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작가의 생각·의도·메시지·작품의 의미·관객이 형성하는 의미 - 각각의 개념적 차이
흔히 “이 작품에는 작가의 의도와 생각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작가의 생각’, ‘작가의 의도’, ‘전달하려는 메시지’, ‘작품의 의미’, ‘관객이 형성하는 의미’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이들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면 “작가의 뜻을 정확히 알아맞혀야 작품을 올바르게 감상할 수 있는가”라는 혼란이 생긴다. 또한 작품의 의미를 관객이 형성한다면 작가는 아무런 생각과 의도 없이 작품을 만들어도 되는가라는 의문도 생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작가의 내면, 제작행위, 작품의 형식, 작품이 놓이는 맥락과 관객의 해석을 서로 구분하면서도 이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1] 다섯 개념의 차이
1. 먼저 ‘작가의 생각’은 작업을 시작하게 한 가장 넓은 정신적 배경이다. 작가가 어떤 대상에 반복해서 끌리는 이유, 개인적인 기억과 감정, 현실에 대한 불편함, 기존 사진에 대한 동의나 반발, 아직 말로 설명하지 못한 관심과 문제의식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작가의 생각은 반드시 처음부터 완성된 문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현대인의 소외를 표현하겠다”처럼 명확할 수도 있지만, “왜인지 모르지만 이 장면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와 같은 막연한 감각일 수도 있다. 작가는 촬영과 편집을 계속하면서 자신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뒤늦게 발견하기도 한다.
2. ‘작가의 의도’는 이러한 생각을 실제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선택한 방향과 방법이다. 무엇을 촬영하고 무엇을 제외할 것인지, 어느 거리와 시점에서 찍을 것인지, 선명하게 표현할 것인지 흔들림을 받아들일 것인지, 한 장으로 보여줄 것인지 여러 장으로 배열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의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의도는 작품의 뜻을 미리 정해 놓은 정답이라기보다 작업을 구체적으로 조직하는 실천적 기준이다.
3.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작가가 관객에게 비교적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장이나 내용이다. “도시개발은 장소뿐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도 지운다”와 같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이 메시지이다.
그러나 모든 작품에 반드시 명확한 메시지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은 하나의 주장을 전달할 수도 있지만 해결되지 않는 질문, 모순, 감정과 감각적 경험을 제안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의도는 존재하지만 명확한 메시지는 없는 작품도 충분히 가능하다.
4.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머릿속에 있던 생각과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사진에 나타난 대상, 구도, 거리, 빛, 색, 초점, 반복, 생략, 사진들의 배열, 인화 크기, 제목과 전시 맥락이 함께 만들어내는 해석의 가능성이다.
의미가 작품 안에 물질처럼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작품의 구체적인 형식과 구조가 어떤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뒷받침한다는 뜻이다. 작가가 깊은 의미를 의도했더라도 그것이 작품의 형식으로 실현되지 않았다면 작품의 의미로 성립했다고 보기 어렵다.
5. 마지막으로 ‘관객이 형성하는 의미’는 관객이 작품이 제공하는 단서와 자신의 지식, 기억, 감정, 사회문화적 경험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구체적인 해석이다.
관객은 작가가 넣어 놓은 의미를 그대로 찾아내는 사람이 아니다. 같은 사진을 보고도 사람마다 다른 장면에 주목하고 서로 다른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작가가 도시의 구조를 보여주려고 촬영한 빈 복도에서 어떤 관객은 어린 시절의 집이나 떠나간 가족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객이 의미를 형성한다는 말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작품에 실제로 나타난 대상과 형식, 사진들의 배열, 제목, 역사적 배경과 전시 맥락은 해석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한계가 된다.
“이 사진을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는 것은 한 관객에게 일어난 개인적 연상이다. 반면 “반복되는 빈 의자와 닫힌 문은 부재와 단절을 강조한다”는 해석은 작품의 시각적 구조에서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검토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진다.
