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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전도 여행 간증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해 주셨습니다! 아멘!!
by Caleb
여자도에 대해서 들은 것은 금년(2004년) 초였다. 어머니, 오평자 권사님을 통해서였다. 전에 오 권사님께서 그 섬에 전도 여행을 다녀 오신 적이 있다고 하셨다. 여름에는 사역을 하는 수련회로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울릉도나 서해안 지역의 섬들, 혹은 무주 지역의 개척 교회를 돕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지난 5월, 리더들이 모여서 여름 수련회를 계획하게 되었는데, 그때 대부분의 리더들이 자체 수련회를, 그것도 사역을 하는 사역 수련회를 다녀 오자는데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6월 초, 여자도 답사를 다녀왔다.
섬달천으로 조계용 집사님께서 마중 나와 계셨다. 여자도에 들어가 조 집사님의 댁에서 점심을 얻어 먹고 교회를 방문했다. 이성일 전도사님은 오신 지 오래 되지 않은 분이셨는데, 그날 바빠서 출타 중이셨다. 교회는 작고 아담한 시골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사님을 통해서 시설에 대해 안내를 받고는 상당히 걱정이 되었다. 잠은 예배당에서 그냥 자야 할 것이라 하셨는데, 아무래도 형제, 자매들의 잠자리가 편치 않을 듯 싶었다. 더구나 새벽 4시에 새벽 예배를 한다고 하시는데, 아무래도 지체들이 많이 피곤할 듯 싶었다. 씻는 곳은 교회 뒷마당, 수도꼭지는 하나 뿐... 화장실은 푸세식... 여러 자매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을 보고 아연실색할 것을 상상했던 것이다. 교회의 숙원 사업으로 지붕 도색, 내외벽 도색, 그리고 예배당 우측의 옹벽 축조 등에 대해서 안내를 들었고, 또 마을 분들을 위한 봉사 활동에 대해서도 안내를 받았다. 대충 마을 안길 청소, 인근 지역 풀 베기, 투약 등이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마파 마을로 넘어갔다. 넘어 가면서 해변을 살펴 보았는데, 해수욕을 할 만한 해변이 몇 개가 눈에 띄었다. 마파 마을에서 중앙 교회 목사님을 뵈었다. 훌륭한 목회자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마파 마을에서는 만일 우리가 왔을 경우, 마을 회관을 빌려 주실 수 있다고 하셨다. 여러 면에서 중앙 교회가 우호적이었다. 여기서 첫 번째 갈등이 시작되었다. 우선 대동 교회와 먼저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왠지 중앙 교회 봉사로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모님과 목사님은 사역지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신중하셨다. 왜냐하면 작은 섬 마을에서는 작은 문제로도 큰 갈등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섬을 방문하면서 대충 7월 말이나 8월 초로 잡았던 수련회 기간을 8월 초로 세팅을 했다.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에는 30명 전원이 참석하는 대규모 수련회를 기획하였지만, 이런, 저런 문제로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씩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한별 형제의 휴가 기간이 7월 말로 잡히게 된 것이 상당히 큰 타격이었다. 직장인들도 한 둘씩 수련회를 갈 수 없다는 뜻을 전해왔다. 문제가 점차 심각해 지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준비모임에 지체들이 무관심하다는 것이었다. 7월 초의 은혜 수련회 계획은 실패하였다. 충남산 기도원 집회의 참석률이 저조하였던 것이다. 7월 17일 충남산 기도원 기도 모임 역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작년에는 핵심일주 분위기가 청년들의 영적인 분위기를 띄워주었다면, 금년에는 그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기대를 했던 기도원 기도모임은 수련회를 참석하지 못하는 지체들 위주로 가지는 일이 일어났다. 보름간 실제적인 준비모임을 가지게 되었으나 역시 참석률은 매우 저조하였다. 4-6명 정도의 참석 인원이 전부였다. 점차 답답함을 느꼈다. 여름 성경학교 때문에 교사들이 대거 준비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교회의 청년들이 둘로 나뉘는 형국까지 보여졌다. 더욱 기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짖눌렀다. 그러다가 마지막 준비모임을 하던 주에는 큰 어려움이 찾아 왔다. 다 그만두고 싶어졌다. 나 혼자만 사역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심한 고독감에 몸부림치게 하였다. 더구나 상욱 형제까지 분규 때문에 수련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상황은 상당히 절망적이었다. 뉴스에서는 8월 1일(일)과 2일(월)에 태풍이 올라 온다는 소식을 전하였고, 8월 첫 주 내내 비 소식이 있다고 하였다. 재정적인 어려움 역시 심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하나님께서 내게 기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셨고, 결국 수련회를 며칠 앞두고 새벽에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때 주님께서는 저 혼자가 아니라고 하셨고, 상황과 환경에 시선을 두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너 있을 곳에 있으라"고 도전하셨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제게 요구하시는 것이었다. 갑자기 새 힘이 솟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까짓 것,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무조건 가자." 