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아직도 남아 있던 초겨울 날,
상록수 주인공 채영신 이야기를 찾아서- 최용신 기념관
2013년 12월3일 화요일
경기 안산시 상록구 본오3동 879-4
상록수공원내 위치
최영신
최 선생은 1930년대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대학을 졸업해 시대조류에 타협하면
편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만의 영달을 버리고
식민지 민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했다.
최선생은 처녀의 몸으로 당시로서는 새소리밖에 안들리는 오지였던 경기도
샘골마을(현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에 들어와 무지한 농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생활개선은 물론 교육을 통해 독립을 이루기 위해 숨어서 한글을 가르치고
독립정신을 불어넣은 애국지사이다.
최 선생은 순국 이후에도
소설속의 (심훈의 상록수) 여주인공 채영신으로 널리 선양됐다.
홀로 찾아간 최용신기념관에서
사유의 시간을 보내며 이렇게 사진을 찍었다!
지하철4호선 타고 상록수역에서 내렸다.
인터넷을 통해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최용신이야기에 끌려 최용신의 기념관을 찾게 되었다.
멀지 않은 곳이어서 낮시간 공부도 할겸 산보삼아 운동삼아
디카를 챙겨 다녀오게 되었다.
상록수역에서 도보 5분거리라고 되어 있어
묻지 많고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둘러보아도 혼자서는 찾기가 쉽지 않아 좌측 사랑방에 들려 물으니
친절하게 그리고 자세히 알려 주어 곧바로 찾아 갈 수 있었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샘골서길 64번지(본오3동)
지하철 4호선 상록수역 1번출구에서 도보 5분거리인
본오3동 주민센터 뒤쪽켠 kfc쪽 가까이 도로옆에 위치해 있었다.
계단 위 높은 곳에 있어 도로에서 기념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최용신의 거리
상록수역에서 최용신기념관까지의 거리에는
최용신 선생과 제자들의 이야기가 조형물로 만들어져 있다는데
그 거리는 몰라서 밟지는 못하고
기념관으로 오르는 계단옆에서 안김의 조각만을 담았다.
이곳에 팜플렛에서 읽은 내용만 남긴다.
만남 (Encountering)
원산과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우등생이었지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샘골로 들어 왔다.
최용신은 아이들과 함께 흙장난을 하면서 한글을 가르쳤다.
그렇게 샘골의 아이들, 샘골 사람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끎 (Leading)
최용신은 가난과 무지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보배롭게 보았다.
식민지 상태였지만 나라의 당당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최용신은 어둠 속에 있는 아이들을 빛의 세계. 희망의 세계로 이끌었다.
향함 (Heading)
샘골강습소에서는
한글, 산술, 체조, 음악, 성경,재봉, 동화듣기 등의 신교육을 가르쳤다.
샘골강습소는 나라의 미래를 위한 인재들을 키우는 곳이었다.
샘골 아이들의 발걸음은 늘 새로움과 기대감이 가득한 그 곳으로 향했다.
안김 (Hugging)
최용신은 샘골 살마들을 사랑으로 대했다. 그들도 최용신을 신뢰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최용신은 2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을 때까지
샘골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세워 주었다. 샘골 사람들은 최용신을
이렇게 불렀다.
둘도 없는 종, 둘도 없는 여왕, 둘도 없는 선생님.
최용신 기념관 건물이 우측에 보인다.
1층 전시실 방향으로 발걸음 옮긴다.
최용신 기념관 1층 전시실
전시실 입구 최용신 상
오르막길로 돌아돌아 올라 2층의 뜰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번화한 안산 시내,
아파트가 밀집된 중심, 높은 계단 위 상록수 공원내에 꼭꼭 숨은 기념관이다.
이렇게 훌륭한 역사의 공간과 쉼터가 계단 위 높은 곳에 위치한 관계로 건물이
보이지 않아 모르고 지나칠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초겨울의 기운이 상록수공원 뜰에 쌓인 낙엽들에서 읽을 수가 있었다.
최용신 기념관 2층
2층엔 사무실과 체험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샘골강습소 주춧돌과 최용신이 직접심은 향나무
샘골강습소 주춧돌
1933년 최용신 선생이 샘골 주민들과 건립한
샘골강습소의 주춧돌로 15기가 보존되고 있다.