이 다섯 개념은 순서대로 단순하게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작가의 생각이 의도를 만들고, 의도가 촬영과 편집의 형식으로 실현되며, 그 형식이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관객과 만날 때 작품의 의미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처음의 생각은 달라질 수 있고, 의도는 작품에 충분히 실현되지 않을 수 있으며, 관객은 작가가 예상하지 못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작가가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길에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경험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것은 ‘작가의 생각’이다. 그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차 안에서 노파인더로 촬영하고 흔들림과 불완전한 구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그것은 ‘작가의 의도’이다.
“현대인은 반복되는 이동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린다”고 말하려 한다면 그것은 ‘메시지’이다. 흐릿한 풍경, 잘린 인물, 반복되는 도로와 사진들의 배열이 익명성과 기억의 불완전함을 드러낸다면 그것이 ‘작품의 의미’이다. 그 사진을 본 관객이 자신의 출근길이나 지나가 버린 중년의 시간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관객이 형성한 의미’이다.
따라서 작가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의도를 세우고 작품을 구성한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작품의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도는 사진의 형식과 배열로 실현되어야 작품의 의미를 형성할 수 있다. 관객은 그 의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여 다시 해석한다.
[2] “작품 안에는 의미와 맥락이 없다”는 말은 절반만 옳다
작품 안에 작가의 생각이 완성된 문장처럼 저장되어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사진 속에 ‘외로움’, ‘상실’,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의미가 픽셀이나 인화재료처럼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작품에는 아무런 의미와 맥락도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사진에는 실제로 촬영된 사람·사물·장소가 있다. 프레임의 안과 밖, 촬영 거리, 시점, 초점, 빛, 색, 몸짓, 시간적 순간도 존재한다. 전시에서는 인화 크기, 배열, 간격, 액자, 제목과 조명도 작품의 구조에 포함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하나의 의미를 직접 말해 주지는 않지만 가능한 해석의 범위를 형성한다.
따라서 더욱 정확한 명제는 다음과 같다.
작품의 의미는 작품 안에 완성된 내용물로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관객이 아무 근거 없이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의미는 작품의 구체적인 형식과 흔적, 사회적 맥락, 작가의 제안과 관객의 경험이 만나는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앨런 세큘라는 사진의 의미가 사진 안에 자연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정의되며, 사진이 사용되는 담론과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앨런 세큘라, 「사진적 의미의 발명에 관하여」, 1975).
로절린드 크라우스도 같은 사진이 지질학적 조사자료, 지리적 기록, 예술작품으로 제시될 때 서로 다른 담론적 공간에서 작동한다고 설명했다(로절린드 크라우스, 「사진의 담론적 공간: 풍경/경관」, 1982).
그러므로 작품은 맥락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런 설명을 붙이지 않고 흰 벽에 사진을 거는 것조차 미술관의 제도와 순수감상이라는 관습을 이용하는 하나의 맥락이다.
[3] 작가의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작가의 생각은 작가 개인의 순수한 내면에서 완전히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온 시대, 사회, 계층, 가족, 교육, 예술사와 이미지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람들이 무엇을 촬영하고 어떤 사진을 좋은 사진이라고 판단하는가가 사회적 관습과 계층적 취향의 영향을 받는다고 분석했다. 가족사진, 여행사진과 기념사진 역시 개인의 자연스러운 행동처럼 보이지만 가족의 결속과 사회적 의례를 수행한다(피에르 부르디외 외, 『사진: 중간예술』, 1965).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가 한 사람의 순수한 창조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언어와 문화적 인용들이 얽힌 구조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사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진가는 이전에 본 영화, 광고, 뉴스, SNS와 예술사진의 시각적 관습을 알게 모르게 반복한다(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1967).
따라서 작가의 생각을 존중한다는 것은 작가를 모든 의미의 최초 창조자로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생각이 어떤 개인적 경험과 사회적·예술사적 조건에서 형성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다.
