각 사람에게 혹은 대대로 전파 될 것이다. ---- 우리가 제안하려는 제도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 신앙의 간결하고도 단순한 한 요약을 작성하여 모든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고 일년의 일정한 날에 목사 앞에 나와 문답을 하고 시험을 받고 또한 각자의 능력을 따라 저들이 충분히 가르침을 받았다고 인정될 때까지 이르는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어린 아이들을 기독교 신앙교리 안에서 양육하라는 특별한 권면을 받아 왔다. ---- 이를 규모 있게 수행하기 위해 교회는 「교리문답」이라고 불리는 어떤 특정한 규칙을 사용하였다. 사탄은 자신이 교회를 흩어서 가공할 만한 폐허로 만들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 안에 아직 어떤 징표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자 사탄은 이런 거룩한 질서를(교리문답) 붕괴시켰다. 따라서 사탄이 남겨 놓은 것은 변화 능력이 전혀 없고 단지 미신만을 산출해 낼 수 있는 몇 가지 유물들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왜 현재 우리 교회 안에 내적인 힘은 없고 외적인 종교적 모습만이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확실한 원인이다. 우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이 요리문답은 옛적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준수되어 왔고,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전통적인 것이다."
이처럼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고백서나 교리교육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중요성은 칼빈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때부터 종교개혁 때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장로교회에서 신조(신경), 신앙고백서, 교리문답 등은 교회에 대한 사랑의 고백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진 찬양과 헌신의 의미가 깊이 배어 있는 표현인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교리문답 교육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많은 장로교 목사들은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리문답 교육 없이는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도저히 지켜 나갈 수가 없었고, 역사적으로도 가장 훌륭하다는 교회도 이것을 소홀히 했을 때 교회는 곧 쇠퇴하고 부패해져 가기 시작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장로교회주의자들이 아닌 다른 분파들은 늘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점이 장로교회주의자와 장로교회의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나누는 큰 특징 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정하지도 않았는데 늘 동일하게 바른 장로교회주의 자가 아닌 자들은 역사적으로 동일하게 신앙고백서의 필요성을 부인해 왔던 것입니다. 즉 영지주의, 펠라기우스파, 아르미니우스주의자, 경건주의자들, 신비주의자, 오순절주의자, 현대 자유주의자들 등등은 신앙고백서의 권위와 용도를 전적으로 배격하거나 반대하였습니다. 그것은 신앙고백서들이 성경의 자유로운 해석과 신학의 발전을 방해하며, 양심의 자유와 개인의 판단권을 방해하고, 위선과 독선과 완고함을 조장시켜 주며, 분란과 혼란을 야기시키고, 종교적인 증오심과 분파들간의 험담을 낳게 하며, 역작용을 일으켜 교리적 무차별주의나 회의주의 또는 불신앙을 조장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극단적 이단들은 대개가 신앙고백서들을 전적으로 배격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그들은 신앙고백서를 마치 인간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멍에인 것처럼 여기거나 새로운 형태의 교황주의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모순적인 모습은 그렇게 신앙고백서를 반대해 왔던 많은 자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점점 자기들의 형편에 맞게 어떤 전통적인 체계나 자기들이 추앙하는 인물들의 권위에 호소하고 있으며, 그들 역시 기록이나 문서화된 신앙고백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것은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신앙고백의 형태가 어쩔 수 없이 본성적으로 필요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형태보다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단들도 전통적인 신앙고백서들을 인정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 더욱 주의를 요하는 점은 전통적인 장로교라고 하면서, 즉 신앙고백서를 갖고 있으면서도 명목상으로만 갖고 있고 전혀 그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요하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당장의 교회부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편만해진 성장주의와 실증주의 사고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신앙고백서를 말하지 않는 또 다른 한가지 이유를 들라면, 신앙고백서는 결코 성경일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성도라면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설교해야지 무슨 신앙고백서냐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신앙고백서는 성경일수도 없거니와 성경의 권위와 능력과 동일시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드시 그 의미를 제대로 살펴보아야 하며 어떤 기준에 의해 해석되어져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누구나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코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으로 돌아감’에 있어서 수없이 많은 이견(異見)과 역사와 해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교회가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된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참뜻을 가장 올바르게 이해할수 있는 준거의 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어떤 집단의 요구로 인해 이루어져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개혁교회는 변화하는 