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기괴한 용모의 달마대사!
그에 의해 禪이 시작 되었으므로 달마는 선의 첫 스승 즉 초조가 된다.
달마대사로 부터 의발을 물려받아 선의 두번째 스승이 된 혜가스님은 어릴적 이름이 광이었다. 그런 이름을 얻게 된것은 그의 부친이 아들을 얻고자 기도를 올리던 중 이상한 빛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뒤에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그를 낳았기 때문이다.
광은 어려서 부터 수많은 책을 읽던중 우연히 불경을 접하고는 크게 깨닫게 되었다. 그후 집을 떠나 승려가 되어 열심히 불경을 연구하였다. 그러다가 나이 마흔살 무렵에 길에서 우연히 한 神人을 만난다. 그일이 있은 다음날 광은 이상하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황급히 그의 스승이 달려와 치료를 하는데 허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광의 머리에서 다섯 봉우리가 솟아 오르고 있었는데 이에 스승은 신인의 말대로 광을 남쪽 숭산으로 보냈고 광은 신인과의 만남을 생각하여 이름을 신광으로 바꾸고 남쪽으로 떠나 마침내 달마대사를 만나 한쪽팔을 자르고 그의 제자가 된것이다.
그뒤 달마로부터 법을 전수받아 2조가된 혜가스님은 널리 불법을 폈다. 어느날 중년의 사내가 와서 넙죽 절을 올리며 애기하기를
"문둥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니 저의 죄를 참회시켜 주옵소서"
혜가스님이 말하기를
"네가 죄를 참회하겠다니 그 죄를 꺼내 보아라. 그리하면 내 참회시켜 주마"
"찾아보아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죄는 다 참회 했느니라"
혜가 스님은 곧 그를 출가시켜 제자로 삼으니 그가 선의 3조인 승찬대사이다. 문둥병 때문에 머리털이 없어 붉은선사로 불린 승찬스님, 승찬스님은 '신심명'이란 저서를 남겼다.
그후 승찬스님은 4조 도신스님에게 의발을 전하였고 나부산과 서주 산곡사에서 설법을 계속하다가 법회 하던중에 큰 나무밑에서 합장한채로 임종하니 그때가 수양제 2년이었다.
도신스님은 5조 홍인스님에게 의발을 전하였는데 어느날. 도신스님은 황매산 근처를 지나다가 지나가던 어떤 소년을 보고 물은일이 있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년이 말하기를
"제 이름 말입니까 굳이 말하자면 佛性 이라고나 할까요?"
도신스님은 그 소년을 데려다가 승려로 만들고 법을 이으니 그가 5조 홍인대사로서 이 홍인대사의 제자인 6조 혜능의 대에 이르러 선은 바야흐로 중국에서 뿌리를 내려 선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일심으로 집중하면 세상 이치 통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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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이 벽화는 선종의 창시자인 제6대 조사 혜능대사의 행자시절 방아 찧는 일화를 통해 불자들에게 일념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진은 제석사 제석당 뒤면 벽화. |
6조 혜능대사
육조(六祖) 혜능 대사(638~713)는 당 태종 12년 중국 남부지방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홀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혜능은 어느날 스님이 외우는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문득 마음이 환히 밝아지는 종교적 체험을 얻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응당 머무르지 말고 마음을 낼지어다)
혜능은 그 스님의 도움을 받아 노모를 마을 사람들에게 의탁하고 선의 다섯번째 스승인 황매산의 홍인대사를 뵙기 위해 길을 떠났다. 홍인대사는 혜능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출신배경을 따졌는데
"남방의 오랑캐가 어찌 감히 불법을 배우겠느냐 돌아가거라"
혜능이 말하기를
"사람에게야 남북이 있겠지만 깨달음의 성품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혜능은 당시 북방사람들이 무시하던 남방출신에다 일자 무식꾼이었기 때문에 지식층인 다른 제자들이 그를 시기 할것을 우려한 홍인대사는
"여기 머물고 싶거든 가서 방아 찧는일이나 하거라"
그렇게 몆달이 지나는동안 혜능의 경지는 더욱 깊어졌다.
'도는 법당에만 있는게 아니다 일하고 움직이는 가운데 있는것이다'
하며 어느날 홍인대사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중대 발표를 하였다.
"너희는 돌아가서 각자 깨달음의 경지를 읊은 게송을 한편씩 지어 오너라.