사람의 많고 적음에 연연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수요일 저녁 예배 도중 기도 응답에 대한 말씀을 주셨다. 한 번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주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하시겠노라는 강한 도전의 말씀이었다. 야고보서 말씀 중에서도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그가 기도하였을 때에 하늘의 문이 닫히고, 또 하늘의 문이 열렸던 사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갑자기 상욱 형제는 수련회에 갈 것 같다는 확신이 찾아 왔다. 기도하면 주님께서 보내 주시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날 저녁, 분규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 하는 상욱 형제에게 이 말을 했더니 본인도 창원 서머나 교회에서 주님께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그 뒤로도 상욱 형제가 상심해서 만일에 갈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 오며 가며 봉고차 운전만 하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무슨 말이냐, 갈 수 있다고 믿고 무조건 짐 다 싸고 기다려라"고 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말씀도 주셨는데, QT 중, 이사야 말씀을 통해서 폭풍 중에 보호하시고, 폭양을 구름으로 가리워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보장이시며 환난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같이 주께서 외인의 훤화를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리움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사25:4-5]
주일과 월요일에 태풍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 또한 8월 첫주간 내내 폭우성 소나기가 있으리라는 소식, 16년 만에 찾아 온 폭염 등 걱정스러운 소식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다. 폭양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이사야 25장, 이곳에 단 한 번 나오는 말이며, 폭풍과 함께 그 말이 나오는 것은 더욱 놀랍다. 정확하게 지금 우리의 상황이 그러한 상황이었다. 폭풍과 폭양이 우리의 가는 길을 두렵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수련회 가기 며칠 전에 주심으로써 주님은 믿음이 부족한 나에게 분명한 확신으로 함께 하신 것이다.
또 한 가지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이사야 26장 11-15절까지였다.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나이다마는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가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멸하사 그 모든 기억을 멸절하셨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사26:11-15]
이 말씀에서 주님은 역사하시는 오른 손을 높이 드셨다고 가르쳐 주셨다. 이제 주께서 준비하신 일들을 행하시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 일들이란 첫째로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던 악습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만 의뢰하며 경배하게 하신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악신들을 모두 제하고 그들을 죽이시겠다는 것이었으며, 셋째로 주의 백성의 지경을 크게 넓히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씀을 도착 예배 때 나누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함께 내 마음은 다시 무장되기 시작했고 문제들은 하나씩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준비 모임은 어렵사리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여행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나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바자회때 나는 하나님께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책을 내 놓았다. 타임 라이프사에서 나온 인간 세계사 씨리즈 20권이었다. 현재 시가 42만원에 판매되고 있고, 중고 시장에서도 20만원을 호가하고 있는 책이었는데, 8만원에 내 놓았다. 그와 비슷한 다른 책을 내 놓을 생각도 했지만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기로 했다. 주께서는 내가 드린 예물을 비롯해서 지체들이 내 놓은 여러 가지 예물들을 기쁘게 받으셨다. 작년만큼 바자회 판매는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러 분들의 헌금, 봉사, 도움의 손길로 필요한 것들이 하나 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수련회가 시작되었다. 주님께서는 주의 일을 맡기시기 위해 여기 저기서 주의 사람들을 부르셨다. 나와 아내 박종금 사모 이외에 정상욱 회장, 김건아, 장혁진, 김재구, 이경원, 이의현, 김인수, 김광섭 등 8명의 형제들과 이진영, 서주영, 김민기, 이재영, 진옥화 등 5명의 자매들이 출발했다. 화요일에는 형순이가, 목요일에는 재경이 광옥이가 합류하기로 했으며, 여수에 계시는 어머니 오평자 권사님도 함께 해 주시기로 하셨다. 그래서 총 19명의 적지 않은 인원이 참가했다.
