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반니 벨조니 (Giovanni Battista Belozi, 1778-1824)
벨조니의 생은 그야말로 파란 만장 했습니다. 이탈리아 파두아에서 평범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6살에 로마로 유학을 가서 수력학을 잠시 공부하기도 했지만, 1798년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점령으로 서둘러 네덜란드로 피신을 왔습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거나 특별히 학문적으로 뛰어난 머리를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방랑 생활을 하게 됩니다.
1803년에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만난 여인 사라와 결혼을 했습니다. 둘은 가난하지만 잉꼬부부로 이 부부는 결혼 이후에도 영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벨조니는 키가 2미터가 넘는 장신이었고 상당히 위압적인 체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생계를 위해 유럽 여러 곳에서 열리는 박람회나 전시회장에서 이벤트로 벌이는 서커스에서 차력사로 일하기도 했죠. 이런 그의 이력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이집트의 연인들’이라고 불리는 당대 유럽 최고의 이집트학자들과 고고학자들 사이에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건지 궁금합니다. 그는 이집트학을 전공한 고고학자도 아닐뿐더러 짧은 그의 생애에서 서른 여섯이 될 때까지 이집트 땅을 밟아 본 적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며, 가장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했던 람세스 2세의 위대한 역작 ‘아부심벨’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물론 벨조니가 아부심벨을 발견한 1816년 이전에 이미 나일강 상류로의 탐험을 떠났었던 스위스의 탐험가 요한 부르크하르가 1813년에 아부심벨을 발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르크하르는 나일강 상류를 따라 황금의 땅 누비아(지금은 아스완 남쪽에서 수단의 북쪽 경계까지 이어진 곳의 지명)를 탐험하던 중 배 안에서 맞은 편 절벽에 모래 속에 묻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조각상이 희미하게 솟아 있는 것을 보고 저 곳에도 고대 이집트의 석상이 남아 있구나 하고 생각만 했던 것이죠. 부르크하르는 람세스 2세의 위대한 신전 아부심벨을 그렇게 지나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벨조니와 이집트와의 인연은 그가 1815년에 서커스 유랑단의 일원으로 지중해에 있는 몰타 섬에 머물고 있을 때 그곳에서 이스마엘 지브랄타를 만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당시 이집트의 총독이었던 모하메드 알리의 밀사 자격으로 몰타 섬에 파견되어, 농업 용지 개간사업과 관개 시설을 시찰하는 임무 수행 중이었습니다. 이스마엘과의 만남에서 벨조니는 이집트를 방문해 총독을 직접 만나 자신의 전공 분야였던 수력을 이용한 관개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발명품을 직접 선보이게 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집트의 나일강은 일년에 한번씩 범람을 하기 때문에 농업 용수를 제대로 확보하고 지대가 낮은 나일강의 물을 효과적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관개 시설이 필수였던 거죠. 이러한 인연으로 우연찮게 벨조니는 고대 파라오들의 문명이 살아 있는 땅, 이집트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들이 계획대로 되지는 않듯이 벨조니가 고안해 낸 수차는 결국 모하메드 알리 총독의 채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집트에서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벨조니는 다시 생계를 위한 일자리를 찾기 시작합니다. 거구의 이탈리아 출신 유럽인이 당시 이집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이집트에 주재하는 유럽인들은 대다수가 영사관과 관련된 외교관들이거나 모하메드 알리 총독과 친분 관계가 있는 유럽의 귀족들, 나머지는 이집트학을 연구하러 온 고고학자들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러 온 탐험가들이었으니까요. 한 부류가 더 있다면, 고대 이집트의 유물들을 사러 온 유물 거래상들 정도였습니다.
<대영 박물관에 있는 벨조니가 옮긴 람세스 2세상>
벨조니는 운이 좋았는데, 탐험가 부르크하르트의 소개로 당시 영국 영사관에 파견돼 있던 영사 헨리 솔트를 만나게 됩니다. 헨리 솔트는 카이로 주재 영국 영사라는 직함을 이용해 사실은 이집트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유럽으로 반출시켜 엄청난 뒷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벨조니에게 일자리를 하나 주었는데 바로 룩소르로 가서 람세스 2세의 장례신전인 라마세움에 있는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석상을 영국으로 옮기는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벨조니에 의해서 영국으로 옮겨진 7톤이 넘는 이 석상은 지금도 대영 박물관의 이집트 갤러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석상을 나일강으로 옮겨 배에 싣는 작업에만 17일이 넘게 소요되고 130명에 가까운 인부들이 동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헨리 솔트의 후원으로 룩소르 지역 뿐 아니라 이집트의 최남단 아스완 지역까지 배를 타고 내려가 유물을 탐사하는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죠.