[4] 작가의 의도는 하나가 아니다
작가의 의도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첫째, 무엇 때문에 작업을 시작했는가에 관한 출발 의도가 있다.
둘째, 무엇을 알아보고 질문하려 하는가에 관한 탐구 의도가 있다.
셋째, 어떤 촬영과 표현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한 형식적 의도가 있다.
넷째, 수많은 사진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순서로 배열할 것인가에 관한 편집 의도가 있다.
다섯째, 관객에게 어떤 생각이나 경험의 가능성을 제공하려 하는가에 관한 관계적 의도가 있다.
여섯째, 피사체를 어떻게 대하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에 관한 윤리적 의도가 있다.
일곱째, 작업을 진행하면서 처음에는 몰랐던 의미를 발견하고 방향을 수정하는 사후적 의도가 있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완성된 하나의 문장이 아니다. 작업을 시작하고 선택하고 수정하며 책임지는 방향성의 전체이다.
[5] 의도와 계획은 같지 않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기 전에 모든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작업은 이미 알고 있는 생각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일만은 아니다.
작가는 촬영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만나고 결과물을 편집하면서 처음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작업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방식이 있다.
① 명확한 개념과 계획을 먼저 정하고 제작하는 방식
② 대략적인 관심을 가지고 촬영하면서 의미를 발견하는 방식
③ 우연과 실험을 받아들이고 사후적으로 작업의 구조를 만드는 방식
모두 정당한 예술적 방법이다.
솔 르윗은 개념미술에서 계획과 결정이 사전에 이루어지고 “아이디어가 작품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 경우 작가의 생각과 규칙이 작품의 핵심적인 구성요소이다(솔 르윗, 「개념미술에 관한 단락들」, 1967).
반대로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 존 케이지의 우연성, 거리사진의 우발적 순간처럼 결과를 완전히 통제하지 않는 작업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에도 “우연을 받아들이겠다”, “통제를 일부 포기하겠다”, “결과를 미리 결정하지 않겠다”는 상위 수준의 의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계획이 없다고 의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연을 작품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과 아무런 기준 없이 작업하는 것은 다르다.
[6] 작가의 의도와 메시지는 다르다
의도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선택과 방향이고, 메시지는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비교적 명확한 주장이다.
작가가 “관광지마다 비슷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일정한 거리와 구도로 반복해서 촬영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그것은 작업의 의도이다.
그 작업을 통해 “관광사진은 개인의 자유로운 기억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된 행동이다”라고 말하려 한다면 그것은 메시지이다.
그러나 작가는 반드시 이러한 결론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왜 여행지에서 이미 보았던 것과 같은 사진을 다시 찍는가”라는 질문을 남길 수도 있다. 이 경우 작품에는 의도와 문제의식이 있지만 단일한 메시지는 없다.
예술작품은 광고나 정치구호처럼 하나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수단이 아니다. 작품은 관객에게 답을 전달하는 대신 질문을 경험하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메시지가 불분명하다고 해서 작품에 의도가 없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메시지가 분명하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작품의 메시지가 설명문에서만 존재하고 사진의 형식으로 구현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예술적 성취로 보기 어렵다.
[7] 작가의 의도가 작품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입장
전통적인 의도주의는 작품의 올바른 의미가 작가가 표현하려 했던 생각이라고 본다. 작품을 이해하려면 작가의 생애, 편지, 인터뷰, 제작 당시의 상황과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작품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고, 특정한 상징과 형식의 선택 이유를 알 수 있으며, 작품을 전혀 관계없는 방식으로 오독하는 것을 줄일 수 있다.
특히 개념미술, 정치적 미술, 장소특정적 작업과 다큐멘터리에서는 제작 목적과 작가의 위치가 중요하다. 외형적으로 비슷한 폐허 사진이라도 도시개발을 비판하기 위해 촬영한 것인지, 관광 홍보를 위해 촬영한 것인지에 따라 사회적 의미는 달라진다.
