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도 되지 않는 시를 왜 쓰나?
유진 (시인)
물질이 정신보다 앞서 달리는 시대에 아무리 써 봤자 쌀 한 톨 될 일도 없는 시를 밥 먹듯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은 마음을 적시는 시 한편에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정신적 풍요에 가치를 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각하지 못한 진, 선, 미의 질서를 깨닫고 자아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데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이다.
시는 파괴된 정신의 균형을 복구하기 위해 무질서한 것들의 통일과 조화를 지향하는 것이며, 시인은 세속적 이해득실을 초월할 수 있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시는 시로써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한 편 한 편을 자세히 읽으면 모두 마음을 적시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순간순간 어떤 맥락에서 어떤 것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생각이 머무르는 시점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기술적 표현방법과 표현능력에 따라 음률과 그림이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에 굴복하지 않아야 비로소 시인이다. 시로 말하고 시처럼 살아야 시인이다. 세속적 이해득실을 초월한 시인이기 때문에 밥도 되지 않는 시를 밥 먹듯 쓸 수 있는 것이다.
안도 다다오가 콘크리트 벽 안에 감춘 방
장지문을 열면 정말 연밥 같은 밥상이 있는,
잠시 살다 가더라도 들고 싶었던 방
그렇게나 발품 팔아 얻고 싶었던
전망 좋고 정갈한 방
뜨거운 햇살마저 은은하게 깃들어
세간이 다 드러나도 누추하지 않은 가난,
그러나 구하지 못하고 지금
방에 갇혀 사는
지상에서는 구할 수 없는 방
ㅡ이종수 「연꽃방」 전문
우리시 2018년 9월호
일본인 안도 다다오는 동양의 자연 관조 사상을 현대적으로 추상화시킨 건축가다. 그는 건축물이 들어설 위치에 비, 바람, 물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창출하는 동시에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건축물을 창조한다는 평을 받으며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었다고 한다.
절제미와 여백 활용, 간결함, 자연과의 융화라는 동양 전통적 정서와 자연을 최대한 고려하고 휴식과 편리함을 위주로 완벽하게 지었다는 훌륭하고 고급스런 현대건축물에 뜨거운 햇살마저 은은하게 깃들어 세간이 다 드러나도 누추하지 않은 가난은 없다.
그 속엔 장지문도 없고, 연꽃모양의 개다리소반도 없다. 가난한 피붙이들과 훈훈하게 정붙이고 살던 단칸방은 어디에도 없다.
편이를 쫓아 온 문명발달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미래세계로 들어섰다. 번쩍이는 대리석과 두툼한 통유리 안에 철저히 고립되어가는 1인 시대, 잃어버린 것, 사라진 것들이 무엇인지 조차 잊혀져가고 있다.
지구촌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지금 어디를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성현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음이 군자’라고 했는데
나는 군자와는 거리가 먼 소인인가 보다
누가 혹 내 글을 읽어주지 않나 하고
매일 페북에 열심히 드나들고 있는 꼴이라니…
그래봐야 백년하청,
세상은 임보를 거들떠도 안 본다
유명해지려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연일 떠들어대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겐 이름날 일이 없다
그렇다면
시류에 부응해서 나도 ‘괴물’이라도 한번 돼 본다?
나를 찾아오는 젊은 여성은 없으니
길 가는 여성이라도 붙들고 희롱을 한번 해 본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런 해프닝을 벌인다면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찾아와
특종으로 보도하기는커녕
파렴치한으로 즉각 고발되어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고 말 게 뻔하다
세상의 주목을 받는 괴물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 명불허전 : 명성이나 명예가 헛되이 퍼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름날 만한 까닭이 있음을 이르는 말.
ㅡ임보 「이름날 일」 전문 .
