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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냄에 대하여 : 불교방송 대념처경 법문 126회~130회
126회
수행자 여러분!
둘째, 성냄입니다. 성냄은 선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성냄을 한문으로는 진심(瞋心)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진(瞋)이란 눈 부릅뜰 진입니다.
눈을 크게 부릅뜬다는 것은 화를 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이라는 뜻의 진심(眞心)으로 혼돈할 수 있어서
여기서는 진심(瞋心)이라고 하지 않고 성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성냄은 불선심으로 대표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3가지 마음 중에
두 번째인 화를 내는 마음입니다. 이 3가지를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성내는 마음은 하나이지만 기본적으로 항상 3가지 마음이 함께 있으며
이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의 유사한 마음이 함께 일어납니다.
이러한 성냄은 타락, 부패, 결점, 잘못, 병의 바탕이 되는 마음입니다.
성냄은 스스로가 불을 지피는 것으로 자신이나 남을 태워서 황폐화 시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면서 가장 쉽게, 가장 많이 내는 것이 성냄입니다.
성냄의 종류는 많습니다.
화를 내는 것, 분노, 혐오, 피하는 것, 없애려는 것,
질투, 인색, 후회가 모두 성냄에 속합니다.
혐오는 미워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냄은 단지 성냄만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것들과 함께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단지 성냄만 알아차릴 것이 아니고
성냄에 따르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마음도 함께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누구나 화를 낼 때는 이상의 여러 가지의 마음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냄이 있을 때는 화를 내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성냄도 소멸시켜야 하며
더 이상 다른 것들과 함께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때에 따라서 성냄 하나만을 알아차리지 말고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불선심도 함께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성냄 하나가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양하게 나타는 것을 모두 알아차려야
비로소 성냄을 완전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나타난 대상을 없애려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러한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이렇게 없애려고 하지 않고 알아차려야 알아차리는 힘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냄에는 어떤 마음이 있는지 종류를 분명하게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모르면 당하지만 알면 당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마음이 불선심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주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치유가 가능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화를 내면, 제일 먼저 화를 낸 자신부터 해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다시 남에게도 고통을 줍니다.
남을 미워하고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면 가장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사악해집니다.
그리고 화를 내는 마음은 더욱 화를 부추겨서
자신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파국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화는 화를 자양분으로 먹고 더 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 화를 더욱 키우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화를 제어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은
화가 화를 불태우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화는 자신의 마음이 분노로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불길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지옥의 불길 속에서 살면,
당연히 죽어서도 같은 불길이 있는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업자성정견입니다.
누구나가 예외 없이 자기가 행위를 하고 반드시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한 결과를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선한 마음을 가지면 선한 마음의 결과로
현재에도 선하고 미래에도 선할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선한 마음을 먹은 세계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생에 어디로 갈 것인가는 지금 현재의 마음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현재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화를 내면 지위가 높거나 명예가 있고 깨끗한 옷을 입었다고 해도 추하게 보입니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세상에서 격리되며 친구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조차도 피합니다.
화는 자신의 고요함과 지혜를 도둑질할 뿐만 아니라 거친 불길에 자꾸 불을 더 지핍니다.
그래서 늘 분노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어리석은 것은 이렇게 분노를 나타내면서 살아야
사는 것처럼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좋아서 화를 내고, 화를 낸 것이 괴로움인데 이 괴로움을 즐겨서 더 화를 냅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는 사람은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흥분한 마음이 지혜를 가리어 오직 뜨거운 불로 자기를 태우는 형벌을 받으면서 삽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런 삶이 과연 행복하겠습니까?
이렇게 사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렇게 사는 사람을 한 가정이나 사회에서 환영하겠습니까?
그래서 화는 가장 큰 피해를 스스로에게 주는 것입니다.
상대가 화를 냈을 때 같이 화를 낸다면 화를 내는 사람이나 하등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화는 화를 내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상대의 화를 가져올 이유가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화를 공연히 받아들여서
자신도 고통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 상대의 화로 인해 똑같이 자신도 화를 낸다면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신견 때문에 내가 반응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화를 낸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화를 낸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 마음이 순간의 마음이지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가 내게 화를 내면 나를 무시했다고 판단해서 똑같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도 탐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그러면 그 순간 뜨거운 불길로 인하여 사물을 바르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화는 가장 천박한 행위이며 항상 손실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바른 견해로 판단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인 관계에서 먼저 화를 내면 이미 상황이 기운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먼저 화를 내는 사람이 상대에게 항복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양보와 항복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양보는 미덕이고 관용이지만, 이때의 항복은 불선업이고 실패이고 좌절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만약 상대가 화를 냈을 때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한다면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무시한 상대도 없고 무시당한 자아도 없습니다.
단지 상대의 축적된 성향만 있을 뿐이지, 여기에는 나도 없고 사실은 상대도 없습니다.