<기자지역의 카프렌왕의 피라미드 현실에 벨조니가 새겨 놓은 글>
그가 아부심벨을 발견한 1816년, 그는 당시 유명한 프랑스의 탐험가이자 경쟁자였던 드로베티의 방해와 견제를 받으며 룩소르에서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지금의 아스완과 누비아 지역을 탐험하게 됩니다. 아스완 지역에서는 원래의 필레 신전이 있었던 아길키아 섬(후에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이 섬이 수몰되고 현재의 필레 섬으로 신전이 옮겨짐)에서 이시스 여신의 아름다운 신전을 탐험했으며, 엘레판틴 섬 등을 탐험했고, 아스완 남쪽 누비아 땅을 탐험하는 도중 모래 속에 묻혀서 두상만 겨우 볼 수 있었던 아부심벨 신전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배에서 내려 이 곳이 심상치 않은 곳임을 직감하고 모래를 제거하려 했으나 신전의 입구는 2천 년이 넘게 모래에 묻혀 있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1년 뒤 그는 솔트의 후원 하에 다시 이곳을 방문해 수많은 인부를 동원해 모래 제거 작업에 들어갔고, 결국 신전의 입구를 열었습니다. 모래가 제거되어 모습을 드러낸 아부심벨 신전은 보는 이를 압도했습니다. 3200년 전에 대 이집트 제국을 건설한 람세스 2세가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제 1 부인이었던 네페르타리를 위해 지은 소신전 등 절벽을 60미터나 깍아 들어가서 그 굴 속에 거대한 신전을 건축해 놓은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던 덕으로 신전 안에 새겨 놓은 부조와 상형 문자들은 완벽하게 보존 돼 있었고 생생한 물감의 색이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람세스 2세 통치 당시 가장 유명한 전쟁 중 하나인 히타이트 원정에서의 카데슈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보는 이를 전율케 했습니다.
<아부심벨 대신전>
후에 벨조니는 후원자였던 솔트가 사실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가 발굴하고 운반했던 유물들이 유럽의 박물관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의 콜렉션으로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벨조니는 깊은 절망에 빠졌지만, 그의 아내 사라는 늘 그랬듯이 그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며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솔트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이집트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고대 이집트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는 현장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 발굴과 복원 현장에 함께 했고, 왕가의 계곡에서 현재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무덤 중 하나로 꼽히는 세티 1세(람세스 2세의 아버지)의 무덤을 최초로 열었던 것입니다. 이 무덤은 벨조니 무덤이라는 애칭이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기자 피라미드 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피라미드 카프렌 왕의 피라미드 내부를 최초로 탐사했으며, 자신의 이름과 날짜를 피라미드 안 현실벽에 새겨 두기도 했죠. 또한 이집트 사막 투어의 유명한 코스이기 한 바하리야 사막을 최초로 탐험한 유럽인이기도 합니다.
벨조니는 고고학자 출신이 아니었고, 우연히 이집트로 건너와 유물 거래상의 하수인 노릇을 한 적도 있지만, 후에 개심하고 이집트 유물 발굴과 보존에 누구보다 앞장 섰으며, 자신이 발굴한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책을 발간해 오늘날 당당히 ‘이집트의 연인들’의 반열에 올라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집트를 떠나 후에도 그의 방랑벽은 끝나지 않았고, 1824년 서아프리카로 탐험을 떠났다가 베닌 왕국이라고 불리는 팀북투에 이르러 이질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그가 발굴해 낸 아부심벨은 현재에도 이집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수많은 신전들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누비아 인들의 땅을 채운 나세르 호수 위에 유유히 떠 있는 아부심벨, 유네스코의 노력으로 원래의 위치보다 약 70미터 가량 높은 곳으로 옮겨진 이 신전은 20세기 고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손을 다시 한번 거쳐, 지금도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는 람세스 2세의 눈빛이 생생한 곳입니다.
첫댓글 천박사님! 계속 올려주시는 좋~은자료 인쇄하여 다시 읽어보려고 갖고 있는데요, 책 한권 분량도 넘는것 같아요. 감사드리고 뿌듯해요~~~
아름님, 감사합니다. 제가 올리는 자료는 주로 이번 이집트 여행과 관련된 자료들 위주라 먼저 읽고 가시는 만큼 아름님의 좋은 여행이 될 거 같습니다.
좋은 정보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