그러나 강한 의도주의에는 문제가 있다. 작가가 “내 작품은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작품이 실제로 자유를 설득력 있게 표현한 것은 아니다. 작품에서 확인할 수 없는 의미를 작가의 말만으로 정답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작가의 의도는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작품의 성공을 보증하지 않는다.
[8] ‘의도적 오류’는 작가의 의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윔샛과 비어즐리는 「의도적 오류」에서 작품을 평가할 때 작가의 사적인 의도를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작가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가 아니라 실제 작품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윌리엄 윔샛·먼로 비어즐리, 「의도적 오류」, 1946).
이 이론은 흔히 “작가의 의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주장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핵심은 의도가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자동으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어떤 사진가가 “현대인의 고독을 표현했다”고 말하더라도 사진에서는 화려한 야경과 멋진 실루엣만 보일 수 있다. 이때 작가의 설명은 작품에 존재하지 않는 깊이를 대신 만들어 주지 못한다.
다음 문장들은 서로 다른 판단이다.
① 작가는 고독을 표현하려고 했다.
② 작품의 형식이 고독을 드러낸다.
③ 관객은 그 작품에서 고독을 경험했다.
④ 그 작품은 현대인의 고독을 설득력 있게 탐구했다.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작품을 만들지는 않는다. 처음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된 작품도 중요한 예술적 가치를 얻을 수 있다.
[9] ‘저자의 죽음’도 작가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작가의 생애와 의도를 작품의 최종 정답으로 삼는 태도를 비판했다. 작품은 한 사람의 순수한 내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언어, 관습과 문화적 인용들이 얽힌 구조이며 독자의 읽기 속에서 복수의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이다(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1967).
그러나 ‘저자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서는 안 된다.
① 작가는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도 된다.
② 작품 제작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③ 작가에게 작품에 대한 책임이 없다.
④ 관객의 모든 해석은 똑같이 옳다.
⑤ 작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바르트가 비판한 것은 ‘저자=의미를 결정하는 신’이라는 관념이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지만 작품의 모든 의미를 독점할 수 없다.
미셸 푸코는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를 완전히 없애기보다 ‘저자 기능’을 분석했다. 작가의 이름은 여러 작품을 분류하고 연결하며 어떤 방식으로 읽을 것인가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미셸 푸코, 「저자란 무엇인가」, 1969).
따라서 작가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의미의 절대적인 지배자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10] 작품이 열려 있다는 것은 아무 해석이나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현대예술의 특징을 ‘열린 작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열린 작품은 하나의 고정된 결론을 강요하지 않고 관객의 참여와 복수의 해석을 허용한다(움베르토 에코, 『열린 작품』, 1962).
그러나 열린 작품은 텅 빈 작품이 아니다.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기 위해서도 작가는 형식, 재료, 규칙과 관계를 구성해야 한다.
관객은 작가가 예상하지 못한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경험을 작품에 연결할 수 있다. 시대가 변하면 같은 작품도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에 없는 내용을 아무 근거 없이 붙이거나 역사적 사실과 작품의 형식을 무시하는 해석까지 모두 타당한 것은 아니다. 에코는 이후 『해석의 한계』에서 해석의 개방성과 자의적인 과잉해석을 구분했다(움베르토 에코, 『해석의 한계』, 1990).
관객은 의미를 창조하지만 무에서 창조하지 않는다. 작품이 제공하는 흔적과 구조에 응답하면서 의미를 만든다.
[11] 관객은 작품을 어떻게 완성하는가
자크 랑시에르는 관객을 작가의 메시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로 보는 생각을 비판했다. 관객은 보고, 비교하고, 기억하고, 다른 경험과 연결하며 작품을 스스로 번역한다(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2008).
작가는 관객에게 정확히 어떤 감정을 느끼라고 명령할 수 없다. 슬픔을 의도한 사진이 어떤 관객에게는 평온함으로, 다른 관객에게는 불편함으로 경험될 수 있다.
