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 야곱, 이스라엘”
- 호세아 11:12-12:14 해설과 적용 -
들어가는 말
문맥상 한글성경의 11장 마지막 절(12절)은 그 다음 장인 12장의 첫 절과 함께 연결되어야 한다. 참고로, 히브리어 성경에는 12:1-2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한글번역 11장 12절로부터 시작한다. 먼저 거시 구조적으로 살펴볼 때, 호세아서는 크게 3개의 대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장 그리고 4-11장, 그리고 12-14장이다. 이 대 단락들은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는데 각각 시작은 비난과 책망과 심판으로 시작하지만 끝 부분은 희망과 구원에 대한 메시지로 종결짓고 있다.
호세아의 불행한 결혼 이야기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부부관계로 빗대어 서술하고 있는 1-3장은 그 결론부분(3:5)에서 재결합이라는 예기치 못한 놀라운 회복으로 끝을 맺는다. 재결합하기로 작정한 남편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서 상당한 값을 지불하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행위에서 구원은 어떻게 오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감동적인 대답을 듣는다. 두 번째 단락에서도 이와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4-11장에 이르는 두 번째 대 단락도 그 끝 부분인 11:7-11에서 이스라엘의 '귀향'(homecoming)에 관한 묘사로 종결짓고 있다.
탕자와 같은 이스라엘의 죄악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도 아들을 향해 끓어오르는 긍휼을 어찌할 수 없어 다시금 탕자 이스라엘을 보듬어 안는 아버지 하나님을 본다. 탕자의 귀향이라 할까, 아니면 고통스럽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긍휼이라 할까, 좌우간 그런 방식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12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세 번째 대 단락 역시 끝 부분(14:4-8)에 가서 희망적인 미래를 약속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리가 다루게 될 본문은 세 번째 대 단락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해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
본문은 직설적인 어조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함께 싸잡아 비난한다(11:12-12:1). 그리고 시인/예언자는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범죄의 역사, 특별히 이스라엘이 저지른 초기 범죄 역사를 언급하는데, 야곱이란 인물을 들어서 그리한다. 분명히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형(模型,
type)으로서 역할을 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에 관한 이야기들 중 세 가지 전승들을 하나씩 집어내어 현재의 이스라엘에 적용시키면서 이스라엘의 배교와 죄악을 비난한다. 다시 말해 야곱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호세아 당시의 청중/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모습인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실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야곱 에피소드를 사용하고 있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즉 본문의 의도가 이스라엘의 죄악과 잘못을 드러내고 그들에게 임할 수밖에 없는 심판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죄악을 만천하에 들추어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 회개하도록 인도하려는 목적인지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본문의 저자는 왜 야곱의 일생 중에 일어났던 특정한 에피소드들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 야곱의 에피소드를 인용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전형(典型)으로서 야곱의 잘못을 드러내어 이스라엘이 당하게 될 심판의 불가피성을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비록 못되고 기만하는 인물이었지만 회개와 변화를 통해 점차적으로 새롭게 바꾸어져가는 야곱의 모습을 그려줌으로써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삶을 향한 변화와 회개를 촉구하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2-4절).
이에 대한 대답은 잠시 뒤로 하고, 이스라엘은 그들이 만나야할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알아야한다(5절).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돌아오되 삶을 개혁하고 언약적 삶의 성품들(인애와 공의)을 회복해야한다(6절).
그러나 이스라엘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만(自滿)이라는 동굴 안에 안주하면서 거짓을 물마시듯 하는 자들이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불의로 재물을 축적하여 성채와 같은 저택에 살면서도 그러한 성공은 자신의 땀과 근면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라고 말하는 거짓말
쟁이들이었다(7-8절).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저택을 파하시고 그들을 길거리의 낭인들처럼 천막에 살게 만들 것이다. 마치 출애굽시절 광야에서 유랑하며 천막생활을 하듯이 말이다(9절).
다시금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쓰라린 과거를 회상하며 불쾌한 심정을 토로하신다(10-14절). 예언자들을 수없이 보내지 않았냐는 것이다. 예언자들을 통해 비유로 환상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히려 강퍅하여져서 배교하기를 밥 먹듯이 하였으며, 야웨 하나님의 제단에 바알 종교예식을 거침없이 거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11절). 그들이 저지른 치졸한 행각의 결과는 마치 그들의 선조 야곱이 아람으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노예 아닌 노예로 생활한 일에 비유된다(12절). 그러나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그대로 내둘 수 없었던 아버지 하나님은 그들을 종노릇 했던 집에서 불러내셨다.