이렇게 자아가 없는 것을 알면 화를 낸 상대도 없고,
오직 화를 내는 상대의 잠재적 성향만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화를 내는 마음은 순간에 일어났다가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졌는데
공연히 상대의 화를 기억하여 내가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이기 때문에 이런 수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대상을 분리해서 지켜봐야 합니다.
상대가 낸 화는 상대의 것으로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상대가 화를 냈을 때 반드시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화는 화를 낸 사람의 문제로 내는 것입니다.
설령 나 때문에 화를 냈다고 해도 근본원인은
화를 낸 사람의 선하지 못한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화를 낸 사람이 다른 곳에서 어떤 일로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공연히 자신에게 화를 내서 자신의 분노를 해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을 흘기는 격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부분의 화는 오해로 인한 것이라고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화를 낼 때 내가 그 상대의 화에 걸린다면 자신의 무지 때문이며,
만약 걸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화를 당하건 당하지 않건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상대가 내게 화를 내는 말을 하거나 행동을 했을 때는
상대를 사람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를 사람으로 보면 반사적으로 화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 대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때 먼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상대의 마음을 함께 알아차려야 합니다.
화를 낸 상대를 사람으로 보면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내게 화를 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거나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미워할 사람이 없이 단지 알아차릴 마음이라는 현상만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사회가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과 여러 가지의 제도나 기계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들을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이 있어서 이것들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이나 제도를 보는 것은 관념을 보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은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제도를 보면 화를 내게 되지만
이것을 운영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면 미워할 대상의 구심점이 약해집니다.
관념은 세속의 관점이라서 번뇌에 걸리지만
실재는 출세간의 관점이라서 번뇌에 걸릴 것이 없이 오직 진실만을 봅니다.
예를 들어 길에는 많은 차들이 운행됩니다.
이때 차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질서를 지키는 차량은 질서를 지키는 마음이 운전을 하는 것이고
질서를 어기는 차량은 질서를 어기는 마음이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가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운행하는 차량 중에 난폭한 운전을 해서
타인에게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 즉시 화를 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운전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 운전을 잘못한 그 사람을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고,
운전을 한 그 사람의 마음을 보면 한결 미움이 누그러집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구체적 형태가 아니고
대상이 마음이기 때문에 미워할 실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모양을 보면 관념에 걸리고
그 실재를 보면 구체적 형태가 사라지기 때문에
미워할 대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27회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성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잘못된 일이 있을 때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나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나라는 모양이 없고
이 모양을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마음만 있기 때문에
미워할 내가 없고 미워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보면 미워할 상대가 없고 상대의 마음만 있기 때문에
미워할 구체적인 모양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나 행위를 보지 말고 그것을 일으킨 그 사람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이 한결 수그러듭니다.
남이 나를 비난하거나 내게 화를 낼 때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아직 깨달음을 얻지 않았어도 이미 깨달음을 향해서 가는 훌륭한 수행자가 된 것입니다.
상대가 화를 냈을 때 반응하는 사람은 아만심이 강하고 탐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 뒤에서 숨어있는 것이 바로 나라고 하는 유신견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고 할 때는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내가 없다고 알아야 비로소 상대의 일로 끝내고 내가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있다고 한다면 모든 일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공연히 남이 나를 미워한다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이 불만족으로 인해서 공연히 남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의 배경에는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아차려서
그것이 과연 나의 마음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화를 내는 원인은 많지만 가장 가까운 원인은 탐욕 때문입니다.
사실 화는 탐욕의 부하입니다.
화는 불선심 중에서도 천박한 것으로 아무 때나 가장 먼저 일어나는 불선심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제어가 되지 않습니다.
천박하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는 뒤에서 이러한 마음을 조정하는 탐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욕이 화를 다스리는 중간보스입니다.
그리고 화를 내는 근본원인은 어리석음입니다.
결국 어리석음이 가장 뒤에서 모든 불선심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사실은 잘못된 일의 모든 조정자는 성냄 뒤에 있는 탐욕, 탐욕 뒤에 있는 무명입니다.
이 무명은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무명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명의 반대인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가 화를 낸 마음을 알아차리면 탐욕을 발견합니다.
다시 탐욕을 알아차리면 어리석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어리석음을 알아차려야
비로소 근본원인을 알아차린 지혜를 얻어 불선심이 선심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화를 낸 것 하나만 알아차려서는 완전한 대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낸 그 마음을 알아차려서 화를 내게 한 원인인 탐욕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탐욕을 일으킨 마음을 알아차려야,
마지막에 숨어서 모든 것을 조정하는 어리석음을 발견하여 지혜로 바꿀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화를 내는 이유는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화는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하여 하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는 축적된 성향 때문에 내기도 하고, 누적된 불만이 쌓이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어도 화를 냅니다.
그리고 화는 이기심과 열등의식이 작용할 때도 나타납니다.
어떤 이유이거나 화를 낸다는 사실은 불선심의 가장 천박한 면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자애가 없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화가 사라지면 그 순간에 자애의 마음으로 바뀝니다.