역사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의 내용들을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고 보존하고 전수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많은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성경과 신앙고백서를 반대립적으로 보거나 또는 무관(無關)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않고 주관적이고, 체험적이며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방식으로 성경의 정신을 왜곡한 이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나 다름없을뿐더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참되게 해석되고 이해되었던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와 다를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참된 정신을 보존하려고 했던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초대교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신앙고백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가장 가치있는 이해와 해석의 틀로서 여겨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정신을 그대로 잇고 있는 장로교회에서 개혁된 신앙고백서를 말하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 신조의 필요성
위의 성경적 근거와 역사적 근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적 개혁파 교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신앙고백을 하나님 앞에서 해야 했고 또한 그 신앙고백이 변질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지켜 가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도는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물음에 대한 본질적인 응답으로 이것을 생명으로 하며, 교회는 바로 그와 같은 신앙 고백적 회원들로 구성되어 신앙고백의 터 위에서 세워진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신조 또는 교리의 외적 고백은 성도 개인과 또한 교회에 있어서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에는 특별한 권위가 부여되어 왔으며, 구원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여길 만큼 교회의 안녕과 유지를 위해서 실제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귀중하게 보존되어 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답변으로서 고백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의 본질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는 교회를 다스려 나가고 보호해야 하는 목적으로서도 신앙고백을 반드시 필요로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조의 이런 필요성은 첫째로 신앙의 바른 가르침을 위한 교육적 목적과 둘째로는 기독교를 파괴하려고 하는 이단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그 필요성이 늘 인정되어 왔던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번째로 초대교회에서 신앙고백서는 기독교 신앙으로 새롭게 개종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특별히 자녀들의 교육에 널리 이용되고 있는 교리문답 형식의 신앙고백서들은 즉흥적이고 피상적인 충동에 의하지 않고 확고하고 분명한 성경 교육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교훈을 요약해 주고, 또한 성경의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며,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어 교회의 일치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해 왔던 것입니다.
2) 두번째로는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이단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게 되면 끊임없이 참된 신앙과 참된 교회를 어지럽히고 또한 변질시키는 거짓된 목사들이 있었는데, 이들로 인해서 바르지 못한 성경 의미가 만들어졌고,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잘못되고 개인적인 가르침들이 난무하였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교회 회의를 통해 대다수의 견해에 따른 성경 말씀의 내용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선언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초대교회에서는 교회를 세상이나 유대교나 이단 사상과 구분하기 위해, 후에는 이런 성경적인 참된 말씀과 잘못된 말씀을 가르치는 이단을 구분하기 위해, 마침내는 신앙고백서를 인정하는 장로교회와 신앙고백서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3. 장로교회의 주요 신앙고백서
1)사도신경
사도신경은 기독교회의 가장 오래된 신조로서 출처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수 없으나 초대교회때부터 성경 의 진리를 가장 바르게 이해하고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드러내는 고백의 형태로 인 정되어 왔으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성경의 내용과 가장 잘 일치하는 신조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칼빈은 사도 신경을 믿음의 요약이요 총체라고 하면서 사도신경으로부터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배울 수 있을뿐 아니라 사도신경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중요한 부분들이 간단히 요약되어져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장로교를 위시한 모든 개신교회는 주기도문과 십계명과 더불어 사도신경을 기독교 신앙의 요약 이며 하나님 말씀과 일치하는 교회 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ch Confession A.D. 1560)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은 스코틀란드 종교개혁이 완성되기 7년전에 죤 녹스(Konx)와 5명의 동료 개혁자들 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카톨릭 교회의 비성경적 제도를 추방하고 예배와 권징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개혁교회의 목사들로 하여금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를 제정하였던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정치적인 배경 속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던 본 신앙고백서는 1560년 8월 18일에 “무오하신 하 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리”라는 인정을 받을 정도로 매우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1567년에 가서야 당국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당국은 “복음을 설 교하는 목사들과 본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 따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만이 스코틀랜드 안에서 유 일하고 참되며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선포할 정도로 본 신앙고백서가 차지하게 된 비중은 매 우 큰 것이었다. 