여수로 가는 날, 구름이 잔뜩 끼었으나 태풍은 흔적도 없었다. 일본 남해에서 만들어 졌던 태풍이 북상하다가 동해로 빠져 버린 것이다. 약속하신 대로 태풍이 우리의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여수로 가던 중 우리는 총 4번의 폭우성 소나기를 만났다. 하동을 지나면서 한 번 만났고, 순천을 지나면서 또 한 번, 섬달천에서 또 한 번, 그리고 배를 타고 여자도에 들어 가던 중 네 번째 소나기를 만났다. 지체들이 간증하는 바와 같이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짐을 배에 짐을 실을 때나 또 짐을 내릴 때 비를 그치게 해 주셨다. 이 비는 여수 지역에서 장마 때에도 볼 수 없었던 단비였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는 길에 단비를 함께 보내 주셨다. 분명 우리의 여자도 방문은 여자도에서 단비와 같은 의미가 있었으리라 확신한다. 이 단비는 폭염으로 무더워졌던 날씨를 최소한 3-4도 정도 낮추어 주는 역할을 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사25:4]
여수로 내려가던 중 중보기도를 부탁했던 임한별 형제로부터 "뽕나무 위의 다윗"에 대해서 묵상해 보라는 문자를 받았다. 작년 임한별 형제는 몸은 따로 있었으나 영은 우리와 함께 있었다. 금년에도 그와 같은 일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한별 형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도 중에 받은 말씀을 보내 준 것이다. 뽕나무 위에서의 다윗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공격할 때와 시점을 물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를 타고 가던 중 문득 그 말씀이 떠 올라 잠깐 주님께 말씀해 주시기를 기도드렸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날 저녁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성일 전도사님은 대동 교회에 오신지 몇 달이 되지 않으셨다. 전도사님 말로는 작년 11월에 처음 오셨다고 하는데 집사님들 말씀으로는 금년 2월에 오셨다고 한다. 전도사님은 우리가 여자도에 도착하던 때 승합차를 기증하시겠다는 고마운 분이 계셔서 그 분을 만나러 뭍에 나가 계셨다. 우리가 전도사님을 만난 때는 짐을 풀어놓고 다시 250장의 블록을 나르기 위해 달천으로 형제들이 나갔을 때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전도사님과 인사를 드렸고, 함께 블록을 배에 실었다. 나는 전도사님께 저녁 시간에 잠깐이나마 함께 청년들과 인사도 나누면서 섬 지역에 대해서와 전도 여행에 대한 지침을 주셨으면 하는 의미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부탁드렸다. 첫날 예배가 끝나고 전도사님이 약 10시 30분부터 오리엔테이션을 하셨는데, 우리는 전도사님의 박학다식한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여자도는 물론이고, 여수, 순천 지역의 여행지, 특산물 등 다양한 정보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자도에 대해서 소개하시면서 다소 심각한 갈등이 되는 말씀을 하셨다. 전도사님에 의하면 여자도는 섬이기 때문에 이 마을은 100여명의 주민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이며, 그래서 굳이 전도하거나 하지 않아도 그 삶을 보고 저절로 전도가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면 반감이 생길 수 있다고 하셨다. 차라리 밝은 모습으로 친절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면 그러한 것들이 섬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더 쉽게 전도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여기서 상당히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전도 여행팀은 현지 목회자들이나 현지 성도들의 요구에 순응해 주는 것이 도리이다. 여행팀이야 기껏해봐야 일주일 정도 그곳에 있지만 현지 사역자와 성도는 계속해서 그 지역에 남기 때문에, 여행팀 위주로 사역을 하다 보면 오히려 현지 상황을 오해해서 현지인들의 사역을 그르치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가능하면 전도사님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만일 전도사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이것도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예 전도를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상황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때라고 생각이 되었다.