여기서 시인/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옛 조상 야곱의 아람 생활을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생활에 비견하여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13절). 그러나 배은망덕한 아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사로 엮어진 그들의 과거를 새까맣게 잊은 채 다시금 아버지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다. 아니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찌해야한단 말인가? 그대로 놔두어야하는가? 아니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있는 예언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흘린 피의 값을 계산하시고 그들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것이다(14절).
[사기꾼 이스라엘]
12 에브라임은 거짓말로 나를 둘러쌓고,
이스라엘 집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싼다,
유다도 하나님께 대항하고
신실하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항한다.
1 에브라임은 바람을 기르고
온종일 동풍을 추적한다.
그들은 거짓과 폭력을 더한다.
그들은 앗시리아와 조약을 맺으며,
애굽에 감람유를 보낸다.
[12절] 에브라임/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은 다시 시작된다.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한 이스라엘의 삶에 대해 고발한다(참조, 7:2). 무엇이 이스라엘의 기만적인 행동인가? 무엇이 그들의 악한 삶의 패턴인가?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예배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들의 기도는
거짓말로 가득한 위선적인 종교행위였고, 그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고 속이는 일들로 가득 찼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국가 전체가 부패하고 오염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과 규례를 매우 중요시하는 나라였지만 그 안에는 경건한 삶과 진실한 언어를 상실한 사람들로 거리는 채워졌다. 유다라고해서 나을 것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놈이 그놈이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향해 반항을 거듭했고, 하나님의 신실함은 그들의 부정직한 삶으로 응답되었다.1)
1) 11:12에서 ‘유다’를 언급하고 있는데, 어떤 의미로 유다를 언급하고 있는지 원문의 구문법상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한글개역, 표준새번역, NIV등은 이스라엘과 함께 유다도 비난의 대상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NRSV 번역은 유다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한다. “유다는 아직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으며 거룩한 자에게 신실하다.” 이런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은 호세아의 메시지를 편집했던 남방의 유다 인들이 그렇게 유다에 대해 긍정적으로 문구를 삽입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여기서 우리는 포로기전 예언자들의 기소내용 대부분이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라는 두 가지 측면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올바른 예배행위가 아닌 우상숭배는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행위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십계명의 첫 번째 부분에 대한 소홀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부분에 대한 무시로 나타나다.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고 섬기는 일은 동료시민과 사람들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대우하는 열매로 나타난다고 율법을 요약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분명하지 않는가! 이스라엘의 거짓과 기만적인 삶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1절] 국가적인 차원에서, 거짓과 기만의 형태는 정치적인 모습을 띈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기만행위는 야웨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보호하심을 믿는 대신에 강대국들의 안전보장과 지원을 추구하는데서 나타난다(11:12b).
애굽과 앗시리아와 맺은 조약 체결이 바로 그러한 기만행위를 나타낸다(참조, 7:11-13). 그러나 시인/예언자는 그들의 행위가 무익하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바람-은유’를 통해 말한다. 바람은 예측하기 어렵고 언제라도 방향을 바꾸어 불기 마련이다. 사람이 바람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무섭기로 악명 높은 ‘동풍’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 중동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동풍은 죽음의 바람이다. 작열하는 기온을 동반하는 동풍은 농작물을 바싹 마르게 하는 무서운 바람이다.
예언자에 따르면 애굽과 앗시리아는 아무 때나 불고 싶은 데로 불어, 땅을 갈라지게 하고 농작물을 태워버리는 동풍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들로부터 ‘역풍’을 맞을 것이다. 아니 그 태풍은 ‘하나님의 바람’이다. 하나님이 일으켜 이스라엘을 시들고 마르게 하는 분노의 동풍이 될 것이다(참조, 13:15).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어리석게도 그들을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며 그들과 조약을 맺는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인가! 이스라엘은 몰라도 너무도 모른다. 예언자의 질타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었던 호세아는 앗시리아와 종주조약을 체결한 일이 있었다(왕하 17:3). 그러나 나중에 그 조약을 깨뜨리기 위하여 애굽에 도움을 청하러 갔다(왕하17:4). 그렇다.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입으로는 외치면서 이스라엘은 이리저리 인간적 도움을 청하러 다니던 이중성격의 소유자였다. 요즈음 말로 그들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는 하는 지조 없는 창녀였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발로 다니는 것 사이에는 너무도 먼 간격이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참된 믿음인가? 구원은 사람에게, 경제력에, 군사력에, 창과 칼의 숫자나 돈의 많음에 달려있지 않다고 고백하는 데서부터 참된 믿음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법적 소송과 야곱 이야기]
2 야웨께서 유다2)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며,
2) 원문은 ‘유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단어와 평행을 이루는 단어가 ‘야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그리고 문맥상 예언자의 비난과 고소는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해가 가능하다.