수행자 여러분!
처음에는 사소한 것으로 시작한 불만족이 쌓이고 쌓이면
그것이 화로 분출되어서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은 불만족을 처음에 알아차려야지
그것이 쌓여서 큰 화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교육시킨다고 할 때도 교육을 한다는 목적으로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살펴봐야 합니다.
교육을 한다는 명분으로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교육이 아니고 자신의 화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이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개선되기보다도 오히려 증오를 키울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대상이 어린아이라면 이런 결과로 인해서 비뚤어진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에 대한 평가가 절하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에게 이것이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습니다. 바로 부모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화를 내지 않고 상대를 자애로 보듬어주면
먼저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져서 이 마음이 상대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편안하고 상대도 편안해져서 비로소 이때 교육적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화는 비도덕적인 마음에 기초한 불선업이므로 오직 선한 마음으로 대할 때만이
교육의 효과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화풀이를 하고 있지 않은지.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축적된 성향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이루지 못한 불만족을 화로서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지.
우리는 이것을 항상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화는 세속의 방식이고 자애는 출세간의 방식입니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투쟁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면 방관합니다.
출세간의 삶은 투쟁이 아닌 관용과 자애입니다.
관용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함께 위하고 자애는 자신과 남을 모두 사랑합니다.
투쟁을 하면 상처와 고통만 남지만 관용을 가지면 자애와 행복과 평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용과 자애가 수행을 하는 마음입니다.
가장 처절한 싸움은 남과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의 선심과 불선심의 싸움이며, 자신의 선과보와 불선과보의 싸움입니다.
이때 우리는 싸우고 있는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선심과 불선심의 부딪힘을 면밀하게 주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알아차리는 그 상태가 바로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불선심에서 선심으로 바뀌어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른 판단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른 행위를 하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싸워서 이겼다고 해서 결코 이긴 것이 아닙니다.
불선으로 이겼다면 이것은 이기고도 진 것입니다.
오히려 이기고도 불선의 과보를 받기 때문에 이긴 것이 아니고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싸워서 이겼다고 해서 결코 이긴 것이 아니므로 스스로 이 사실을 통찰해야 합니다.
선하기 때문에 졌다면 이것은 지고도 이긴 것입니다.
오히려 지고도 선한 과보를 받기 때문에 진 것이 아니고 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싸워서 졌다고 해서 결코 진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무엇을 이겼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졌다는 말입니까?
그것들은 세속적 관점에서 본 견해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출세간을 지향하는 사람은 세속적 관점에서 이기는 것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지십시오.
그것이 진정으로 당신을 이기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상대를 이기는 것입니다.
맞서지 마십시오.
그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십시오.
그것이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기고 지는 싸움에는 끝없는 윤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것도 없고, 지는 것도 없으면
나고 죽는 생사의 괴로움이 끊어져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나타난 모든 대상을 알아차리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궁극의 열반을 성취합니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무인작용심이라고 하는데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고 아라한의 마음입니다.
모든 것은 단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그것들은 각자의 업으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알면
자신의 일이나 세상의 일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소한 일이나 큰일이나 상관없이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기고 지는 것이 사라집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툼에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자아가 있습니다.
이 자아를 강화해주는 것이 탐욕과 집착입니다.
바로 이 탐욕과 집착 때문에 화를 내고 싸웁니다.
그러므로 탐욕이 일어날 때는 탐욕이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집착으로 발전했다면 집착으로 발전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는 것 밖에 더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만약 성냄이 일어났다면 성냄이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고, 그 마음이 알기 때문에
언제나 최종적으로 나타난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가장 확실하게 현장에서 대상을 파악하여 해결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미루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그 자리에서 해결됩니다.
왜 이것을 미루어서 번뇌를 가지고 갑니까?
미룬다는 것은 회피하는 것입니다.
나타난 즉시 나타난 대상을 바로 알아차리십시오.
모든 번뇌는 한낱 알아차릴 대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은 나타난 대상과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난 현상을 단지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싸우게 되면 자꾸 싸우게 되고 나중에는 싸우는 것을 좋아서 집착합니다.
그러면 더 큰 불선업을 짓습니다.
수행 중에 대상과 싸우게 되면 대상에 대한 탐욕이 있는 것입니다.
탐욕이 있어서 대상과 하나가 되어 대상에 반응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 중에 나타난 대상과 싸우지 않는다면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분리해서 지켜본 것입니다.
그러면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가 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합니다.
수행 중에 나타난 대상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좋아하거나 또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통증, 망상, 졸음 이런 것들입니다.