이 참에 혁진이 얘기를 잠깐 해야 할 것 같다. 혁진이는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때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단체로 여행을 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오래 전부터 권면했지만 혁진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수련회를 가지 않겠노라 큰 소리를 쳤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혁진이는 출발대원과 함께 여자도에 내려갈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이 하나님의 강권하심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런데 혁진이가 여자도 부두에 내리자마자 그만 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떨어진 농구공을 줍느라 방파재 밑으로 내려갔다가 그만 무릎 아래를 심하게 찍은 것이다. 그런데 예배당을 정리하다가 의자에 똑같은 자리를 또 찍고 말았다. 혁진이는 워낙 다리를 심하게 절었고 결국 다음날 아침 첫배로 대전에 올라가기로 결심하고 말았다. 그날 밤 혁진이는 밤새 한 숨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혁진이는 놀라운 말을 해 주었다. 간 밤에 새벽예배를 전후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뭔가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었느냐고 묻자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자 온 몸에 전율이 돋으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 질 뻔했다고 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나중에 안 일이지만 혁진이는 어려움을 각오하고 수련회를 따라 왔는데 오자마자 무릎을 다치고 말았으니 하나님께 "도대체 이게 뭐냐, 수련회 때 얻은 게 없지 않느냐?"고 따졌던 모양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 음성을 들려 주신 것이다. 아직도 혁진이는 이 음성이 자신이 만들어 낸 생각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으나 두 번의 간증을 하면서 점차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참으로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다음날 오전 봉사활동은 블록 250장을 교회로 옮기고, 다시 지붕에 붉은 색 초벌칠을 하는 것이었다. 장난이 아닌 일이었다. 자매들은 마을 안 길을 쓸고 잡초를 뽑는 일을 했다. 사실 청년들이 집에서만 뒹굴던지라 일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처음 블록을 나르는데 전도사님이나 집사님 모두 우리들을 보고 상당히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워낙 부실해 보이니까 그랬을 것이다. 칠순의 조계용 집사님의 능수 능란한 작업 솜씨와 노가다판(?)에서 숙련된 전도사님의 일솜씨들은 20대의 우리 청년들을 부끄럽게 했다. 그러나 우리 청년들의 장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요령 피울 줄 모르고 무식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들 스스로도 보기에 놀라울 정도였다. 요령피우고 이리 저리 빠져나가 쉬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자원해서 열심히 일에 참여하였다. 자매들 역시, 요령 피우지 않고 구슬땀을 흘리며 청소하고 밥하고, 형제들을 위해서 서빙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인수는 아예 나흘째가 되니 온 혓바늘이 돋아나고 지쳐 쓰러져버렸고, 의현이도 다녀와서 며칠간 보양을 해야 할 정도였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주를 위해 드렸던 땀과 노력, 헌신을 주께서 받으시리...
둘째날 오전 봉사를 마치고 점심 때쯤 모두 녹초가 되었다. 오후에 못다칠한 지붕칠을 마치고 잠깐 물놀이를 하게 했다. 몇은 예배당에 누워 자고 또 몇은 물놀이를 갔다. 하지만 물이 깨끗하지 못하고 석화가 워낙 많아 거의 모든 청년들이 손과 발을 베는 일이 생겼다. 에어 매트 하나가 터진 것도 이때였다. 문제는 그 이후 일정이었다. 원래는 이 시간에 축호 전도를 가고 저녁 시간에는 마을 회관 앞에서 찬양을 부르며 노방전도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섬 분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시간과 아낙네들이 밭일을 하러 나가는 시간이 그 시간인지라 축호 전도가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전도사님과 집사님의 말씀이었다. 