최용신 나무
1934년 최용신 선생이 직접 심은 향나무.
5그루가 남아 있음.
최용신기념관 2층과 최용신이 직접심은 향나무들
심훈(沈熏:상록수 저자) 문학기념비
... 아침 저녁 저의 손으로 치는 그 종소리는 저희
가슴뿐 아니라 이곳 주민들의 어두운 귀와 혼몽이 든
잠을 깨워 주고 이 청석골의 산천초목까지 울리겠지요.
.....
-<상록수> 중에서-
최용신 유훈비
최용신 묘소로 가는길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최용신묘(좌측), 최용신 선생님이 생전에 약혼했던 김학준 선생의 묘(우측)
생전에 손 최용신 선생님과 약혼했으면서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사이였지만
죽어서 함께 묻히고 싶다는 김학준 선생의 유언을 그 부인이 기꺼이 들어준 것이다.
1935년, 최용신선생의 장례때 그의 약혼자였던 김학준장로는 자신의 코트를
관에 씌워주며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1975년 김학준장로가 세상을 뜨면서
사후에라도 최용신선생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게 되고
이에 따라 인근 일리공동묘지에 있던 최용신선생의 묘를 현 위치에 이장,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이장하면서 당시 약혼자였던 김학준장로의 코트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묘비 옆에 적혀 있는 김학준 선생의 약력에 일제 말기 3년간 옥살이도 적혀있다.
묘비 오른편에서 두번째는 김학준장로의 부인인 길금복여사다.
남편이 사랑했던 여인의 곁에 묻은 이 애틋하기만한
세계적 문화스토텔링은
지금도 한국인들의 정서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부의 정서이다.
길금복여사는 최용신선생이 사랑했던 제자였다.
최용신선생이 죽은 이후 길금복과 김학준은 어려움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사랑이 싹트게 되었으나 김학준은 자신이 죽으면 최용신의 곁에 묻는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김학준은 조선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부인과 자녀들은 지금 미국과 수원등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이 문제로
자녀들과 길금복여사와의 갈등은 자연스럽게 나타날수 밖에 없게 되어
이후 길금복여사는 이 문제로 외부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있다.
이것은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최용신선생과 우리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한 시대의 뼈아픈 고통이자 오늘날 길금복여사가 안고 살아가야 하는
또 하나의 가슴아린 운명이다.
출처:http://cafe.daum.net/anmincf/
최용신 묘소관람을 마치고 상록수 공원을 한바퀴 둘러 본다.
가을이 지표면에 내려앉아 초겨울을 영접하고 있었다.
여긴 가을이 아직 남아 있었다.
빨간가을이 내가 올 줄을 어찌알고
이렇게 고운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을까?
초겨울 나들이지만
초겨울이 잠시 물러나 준 이곳에서,
가을의 영접을 받게 된 기쁨이 내가슴에서 고요히 일렁인다.
최용신의 반김일까?
상록수 공원내에 최용신 기념관이 위치 해 있었다.
공원입구에서 오르는계단이다.
공원입구 계단을 오르면 최용신기념관 2층을 바로 만난다.
상록수 공원을 한바퀴 쭈욱 둘러 보면서
박물관 전시실 관람을 위해 1층으로 내려간다.
박물관 내부로 든다.
최용신이 만든 무궁화 자수지도
협성여자신학교 시절 (가운데가 최용신)
쉼 없는 열정
최용신은 직접 교재를 만들어 보조교사였던 황종우와 함께 한글,산술,재봉, 수예
동화,노래, 성서 등을 가르쳤다. 수업후에는 가정을 방문했다.
학부모와 아이들의 형편과 성격, 취미까지 참작해 어린아이들을 지도하고
어루만졌다. 최용신에게 아이들은 나라의 미래이자 희망이었다.
최용신은 아이들을 '나라의 미래'라 불렀다. 최용신에게는 하루는 짧았다.
오전반,오후반,야간반 수업은 물론 가정순회를 하면서 부녀자와 노인들을 가르쳤다.
방학이 되면 야목리, 반월리, 둔대리, 초지(원시리),거무게, 안산 삼거리 등 여러 곳을
순회하며 한글, 성경을 가르치고, 농촌계몽활동을 하였다.