그리고 1572년에 가서는 모든 목사들이 이 고백서에 서명하도록 하였으며, 이 때부터 1647년 웨스트민스 터 신앙고백서가 채택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의 중요한 교리적 표준 역할을 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채택은 미사제도와 교황의 사법권 행사를 강력하게 배격하는 결과 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개혁교회를 배척하고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면서 만들어진 모든 기존 법령들 을 파기하는 운동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본 신앙고백서의 채택으로 인해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성경의 정신에 입각한 순수한 신앙과 교회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3)벨직 신앙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 A.D. 1561)
칼빈의 개혁교회 운동은 벨기에와 네델란드 지방으로 뻗쳐갔습니다. 이 벨기에 신앙고백은 기도 드 브레(Guido de Bres)가 이 지방의 개혁교회를 위하여 작성한 것인데 그는 1567년에 순교하였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개혁자에 대한 심한 박해에 대항하여 싸운 신앙인들의 신앙과 정신을 살린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을뿐더러 고백의 내용도 훌륭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개혁교회 신앙고백 가운데 아주 우수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이 고백서는 15178년 엠덴(Emden) 개혁교회 노회에서 채택되었고 1619년에는 도르트(Dort)에서 모인 전국 총회에서 수정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신앙고백은 명실공히 벨기에와 홀란드의 개혁교회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이 고백은 처음에 프랑스어로 초안된 것인데 나중에 홀란드어와 라틴어로 번역되었다가 도르트 총회에서는 이러한 번역들을 비교하면서 이것을 공식으로 채택하였습니다.
4)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A.D. 1563)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함께 개혁주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현재까지 사용해 온 신앙고백서입니다. 특히 화란 개혁파 교회에서는 이것을 청소년 신앙교육을 위하여 사용할뿐 아니라 주일 저녁 예배 설교의 주제로 사용할 정도로 귀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교리문답서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요청에 의해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젊은 교수 자카리우스 우르지누스와 궁정 설교가 올레비아누스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이 교리문답서는 이후 화란의 개혁교회와 라인강 하류 지방과 헝가리, 체코, 폴란드에 있는 여러 지역의개혁교회들은 물론 영미의 장로교회들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1618,9년에 화란의 도르트레히트에서 열린 노회는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를 교회의 신앙고백서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함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더불어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서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5)도르트 신조(The Canons of Dort A.D. 1619)
이 신조는 17세기 초 유럽 전지역을 논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아르미니안들의 비성경적 입장을 정죄하고자 모였던 국제적인 칼빈 총회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예지예정 교리와 인간의 주권 교리를 내세웠던 아르미니안은 정죄되었고 끝내 칼빈주의 정통파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 노회에서 채택한 신앙기준은 5개조 아래 93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요약하면 TULIP(T-전적부패, U-무조건적 선택, L-제한속죄, I-저항할 수 없는 은혜, P-성도의 견인) 교리라 하여 이후 칼빈주의 신학의 체계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역사학자 필립 샤프는 이 모임의 역사성을 가리켜 “도르트 총회는 개혁교회의 역사 중에서 유일하게, 준(準) 세계교회의 총회의 성격을 가진 회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르트 총회는 신학자들의 모임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매우 중요한 교리적 표준문서들을 제정하긴 하였으나, 그 참석자들이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신학자들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식이나 경건함에서 사도시대 이후 어떠한 회의보다 뛰어났다”고 평하고 있을만큼 도르트 신조는 역사적으로 칼빈신학의 정점을 드러내고 있다는데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6)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A.D. 1647)
본 신앙고백서는 개혁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칼빈의 신학적 사상과 전 개혁교회의 신앙적 내용을 거의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밀한 칼빈주의, 개혁교회 성격의 신앙고백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즉 개혁교회에서 받아들이는 최후의 신앙고백이라는 것과 그 신앙적 입장도 16-17세기를 이어 철저하게 각 교리에 있어서 개혁교회의 독특성을 잘 정리하고 있기에 본 고백서는 개혁주의의 신앙고백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이 고백서를 정통적인 신앙고백서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결 론