관객이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은 미완성된 사진의 나머지 절반을 마음대로 채운다는 뜻이 아니다. 작품이 제공한 의미의 가능성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실제 경험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술적 소통은 작가가 완성된 의미를 포장하여 관객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다. 작가는 관객이 의미를 형성할 수 있도록 이미지, 형식, 공간과 시간의 조건을 구성한다.
작가의 역할은 정답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발생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데 있다.
[12] 관객의 개인적 연상과 작품 해석은 다르다
관객이 어떤 작품을 보고 느낀 모든 감정은 실제 경험이다. 그러나 모든 감정이 곧 작품의 공적인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복도를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는 것은 관객 개인에게 발생한 연상이다. 이 경험은 진실하지만 다른 관객도 반드시 그렇게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닫힌 문과 비어 있는 복도가 반복되면서 공간의 단절과 부재가 강조된다”는 해석은 작품의 시각적 구조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다른 관객과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다음을 구분해야 한다.
① 작품의 형식과 맥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는 해석
② 특정 관객의 기억에서 발생한 개인적 연상
③ 작품이 관객에게 일으킨 정서적 효과
④ 시대와 사회의 변화로 새롭게 나타난 의미
이들은 모두 작품의 수용과 관계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13] 작품의 의미와 작품의 효과도 다르다
관객이 슬픔을 느꼈다는 것과 작품의 의미가 슬픔이라는 것은 같지 않다.
작품의 의미는 작품이 무엇을 보여주고 질문하며 어떤 관계를 구성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작품의 효과는 그것이 관객에게 어떤 감정, 기억, 판단과 행동을 일으켰는가에 관한 것이다.
재개발 지역을 촬영한 사진을 보고 한 관객은 슬픔을 느끼고, 다른 관객은 분노하며, 또 다른 관객은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 효과는 다르지만 작품이 다루는 의미는 장소의 변화, 소멸, 기억과 개발의 관계일 수 있다.
작가가 의도한 효과와 실제 효과도 다를 수 있다. 작가는 연민을 일으키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촬영했지만 관객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구경거리로 만든 사진처럼 보일 수 있다.
“좋은 뜻으로 촬영했다”는 설명만으로 작품의 실제 윤리적 효과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14] 해석학적으로 의미는 만남에서 발생한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이해를 과거의 작가 의도를 그대로 복원하는 일로만 보지 않았다. 작품이 속한 역사적 지평과 현재 관객의 지평이 만나면서 새로운 이해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를 ‘지평의 융합’이라고 한다(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1960).
이 관점에서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머릿속, 작품이라는 물건, 관객의 주관적 감정 가운데 어느 한 곳에만 있지 않다. 의미는 이들이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만나는 해석적 사건이다.
존 듀이 역시 예술을 고립된 물건이 아니라 인간과 환경 사이에서 형성되는 경험으로 보았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사진은 예술의 산물이지만 작품은 그것이 관객의 경험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실현된다(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 1934).
따라서 작품의 의미는 작가가 넣고 관객이 꺼내는 내용물이 아니다. 작품을 매개로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사건이다.
[15] 사진에서는 작가의 의도가 더욱 불완전하게 작동한다
사진은 회화보다 작가의 통제 밖에 있는 요소가 많이 들어온다. 사진가는 프레임과 순간을 선택하지만 카메라 앞의 현실을 완전히 설계하지는 못한다. 우연한 표정, 배경의 작은 사물, 빛의 변화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함께 기록된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사진가인 오퍼레이터, 촬영된 대상인 스펙트럼, 관객인 스펙테이터의 관계로 설명했다. 특히 푼크툼은 사진가가 계획하여 넣은 상징이라기보다 관객을 개인적으로 찌르는 예기치 않은 세부와 관계한다(롤랑 바르트, 『밝은 방』, 1980).
예를 들어 사진가는 도시의 건축구조를 촬영했지만 관객은 화면 구석의 낡은 의자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다. 이 기억은 사진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의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잘못된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반대로 관객이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작품 전체를 설명하는 객관적 의미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특정 관객에게 발생한 개인적 효과일 수 있다.