야곱을 그의 행위들에 따라 벌하시며, 그의 행실에 따라 그를 보응할 것이다.
3 그는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움켜잡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
4 그는 천사와 힘을 겨루었고 그가 이겼다.3)
그는 울면서 그에게 은혜를 간구했다.벧엘에서 그는 그를 만났고4) 거기서 그는 그(우리)와5) 함께 말하였다.
5 야웨 만군의 하나님,야웨는 그의 이름이라!
6 자, 너는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인애와 공의를 꼭 붙들라! 너의 하나님을 계속해서 기다리라!
3) 첫 번째 ‘그’는 야곱이 분명하지만 두 번째 ‘그’는 문법적으로 야곱일 수도 있고 천사일 수도 있다. 전통적인 이해는 야곱이지만, 천사라고 하면 그 다음 줄에 야곱이 울면서 천사에게 은혜를 구했다는 말이 자연스럽다.
4) 주어나 목적어가 모두 3인칭 남성 단수인 ‘그’이다. 주어와 목적어가 각각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하다. “벧엘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다. 거기서 야곱이 하나님과 말하였다”와 “벧엘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만났다. 거기서 하나님이 야곱과 말씀하였다.”
5) 히브리 원문(MT)에는 ‘우리’로 되어 있지만 칠십인경(LXX)에는 ‘그’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칠십인경을 따른다.
[2절] 따라서 하나님은 사기꾼과 같은 이스라엘을 법정에 고소하겠다는 것이다. 개역성경에 “야웨께서 유다와 논쟁하신다”는 표현에서 ‘유다’는 원래 ‘이스라엘’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6)
6) K. Elliger는 BHS의 비평 각주를 통해서 ‘유다’ 대신에 ‘이스라엘’로 읽기를 제안한다.
그 이유로는 본 단락은 기본적으로 북 이스라엘 왕국을 향한 호세아의 메시지이며, 또한 그 다음 구절에 언급된 ‘야곱’과 평행을 이루는 호칭은 ‘유다’가 아니라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로 표기된 이유는 후에 호세아의 메시지가 남쪽 유다에서 적용되고 사용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좌우간 중요한 사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송을 제기하시겠다는 것이다. 소위 언약파기로 인한 소송제기(covenant lawsuit)에 관한 본문이다.
야곱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행위들에 대한 예언자의 고발 내용은 다음 절들에 나온다.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송을 제기했다면 소송의 내용은 분명히 이스라엘에 관한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흥미를 끄는 것은 예언자가 이스라엘의 족장 야곱에 관한 세 가지 에피소드를 언급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석자들의 관심은 야곱에 대한 언급이 분명히 이스라엘의 언약 파기의 죄악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면, 야곱에 관한 에피소드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호세아가 야곱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이스라엘의 기만성과 속임수를 비난하기 위해서인지 — 야곱이 얼마나 속임수의 대가였던가! — 아니면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에 되었듯이(창 32:28) 죄로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의미에서 야곱의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먼저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본문은 ‘소송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쉽게도 표준새번역은 ‘심판하다’고 번역하고,개역개정은 ‘논쟁하다’로, 개역은 ‘쟁변하다’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원어는 ‘리브’(ביר)로서 ‘소송을 제기하다’로 잘 번역될 수 있는 법률적 용어다.