우리는 지금까지 정통적인 장로 교회의 입장에서 왜 신앙고백서를 바르게 알고 또한 그것을 소유해야 하며 또 어떤 것이 바른 신앙고백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는 참된 신앙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가장 정확하고 바르게 해석되고 가르쳐져야만 하는데, 최근에는 이단들도 초대 신앙고백서들(사도신경 등)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것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결국에는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신앙고백서를 어떻게 해석해서 그 참된 내용을 소유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참된 교회의 선조들이 신앙고백서의 중요한 가치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의 교훈을 위한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도가 되게 하였으며, 성경의 진리 내용을 완벽하고 견고하게 진술함으로써 오류를 막고 이단자들을 금하였으며, 성도의 교제와 연합의 기초를 세워갔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가 연합하는 것에 있어서도 무조건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경 말씀을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바르게 동의하는 교회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장로교회에서는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목사와 장로와 권사 및 집사 직분을 임명할 때 반드시 손을 들어 하나님 앞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하신 말씀으로 받을것과 성경의 내용을 가장 잘 반영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와 같은 신앙고백서를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치며 변질되지 않도록 지켜갈 것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이 맹세는 역사적으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모든 일꾼들에게 요청된 고백이었으며 이 고백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고 유지하느냐에 따라 참된 교회로서 남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판가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역사적으로 참된 신앙과 참된 교회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임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결코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를 인정하고 배우는데 있어서 어중간한 입장에 서지 않도록 합시다. 이 신앙고백서를 배우고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던졌던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이 신앙고백서를 부지런히 배워서 성경을 잘 해석하고 또한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마음속에 간직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의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익히고 배우지 못했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기억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개혁신학의 주요교리
개혁신학은 루터가 독창적으로 착상했던 것을 칼빈이 조직적 체계화한 것이다. 개혁 정신의 핵심은 중세로마카톨릭교회가 교회제도와 전통과 기구의 권위에 치중함으로써 상실했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신 주권으로 하여금 그 교회와 歷史속에 役事하도록 하자는 데 있다. 따라서 세계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를 택스터로 하여 제 2부 개혁교회의 고전적인 신앙고백서의 내용과 장로교회 신앙고백서를 비교 성경, 칭의, 성화, 성찬, 예정, 교회순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1) 성경(聖經)
스위스와 프랑스, 화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신양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를 특별히 강조했다.
성경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성신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이 교회의 권위 위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즉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에 호소한다. 다시말해서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신적 계시와 인간의 기록문서들 사이의 정확한 관계성은 개혁교회와 로마카톨릭 속에 논쟁의 주제가 되었고 여전히 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리의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증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 자신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교회 위에 두고 있으며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개혁신학의 최고의 권위라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성경은 성신에 의해서 기록된 신.구약 성경임을 확인하고 신앙과 사랑을 중심으로 해석하며 성신이 복음을 통하여 역사 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신앙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경중심임으로 성경전체의 영감된 진리는 이 중심에 의하지 않고는 바르게 해석될 수 없으며 성경의 권위는 진정한 의미의 저자인 하나님께로 난다.
1946년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하나님의 말씀의 지고의 재판관임을 선언한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강조하며 성경으로 성경해석을 이야기하며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의 내적 조명을 강조하며 외경의 권위를 부정한다. 웨스트민스트 요리문답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의무에 대한 가르침이라 고백한다.