[16] 카메라와 기술도 작품 제작에 참여한다
빌렘 플루서는 사진가가 완전히 자유롭게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장치가 제공하는 가능성 안에서 작업한다고 보았다. 셔터속도, 조리개, 렌즈와 자동초점은 무엇을 어떻게 찍을 수 있는지를 미리 규정한다. 사진가는 장치의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프로그램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빌렘 플루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1983).
디지털사진에서는 소프트웨어, 자동보정, 이미지 처리 알고리즘과 플랫폼도 결과에 관여한다. 스마트폰 사진의 색과 선명도는 촬영자의 의도뿐 아니라 제조사가 설계한 계산사진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에서는 저자의 위치가 더욱 복잡해진다. 프롬프트를 작성한 사람, 학습자료를 만든 수많은 이미지 생산자, 모델 개발자, 알고리즘과 결과를 선택한 사람이 함께 이미지에 영향을 준다.
그렇다고 인간의 의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어떤 장치를 선택하고, 어떤 결과를 버리며, 무엇을 작품으로 제시할지를 결정한다.
동시대의 작가성은 모든 것을 직접 만들었다는 데만 있지 않다. 분산된 제작 조건을 어떻게 선택하고 조직하며 그 결과를 책임지는가에서도 나타난다.
[17] 의도 없이 만들어진 이미지도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예술적 의도 없이 만들어진 이미지도 예술작품으로 사용될 수 있다. 가족의 기념사진, 과학자료, 감시카메라 화면, 익명의 기록사진과 우연히 찍힌 사진이 후대에 중요한 예술적·역사적 의미를 얻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의도를 구분해야 한다.
첫째는 이미지를 처음 만든 사람의 촬영 의도이다.
둘째는 그 이미지를 선택하고 다시 제시한 사람의 편집·전시 의도이다.
가족사진을 찍은 사람에게 예술적 의도가 없었더라도 다른 작가나 기획자가 그 사진들을 선택하고 배열하여 가족제도, 젠더, 계급과 기억을 탐구할 수 있다. 처음 촬영자의 예술적 의도는 없었지만 이미지를 선택하고 재구성한 사람의 큐레토리얼 의도가 새롭게 작동한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사물을 직접 제작하는 기술보다 기존 사물을 선택하고 명명하여 예술의 맥락으로 옮기는 행위를 강조했다. 여기에서는 제작 의도보다 선택과 맥락화의 의도가 중요하다.
따라서 예술적 의도 없이 만들어진 이미지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술적 관계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누군가의 선택, 배열, 명명, 해석과 제시가 개입한다.
[18] 그렇다면 작가는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찍어도 되는가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거창한 철학이나 명확한 메시지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왜인지 모르지만 이 장면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는 감각도 충분한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찍는 것과 아직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관심을 따라 찍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선택 기준이 없는 상태이다. 후자는 언어화되지 않았지만 반복되는 감각, 기억과 문제의식이 작동하는 상태이다.
작가의 생각은 언제나 명확한 문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한 대상에 반복해서 끌리는 감각, 일정한 거리와 시점을 고집하는 태도, 아름답게 찍지 않으려는 결심, 우연을 받아들이는 촬영 규칙, 같은 장소를 오랫동안 관찰하려는 지속성으로도 나타난다.