거기다 전도사님과 집사님의 의견에 미묘한 차이가 있어서 우리가 계획을 잡는 데 더욱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노방전도를 취소했다. 축호 전도만 저녁 식사 전후로 하자고 말을 맞추었다. 그러고 나니 오후에 할 일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매들은 몇이서 고동을 잡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때 김건아 형제가 뭔가 이상하다고 문제를 제기해 왔다. 전도를 하러 와놓고서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대면서 전도를 안 한다면 뭐가 되겠느냐고 하는 것이다. 분명히 옳은 이야기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전도를 안 한다면 그게 무슨 전도 여행이 되겠는가? 결국 나는 건아 형제와 단 둘이서 밭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간간히 구름이 햇볕을 가려 주기도 했지만 오후 햇빛은 따가울 정도였다. 그런 뙤약볕 아래서 일하시는 다섯 분의 아주머니, 할머니를 만났다. 대부분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복음에 적대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 중에도 교회를 다니시는 분도 한 분 계셨는데, 고추를 따시는 아주머니셨다. 교회 다니시기 시작한 지 몇 달 안 되어서 뭐가 뭔지 잘 모른다고 하셨다. 손을 붙들고 기도해 드리면 모두들 고마워 하셨다. 첫 번째 콩을 까는 할머니도 그러셨고 참외 밭에 광주리를 들고 막 도착한 할머니도 그러셨다. 특히 참외밭 할머니는 교회 다닌 적은 없었지만 손 붙들고 기도해 드렸더니 우시는 것이다. 기도를 하는데 어찌 그리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참외를 두 덩이나 따서 우리 손에 하나씩 안겨 주시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갑자기 힘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배당에 돌아와 봤더니 고동 잡으러 간 팀도 막 도착한 때였다. 어머니 오평자 권사님은 마을 회관 앞에 사람들이 많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시간이 5시 반 경이었다. 나는 갑자기 노방 전도를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든 지체들을 다 불러 모았다. 그리고 노방 전도를 하겠다고 선포하고 준비를 하게 했다. 찬양 인도는 이재영, 워쉽은 진옥화와 김민기, 선포자는 김건아, 그리고 나는 처음과 끝 부분에 기도를 맡았다. 30분 정도 기도를 하고 교회에서 가져간 반주기를 가지고 갔다. 순식간에 그곳을 노방전도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마을 회관 앞에는 우리가 가지고 간 두 개의 플래가드 중 하나가 붙어 있었는데, "예수만 믿으면 천국 갈 수 있습니다"라고 씌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플래카드 앞에서 서서 노방전도를 했다. 진옥화 자매가 준비한 여러 찬양 곡을 부르면서 간간히 김건아 형제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등의 선창을 하면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를 따라 외쳤다. 이렇게 30분 정도 목이 터져라 찬양 인도를 했다. 그리고 나고 곧바로 두 조로 나누어 축호 전도를 했다. 아내와 나, 전도사님이 한 조를, 어머니와 김건아 그리고 조경호 집사님이 한 조를 맡아서 전도를 했다. 이 축호 전도는 사실 초청장과 가져간 고무장갑 선물을 나누어 주는 정도였지만 어쨌든 그 와중에도 전도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전도를 하게 된 것은 상황에 눈을 뜨기 보다는 본질적인 문제에 귀를 기울이라는 한별 형제의 문자에 그 원인이 있었다. 감사!!
셋째날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첫배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진영자매 세 사람이 장을 보러 나갔다. 삼계탕 거리를 사러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배로 형순 형제가 들어왔다. 물과 음료수가 필요한 우리들에게 물과 음료수를 제공해 주었다. 정말로 가뭄의 단비같은 물과 음료수였다. 다시 12시 30분 배로 장보러 간 팀이 도착했고 어머니는 후발대 두 사람, 이재경, 이광옥 자매를 마중하러 덕양에 머무르셨다. 두 사람은 밤 8시 22분 쯤에 덕양 역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마중나가 박권사님 댁에서 같이 하룻밤을 자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도 축제 준비에만 매진했다. 