장로교신앙고백서는 성경이 신앙과 행위에 대한 규범이라는 것이며 성경은 결코 이 세상의 진리를 말하려는 백과사전이 아니라 성부하나님이 성자이신 그리스도와 성신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와 우주통치및 종말적 성취와 심판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4조에서 성경전체의 영감을 주장하면서 그 중심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심을 강조하며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며 성경해석은 신앙의 지식을 추구함에 유용하다고 정의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사람의 손에 의해서 쓰여졌으나 진정한 저자는 하나님이시고 성경전체가 정확무오하며 완전하며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의 참된 교사는 성신님이고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칭의
신앙이란 십자가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값주고 사신 구원을 받아 드리고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수단이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천명하고(갈3;2) 신앙은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엡2:8-9)이다 는 것이다.신앙은 단순히 지적동의가 아니라 인간 안에 일어나는 영적 변화이고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이해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이다.
"오직 신앙"(Sola Fide)에 의한 칭의라는 주제는 성경전체를 통해서 발견된다(롬3:21-22, 갈2;16,21,25, 3;24-26)
성경 바탕위에서 출발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칭의의 개념에서 그의 신학이 출발점을 가지고 있으며 칭의론은 개신교 신학의 맥락을 형성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개신교 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 칭의에 대한 신앙이다.
구원신앙은 곧 칭의의 신앙인 것이다. 칭의론은 초대교회에서는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지못하다가 암브로시우스와 어거스틴의 칭의론을 강조한 이후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종교개혁에 있어서 칭의론은 개혁의 출발점을 형성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루터는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칭의론을 재발견함으로써 카톨릭교회의 업적의 의를 거부하고 종교개혁의 신학적인 기틀을 마련하다. 칭의는
① 오직 은혜로서만(gratia)
② 오직 그리스도때문에(propter Christum)
③ 오직 신앙으로서만(perfidem)가능하다는 것이다.
칼빈의 칭의론은 "종교의 유지를 위한 결정적 구심점"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근거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은 그리스도인들의 계속적인 반복적인 사건이다. 칼빈은 성화와 칭의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가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인간의 선행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보잘것 없는 선행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용납하고 보상해주신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서 성신에 의해서만 칭의와 성화가 나타나며 성경중심인 신앙과 행위는 하이델베르그신앙고백과 같이 이신칭의는 성신의 주된 열매란 것이다.제2스위스신앙고백에서는 칭의란 회개에 전제된 이신칭의를 말하며 죄책과 형벌에서 사멸을 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이 의롭게 되고 우리의 능력이 율법을 준행하기에 너무나도 역부족하기에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서 하나님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신 사람들을 칭의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죄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의인처럼 여기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으로 오직 그의 의에 힘입어 칭의를 얻는다. 하나님은 칭의 받은 자의 죄와 허물은 계속 용서하신다는 것이다.웨스트민스트 소요리문답은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서 우리의 믿음을 강조한다.
장로교 신앙고백은 회개를 통한 하나님과 화목관계와 구원을 이야기하며 개혁주의의 전통에 따라 칭의를 구원의 관건으로 보면서도 결코 칭의와 분리될 수 없는 성화를 강조한다.
롬 5:1의 "의롭다함을 입었은즉'은 법적인 용어로서 유죄한 자가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것이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 의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복음을 수용함으로써 칭의 혹은 의인을 받을 때 이 칭의의 근거는 밖으로부터 온 의(iustitutia aliena)이다.따라서 이신칭의란 인간의 내적 발전이나 경험에 얻어진 계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앞에서 얻어지는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신칭의는 성화의 과정이 아니라 성화의 기초가 된다.
3)성화
신학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개관할 때 성화는 중요한 관심대상이 되지못하였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고 칭의를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기 위하여 인간의 성화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이에 비하여 성서에 있어서는 성화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나타난다. 나 야웨가 너희 하나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스스로 거룩하게 행동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 11:44)는 계명은 성서의 중심 계명으로서 사랑의 계명과 직결되어 있다.