따라서 작업을 시작할 때 자신의 의도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해도 된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될수록 무엇을 반복하고 선택하며 제외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찍었다”는 말은 촬영의 출발점에서는 가능하지만 최종 전시의 근거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시는 촬영된 모든 사진을 우연히 내놓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작품으로 인정하고 어떤 관계로 보여줄지를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9] 작가의 의도는 전달할 정답보다 작업을 조직하는 기준이다
작가의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할 정답으로만 생각하면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 의도는 불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의도의 더 중요한 역할은 제작 과정에서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작가는 의도를 통해 무엇을 촬영하고 무엇을 지나칠 것인지, 어느 장소에 다시 찾아갈 것인지, 어떤 거리와 시점을 유지할 것인지, 어떤 사진을 버릴 것인지, 어떤 순서로 배열할 것인지, 설명을 얼마나 제공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의도가 전혀 없으면 모든 사진이 같은 가치를 가진 것처럼 보이고 편집의 기준도 사라진다. 결국 작업에 필요한 사진보다 보기 좋은 사진, 익숙한 사진과 칭찬받기 쉬운 사진만 남기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는 관객을 통제하는 명령문이 아니라 작업을 지속하고 선택하게 하는 방향이다.
[20] 작가의 의도는 작품의 형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작가가 깊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과 작품이 깊다는 것은 같지 않다. 의도가 작품의 형식과 구조로 전환되지 않으면 관객은 그것을 작품에서 확인할 수 없다.
작가가 “도시인의 고립을 표현했다”고 말하지만 사진이 화려한 야경과 멋진 색에만 집중한다면 의도와 작품이 충돌할 수 있다.
반대로 외로운 사람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도 고립을 표현할 수 있다. 반복되는 빈 공간, 서로 단절된 시선, 지나치게 넓은 거리와 기계적인 배열을 통해 고립의 구조를 경험하게 할 수 있다.
좋은 작업은 생각을 설명문으로만 전달하지 않는다.
① 생각을 촬영 규칙으로 바꾼다.
② 감정을 빛, 거리, 색과 리듬으로 바꾼다.
③ 질문을 사진 사이의 관계로 바꾼다.
④ 시간의 경험을 반복과 배열로 바꾼다.
⑤ 사회적 문제를 구체적인 사람·장소·사물의 관계로 바꾼다.
작가가 의도한 내용을 작품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면 관객의 이해 부족만을 탓해서는 안 된다.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형식화되었는지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
[21] 작가노트는 작품의 정답지가 아니다
작가노트는 관객에게 작품의 뜻을 외우게 하는 설명문이 아니다. 작품에서 부족한 의미를 어려운 철학으로 대신 채우는 글도 아니다.
작가노트는 작업을 시작한 구체적인 계기, 사진에 직접 보이지 않는 장소와 기간, 촬영 및 편집 방법, 작업이 놓인 사회적·역사적 배경을 알려줄 수 있다. 합성, 재연, 아카이브와 인공지능 사용처럼 사진의 사실성 판단에 필요한 정보도 제공할 수 있다.
작가노트는 해석의 입구를 제공하되 출구까지 정해서는 안 된다.
“이 작품은 현대인의 소외를 의미한다”라고 단정하기보다 “매일 수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가면서도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출퇴근 경험에서 이 작업을 시작했다”라고 쓰는 편이 더 적절하다.
앞의 문장은 관객에게 결론을 요구한다. 뒤의 문장은 작품이 시작된 구체적인 조건을 제공하면서 관객이 스스로 사진을 해석할 공간을 남긴다.
[22] 작가의 의도는 윤리적 책임과도 관계한다
작가가 작품의 모든 해석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해서 작품의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진가는 왜 이 사람을 촬영했는지, 그 사람이 어떤 존재로 보이게 되는지, 사진이 그 사람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은 없는지, 타인의 고통을 감동적인 이미지로 소비하지 않았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작가가 “그런 뜻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의도하지 않은 차별적 의미나 사회적 피해가 발생했다면 작품의 실제 효과를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관객이 불쾌감을 느꼈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이 곧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불편함이 작품이 제기하는 비판적 경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 평가는 작가의 선한 의도나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 가운데 하나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작품이 누구를 어떻게 재현하고 어떤 권력관계를 반복하거나 비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23] 동시대예술에서 작가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전통적인 예술가상에서는 작가가 자신의 내면과 생각을 작품에 표현하고 관객은 그 뜻을 발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시대예술에서 작가는 이미지를 직접 만드는 사람만이 아니다. 기존 이미지를 수집하고 선택하는 사람, 서로 다른 자료를 연결하는 편집자, 작업의 규칙과 과정을 설계하는 사람, 관객의 참여조건을 만드는 사람, 사회적 관계를 조직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작가의 의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의도가 한 장의 이미지 내부에서 작업 전체의 구조와 관계를 설계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과거의 작가가 주로 “무엇을 찍거나 그릴 것인가”를 결정했다면 동시대의 작가는 “어떤 이미지와 자료를 어떤 규칙으로 관계 맺게 하고, 어떤 공간과 제도 속에서 관객에게 경험하게 할 것인가”까지 결정한다.