한쪽에서는 저녁식사인 삼계탕을 준비하고 한쪽에서는 무대를 만들고 장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장식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들었다. 스크린을 설치하고 조명을 설치하고 장식하고, 시스템을 설치하는 등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아쉽게 건아 형제는 설치하는 것만 보고 5시 30분 배로 떠났다. 6시 경에 식사가 나간다고 방송이 나갔으니 순식간에 마을 회관에 동네분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떡이랑 음식을 준비하는 팀이 경황이 없어졌다. 아직 햇볕이 쨍쨍하고 어두워질 생각을 안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잡힐 리 만무했다. 거기에 시스템이 말을 듣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액정이 켜지지 않는 것이다. 조명도 한 바탕 떨어져 깨지는 바람에 그만큼 장식이 늦어졌다. 연극 준비는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당황했다. 식사하러 오신 분들이 자꾸 밥을 내 놓으라고 해서 결국 6시가 조금 넘는 시간에 식사가 나갔고, 동네 분들은 6시 25분도 채 안되어 식사를 마치고 모두 마당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7시부터 준비 찬송을 할 예정이었는데 햇볕을 보니 7시 30분은 되어야 분위기가 잡힐 것 같았다. 그런데 6시 25분이 되니 벌써 식사가 끝난 것이다. 상당히 많은 분들은 집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참으로 심각하게 당황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전도사님을 통해서 동네 분들이 노래 자랑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하자 싶어서 광고를 넣었다. 노래 자랑이 있으니 회관 앞으로 모여 달라고 .. 몇몇 분들이 한쪽 나무 그늘에 모여 앉기는 했지만 노래 자랑할 분위기는 못되었다. 상금도 준비하고 상품도 준비했다. 1시간 정도 노래자랑을 하고 곧바로 준비찬송을 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이것도 뜻대로 안 되었다. 마을 분들이 빨리 프로그램을 끝내달라고 주문을 했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노래자랑을 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노래자랑도 수포로 돌아갔고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곧바로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했다. 아마도 대충 7시 전후로 프로그램이 들어간 것 같다. 순전히 찬양 인도자인 옥화만 믿으며..
옥화는 참으로 훌륭하게 찬양을 인도했다. 전혀 연습도 없이 진행된 찬양인도였지만 대단히 훌륭하게 찬양인도를 해 내고 있었다. 한 곡 한 곡이 끊어져서 진행한 것이 흠이었지만 연습도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불가항력적이었다고 보여진다. 마당 한 복판에 깔아 놓은 돗자리에는 우리들만 몇 명 앉아 있어서 썰렁했다. 전도사님을 통해서 성도분들이 돗자리에 앉아 달라고 부탁을 드렸고, 설것이를 마치신 분들이 자리를 채워 주셔서 겨우 분위기는 살아났다. 나는 당황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시간을 벌어준 옥화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날 밤 전할 말씀을 묵상했다. 부활에 대한 영상을 볼 것이기 때문에 부활과 복음을 전해야 할 듯 싶었다.
찬양 시간에 마을 분들은 상당히 흥이 난 모양이다. 함께 원을 그리면서 "예수님이 좋을 걸"을 따라 부르기도 했고, 우리가 특송을 할 때에는 나의 주문에 따라 일어서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특송을 마치고 재영이의 간증, 스킷, 그리고 영상을 보았다. 스킷은 작년 거문도 여행 때 썼던 "티켓" 대본을 약간 손질해서 다시 올렸다. 영상은 "부활의 의미"를 함께 보았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에 관한 말씀을 같이 묵상했다. 워낙 분위기가 산만해서 집중력있게 말씀을 전하기는 어려웠지만 하나님의 도우시는 힘을 입어 할 수 있는한 뜨겁게 말씀을 선포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스킷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와 닿았다는 평가도 있었고, 재영이의 간증에 큰 감동을 받은 성도들도 많았다고 한다. 조 집사님은 말씀에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하셨는데 "충격을 받았다"는 표현으로 쓰실 정도였다.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지 않으셨더라면 얼마나 챙피를 당했을까 싶으니 하나님께 다만 감사할 따름이었다. 주님께 감사를...