이 단어는 법적 공방(2:2; 4:4, 그리고 11장)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로서 호세아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을 향하여 법적 소송도 불사하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2절). 그리고 3절과 4절에 기소(起訴) 내용이 나온다. 기소에 있어서 독특성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직접적으로 나열하는 대신에 족장 야곱의 일생 중에 있었던 세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것으로 기소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예언자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야곱의 이야기는 곧 당신들의 이야기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세 가지 이야기는
(1) 태어날 때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았던 사건(3절. 참조, 창 25:19-26),
(2) 어른이 되어 얍복 강가에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의 천사와의 생사를 건 싸움을 하였던 일(3b-4a절. 참조, 창 32장),
(3) 그리고 도망자의 신세로 하란으로 가던 중 황량한 들판(후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다(4b-6절. 참조,창 28:10-17). 예언자는 옛 이야기를 현재의 상황에 적용되는 메시지로 들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로 야곱 전승이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3절] 첫 번째 야곱 이야기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장자가 되려고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았던 에피소드다(창 25:19-26). ‘야곱’이란 이름의 뜻이 ‘움켜잡는 자’라는 것은 그의 일생 전체를 통해서 분명해진다. 형의 장자권을 움켜잡으려고 온갖 속임수와 꾀를 다 동원하였던 집념의 사나이 야곱. 그는 이미 어머니 태중에서 형의 장자권한을 악착같이 움켜잡으려하였고, 청년이 된 후도 그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간교한 속임수로 장자권한을 탈취한다. 소위 저 유명한 ‘팥죽 사건’이 그것이다.
아버지의 복을 야곱에게 탈취당한 후 분을 삭이지 못한 에서는 울면서 이렇게 외쳤다. “그 자의 이름을 야곱(בוקעי, ‘야콥’)이라 함은 정말로 잘 지은 이름입니다! 그가 두 번씩이나 나를 탈취(בקעי, ‘야콥’)하였기 때문입니다.”(창 27:36).
이 에피소드를 통하여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은 처음부터 자기중심적이었고 남의 것을 강탈하려는 자들이었다”라고 고소하고 있다
[3b-4a절] 두 번째 이야기는 야곱이 이십여 년 만에 하란에서 귀국하면서 얍복강 나루터에서 있었던 일이다(창 32:22-32). 야곱은 한밤중에 나중에 하나님의 천사로 판명된 어떤 낮선 사람과 사투를 벌인다. 창세기에 따르면 누가 이겼는지 불분명하다. 창 32:25a절, 26절, 그리
고 28b절에서는 야곱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야기의 최종 본에 따르면 낮선 사람이 이긴다. 그는 야곱의 환도 뼈를 내리쳐 절뚝거리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25절), 승리자의 입장에서 준엄하게 야곱의 이름을 물어보면서도(27절)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29절). 창세기 기사에 대한 호세아의 독특한 덧붙임이 눈에 띈다.
창세기 기록에는 야곱이 울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호세아에 의하면 야곱은 통곡하면서 그에게(하나님의 천사) 은혜를 간구했다는 것이다. 야곱의 통곡에 대한 언급은 단순히 ‘교훈적 장식’(homiletical embellishment)에 불과한 것일까?7)
7) James Limburg, Hosea-Micah, Interpretation (Atlanta: John Knox Press, 1988), p. 44.
이럴 경우 야곱전승에 대한 예언자의 언급은 이스라엘은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적이며 하나님께 대드는 되먹지 못한 자식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 된다. 그러나 예언자가 야곱의 통곡을 의도적으로 진지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가 야곱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이스라엘에게 “비록 너희들이 야곱처럼 하나님께 대들고 반역하였다 하더라도 이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된다. 특별히 야곱이 울고 은혜를 구했다는 기록은 야곱이 에서를 만났을 때 사건을 연상케 한다(창 33:4-10).
그렇다면 우리는 야곱의 놀라운 변화의 모습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머니의 모태에서 형을 몰아내려고 했던 바로 그 야곱이(3a절) 이제는 에서 앞에서 울면서 그의 호의와 은혜를 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가능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야
곱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조우’(genuine encounter) 경험을 통하여 야곱은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3-4b절의 대칭구조가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8)
8) William L. Holladay, "Chiasmus, the Key to Hosea XII 3-6," Vetus Testamentum 16 (1966), pp.56-57. Gale Yee, "Hosea," in The New Interpreters Bible, p. 284에서 재인용.
A 태속에서 야곱은 그의 ‘형’을 움켜잡았다.
B 어른이 된 후 그는 ‘하나님’과 다투었다.
B' 그는 ‘천사’와 다투었고 이겼다.
A' 그는 통곡했고 (‘에서’의) 은혜를 구했다(참조, 창 33:4-10).
보다시피, 형의 장자 권한을 빼앗으려던 자가(A) 이제는 통곡하면서 그의 은혜와 호의를 비는 자가 되었다(A').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과의 결정적인 조우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B, B'). 이것은 호세아의 청중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였을 것이다.