[24] 가장 타당한 이론적 입장
작가의 의도를 둘러싼 이론은 크게 세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강한 의도주의이다. 작품의 올바른 의미는 작가가 의도한 의미라고 본다. 그러나 이 입장은 작품의 형식과 관객의 해석을 작가의 설명에 지나치게 종속시킬 위험이 있다.
두 번째는 극단적인 반의도주의이다. 작품이 공개된 뒤에는 작가의 의도가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입장은 개념미술, 다큐멘터리, 장소특정적 작업과 정치적 미술처럼 제작 목적과 역사적 조건이 중요한 작업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세 번째는 온건한 의도론 또는 관계적 의미론이다. 작가의 의도는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이지만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고 본다. 의도는 작품의 형식, 장르적 관습, 역사적 맥락과 관객의 경험과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사진과 동시대예술에는 세 번째 입장이 가장 타당하다.
작가는 작품의 의미를 독점하지 않지만 아무 역할도 없는 사람이 아니다. 관객은 의미를 능동적으로 형성하지만 작품과 무관한 의미를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사람도 아니다. 작품은 고정된 의미를 담은 그릇이 아니지만 완전히 비어 있는 표면도 아니다.
[25] 최종 정리
‘작가의 생각’은 작업을 시작하게 한 관심, 기억, 감정과 문제의식이다.
‘작가의 의도’는 그 생각을 실제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선택한 촬영·편집·배열의 방향이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작가가 관객에게 제시하려는 비교적 분명하고 문장화할 수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모든 작품에 메시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작품의 의미’는 작품의 대상, 형식, 배열,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맥락이 뒷받침하는 해석의 가능성이다. 의미가 작품 안에 물질처럼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관객이 형성하는 의미’는 작품이 제공하는 단서와 관객의 지식, 기억, 감정과 사회문화적 경험이 만나 만들어진 구체적인 해석이다.
‘작품의 효과’는 그 해석 과정에서 관객에게 실제로 발생한 감정, 기억, 판단과 행동이다.
따라서 작품의 의미는 작가가 일방적으로 넣어 두는 것도 아니며 관객이 무에서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작가의 생각은 의도를 만들고, 의도는 촬영과 편집의 선택을 통해 작품의 형식으로 실현된다. 그 형식이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관객의 경험과 만날 때 작품의 의미가 발생한다.
작가의 의도는 작품의 의미를 독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작품을 만들고 선택하고 배열하며 그 결과에 책임지기 위해 필요하다.
관객은 작가의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쓰는 사람이 아니다. 작품의 형식과 맥락을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능동적인 해석자이다.
작품은 의미를 완성된 상태로 보관한 물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 의미도 없는 빈 표면도 아니다. 작품은 작가의 선택, 현실의 흔적, 사진의 형식, 사회적 맥락과 관객의 경험이 만나면서 의미가 계속 발생하는 구조이다.
따라서 좋은 작품은 작가의 뜻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달하는 작품이 아니다. 작가의 문제의식이 사진의 형식과 구조로 충분히 실현되어 있으면서도, 관객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작가가 예상하지 못한 의미까지 발견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작품이다.
동시대의 작가는 의미의 유일한 창조자나 지배자가 아니다. 그는 의미가 발생할 조건을 선택하고 조직하며 그 결과에 책임지는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