귀국후 샘골귀환
1934년 일본 고배여지신학교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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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선생님이 돌아 오시던 날, 철없던 우리들은 다리가 불편하신
선생님을 꼭 끌어 안고 매달렸지요.
최용신 유언
인사말을 하는 김학준
최용신의 흔적을 찾아
1939년 2월 28일(화) 오후 1시에 천곡에 도착, 언덕 위에 덩그런 학원은 고 최양이
창자가 꼬여지도록 애써 지은 건물이라 함에 널 한쪽, 흙 한 줌도 무슨 신성한
물건 같아 보인다.......참으로 산자는 단 하루를 삵았어도 영생한 것이다.
김교신 일기,'성서조선', 1939
서울대학교 국민계몽대. 1960년
건국훈장 애족장
1층 전시실옆 영상실, 교육실 및 강당
2층 체험실
커튼쳐진 안의 둥근 벽면과 천정에 쓰여진 최용신의 말들을 옮김
1933.1. 샘골강습소
여인이 산책을 마치고 돌아 가듯이 나도 관람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다시 상록수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한낮의 해는 구름속에 가리워져
나와 숨박꼭질 놀이라도 하는 듯 했다.
최용신 선생에 대하여
최용신 선생은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1909년 8월 12일에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언니, 큰 오빠, 작은 오빠, 여동생, 이렇게
3녀 2남 중 차녀였는데요. 선생의 고향인 두남리는 원산에서 10리쯤 떨어진
풍광이 아름다운 전형적인 농촌이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일찍이 기독교가
많이 전파되어 있었고 교회와 학교를 운영하는 등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곳이었기에, 선생은 일찍이 근대교육을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은 8살이 되던 1916년에 마을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했습니다.
2년간 이곳에 다니다가 1918년 원산의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졸업 후에는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 그 후에는 협성여자신학교
농촌과에 재학하면서 농촌계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협성여자신학교에서 선생은 농촌사회지도 교육과의
황에스더 교수를 만나게 되고, 학생들에게 직접 농촌에 들어가 몸소
체험하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 황에스더 교수를 통해 최용신 선생은
농촌계몽운동의 뜻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29년 여름방학 때 황해도 수안군 용현리에서
첫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는데요. 선생은 그곳 현지 활동을 통해 가난과
무지가 만연한 농촌의 현실을 보게 되었고, 깊은 좌절을 한 후 학업을
중단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선생은 결국 1931년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고 비로소 농촌운동에 확실히 전념을 하게 됩니다.
이때 선생은 감리교선교사 밀러(Miller)의 후원을 받고 경기도 화성시
샘골에서 농촌교육을 시작하게 되는데요. 물론 처음부터 농촌교육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선생은 지역 주민들의 냉소와 비관주의에
맞서야만 했고, 경멸이 섞인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이러한
반응에 좌절하지 않은 채 원래부터 마을에 있었던 강습소를 확대하고
개편했으며, 당시 무허가였던 강습소에 인가를 신청하였고, 날이 갈수록
강습소는 점점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선생의 모습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고,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정식 교사(校舍)를 지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농촌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윽고 선생의
노력과 헌신,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인해 교회 예배당에
딸려 있었던 초라한 강습소는 ‘천곡학원’이라는 정식 교육기관으로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원의 교육내용은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뿐만 아니라 산술과 보건 및
농촌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기술, 애국심과 자립심을 북돋우는 의식계몽 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김활란 등은 샘골에서 행한 최용신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여러 방면으로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최용신 선생의 노력으로 마을의 안정과 기반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아갈 때,
선생은 더 큰 뜻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장기적이고
실천적인 농촌계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은
1934년에 일본 고베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공부하던 중 별안간 각기병에 걸리게 되어
급히 귀국하게 되었고, 샘골에서 휴양하면서 농촌교육을 계속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YWCA가 샘골학원(천곡학원) 보조금 지원 중단을 선언하여서
선생은 경제적인 부담을 안게 되었고, 샘골학원을 향한 냉담한 사회의 반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은 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1935년 1월 23일 장중첩으로 병사하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라는 유언을 남기며 학생들을 걱정하였습니다.
출처:http://mpva.tistory.com/2430
사진촬영및제작 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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