바로 그런 것과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좌선 중에 나타난 모든 것들은, 수행 중에 나타난 모든 것들은,
경행을 할 때 나타난 모든 것들은 모두 알아차릴 대상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것은 싸워달라고 나타난 것이 아니고 와서 보아달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나타난 대상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와서 보아달라고 할 때 가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28회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남에게 분노를 나타낼 때 이 분노는 자신을 해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항상 역효과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분노한 사람이 분노의 대상자에게 ‘그가 추하게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왜 그런가? 비구들이여, 분노한 사람은 분노의 대상자가 훌륭하게 보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 사람은 저 스스로 화가 나서 분노에 휩싸이고 무너진다.
비록 목욕을 깨끗이 하고, 머리와 수염을 다듬고 깨끗한 옷을 입었으나
분노에 휩싸이면 추하게 보인다.
이것이 분노한 자가 분노의 대상에게 바라는 첫 번째 효과이나,
이것은 화를 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효과이다.
분노한 사람은 분노의 대상자에게 ‘그가 잠을 설쳤으면’하고 또 바란다.
왜 그런가? 분노한 자는 상대가 숙면을 취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분노한 사람이 화가 나서 분노에 휩싸이고 스스로 무너진다.
양털로 된 침구, 하얀 담요에 꽃으로 수놓은 모포, 가죽 깔개에 발을 친 침대나,
양쪽 끝에 진홍색 방석이 깔린 긴 의자에서도 그는 분노에 휩싸여 잠자리가 불편하다.
이것이 화를 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두 번째 효과이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화를 낸 자는 그가 증오하는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의도입니다.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은 악한 의도를 내야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삶은 참으로 불행한 삶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마음을 먹은 사람이 스스로 무너져 고통을 받고
자신이 낸 분노로 인해 스스로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먹은 마음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사람은 화를 내기 때문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고 피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서 얻은 이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화를 내는 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악행을 하는 것이라서
고스란히 그 과보를 받아 사악도의 존재로 태어납니다.
과연 이것은 누가 만든 것이며 이로 인해 누가 고통을 받는 것입니까?
이것은 온전하게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탐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긴 번뇌이며,
일으킨 사람이 이것을 고스란히 받게 되어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성냄은 혐오에 뿌리를 둔 마음입니다.
혐오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혐오는 여러 가지의 층이 있습니다.
가벼운 혐오에서부터 중간 정도의 혐오와 거친 혐오가 있습니다.
분노는 아주 거친 혐오입니다.
우리가 거친 혐오는 쉽게 알 수 있지만 미세한 혐오는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작은 혐오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과정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제대로 알아차린다면 온통 혐오의 지뢰밭 속에서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혐오를 감당하지 못하고
좋아하고 화를 내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겪지 마십시오.
이것은 당신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 순간의 마음이고 그간에 가지고 있었던 축적된 성향의 마음일 뿐입니다.
이미 그것을 보았다면 그것을 본 당신의 마음은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악한 마음도 당신의 마음이 아니고
그렇다고 지혜를 얻은 마음도 당신의 마음이 아닙니다.
다만 흐르는 물처럼 흐르는 바람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마음들이 연속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에서도 당신은 자유를 얻어야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으로 양극화되어 있습니다.
어쩌다가 덤덤한 느낌이 있지만 이것은 무지의 느낌입니다.
이처럼 애증이 교차하는 속에서 좋아도 편치 못하고, 싫어도 편치 못한 삶을 삽니다.
좋으면 좋아서 편치 못하고, 싫으면 싫어서 편치 못하고, 덤덤하면 심심해서 편치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온통 불만족입니다.
좋아도 괴롭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싫어서 괴로운 것은 당연하지만 좋아도 괴롭다면 구조적으로
우리는 불만족 속에서 살아야하고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혐오의 마음은 탐욕을 가진 마음과 다릅니다.
탐욕은 마음이 대상을 좋아하는 것이고, 혐오는 마음이 대상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과 혐오는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붙어서 교차하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남을 좋아할 때는 탐욕을 가진 것이며, 남에게 화를 낼 때는 혐오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아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 많으므로 이것을 모두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또 두려운 대상에 대해서도 혐오가 일어납니다.
일반적으로 두려운 대상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두려움을 갖습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무슨 병이 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갑자기 사고가 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혹시 죽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이 없어질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명예 지위를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이처럼 두려움의 종류는 많고 그것들은 끊이지 않고 계속 됩니다.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두려움과 근심걱정을 없애려고 노력해도 없애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거기에 어떤 절대적인 힘을 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려움은 통찰지혜가 있어야만 소멸되는데
아직 통찰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혐오는 탐욕 때문에 일어납니다.
누구나 귀하게 여기는 것을 잃어버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한 사람이나 물건이라도 헤어지거나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느낍니다.
그래서 탐욕과 혐오와 슬픔이 한데 어울려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납니다.
슬픔은 혐오하는 마음이라서 바람직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슬픔을 겪는 일이 적어집니다.
이미 지나간 것을 슬퍼하는 것은 또 다른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는데 자신의 과거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탐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일에 대하여 슬픔을 갖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 시대에 우비리라는 왕비가 있었습니다.