루터는 신앙과 성화란 바로 성신의 역사라는 것을 말한다. 그는 성신의 역사는 일회적인 역사적 예수의 구속사건을 날마다 신자들 마음속에 영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의인(義認)과 성화(聖化)를 성취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에서 하나님의 지식의 필수조건은 이성이 아니라 신앙과 경건이라고 밝히고 있다. 칼빈은 성신의 역사에 의한 성화(sanctification)을 강조한다. 성화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칼빈이 강조한 계몽과 성화는 성령역사의 두개의 축이다. 계몽도 성경의 영감과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납을 가능케 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이룩된 공로의 신앙에 적용되어 새로운 영적 삶을 산출시킨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서 칭의와 성화는 성신 안에서 일어나며 성신이 내주하시는 성도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죄에 대립하는 갈등의 경험을 가지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평생토록 죄를 극복하고 성화에로 투쟁해야 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자유케 된 사람은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고 고백하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의 이중적 사상의 전제이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에서 신앙을 전제한 선행을 취급한다. 복음설교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구원의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성장 강화된다. 이 선행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함이요, 이웃의 유익을 위함이다. 우리는 칭의로 인해서 구원받았다고 선행을 무시해서는 안되며 선행에 대한 보상은 하나님의 은혜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피택자들은 중생한 사람들이다. 칭의얻고 양자된 사람은 중생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마음과 정신이 새롭게 되었다. 말씀과 성신이 이들의 마음과 정신 안에 거하신다. 성화의 성신이 도우사 중생한 사람은 계속 성화의 삶을 살면서 영화의 차원을 지향한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늘 부족한 죄인이므로 죄에 대한 투쟁이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여 칭의와 성화 영생을 누리는 것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선행은 이신칭의의 양자에게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하나님은 효과적으로 부르셨으며 칭의하셨으며 양자삼으셨고 성화시키시어 택하신 백성을 결국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소망과 피택 성령 안에서의 평화와 기쁨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그들의 순종을 통해서 확증해야 한다.
웨스터민스트 소요리 문답에서 성화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주신 은혜로운 사역이고 은혜 안에서 죽을 때까지 지녀야 할 견인이라는 것이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앙고백에서는 사람은 믿음으로만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칭의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성신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화의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 칭의의 은총은 이례적이나 성화의 생활은 일생을 통해서 계속된다. 성화의 과정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늘 부족한 죄인임을 밝히고 평생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칭의가 구원이고 이 칭의를 얻은 사람은 성화에로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 한다. 성화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4)성찬
"성찬"이란 단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라틴어 Sacramentum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로마의 군인들이 군사적으로 하는 맹세로서 사령관에게 충성하고 군기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서원이었다.성찬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의미에서 생명과 죽음의 양자택일적인 헌신으로서 교회에서는 세례시에 최초로 사용하였다.
제1세기 기독교인들에게는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의식들이 있었고 중세에 이르러서는 7개의 성례 전으로 개혁주의자들은 세례와 주의 만찬을 성례전이라 주장하였다.
중세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화체는 성물의 실재 혹은 "본질"을 그리스도의 신체적인 피와 살이 되게한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는 실제적으로 중세미사에서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다시 한번 희생해야 했다.바로 이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하여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일관되게 반대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화체설을 대치하기 위한 주의 만찬 이론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루터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이라는 이론을 주장 주의 만찬에 그리스도께서 신체적으로 육체적으로 임한다고 주장했고
쯔빙그리는 주의 만찬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분명히 은유적 혹은 상징적이었으며