[4b-6절] 세 번째 에피소드는 벧엘에서의 하나님과의 조우에 관한 이야기이다(창 28:10-17).
연대적으로 이 이야기는 앞에 소개된 브니엘 이야기보다는 이르지만, 의미 있게 현재의 위치에 놓여졌다. 먼저 본문을 다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벧엘에서 그는 그를 만났고 (4bα절)
거기서 그는 우리(그)와 함께 말하였다”(4bβ절).
보다시피, 원문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각각 인칭 대명사로 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야곱을 만난 것인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것인지(4bα절), 그리고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신 것인지 야곱이 하나님에게 말씀하신 것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호세아의 청중들) 말씀하신 것인지, 야곱이 우리에게(호세아의 청중들) 말씀하신 것인지(4bβ절) 분명치 않다.
여러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해 볼 때 본문은 매우 의도적인 ‘모호성’을 지닌 문장인 듯 하다. 일종의 문학 기법인 ‘모호성’(literary ambiguity)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일 이(Gale Yee)는 본문의 모호성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안한다. 그녀에 따르면 본문은 이중적 주어와 목적어를 지닌다는 것이다. 주어는 하나님일 수도 야곱일 수도 있고, 목적격은 야곱일 수도, 당대의 사람들일 수도 있다. 이런 구도라면 모두 세 가지 의미차원이 가능하다.
첫째 차원에서는,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시고 그와 말씀하시고, 자신의 신적 이름을 계시하시고, 그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사랑(인애)과 공의를 지켜 행할 것을 명하신다는 뜻이 된다(하나님 야곱).
둘째 차원에서는,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우리에게 회개하고 언약적 삶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는 뜻을 지닌다(하나님 우리).
세 번째 차원에서는, 야곱이 우리에게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고 우리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의 언약을 지킬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 된다(야곱 우리).9)
9) Gale Yee, "Hosea," p. 284.
여기서 우리는 세 개의 야곱 에피소드의 사용목적이 점차적으로 분명해진다는 것을 감지 할수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야곱은 치사하고 거짓으로 뭉쳐진 비열한 사기꾼으로 등장한다. 그에게는 전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람 같은 흔적과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러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야곱은 다르다. 그는 ‘장엄한 패배’10)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사람으로 변화되어간다. 그는 처음으로 사람은 은혜를 입고 사는 존재인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게 된다.
10) 이 문구는 얍복강의 야곱에 관한 창세기 본문(32:22-32)에 대한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의 설교문 제목이다. Frederick Buechner, The Magnificent Defeat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79),pp. 10-18.
세 번째 에피소드에 투영된 야곱은 자신의 변화의 경험을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강하게 권한다. 그는 후손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와 인내와 공의를 지키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격려하는 거룩한 노인으로 변해있다. 종합해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호세아의 메시지는 강한 비난과 고소의 음조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저열한 인간 야곱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야곱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애절한 조상이 아닌가? 그러나 그 야곱은 이스라엘로 변화한다. 새로운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하나님과의 ‘치명적인 조우(遭遇)’ 때문이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만난 것이었다. 비로소 그는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은혜를 구한다.11)
11) 참고, 류호준, “피치 못할 두 가지 만남,” in 『창세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두란노 HOW 주석 구약시리즈, 목회와 신학 편집부 엮음 (서울: 두란노, 2003), pp. 239-56.
그렇게 변화된 야곱/이스라엘은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그의 후손 이스라엘에게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소개하며(5절), 그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한다(6절).
이러한 포괄적인 야곱 이야기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신다. 죄와 허물로 찌든 우리의 과거 역사 속에 우리 자신들을 묶어놓아 죽음을 경험하게 하시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놓아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을 갈망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언약적 삶의 특성들을 양육하라. 인애와 공의를 마음 깊이 품고 지켜라. 너의 하나님을 기다리고 갈망하라”(6절).
[이스라엘은 구제불능인가?]
7 손 안에는 거짓 저울이 있는 장사꾼12),
그는 속이기를 좋아한다.
8 에브라임은 말하기를 “아하, 나는 부자다.
나는 재산을 모았다.
나의 모든 수고한 것들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찾지 못하리라.”
12) ‘장사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가나안’이다. 구약성경에는 가나안이란 명칭은 종종 장사꾼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예, 겔 16:29; 17:4; 습 1:11. 가나안 족들은 원래 해상무역을 하던 자들이었다. 참조, Peoples of Old Testament Tmes, ed. D. J. Wiseman (Oxford, 1973), pp. 40, 43.