가장 뛰어난 자를 골라 여섯번째 스승으로 삼아 법을 물려주리라"
당시 자타가 인정하는 탁월한 제자는 신수스님으로 다른 제자들은 여섯번째 스승의 자리는 당연히 신수스님 차지라 생각하여 아예 게송을 짓는걸 포기한 스님이 많았다. 마침내 신수스님은 고뇌끝에 게송을 지었는데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늘 부지런히 털고 닦아
때 묻지 않게 하리라'
그러나 홍인스님은 그 게송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 혜능은 여전히 방아만 찧고 있었는데 뒤늦게 사실을 알아차린 혜능은 게송이 붙어있는곳으로 달려갔다. 글을 모르는 혜능은 그곳에 있던 관리에게 간청했다.
"나는 글을 모르니 이 게송을 좀 읽어 주십시요"
그 관리가 게송을 말하자 혜능은
"저도 한편 짓고 싶은데 글을 모르니 대신 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허~어 건방진 행자놈이로군 스님들도 가만히 있는데 어디 나서는가"
"위 없는 깨달음을 배우는 사람들이 어찌 초행자에게 그렇게 말하십니까? 남을 업신여김은 곧 죄가 됨을 모르십니까?"
"어이구 미안하이"
그리고 나서 그 관리가 대필을 하였는데
'깨달음엔 나무가 없고
거울또한 대(臺)가 아니로다
깨달아 텅 빈 큰 마음 허공같아
본래 한 물건도 그 안에
얼씬거리지 못하는 법
어느곳에 티끌이 일어나리오'
[보제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이 게송을 본 스님들은 감탄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나타난 홍인대사는 누가 그를 해칠까 염려해서 글을 지워 버렸다.
그 후, 홍인대사는 남의 눈을 피해 방아를 찧는 혜능을 찾아갔다.
홍인대사가 “쌀은 다 찧었느냐(공부는 다 되었는가)”라고 묻자
혜능은 “쌀은 다 찧었는데 아직 키질을 못했습니다(공부는 다 되었으나 아직 인가(印可)를 못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홍인대사는 지팡이로 방아 머리를 세 번 치더니 뒷짐을 지고 묵묵히 돌아갔다.
지팡이를 세 번 친 것은 삼경(三更)을 뜻하는 것이고, 뒷짐을 지고 간 것은 뒷문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혜능은 그 날 밤 삼경에 조실 방으로 갔다. 그곳에는 병풍이 둘러져 있었는데 혜능은 그 병풍 뒤에 앉아 오조(五祖) 홍인대사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았다.
그런뒤 한밤중에 남몰래 혜능을 불러 금강경을 강설해 주었다. 혜능은 그때 큰 깨달음을 얻어 홍인대사로부터 의발을 전해받고 여섯번째 스승이 되었다. 그후 스승의 권유에 따라 양자강 남쪽으로 가서 15년간 숨어지낸 혜능은 나이 마흔에 가까운때에 광주지방 법성사에 나타나서 고승인 인종스님과 담론 하였다. 혜능과 대화한뒤 인종스님은 크게 감탄하여
"행자의 경전해설이 순금이라면 나의 강의는 깨진 기왓장과 같습니다"
감동한 인종스님은 혜능의 머리를 깍아 승려로 만든뒤 스스로 제자가 되었다. 다음해인 677년 조계 지방으로 가서 보림사라는 절을 세웠고 평생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때까지 중국불교는 주로 학문불교 내지는 신앙불교였는데 혜능대사는 불교의 근본원리인 깨달음만을 강조할뿐 다른것은 중시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신수스님의 점오사상에 반해 혜능스님은 한순간에 깨달아 부처가 되는 돈오사상을 설했다. 즉 혜능스님은 대승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최상승인만을 상대 했던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후대의 선사들에게도 이어졌다. 따라서 선의 세계에서는 대승인은 커녕 소승인에도 못 미치는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또한 깨달음을 위해서는 부처님과 경전까지도 버리므로 정통 불교인들에게 이단으로 비쳐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종은 불교의 깨달음에 본질을 둔데다가 중국인의 기질과 딱 맞아 떨어졌으므로 삽시간에 중국불교의 중심을 차지 하였고 그 힘은 한국과 일본까지 전파되었다.
혜능대사의 가르침은 (법보단경) 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크게 존중되고 있는데 중국인이 지은 불교서적중 경이라 불리는것은 오직 이 한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