우리시 2018년 11월호
시의 마음, 시의 가치를 제대로 잘 전달하는 데에 목적을 둔 시인이 유명세를 기웃거릴까. 하물며, 평생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는 어른께서 페북을 살피는 일이란 단지 시의 말에 귀를 대고 들어주는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떤 말로 잊혀지고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의 주목을 받는 괴물도 /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
세속적 명성을 시의 명성으로 착각한 C가 동생에게 고급정장까지 빌려서 입고 돋보이려 한 것은 유명시가 아니라 유명인이었다. 유명인의 권력에 편승해보겠다는 심사가 아니라면 없는 외양까지 꾸며가며 애써 찾아 갈 이유가 없지 않을까? 유명세를 누리며 취기를 이용한 주사를 휘두르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거쳐 힘겹게 쌓아올린 유명세를 보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욱이 우리나라 시인이이라면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저질러 놓고도 서로 논쟁중인 두 사람 모두 괴물이긴 마찬가지 아닌가. 괴물이나 괴물을 폭로한 괴물을 불구경하는 일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유명시인이나 무명시인이나 시인으로서의 자세를 바르게 가지는 것이 우선이다. 유명해지기 위해 시의 가치에 대한 자긍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먼 발치에서 존경심을 품고 지내는 필자처럼 알고 있는 시인들은 거의 대부분 임보 교수님을 존경하고 있다. 굳이 찾아다니거나 나서지 않더라도 먼 발치에서 존경심을 품고 지내는 후학들이 많다는 건 그야말로 진정한 명불허전名不虛傳이 아닌가.
명당이 어딘고 하니 / 지금 앉아 있는 내 집의 식탁 자리 // 오른편 탁자 위엔 TV가 켜져 있고 / 왼편 창밖엔 푸른 뜰이 내다보인다 // 천리 밖 허상(虛像)과 지척의 진경(眞景) / 두 세상을 아울러 거느린 공간 // TV에선 뉴스와 광고전이 치열하고 / 뜰에선 귤과 백모란이 다투어 꽃을 열고 있다 // 찾아올 사람도 찾아야 할 사람도 없는 / 한가로운 5월의 첫머리 오후 // 저쪽도 기웃 이쪽도 기웃 / 사바(娑婆)와 정토(淨土)를 넘나들며 // 매실주 한잔 곁에 놓고 / <청산별곡> 흥얼거린다. ㅡ임보 「천하 명당(明堂)」 전문.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군자의 禪詩가 아닌가.
무질서한 것들의 통일과 조화를 위해 파괴된 정신의 균형을 복구하려는 시의 가치를 문화 권력이 아닌 진솔한 시로써 보여주며 세속적 이해득실을 초월한 채, 오늘도 낭창을 즐기시는 임보 시인이야말로 후학들이 참으로 본 받고 싶은 이시대의 군자가 아니시던가
기어이 허물을 남기는 매미가 있고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는 눈사람이 있다
ㅡ 이종섶 「같이 며칠을 사는데도· 2」전문.
우리시 2018년 11월호
태어나면 누구나 사는 일에 매진한다. 죽어라 달리기도 하고 느릿느릿 걷기도 하면서 한 세상을 산다. 기어이 허물을 남기는 매미는 적게는 5년, 길게는 17년을 주기로 지상에 나와 짧은 한 철을 살다가는 것이 억울해 허물을 남기는 것일까?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에 비하면 억울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해가 나면 녹아버릴 눈사람은 며칠이라도 살 수 있어 행복할까? 여한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 같은 며칠을 살면서도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한생을 살면서 목적이나 생각이나 행동에 따라 인생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한 치 어긋남이 없는 인과연의 법칙이다.
한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시를 쓰는 시인들이여 어떤 시인이 되고 어떤 시를 쓸 것인가?
시의 가치는 시인의 정신에 달려 있다. 쌀 대신 시를 택한 시인들 덕분에 하루에도 수편씩 쏟아지는 시들을 모두 읽기에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모자란다.
하지만 시인다운 시인들이 밥도 되지 않는 시를 밥 먹듯 써내는 모든 시들이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진, 선, 미의 질서를 깨닫고 자아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데에 뜻을 두고 정신적 풍요를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많은 시인들이 마음을 적시는 시 한편을 쓰기위해 날마다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은 감사하고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ㅡ 『우리시』2019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