9 그러나 나는 이집트 땅에서부터
너의 하나님 야웨다.
명절날에 하던 것처럼
나는 다시금 너를 천막에 살게 할 것이다.
[7-8절] 호세아는 역사적 야곱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이스라엘의 현 상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다시 기소를 계속한다(7,8절). 에브라임은 부정직한 상인과 같다는 것이다. 에브라임의 거짓과 기만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서 이야기한 바가 있다(11:12-12:1). 예언자는 이스라
엘의 부패를 빗대어 말하기를, 에브라임은 개인적 이익에 눈이 멀어 저울을 속이는 사기꾼 같은 장사치라는 것이다. ‘장사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원래 ‘가나안’이다. 무역이나 상거래로 이름을 떨친 ‘가나안족’이란 이름은 후에 상인, 장사꾼 등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시인/예언자는 에브라임을 의도적으로 가나안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일종의 수치스런 별명을 에브라임에게 던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나 그들이 지독히도 경멸하였던 이방민족 가나안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도덕성과 윤리성은 형편없다는 우회적인 비난이기도 하다. 좌우간 그들이 쌓아놓은 부와 재물은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속인 결과이다. 그리하고도 뻔뻔스럽게 부와 재산을 자랑하는 철면피들이었다.
이것은 특별히 부정과 부패가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말이다. 언약적 삶의 특성인 인애(仁愛, ‘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을 상실한 사회의 사방곳곳에서는 심하게 썩는 냄새가 요동하였다. 합법을 가장한 착취와 부의 축적은 그들의 강변(强辯) 속에 잘 나타나있다. “내가 얻은 수입 중에 죄라 할만한 잘못이나 불의는 결코 없다!”
[9절] 그러나 하나님이 그 뻔뻔스런 소리를 그냥 지나치실 분이신가?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출애굽 역사를 기억나게 하는 자신의 이름을 대신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나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낸 너의 하나님 야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인칭 직설법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자신과 특별한 언약 관계에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나는 너의 하나님 야웨다”는 것이다. 너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특별한 관계이고, 나는 처음부터 너희의 민족 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의를 반영하지 못한 채, 속임과 착취와 기만과 자만(自慢)으로 얼룩진 반(反)-언약적 삶을 산다면 너희를 천막 생활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천막에 대한 언급은 ‘장막절’(Sukkot)을 연상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천막생활로 돌려보내겠다는 말은 그들을 엉겅퀴와 가시덤불로 덮인 폐허와 황량함의 광야처럼 만들겠다는 위협이요 저주이다. 에브라임이 그렇게도 자랑하고 뽐내던 부와 재물들을 빼앗아 가버리겠다는 것이다. 흙먼지 이는 광야의 천막 어디에 얼마나 금은보화 재물을 쌓아둘 수 있으리요!
그러나 이스라엘을 광야 시절 천막생활로 돌려보내겠다는 엄한 위협의 말 속에는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리려는 하나님의 가슴 저리는 간절한 염원(念願)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장막절 축제 때 이스라엘은 옛적 조상들의 광야 유랑시절을 떠올린다. 적어도 하나님과 예언자에게 있어서 광야시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적 사랑에 깊이 빠져있었던 밀월기간이었다(참조, 2:14-15; 9:10; 11:1-4).
따라서 이스라엘을 천막시절로 돌려보내겠다는 준엄한 말씀의 이면에는 그들과 함께 다시금 신혼의 밀월기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희망과 약속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아버지의 강인한 사랑의 매의 의미를 알 것인가?
[거절된 사랑이여!]
10 나는 예언자들에게 말하였다;
이상을 많이 보여준 것은 나였으며
예언자들을 통해 비유로 말하기도 하였다.
11 길르앗이 불의하냐?
그들은 정말로 폐허가 될 것이다!
길갈에서 그들은 황소 제물을 바치니,
그들의 제단들도 밭고랑에 쌓인
돌무더기처럼 될 것이다.
12 야곱은 아람 땅으로 도망쳤고,
이스라엘은 거기서 한 아내를 얻기 위해 일했으며,
한 아내를 얻기 위해 [양떼를] 쳤다.
13 그러나 야웨는 한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리셨고,
한 예언자로 말미암아 그는 보호되었다.
