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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 속의 물고기
글: 전 마오
갇혀 사는 것은 우물 속의 생명체만이 아닐 것이다. 어항 속의 물고기도 갇혀 사는 것이고, 우리 인간도 어찌 생각해 보면 지구라는 한 천체에 구름에 휩싸인 채 대기권에 갇혀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갇혀 있는 것을 싫어한다.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숨막힌다는 의식을 갖고 있어서일 것이리라. 다른 사람의 나에 대한 간섭도 나를 어느 한 공간에 틀어박히게 하는, 말하자면 나를 갇히게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여 대개의 사람들이 싫어한다.
사람들은 현재 있는 공간―공간 넓이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을 갇혀 있다고 생각하고 언제나 그곳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친다. 학생들은 자기가 마쳐야 할 학습의 장인 교실에서 떠나려 하고, 직업이 없이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은 집에서 한사코 떠나 어딘가에 가고 싶고, 국제화 시대인 오늘날에 있어서는 자기 나라를 떠나 멀리 다른 나라에 가보고 싶어 한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가 행복의 보금자리였을 그곳을 일단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행복하게 생활하던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 여러 가지 생각 끝에 그곳을 떠난다. 일단 떠나면 이전보다 더 큰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거의 항상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지만, 결과는 대부분이 고생이고 실속이 없는 생활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어항에 갇혀 있는 물고기에 대해 연민을 느끼나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어항은 갇혀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갇혀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뭔가 답답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생각에 갇혀 있다고 생각되는 공간에서 고기들이나 사람들이 자기의 분수를 알고 생활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예 중의 하나가 어항 속에서의 물고기들의 생활에 대한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어항 속의 고기들을 관찰해 보면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어항 속의 물고기를 관찰하는 습성이 생겼다. 거실에 적당한 크기의 어항이 하나 있다. 어항을 들여놓은 것은 물론 관상하기에 좋은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도시 생활에 있어서 부족하기 쉬운 방 안의 습도를 조절하고 정서적인 안정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사실 어항 속에서 나오는 습기는 도시의 아파트에 있어서 사람들의 건강에 큰 도움을 주어 감기 예방 등에 많은 효과가 있다고 하며, 또한 피곤할 때 고기들이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만 보아도 마음이 평안해짐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엔 열대어를 길렀다. 그런데 아마추어인 내가 아무리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도 열대어들은 한 마리 두 마리 죽어갔다. 나중에는 두 마리만 남아 꽤 오래 살더니 그중 한 마리가 죽어 마지막으로 한 마리만 남게 되었다. 어항에 한 마리만 남겨 키우기가 안쓰러워 금붕어를 10여 마리 들여놓았다. 그런데 놀랄 일이 일어났다. 금붕어들이 한 마리 남은 열대어를 공격해서 해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어항 속의 물과 분위기에 익숙해진 열대어가 자기 집(?)에 침입한 금붕어를 하나씩 차례로 죽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죽어 가는 금붕어가 불쌍해 아깝지만 열대어를 꺼내어 따로 다른 장소에 놓고 키웠다. 그런데 그 열대어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며칠이 지나 죽고 말았다. 남아 있던 금붕어들은 그 열대어의 공격을 받은 후유증으로 다 죽어 어항은 이제 텅 비어 버렸다.
어항을 깨끗이 청소하였다. 밑 부분에 깔린 모래까지도 깨끗이 닦고 건조시켰다. 이와 같이 사막처럼 삭막한 모습을 하고 있는 어항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마침 기회가 왔다.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검단산으로 여럿이서 등산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 산에 오를 수 없는 후배가 개울에서 산천어 비슷한 고기를 산채로 잡아서 자기도 10마리 갖고 나에게도 열 마리를 주었다. 나는 정성을 다하여 비어 있는 어항에 물을 채우고 고기를 넣었다. 처음에 고기들은 그 곳이 어색한 듯 두리번거리다가 얼마 후에 자유롭게 헤엄쳐 다녔다.