왕비는 죽을 딸을 슬퍼하며 매일 묘지에 와서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부처님께서 이곳을 지나가시다가 왕비가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왕비를 불렀습니다.
“아! 사랑스러운 내 딸 지와야! 하고 숲속에서 흐느끼는 우비리 왕비여,
이리 와서 들어보시오.
이 묘지에서 모두가 같은 이름을 가진 지와라는 수많은 사랑스러운 딸들이 화장되었는데 ,
지금 그대는 어느 지와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왕비는 과거 몇 생애에서도 왕비로 태어나서
지와라는 딸을 낳아 똑 같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숲속에 와서 지와를 부르며 울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이 어느 때 태어나서 죽은 지와를 부르고 있는가 라고 물은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들의 슬픔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이것을 새로운 것인 줄 알지만
우리는 똑같은 것을 경험하고 똑같이 슬퍼하고 똑같이 비탄에 잠겨서 울부짖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똑 같이 되풀이 되는 삶 속에서 수많은 이별을 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슬픔과 비탄에 잠겨야 합니다.
과거에도 눈물을 흘렸고, 현재에도 눈물을 흘리고, 이렇게 미래에도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려서
과거나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슬픔과 비탄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은 사람으로 인해서 슬퍼할 때 사실은 죽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그 죽은 사람과 가지고 있었던 그 기억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탐욕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죽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는 이미 가야할 곳으로 간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잊지 못하고 슬퍼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탐욕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죽은 자 때문에 슬퍼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문제는 자기 가신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의 마음에 속지 마십시오.
수행자 여러분!
습관대로 살아온 삶을 바꾸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습관이라는 것이 진리라는 것도 확신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만나기도 어렵고, 진리를 가르쳐 주는 지도자를 만나기도 어렵고,
진리를 만났어도 그것을 실천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들은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경전에 근거한 진리를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방법으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는 어느 생에서나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법의 이익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차린 그 순간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수행자가 모든 것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차츰 혜안이 생겨서 법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혐오는 언제나 괴로운 느낌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혐오가 일어나면 갈애와 집착으로 발전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괴로운 느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혐오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혐오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서 들어온 감각대상 때문에 일어납니다.
추한 광경을 보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듣거나, 역한 냄새를 맡거나,
맛이 없는 음식을 먹거나, 피부로 닿는 괴로운 느낌을 느끼거나,
마음에 내키지 않는 생각을 하면 즉시 혐오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매우 사소한 것이라도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혐오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덥거나, 지나치게 추워도 혐오가 일어납니다.
모르는 사람과 가벼운 육체적인 스침에 대해서도
즉시 불쾌한 마음과 함께 혐오가 일어납니다.
사소한 남의 잘못에 대해서도 혐오를 일으키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충족시킵니다.
그래서 혐오는 단지 감각대상과 부딪쳐서 일어난 것이지만
이 배경에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자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혐오는 더욱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혐오는 일어날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일어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좋은 소리, 좋은 냄새, 좋은 맛, 좋은 부딪힘,
좋은 생각이 일어나면 혐오가 아닌 감각적 쾌감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부딪쳤을 때는 혐오가 아닌 감각적 쾌락을 느낄 것입니다.
지금까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접수된 좋은 대상은 기억을 해서 집착을 하고,
좋지 못한 대상은 기억을 해서 혐오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혐오는 아니지만
사실은 좋은 기억 때문에 좋지 않을 것을 혐오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즐거운 것만을 경험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더 이상 즐겁지 못하면 즉시 혐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혐오만 알아차릴 대상이 아니고
좋아하는 것도 함께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감사합니다.
129회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성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혐오는 법에 대한 무지 때문에도 일어납니다.
무지하면 좋은 것을 나쁘게 보고, 나쁜 것을 좋게 봅니다.
그래서 무지 앞에서는 무엇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같은 것도 마음가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무지와 지혜의 차이입니다.
무지는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몰라서 그랬는데, 그래 어쩔 거야!’ 라고 오히려 항의를 합니다.
모르는 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모르는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지는 양심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오히려 위세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혐오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함께 수행하는 도반이 있는데 한 사람은 계속해서 수행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중도에 포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포기를 한 사람이 수행을 계속하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한다면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이때 시기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지한지를 결코 모릅니다.
사실은 그래서 시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상대의 무지함을 누구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시기를 받는 사람은 그냥 상대의 일이라고 알고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로 인해 괴로움을 당할 때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상대에게 불쾌한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상대에게 화를 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는
이때 불쾌한 말이 상대의 불선업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이런 말을 듣는 이는 자신의 악업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바로 가슴으로 와서
그 비난으로 인해서 생긴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상대에게서 답을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문제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상대로 하여금 마음이 바뀌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 때문에 많은 날을 지새우면서 괴로움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그가 내게 화를 내고 나를 비난한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날들 동안 고통 속에서 그를 원망하며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게 화를 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당신이 내게 이런 비난을 했기 때문에
당신이 잘못했는데 나는 이런 고통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상대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반문합니다.