셋째날 저녁에 나는 축호 전도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1분 구원을 연습하고 왔는데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대로 가는 것이 좋을지 몰라 한별형제에게 그런 부담을 나누었는데, 한별 형제는 에스겔 3장 16-22절 말씀을 주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면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만일 에스겔이 그 말씀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듣지 않고 불순종하면 그 피에 대한 책임이 그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지만, 그러나 만일 에스겔이 말씀을 전파하지 않고 악인이 심판을 받게 되면 그 핏값을 에스겔에게서 찾으시겠다는 무서운 말씀이었다. 나는 이 말씀을 문자로 받고 크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넷째날 봉사는 오후 3시 30분까지.. 지붕을 세 번째 칠하고 벽체를 칠했다. 그리고 옹벽도 쌓았다. 참 많은 일을 했다. 이장님이 도와 주셔서 벽체 칠은 수월했다. 봉사가 끝나고 이장님께 부탁을 드려 배로 섬을 한 바퀴 유람할 수 있었고, 마파마을 건너편 무인도(매물도)에 올라 잠깐이나마 해수욕을 할 수도 있었다. 참 아름다운 무인도였다. 유람 후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해변으로 옮겨 갔다. 리어커 두 대에 식사 준비할 것을 싣고 출발했다. 길이 험해서 리어커 모는 형제들이 고생을 했는데, 아무튼 아무도 없는 해변에 전세를 내면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저녁 노을이 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넷째날 저녁 참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특히 옥화 자매가 캠프 파이어를 쓰러뜨리는 실수를 했는데 이것이 옥화 자매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심하게 상심해 있는 옥화 자매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옥화 자매의 상처를 싸매시고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함께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은 약한자, 아픈자, 환자들을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할렐루야!
식사를 마치고 은하수를 보면서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 좌우편으로 보이는 밤바다, 하늘 위로 가득한 별들과 은하수, 리어커 두 대, 랜턴 서너개로 어두운 밤길을 마치 피난민처럼 조심스럽게 걸어 돌아왔다. 이 날 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큰 시험에 들고 말았다. 며칠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 몇몇 지체들 중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상처 등이 갑자기 나를 괴롭혔다. 나는 모든 것을 다 놔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성일 전도사님의 의학 상담 시간이 끝나고 원래는 말씀을 나누고 기도모임을 해야 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다 그만 두고 싶었다. 그래서 기도모임 없이 그냥 편하게 씻고 자자고 했다. 다음날도 천천히 일어나 가자고 했다. 지체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을 하자 지체들은 한 두 사람씩 씻으러 가고 짐도 정리하고 그랬다. 그러나 어딘가 모를 불안감이 온 공동체를 휘감았다. 나는 알 수 없는 분노, 수치, 죄책감 등에 사로잡혔다. 하나님께서 내게 대해 분노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그만 골방을 찾았다. 그곳에서 주님은 왜 화가 났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았다. 사람들 때문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주님은 그 자리를 그 사람들이 주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라고 했다. 주님은 내게 주님께서 주신 자리를 경홀히 여기고 함부러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난다면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래도 좋으냐고 물으시는 듯 했다. 나는 두려웠다. 주님은 계속해서 내 감정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해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회개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기도모임을 가지겠다고 선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심각한 영적인 전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영적인 전쟁에서 주님은 우리로 승리하게 하셨다.
마지막 날 우리는 5시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이미 모든 짐은 정리가 된 상태였으나 그래도 아침 첫 배를 타기 위해서는 그렇게 부산을 떨어야 했다. QT를 하고 주먹밥을 말아서 먹고 짐을 부두로 나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그 전날 하루 종일 한별형제가 보내준 에스겔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고 고민하게 하셨는데, 기도 중 주님은 외침 전도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하셨다. 모든 짐을 다 나른 뒤 우리는 회관 앞에 모여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마이크 테스트(?)를 한 뒤 먼저 내가 선창을 했다. 그러면 지체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따라 했다.
"대동 마을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대전에서 온 전민 침례교회 청년대학부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동안 보여주신 사랑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떠나기 전 주민 여러분들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외침전도를 했는데 효과는 놀라웠다. 주민들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참여한 우리들, 이 전도사님,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큰 은혜를 입는 시간이었다. 전도는 그런 힘이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주의 말씀을 외칠 때,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눈물과 한숨, 주님의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여수 관광은 향일암, 식사, 해수욕,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 방문 등으로 이어졌다. 항상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손 목사님의 신앙 전기는 언제나 내게 뜨거운 충격을 전해 준다. 이 참에 아예 청년부 필독서로 책 몇 권과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했다.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주님, 우리를 언제까지고 써주시옵소서. 아멘!
첫댓글 제가 또 다른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도와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마파 마을 앞의 무인도는 매물섬이라 부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행여나 저희가 지나치게 소란을 피운 건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