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弓裔)의 아버지는 헌안왕(憲安王),경문왕(景文王) 누구일까?>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가 당(唐)나라와 신라(新羅)에 의해 멸망한 이후, 옛 고구려(高句麗) 지역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이 발해(渤海)를 건국하여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를 계승 하였다. 발해(渤海) 남쪽의 신라(新羅)는 우여곡절 끝에 백제(百濟) 전지역과 고구려(高句麗)의 대동강 이남(以南) 지역을 차지하였다.
신라(新羅)는 (서기 846년) 장보고(張保皐)의 반란과 계속되는 신하(臣下)들의 역모사건 및 각종 자연재해로 각 지역에서 도적들이 창궐하였다. 이렇듯 신라(新羅) 말기에 이르러 조정(朝廷)에서도 억제하지 못하는 도처의 도적들이 그 세(勢)를 넓혀가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궁예(弓裔)와 왕건(王建)이 등장하게 된다.
<삼국사기 열전>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後宮)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궁예(弓裔)의 성씨(姓氏)가 왕성(王姓)인 김씨(金氏)라고 하였으니, 그 아버지는 분명히 왕족(王族)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헌안왕(憲安王) 또는 경문왕(景文王)의 아들로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보다 앞서는 기록인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고려(高麗)의 석굴사(石窟寺) 애꾸 중(僧) 궁예(弓乂)가 무리를 모아 개주(開州)에 웅거하여 왕을 칭하면서 태봉국(泰封國)이라 하였다.”라고 서술하면서 여기에 주(註)를 달았는데 “전 임금의 성씨는 고(高)씨요 뒷 임금은 왕건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궁예(弓裔)의 성씨(姓氏)가 고(高)씨라는 이야기가 된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 “당(唐) 말엽에는 그 왕(王)의 성(姓)이 高氏였다. 同光 원년(A.D.923)에 正使로 廣評侍郞 韓申一과 副使로 春部少卿 朴巖 등을 [後唐]에 보내 왔는데, 그 국왕(國王)의 성명(姓名)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잃어버리고 기록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여 궁예(弓裔)의 성씨(姓氏)가 고(高)씨라는 것을 뒷받침 하는 기록이다. 이후 권지국사(權知國事) 왕건(王建)이 사신을 보내오니, 후당(後唐) 명종(明宗)이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는 구절과 함께 “왕건(王建)은 고려(高麗)의 대족(大族)이다.”라고 하였다.
궁예(弓裔)의 성씨(姓氏)가 고(高)씨라면,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성씨(姓氏)가 김씨(金氏)라는 것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궁예(弓裔)의 성씨(姓氏)가 고(高)씨라는 중국측 기록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왕건(王建)의 본향(本鄕)인 패서 지역은 고구려(高句麗) 유민들이 정착하여 살던 곳으로서 신오대사(新五代史)에 “왕건(王建)은 고려(高麗)의 대족(大族)이다.”라는 구절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의 본향(本鄕)인 패서 지역을 장악하고, 태봉국(泰封國)을 세웠다는 사실이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궁예(弓裔)의 성씨(姓氏)가 고구려(高句麗)의 왕성(王姓)인 고(高)씨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중국측 기록에 궁예(弓裔)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수록되지 못한것은 왕건(王建) 세력들이 역성혁명(逆成革命)의 치부를 위장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어째든 궁예(弓裔)는 신라(新羅) 말기에 옛 고구려(高句麗) 지역에서 일어나 한 시대를 풍미(風味)하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궁예(弓裔)의 가장 의문점은 그의 탄생 배경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궁예(弓裔)의 아버지는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憲安王)의 후궁(後宮)이었는데 그 성(姓)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하였다. 궁예(弓裔)의 아버지는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 보다는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일 가능성이 크다.
헌안왕(憲安王)은 (서기 857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誼靖)으로 신무왕(神武王)의 이복 동생이다. 헌안왕(憲安王)의 이름은 의정(誼靖)인데, 신무왕(神武王)의 아들 문성왕(文聖王) 집권 시기에 상대등(上大等)에 봉해진 이찬(伊飡) 의정(義正)이 바로 헌안왕(憲安王)이다. (서기 852년)에 문성왕(文聖王)의 왕태자가 죽음으로써 후계자가 사라지게 된다. 그후 (서기 857년)에 병환(病患)이 깊어진 문성왕(文聖王)은 신하(臣下)들에게 다음과 같이 고명(顧命)을 내린다.
“서불한(舒弗邯) 의정(誼靖)은 앞 임금의 손자이고 나의 숙부로, 효성과 우애가 있고 총명하며 민첩하고 너그럽고 인자하다.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의 정치를 도와 위로는 종묘를 공경히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아 기를 만하다. 이에 무거운 짐을 벗어 어질고 덕있는 사람에게 맡긴다. 그대 여러 신하들은 힘껏 충성을 다하고 죽은 사람을 보내고 산 사람을 섬기는데 혹시라도 예절에 어긋나지 말도록 하라! 나라 안에 널리 알려 나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하라!