아니 당신이 나를 비난한 것을 모르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나를 가해한 상대는 잊어버려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자유로운데
당한 나는 그것을 기억하여 오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면 이것은 불공평한 일입니다.
바로 이 불공평을 조장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것은 상대가 아닙니다.
상대가 화를 낸 뒤에 그것을 받아들여서 내 기억 속에 저장하고 계속계속 생각한
자신의 잘못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잘못은 상대의 것으로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뜻하지 않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삽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무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알아차릴 수 있는 자신이고,
그래서 자신이 자신의 업으로 돌리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상대의 변화는 기대할 수없는 것이라면 내가 방관할 것이 아니고,
자신의 알아차림으로 해결해야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미덕일 뿐만 아니라
가장 이익이 큰 것이라서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할 덕목입니다.
상대적인 세상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일정 부분의 자신의 과보도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왜 그렇게 예뻐! 그래서 당신이 미워죽겠어!’라는 말을 들었다면
사실은 예쁜 것도 상대를 자극하는 하나의 과보입니다.
세상의 과보란 이런 것입니다.
예쁜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운 그의 마음은 그의 마음이지 내가 어찌하겠습니까?
이런 과보는 어떤 것이 되었거나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현재 나타난 대상을 알아차리면
불선 과보에 대하여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적어집니다.
내가 잘나고 상대가 못난 것이나, 내가 못나고 상대가 잘난 것이나
이것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런 과보가 모두 적용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는 과보 속에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할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성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어떤 형태로든, 그것이 옳거나 옳지 않거나 간에
상대가 자신에게 한 비난을 내가 일으킨 선하지 못한 과보로 인해서 일어난 것으로
수용해야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이 과보심으로 인해서 새로운 선하지 못한 과보심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상대의 비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상대의 불선 과보심에
자신의 불선 과보심이 일어나 끝없이 주고 받아야합니다.
바로 우리가 윤회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주고받는 것들이 연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악순환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이 알아차려서
스스로 혐오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좋고 상대도 좋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이고 그 자신의 알아차림밖에 없습니다.
성냄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중에서
항상 함께 일어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이 아니고,
다양하게 결합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선하지 못할 때는 어느 때나 항상 함께 있는 마음의 작용은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 4가지입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이 나타날 때 항상 있는 마음의 작용이 아니고
때때로 나타나는 마음의 작용이 바로 성냄입니다.
성냄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선심을 가졌다고 해서 항상 화를 내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화를 낼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만 화를 냅니다.
바로 이것이 기회입니다.
어리석음은 항상 있어서 어찌할 수 없지만
성냄은 알아차림에 의해서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차려서 화를 내지 않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화를 낼 때는 두드러지게 성냄과 함께 질투와, 인색과, 후회가 함께 있습니다.
먼저 성냄과 함께 있는 질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질투는 성냄과 함께 일어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질투는 남이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된 것을 나누어 갖지 않는 행위입니다.
질투는 남의 성공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남의 성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질투는 대부분 인색함과 함께 일어납니다.
질투가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림으로써 나와 남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남을 배려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면 오직 자신만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질투심이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자기에게 질투심이 있다는 것을 알기도 하는데
자신이 추악하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보고도 보지 못한 척 하기 때문에
철저한 자성이 없어서 다음에도 계속해서 똑같은 질투를 해야 합니다.
질투심은 나의 질투심이 아닙니다.
그 순간 조건에 의해 일어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질투심이 일어났을 때 질투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가슴에 가서 느낌을 지켜봐야 합니다.
질투는 나와 남을 비교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남의 좋은 점을 칭찬해주면 자신이 칭찬을 받습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면 자신의 허물이 드러납니다.
남의 성공을 시기하면 자신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남을 혐오하면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과 남을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라는 말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자신과 남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오랜 동안 질투하면서 살아온 습관을 개선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에 성냄과 함께 있는 인색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인색도 성냄과 함께 일어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인색한 것에 탐욕과 이기심과 질투하는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대체로 마음은 하나만 일어나지 않고 여러 가지의 마음이 결합하여 일어납니다.
그래서 선하지 못한 마음을 알아차리면 여러 가지의 마음이 함께 소멸합니다.
인색한 마음이 있으면 무엇이나 남과 나누어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은 자신에게만 있어야 하고 남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인색한 마음은 풍요하지 못하고 삭막하기 때문에 고독하게 살아야 합니다.
남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혼자만 소유하려는 마음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재물이 많다고 해도 그는 부자가 아닙니다.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재물은 이미 재물이 아닙니다.
이처럼 재물이 아닌 것을 재물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인색한 마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숨깁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드러나면 남에게 빼앗길까봐서 오히려 없는 척합니다.