그곳의 분위기에 익숙해져 안정된 후에 먹이를 넣어 주었다. 처음 먹이를 넣어 줄 때는 주위를 살피다가 한참 후에야 입에 넣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활기찬 모습으로 먹이를 먹었다. 이틀마다 한 번씩 규칙적으로 먹이를 주었다. 어항에 들어간 지 며칠 동안은 곁에 가면 살며시 꼬리에 힘을 빼고 피하더니,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곁에 가면 반가운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가 울다가 엄마가 젖을 들이대면 울음을 그치고 엄마의 젖을 무는 모습 같았다. 고기들이 자기들만의 의식으로 자기를 위하는 대상에 대하여 고마움과 반가움을 느끼고 다가간다는 것을 보고 그러한 모습을 닮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그 뒤로 경기도 하남의 검단산에서 잡아와 기르고 있는 산천어들 틈에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가져온 붕어 한 마리를 넣어 그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갓 들어온 붕어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는지 한 군데 코너에 지느러미를 아래로 향한 채 힘없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틀이 지나자 분위기에 익숙해진 듯 붕어는 눈을 크게 뜨고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래 물아래 바닥에서만 사는 고기인지는 몰라도 물위에 띄어주는 먹이를 찾지 못하고 계속 어항의 아랫부분에서만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결국 밑바닥에 떨어지는 찌꺼기만 찾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3일 째 되던 날 나는 먹이를 주면서 놀랬다. 내 의식의 눈으로 봐서 그런지 몰라도, 이미 삶의 터를 잡은 산천어 한 마리가 자기 입에 넣은 먹이를 어항의 아래 부분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는 붕어에게 떨어 뜨려 주지 않는가! 그러면 붕어는 그것을 받아먹고 있었다. 몇 번인가를 그렇게 하다가 이제 붕어도 먹이가 언제 어느 장소에 떨어지는지 인식하게 되어 먹이를 찾는데 익숙하게 되었다. 바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열대어를 키울 때는 그들이 생산하는 찌꺼기를 치우는 즉 어항 속의 청소를 담당하는 청소부 고기(필자가 붙인 이름)가 한 마리 있어서 항상 어항 속이 깨끗하였다. 그러나 산천어와 붕어를 키우면서 그러한 일을 담당할 고기가 없던 차에 강원도(江原道)의 어느 산골에 갈 기회가 있어, 그곳에서 다슬기 몇 마리를 구할 수 있었다. 다슬기나 우렁이는 원래 찌꺼기를 좋아해서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치우는 동물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다슬기를 잘 다루어 죽지 않게 해서 집에 가져와 어항 속에 넣었다. 일주일쯤 지나자 어항의 면면이 깨끗해졌다. 다슬기가 어항 속의 온갖 쓰레기와 유리에 묻어 있는 모든 때를 처리했던 것이다. 다슬기가 청소를 해주어 고마워서인지 몰라도 종종 다른 고기들이 다슬기에게 다가가서 등을 몸으로 비비기도 하고 또 입으로 다독거려주곤 하였다. 얼마나 보기 좋은 모습인가!
어항 속의 고기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인간 사회에서의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모든 인간은 원칙적으로 평등하다고 하면서도 내면에 있어서는 거의 언제나 불평등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갈수록 인간관계가 경쟁 관계로 바뀌어감에 따라 삭막한 상황들이 우리 주변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 아닌가! 부유하게 살며 인권을 존중한다는 미국에서는 흑인과 다른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 대우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랍권에서는 자기만 살기 위하여 동족간의 살상도 마다하지 않는 일이 허다하고, 지구의 어느 지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어도 다른 한 쪽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음식물을 함부로 버리는 등 흥청망청 낭비하는 세태다. 자기만을 챙기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아니 이미 그러한 현상들이 우리 곁에 자리 잡아 안주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감정 문제를 생각해 보면 고기들의 생활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산천어, 붕어, 다슬기 등이 종류가 서로 다른 고기들인데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주며 돕고 사는 모습은 좁은 국토에서 아무 근거 없는 일로 서로 감정을 대치시키고 있는 부족하고 치졸한 우리네 정서와 의식에 뭔가 충고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우리의 안목의 범위를 세계로 그리고 우주로 넓혀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자신과 나라를 위하여 위의 어항 속에서의 고기들의 서로 도와주며 상생하는 법을 배워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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