칼빈은 루터의 신체적 화체적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했으며 또한 쯔빙글리의 기념적 상징적 견해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철학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칼빈은 쯔빙글리와 일치하였으나 칼빈은 루터적이며 로마카톨릭적 입장의 근본적인 가치를 즉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주의 만찬에 임재하시고 신자들은 그 만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칼빈의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의 만찬에 신체적으로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한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서 하나님께서 성례전을 제정하신 목적은 언약의 백성과 언약밖에 있는 사람을 구별하기 위함이요 그의 자녀들의 신앙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요 성례전에 참여시킴으로 저들의 마음속에 그의 약속을 인봉하기 위함이요 택함을 받은자들이 이들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와 축복에 넘치는 교제와 연합에 이르기 위함이다. 성례전은 상징이 아니라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이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영혼과 양식이 되신다. 우리들이 성찬을 올바로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연합되게 된 것은 성경에 의한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견적이고 거룩한 표시요 인정이다. 십자가상에서 성취하신 유일회적인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때문에 그리스도는 죄의 용서와 영성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다. 성만찬에 있어서 봉헌된 떡이라도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이 거룩한 표시를 입으로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참 몸과 참 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제 2 스위스신앙고백에서 기념설을 주장한다. 우리가 성만찬을 통하여 죄, 영원한 죽음 및 사단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사 갈보리언덕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희생제사를 회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떡과 즙을 물질적으로 먹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떡과 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받아 영생에 연결되는 중요한 것으로 본다. 칼빈이 주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실제적 임재와 비슷하다. 그러나 볼링거는 칼빈과 달리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더 첨가하여 주장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서 본 항목은 쯔빙글리의 기념설과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다 받아드리고 있다. 세상끝날까지 이 성찬을 행함으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희생제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이 십자가가 믿는 사람들에게 모든 은택을 확인하고 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장하며 강건해지며 예수그리스도와 연합이다.유일회적인 희생제사를 기념하는 것이고 성찬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트 소요리문답에서 신앙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자들이며 성찬에 떡과 즙을 주고받음으로 영적 양육을 받는 것이다.
장로교 신앙고백에서는 교회론 안에 기록했으며 주님의 구속적 사역인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고 영적으로 그 사건에 동참하기 위하여 성만찬식에 참여하고 이 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교제하고 성례전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신앙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성찬예배에서 집례자가 제정의 말씀과 더불어 봉헌한 떡과 즙을 믿는 성도들이 받아 먹고 마실 때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떡과 즙이 참살과 피로 화채 것도 아니요 떡과 즙속에 예수님의 신비체가 갇히는 것도 아니다.
"성만찬 예전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인 것이다. 성령에 의해서 매개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임재(믿는 사람들 마음 마음속에서)인 것이다"
5) 예정론
예정론이 우리에게 주는 핵심은 구원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와 긍휼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 때에 구원의 확신이 온다. 칼빈은 예정교리로 구원의 확실성을 도와준다. 예정론의 근본적인 핵심은 하나님의 선택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적인 은혜로서 인간에게 공권은 없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이 우리의 조건과 자격이 아니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예정론의 본래 의도와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를 확인하는 데 있다. 기독교강요에서 예정론은 3권 구원론의 끝부분에서 칭의, 성화 다음에 예정에 관해서 기록했는데 은혜로 구원받는 사람, 복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예정론은 칼빈의 예정교리의 핵심인데 예지 예정론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배척당했다. 예정은 우리의 공로에 믿음에 대한 예지에서 예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구원을 주는 것으로 예정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내적사건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예정론이 없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예정에 관하여 논한다. 오직 은총과 오직 신앙에 의한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예정 혹은 선택을 전제로 한다. 이는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한다. 피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을 역설한다.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이중예정론을 주장하며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는 것은 강하게 서술하나 버림받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지극히 약하게 서술한다. 택한 받은 자만이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 즉, 칭의, 양자, 성화를 거쳐 완전히 효과적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은 택함 받은 사람들 뿐이다.
웨스트민스트 소요리문답에는 하나님이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셨는데 이 모든 것은 그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예지,예정을 주장하는데 택한 사람은 은혜의 계약을 맺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의 신분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장로교신앙고백서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정섭리는 인간의 자유나 선행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예정신앙과 자유의지는 서로 보완해야 한다.