질투가 남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라면
인색은 오히려 자신의 성공을 숨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인색한 사람은 위축된 채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진 것은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색한 마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사용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남도 사용하지 못하고 자신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색한 마음의 실재입니다.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온갖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것은 더 큰 불선행에 속합니다.
인색하면 남에게 베풀어도 이익을 위해서
베푸는 조건이 붙어있다면 이것은 베풀어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라는 것이 있는 공덕행은 그 공덕행의 의미가 반감됩니다.
바라지 않고 했으면 완전한 공덕이 될 것인데
바라면서 했기 때문에 공덕의 과보가 줄어듭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입니다.
남에게 베풀어도 자신에게 베풀지 않으면 인색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베풀어도 남에게 베풀지 않으면 인색한 것입니다.
인색한 사람은 인색한 것을 좋아하면서 살기 때문에 살아서도 굶주리는 아귀로 삽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굶주리는 아귀로 태어납니다.
아귀는 항상 굶주림 속에서 살며,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채로 삽니다.
그리고 먹으면 토합니다.
이런 사람은 과거에도 아귀였으며 현재에도 아귀의 마음이고
미래에도 아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누가 결정합니까?
부처님께서 결정합니까?
아라한이 결정합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인색하다면 그것이 아귀의 마음이라고 알아야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30회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성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애로우면 인색하지 않고 인색하면 자애롭지 못합니다.
나누어 갖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성공을 숨기는 마음은
결코 선한 이들의 표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항상 스스로를 움츠리게 하여
스스로를 속박하기 때문에 쓰디쓰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색한 마음이 일어나면 즉시 인색한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가슴으로 와서 인색한 마음이 남긴 느낌을 주시해야 합니다.
이때 인색한 마음을 없애려고 해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단지 계속해서 인색한 마음이 있는지 알아차리면
이것이 삭막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언젠가 스스로 풍요로운 자애를 찾아서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냄과 함께 있는 후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후회는 성냄과 함께 일어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후회는 선하지 못한 행위를 했거나,
선한 행위를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일 때
성내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후회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이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것에 대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걱정을 하고, 안절부절 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 상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후회는 뉘우치고 한탄한다는 뜻으로 회한(悔恨)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후회는 항상 들뜸과 함께 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후회를 3가지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첫째, 마음의 작용 52가지 중에서 선하지 않은 마음의 작용을 말할 때
성냄과 함께 있는 후회입니다. 이때의 후회가 바로 불선업입니다.
논장에서 말하는 후회는 들뜸과 함께 있는 첫 번째 후회를 말합니다.
둘째, 점잖지 못한 행동을 하여 계면 적어 하는 후회입니다.
무심히 한 사소한 행동으로 인하여 얼굴을 붉힐 때 이때 후회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불선업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셋째, 계율에 입각해서 선업인지 불선업인지 잘 구분할 수 없는
애매한 행위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입니다.
이때의 후회도 불선업에 속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후회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이러한 후회는 해탈을 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후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후회를 하지 말고 후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과를 성취하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후회는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탐욕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후회는 성내는 마음과 함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후회를 불선행이라고 합니다.
후회는 참회와는 다릅니다.
이루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것과 자기가 한 행위를 겸허하게 참회하는 것은 다릅니다.
참회는 믿음과 알아차림과 양심과 수치심과 탐욕 없음과 성냄 없음과
중립적인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서 선행에 속하지만
이것도 반대가 되는 후회는 불선행에 속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미 지난 일을 한탄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합니다.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미래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수행자는 언제나 현재의 것을 알아차려야합니다.
과오를 저지르고 그것을 혐오한다고 해서 과거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후회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가슴으로 가서
후회한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느낌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수행입니다.
그러고도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려우면 진심으로 참회하면 됩니다.
그런 뒤에 알아차릴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여 몸과 마음을 지켜보고 고요함을 얻어야 합니다.
과거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이미 형성되었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새로운 업을 생성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사실 후회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참회입니다.
그러므로 참회하기 위해서 달리 방편을 쓸 것이 없습니다.
후회하고 있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진정한 참회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후회하고 살았지만 개선된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후회하고도 또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후회에 대한 효용성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거나,
한 것을 한탄하는 것은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라서
실효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은 생각입니다.
단 한순간이라고 진실한 알아차림이 있으면
지혜가 나서 사물의 성품을 꿰뚫어 보기 때문에 조금씩 개선될 여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이익입니다.
후회를 한 뒤에 다시 후회하는 행위를 거듭하기 때문에
후회하는 것을 노예근성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참회는 잘못한 것을 뉘우치지만
불선업의 후회는 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냄은 2가지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 괴로운 느낌에 따라 분노와 함께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후회입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후회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찾아온 손님입니다.
이런 후회는 습관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런 후회가 일어날 때 후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자신의 축적된 성향을 알아야 합니다.
축적된 성향은 바꿀 수가 없으므로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둘째, 괴로운 느낌에 따라 분노와 함께 유발되어 일어나는 후회입니다.