14. 그러나 에브라임은 심하게 그를 격노케 했으니
그의 주가 그 위에 그의 피 값을 물으시고
그의 수치스런 행위들에 책임을 물을 것이다.
[10절] 이스라엘의 부패와 타락에 한없이 낙심하신 하나님은 일종의 푸념 섞인 야이기를 독백의 형태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나님은 자신의 전령들인 예언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이스라엘을 경고하기도, 위협하기도고, 애걸하기도, 사정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수많은 이상과 환상을 통하여, 다양한 방식의 비유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심판의 위협, 재앙의 도래, 천지개벽 같은 종말의 불가피성 등, 끊임없이 그들에게 말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영적 시력과 청력을 상실한 중증 환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의 부패와 배교의 온상으로 지목되었던 길르앗과 길갈이 또 다시 등장한다(참조, 4:15; 6:8). 이미 길르앗은 ‘악인들의 도시’로 명명되었고(6:8), 이스라엘의 옛 성지 길갈에서는 황소제사를 공개적으로 드리는 이교적 제사의 센터, 특별히 바알 풍산종교의 센터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폐허더미가 될 것이다. 그 돌무더기들은 영원히 후대를 위한 슬픔의 기념비가 될 것이다.
[11절] 길르앗과 길갈이 앞서 언급된 야곱 전승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는 사실이 눈에 돋보인다. 야곱은 하란에서 아내들을 데리고 장인 라반의 눈을 피하여 길르앗으로 야반도주한 일이 있었다. 야곱을 추격한 라반은 마침내 길르앗 지역에서 그를 만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야곱은 장인에게 그의 딸들이자 자신의 아내들을 잘 데리고 살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무더기(히브리어로 ‘갈’[לג]이다)를 세워 언약을 맺는다(창 31:43-53). 다시금 예언자는 ‘길갈’의 제단들이 ‘갈림’(םילג, ‘돌무더기들’)이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언어유희를 통한 강력한 심판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12절] 자연스럽게 시인/예언자는 다시금 야곱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끈질긴 애정과 집념에 대해 말한다. 먼저 야곱이 아람 땅에 가서 아내를 얻기 위해 고생하며 노동한 것을 두고 아내 이스라엘이 내연의 남자(情夫)와 같은 이방 나라들과 눈이 맞아 도망 나갔지만 결국 그들의 잔혹한 학대에 시달리게 된 것에 비견하고 있다.
12절의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출한 아들, 이방 땅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탕자, 죄의 쥐엄 열매로 연명하며 비참한 노예가 된 아들이다. ‘아버지를 떠나 자유를’13) 얻으려 했지만 남은 것은 비참한 현실뿐이었다. 그러나 비참한 아들의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다시 구원자를 보내기로 한다.
13) 참조, 류호준,『아버지를 떠나 자유를』(서울: 이레서원, 2002), pp. 75-88
[13절] 여기서 시인/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의 원점인 출애굽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출애굽의 중심부에는 한 예언자가 있었다. 본문에서는 모세라는 이름이 직접 거명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모든 예언자의 원조였다(the Prophet Par Excellence). 신 18:18은 “내가 그 형제 중
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리라”고 말한다. 모든 예언자들의 원형이며, 이미 오셨고 앞으로 다시 오실 ‘한 예언자’의 모형이기도한 모세는 비참한 아들 이스라엘, 비참한 아내 에브라임을 다시 고향 집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친히 먼 길을 떠나 이국땅으로 갔다. 아니 그와 함께 하나님이 친히 먼 길을 떠나신 것이다. 기독교신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성육신’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리라.
그분은 정말로 먼 길을 오신 분이셨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구출되었고 인도되었고 보호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하실 것이다.
[14절] 그러나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인내는 언제나 자녀의 고집스런 거절의 장애에 부딪힌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은 이제는 진부한 사자성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스라엘은 배은망덕한 못된 놈이었다. 이사야의 말을 빌자면 ‘짐승보다 못한 자식’
이었다(사 1:2-3). 자신의 개인역사도 모르는, 아니 민족의 구원역사도 모르는 무지한 백성이었다. 아비 없이 자란 후레자식 같은 자들이었다.
다시금 하나님은 그들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하신다.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어들인다는 진리를 값 비싸게 배우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일기를 읽고 있노라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왜 그들은 그랬을까? 이 질문은 지금도 우리가 대답해야할 질문으로 남아 있다.
류호준 목사, [그말씀] (2005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