예정론의 올바른 강조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데 있다. 전형적인 장로교에선 이중 예정론이 결정론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태초부터 그의 뜻에 따라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고 불가변적으로 정하셨다(엡 1:1 롬 11:33).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죄의 창시자가 아니다.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의지를 강압하시지도 아니하시고 제2의 원인들의 자유의지와 우열성이 결코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확보 확립하는 것이다. 예정교리는 기독교적 숙명론이 아니라 구원받은 신자들의 위로와 확신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자유로이 주시는 은총을 찬양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6)교회론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가 있다. 참교회는 외형적인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회중,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교회보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은 가시적인 교회에 있다. 가시적인 교회는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안에서 계속 재창조되어야 한다. 교회는 참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데 참된 일치는 같은 예식 같은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일치되어야 한다. 교회의 참된 표시는 복음을 순수하게 가르쳐야 되며 성례전을 바르게 집행해야 한다.
스코틀랜드신앙고백에서 교회의 역사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까지 소급해서 보며 선택교리에 입각한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예배하는 하나님의 피택자들을 교회가 정의하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신다고 하며 나아가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한다. 교회는 초월적인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로서 불가시적이라는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에서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리와 성도의 교제를 고백하고 있다. 구원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기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되며 하나님께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중적인 사랑의 전제이라는 것이다.
제2스위스신앙고백서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를 논하며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는 이 땅위에 있는 동안 죄악과 싸우는 전투적인 교회로 승리적인 교회는 하늘나라에만 가능하며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무이한 머리이시며 교회는 질서가 있어야 하며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는 창 3장 15절의 원복음시대로 소급한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서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구분하며 가시적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고 성례전이 베풀어지고 이에 대한 신앙과 순종이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개교회이다. 교회를 통해서 구원이 일어나며 성장과 봉사가 진척된다. 가시적 교회안에는 세상끝날까지 알곡과 쭉정이가 함께 있다.
장로교의 신앙고백은 교회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교회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설교되며 세례와 성만찬을 올바로 베푸는 것에 말씀 듣고 혹은 순종의 측면을 하나더 추가한다.
하나의 교회는 교파간의 연합사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며 거룩한 모임은 세상적인 더러움과 구분되어야 하고 사도적 믿음과 가르침 증언 위에 세워지며 개별성을 가지는 동시에 보편성을 견지해야 한다. 교회는 밖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과 세상속에 복음을 전파하여 땅위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본 신앙고백은 승리적 교회가 아니라 역사안에서 실존하는 전투적 교회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개혁교회는 영성과 제도가 통일된 하나의 보편적이고 거룩한 사도적 공동체이다. 이러한 사도적 교회론에 입각해 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교회 신학의 전통은 연합하고 일치하고 복음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여 왔다.교리상 불일치가 교회의 본질 연합을 깨드리는 것이 아니다. 본질상 중요한 교리는 변질될수 없지만 비 본질적인 교리가 교회의 연합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개혁교회 전통의 연합일치운동은 오늘날 많은 파벌로 갈라져 이합집산하고 아직도 반복질시하고 있는 한국장로교회 상황에서 다시 한번 일깨워야 할 귀중한 보고요 유산이다. 교리상 불일치가 교회의 본질 연합을 깨트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중요한 교리는 변질될 수 없지만 비본질적인 교리가 교회의 연합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7) 마무리하는 말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과 영광 사상에서 출발한다. 이 주권적 은총은 개인의 심령적 차원뿐만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 가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개혁 사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그의 주권적 은총의 표현이다 이 선택사상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숙명론이 아니라 신앙고백이다.개혁사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과 사고와 행위에 있어서 지고의 권위로 인정을 한다.
개혁교회의 본질이란 끊임없는 자기개혁운동이다. 개혁교회의 발생이 로마 카톨릭교회 제도의 갱신과 개혁에서 출발했다 개혁교회는 자신이 하나의 보편적이고 거룩한 사도적 교회로 이해해야 한다.
개혁사상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 신앙에서 출발해서 궁극적으로 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이 세상에 모든 삶의 영역속에서 구현하여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가 되도록 한다. 개혁신학 사상은 단순히 16세기 역사적 종교개혁 사상의 되풀이가 아니다 그것은 "성서만으로"라고 하는 종교개혁 정신을 역사적인 구체적정황과 대화하면서 구현하는데서 새롭게 생성된다.
개혁교회와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바른 신앙고백으로 현실을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