이 후회는 내부의 자발적인 후회가 아니고 외부로부터 오는 일로 인해서 유발된 후회입니다.
이런 후회는 외부로부터 찾아온 손님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서 생긴 문제로 인해 후회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입속에 도끼가 생겨난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쁜 말로 자신을 찍는다.
비난받아야할 사람을 칭찬하고, 칭찬받아야할 사람을 비난하는 자는
자기 입으로 악업을 쌓는다.
그렇게 불선업을 저지르는 자에게는 복이 없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은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번뇌에서 벗어나야 행복한 것이며 그렇게 살기 위해서 계율을 지키고
고요함을 얻어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혜의 과정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화를 내는 것으로 지혜를 측정하기도 합니다.
누가 화를 낸다면 이는 탐욕으로 인한 것이며,
이러한 탐욕은 어리석음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내는 것은 지혜를 측정하는 잣대라고 아셔야 하겠습니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나를 욕하고 나를 해쳤으며,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고
이와 같은 생각에 끈질기게 매달리는 자는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다.
저 사람은 나를 욕하고 나를 해쳤으며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고
이와 같은 생각에 끈질기게 매달리는 자는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다.
어느 때나 분노의 감정은 분노로서 가라앉지 않고
분노를 하지 않음으로써 가라앉으니 이것이 만고의 교훈이다.”
그렇습니다.
성냄과 혐오는 단계적으로 제거됩니다.
알아차린다고 해서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습니다.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리고,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에는 화가 소멸됩니다.
그러나 오래 동안 습관적으로 행해온 화가 알아차린다고 해서 완전하게 소멸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먼저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해야합니다.
그렇다고 수다원에서 성냄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수다원의 도과에 이른 수행자도 괴로운 느낌으로 인해서 화를 냅니다.
그러나 화를 낸 뒤에 알아차려서 맨 느낌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수다원이 되면 범부가 내는 화보다도 약하며
화를 냈다가도 즉시 맨 느낌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수다원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납니다.
다음으로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해도 역시 화를 냅니다.
그러나 수다원의 화보다도 약합니다.
사다함은 수다원의 도와 과의 지혜보다 깊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를 좀 더 자세하게 보아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 적습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것도 약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낸 뒤에도 맨 느낌으로 돌아오는 시간과 횟수가 빠릅니다.
그래서 사다함도 인간으로 한 번 더 태어나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납니다.
다음으로 아나함이 되면 성냄과 혐오가 완전하게 제거 되어
더 이상 잠재적인 성냄과 혐오의 성향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세한 것이 남아있어서 천상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그곳에서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합니다.
천상에서는 행복만 있고 불행이 없기 때문에 수행을 할 수가 없지만
유일하게 정거천에서만 아나함이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거천의 수명도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야 합니다.
정거천은 네 곳이 있는데 그곳의 수명은 각각 천 대겁으로부터 만 육천 대겁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아나함이 최선은 아닙니다.
금생에 아라한이 되어서 즉시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해탈의 자유를 얻는 것이 누구에게나 지상과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가 완전하게 소멸되어
오직 원인과 결과가 없는 무인작용심으로 살기 때문에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최고의 지혜를 얻은 것조차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걸림이 없습니다.
이 단계가 위빠사나 수행자가 이르고자 하는 최고의 단계이며 마지막 과정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은 계셔도 부처님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는 자라는 말인데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부처는 자기 자신이 얻은 지혜 속에도 빠져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은, 우리가 아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서 탐욕을 갖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까지 성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냄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남에게 화를 내는 것 대신에
더 많은 자애와 연민을 갖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먼저 낮은 단계의 번뇌를 제거해야 합니다.
성냄의 정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아야 하며,
이러한 성냄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수행자여러분들은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려서
가장 천박한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지고의 행복인 자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스스로가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화가 났을 때 알아차리는 수행 방법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하나,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립니다.
둘,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셋, 화가 난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립니다.
넷, 화가 난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느낌을 가슴에서 알아차립니다.
이때 반드시 가슴의 느낌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만약 머리의 느낌이 강하다면 가슴이 아닌 머리에서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화가 난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몸의 어느 곳에 일어난 느낌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다섯, 거친 느낌, 중간 느낌, 미세한 느낌을 알아차린 뒤에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여섯째 이렇게 느낌이 사라지고 느낌이 사라진 뒤에 호흡이 있고
만약 그 호흡이 사라졌다면 다음에는 가슴에 있는 미세한 맥박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해서 화가 났을 때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리고
반드시 화가 난 마음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지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가슴의 느낌을 주시하면
점진적으로 화가 약화되며 온전한 고요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이런 수행을 통해서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성냄에 대하여>는 예전에 올린 적이 있지만 스마트폰에서 재생되지 않는 파일이어서 삭제했습니다.
몇몇 스마트폰에서 들을 수 없는 파일들은 지우고 다시 만들어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