왕위에 오른 헌안왕(憲安王)은 사저(私邸)에 있을때, 이미 부인을 두었으며 슬하에 아들은 없고 두명의 딸이 있었다. 만약 서자(庶子)인 궁예(弓裔)가 존재하고 있었다면, 헌안왕(憲安王)이 후계자로 왕족(王族)인 응렴(膺廉)을 낙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헌안왕(憲安王)이 후궁(後宮)을 두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보면 헌안왕(憲安王)은 궁예(弓裔)의 아버지가 아닐 것이다.
(서기 861년) 경문왕(景文王)은 16세로 왕위에 올랐다. 경문왕(景文王)이 후계자로 낙점 받을때, 헌안왕(憲安王)의 첫째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을 아내로 맞이 하여었다. 원래 경문왕(景文王)은 외모가 출중한 영화부인(寧花夫人)의 동생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어쩔수 없이 첫째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을 아내로 맞이 하였다.
경문왕(景文王)이 후계자로 낙점 받게된 이유는, 그 아버지가 헌안왕(憲安王)이 상대등(上大等)의 관직에 있을때, 사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파진찬(波珍澯) 김계명(金啓明)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계명(金啓明)의 아들인 경문왕(景文王)이 궁예(弓裔)의 아버지일까?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뿐만 아니라,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도 궁예(弓裔)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열전>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 빛이 있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까지 뻗쳤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출생하였고 나면서 이빨이 나고, 또 햇빛이 이상하니 아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오니 마땅히 이를 키우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궁중의 사람을 시켜 그 집에 가서 죽이게 하였다.
궁예(弓裔)는 왕궁(王宮)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어머니 집에서 출생 하였다고 한다. 궁예(弓裔)의 어머니가 왕궁(王宮)에 있다가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행차 하였던 것인지, 아니면 왕(王)의 인심을 잃어 출궁 당하여 친정에 머물렀는지 기록에 없어 자세하지 않다. 다만 일관(日官)이 궁예(弓裔)의 탄생을 상서롭지 못하며, 국가(國家)에 위해(危害)를 끼칠수 있다고 왕(王)에게 알린것을 볼때 왕궁(王宮)내에 이들을 노리는 세력이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경문왕(景文王)이 후궁(後宮)을 두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서기 863년)에 헌안왕(憲安王)의 둘째 딸을 왕비(王妃)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기존의 왕(王)들 처럼 정략결혼이 아닌, 경문왕(景文王)의 개인적인 여성관이 반영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이를보면 경문왕(景文王)은 또 다른 여인(女人)을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여인(女人)이란 (서기 866년)에 터진 이찬(伊飡) 윤흥(允興)의 반란 사건과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음을 유추 할 수 있다.
이찬(伊飡) 윤흥(允興)에 대해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誌)에 소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헌안왕(憲安王) 시절 거문고(玄琴)의 이치와 타는 법이 단절될까 우려하여 이찬(伊飡) 윤흥(允興)에게 “방편을 써서라도 그 음을 전할 수 있게 하라.”하고 남원(南原)의 공사(公事)를 맡겼다고 한다. 이찬(伊飡) 윤흥(允興)이 남원(南原)에서 3년 이상 머물렀다고 하니, 경문왕(景文王)이 아닌 헌안왕(憲安王) 집권기 였을 것이다. 진골(眞骨)로서 윤흥(允興)은 김계명(金啓明)의 아들인 경문왕(景文王)이 왕위에 오르자, 권력을 잡기위한 방편으로 자신의 딸을 바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성왕(文聖王)의 외척 세력인 위진(魏珍)과 김정(金正)의 견제로 경문왕(景文王)은 헌안왕(憲安王)의 첫째 딸인 문의왕비(文懿王妃)의 아들 정(晸)을 서둘러 왕태자(王太子)로 삼는다.
그해 5월5일에 윤흥(允興)의 딸이 궁예(弓裔)를 본가(本家)에서 낳았다. 이에 경문왕(景文王) 세력들은 몰래 궁예(弓裔)를 죽일려고 하였다. 결국 윤흥(允興) 세력은 반란을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대산군(岱山郡 : 경상북도 성주)으로 달아난다. 그러나 진압군(鎭壓軍)에 의해 일족(一族)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으며, 궁예(弓裔)는 유모(乳婢)에 의해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지금까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기록한 궁예(弓裔)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는 것에 초첨을 맞추어 기술하였다. 다만 궁예(弓裔)가 헌안왕(憲安王)의 화상(畵像)을 칼로 베었다는 가설을 가지고, 궁예(弓裔)의 아버지가 헌안왕(憲安王)이라고도 한다. 이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을 편찬한 일연(一然)이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을 깍아 내려 왕건(王建)을 높이고자 허설(虛說)을 말한 것을 잘못 인용한 결과이다.
궁예(弓裔)의 목숨을 살린 유모(乳婢)가 분명히 아버지에 대하여 말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궁예(弓裔)는 왕도(王都)로 가지 못하고, 세달사(世達寺)로 가서 머리를 깎고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그것은 궁예(弓裔) 가문(家門)이 역적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역적(逆賊)이라는 멍에를 가진 궁예(弓裔)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할수 없이 중(僧)이 되었지만, 그의 가슴에는 세상을 바꾸어 버리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서기 891년) 죽주(竹州)의 도적 기훤(箕萱)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그의 원대한 계획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