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롱이 그가 궁금하다. 자전해설과 함께 만나본다.
※ 이 글은 박영롱 아마와의 대화를 통한 취재를 바탕으로 기자가 일인칭 시점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박영롱 아마가 직접 쓴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최철한 9단을 이기다
‘내 앞에,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최철한 사범님이 있었다. 기보로만 만나던, 랭킹3위의 최철한 9단이다. 4월 2일 열린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 예선2회전에서였다.
저울로 달아본다면 부담감은 최 사범님에게 더 클 터였다. 난 어차피 입단점수제로 입단한다는 계획은 진작에 접었다. 점수를 쌓아 특별입단을 하려면 5점이 필요한데, 이 시점까지 얻은 점수는 세계기전인 비씨카드배에서 획득한 1점뿐이었다.
명인전에서는 예선결승에 진출하면 1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려면 프로기사 3명을 넘어야 했다.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성공한다 해도 비로소 2점이다. 오픈기전에서 꾸준히 아마 대표로 선발되어 점수를 누적시키면 된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말이 쉽지, 연구생 혹은 연구생 출신 강자들이 대거 출전하는 선발전은 그 자체가 입단전이나 다름없는 지옥의 승부다. 결국 점수 누적을 통해 입단을 한다는 건 먼 나라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올해 명인전과 olleh kt배에서 아마 대표로 선발된 건 무척 행운이었다. 두 국내기전은 다 아마추어가 참가할 수 있는 오픈전 형식을 택하고 있다. 2008년에 봄에 연구생을 나오고 나서 여러 아마추어 대회에도 출전해 보았지만 만족할 성적을 거둔 적은 없었다. 목표는 오직 입단이니까 그런 건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애써 저으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승부에 미련은 갖지 말자. 최철한 9단과 같은 대 기사와 대국한다는 자체가 좋은 기회다.’
선발전은 며칠 전에 치러졌다. 선발이 확정된 사람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3층으로 올라와 자신의 마지막 대국 기보를 저장하고 필요한 정보도 기재해 놓고 가라고 한국기원 관계자가 알려줬다.
3층에는 기자 한 명이 취재를 와 있었는데, “선발된 아마추어 대표 중 한 명은 예선 2회전’에서 최철한 9단을 만날 가능성이 크네요?”라고 말했다. 대진표에는 영문 소문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자신이 올라온 조의 표식이었다. 그것은 프로기사들의 이름이 즐비한 대진표 곳곳에 흩어져 박혀 있었다. 아마추어끼리 맞붙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그게 바로 저에요.”
라고 나는 명랑하게 그 기자에게 말했다. 그 기자는 살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진 운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짐짓 이렇게 물어보기에, “그냥 별 느낌은 없네요”라고 대답했다.
마음이 가볍단 뜻은 아니었다. 단지 점수를 쌓아 특별 입단하는 것은 아주 먼 이야기이기 때문이었고 또, 프로기사는 누구라도 쉽게 이길 순 없다는 것도 이유였다. 그편이 좀더 솔직한 생각이었다.
점수제에 미련을 버리고 난 후부터는 오히려 조금은 상황을 즐길 수 있게 된 듯했다. 지느냐 이기느냐에 의미를 두는 대신 프로기사들과 대국하는 값진 공부를 하게 된 데 의미를 두게 됐다.
그렇게 보면 최 사범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최 9단과 같은 정상급 기사에게 지도기 받는 것은 쉽지 않다. 또 지도비도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기쁜 마음마저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들어 최 사범님을 잠시 바라봤다. 그 모습은 무척 조용하였다. 미동도 없었다. 잠깐 얼굴을 보고 있으니 위압감(요즘엔 ‘포스’라고도 하던가…)이 들어 바둑판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몇 수가 놓였다. 나도 프로가 되려고 공부해 온 만큼 훤한 변화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최 사범님이 놓는 한 수 한 수에 숨이 막혀온다. 이래서야 바둑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질 것 같다. 정신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애초, 내려놓은 마음이었다. 독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지독하게 전투를 잘하는 최 사범님이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피할 생각이 없었다. 지는 것을 그리 아파하지 않기로 각오를 다져놓은 데다 소문난 최 사범님의 전투력이 궁금하기도 하였다.
한데, 좀처럼 반상은 평이한 흐름을 벗어날 줄을 모른다. 전투 같은 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잔뜩 각오를 했던 탓인지 괜히 싱거운 기분도 들었다.
1보(1~39)
최 사범님의 흑35의 마늘모 행마는 배워둘 만한 수였다. 좌변 흑의 뒷맛을 완화하는 동시에 좌상귀 백도 위협한다. 35로 인해 좌상귀에는 흑이 들어가 사는 맛이 생겼다. 가령 백이 손빼면(백1…손뺌) 흑2로 들여다보는 데부터 10까지의 수순으로 깨끗하게 산다. 반대로 백은 근거를 잃게 된다.
2보(40~50)
백40 때 최 사범님은 41로 어깨짚어 왔다. 나라면 평범하게 46 자리에 한칸 뛰어 지켰을 것이다. 42엔 43으로 젖혔다. 최 사범님다운 격렬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다소 무리가 아니었을까. 백44로 끊어가자 45ㆍ47로 단수쳤지만 백48로 끊어 백이 빵따냄을 얻어 냈다. 명백히 백이 득점을 올렸다.
3보(51~81)
게다가 우하 방면 흑은 뒷맛도 나빴다. 나는 패를 만들 수 있었고 우하를 그대로 흑에게 양보하는 대가로 상변 흑진을 두 동강 냈다. 내가 작은 우세를 잡았다. 흑 석점을 잡는 정도로 적당히 물러서면서 판을 정리했더라면 승리에 쉽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78로 판을 어렵게 만들었는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
4보(82~131)
좌상 방면에서 중앙으로 뻗어 나온 접전에서 백116의 빵따냄을 얻었다. 중앙 빵따냄 두 번을 얻어서는 백의 우세가 확실한 국면이었다. 그러나 120으로 바로 넘어간 것은 만심의 일착이었다.
나중에서야 130으로 끊으니 흑은 석점을 가볍게 보고 131에 두었다. 이래선 애써 쌓은 우세도 빛이 바래고 말았다. 실전 120으로 넘어간 수로는 백1로 먼저 끊어야 하였다. 흑이 6까지 도망쳐 나올 때 7로 넘어가면 된다. 흑은 예정대로 8에 붙여 좌측 백을 공격하겠지만 흑16까지 백과 흑이 각생하고 나면 도로 백에게 선수가 돌아온다. 그때 백17로 두었으면 확실했다.
5보(132~145)
그러나 흑은 끊임 없이 추격해 왔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 차례 나의 범실이 있었다. 그건 최 사범님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흑43에 들여다보아 백44의 응수를 허용한 것이 그랬다. 괜한 교환으로 하변의 백을 단단하게 해주었다. 중앙에는 마이너스였다. 작은 실수지만 이런 게 쌓이면 미세한 국면에서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6보(146~271)
내가 바둑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은 후반이다. 수읽기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지만 형세판단은 더 보완해야 한다고 느낀다.
이 바둑은 정밀함을 다투는 끝내기 승부로 치달았다. 나중에 돌아보니 갖가지 변수가 있었지만, 결국 내가 반집승을 거뒀다.
믿기지 않았다. 내가 이긴 것이었다. 한국기원 관계자들이나 승패를 기록하는 아르바이트 생도 짐짓 놀라는 눈치였다. 내 손을 들여다 보았다. 가장 볼을 꼬집어 보고 싶은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또 놀라운 것은 최 사범님의 태도였다. 종국 후 최 사범님은 태연하게 나와 복기를 진행했다. 도련 도련 승부처에 관한 생각을 이야기 했다. 표정만으로는 알 수 없는지도 몰랐지만 당황하는 기색 같은 건 없었다.
내가 반대입장이었다면 복기까지는 못했을 것 같다. 벌떡 일어나 복기 없이 나가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다 해도 비난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최 사범님은 대국 내내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승부처에서는 움직이는 템포가 달랐다. 도발을 이끌어 내는 감각도 무언가 생각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패하고 나서도 마음을 다스렸다.
‘대가란 이렇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 나로선 진짜 공부가 된 셈이었다. 그리고 자신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날 잠이 잘 오질 않았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