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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야사 3-홍길동은 실존 인물이었다
『홍길동전』은 허균이 지은 최초의 한글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드물지만 소설의 주인공 홍길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신출 귀몰하는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 ‘홍길동’이란 답이 바로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홍길동을 만화 영화의 주인공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홍길동은 과연 허균의 상상력이 그려 낸 소설 속의 주인공이기만 할까? 소설 속의 홍길동은 15세기 초 세종 시대의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는 이조 판서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는데 사회적 차별이 심한 자신의 출신에 대해 고민하던 가운데, 홍판서의 본처와 첩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가출해서 도적의 수령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활빈당으로 조직해 부당하게 빼앗긴 재물을 되찾아 백성들에게 나눠 주는 의적으로 활동한다. 홍길동은 둔갑술을 부려 신출귀몰하는 행각을 벌이는데 암행 어사로 위장해 탐관 오리들을 처벌하는가 하면 관아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는 끝내 체포되지만 왕은 그에게 병조 판서직과 쌀 1천 섬을 내리고 석방한다. 홍길동은 남쪽 저도라는 섬에 근거지를 두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요괴를 물리쳤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마침내 율도국을 공략해 율도국의 왕이 되었다. 이처럼 소설 속의 홍길동은 도저히 현실 속의 인간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능력과 경력이 과장되어 있다. 그리고 소설의 곳곳에는 허균의 경험과 사상이 녹아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허균 자신이 서자 출신은 아니지만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서얼 차별을 폐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왕과 대신들의 미움을 살 정도였다. 또한 이러한 그의 생각은 홍길동의 출신 배경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청년 시절 임진 왜란을 겪은 허균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홍길동이 율도국을 공략해 국왕이 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실존 인물이 있었으며, 그의 행각이 소설 주인공의 그것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다. 연산군 시대인 1490년 12월 29일의 『조선 왕조 실록』을 보자. 의금부의 위관 한치형이 왕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고 한다. 강도 홍길동이 갓 꼭대기에 옥으로 만들어 단 장식을 하고 붉은 허리띠 차림으로 첨지(중추원의 정3품)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공서에 드나들면서 꺼림 없이 행동을 자행했는데도, 그 지방 말단 관리들이 어찌 이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체포해 고발하지 아니했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관리들을 모두 변방으로 유배 보내는 것이 어떠하리까. 또한 중종 18년(1524) 8월 29일의 「중종 실록」에는, 충청도 지역에서 홍길동 토벌 작전의 여파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많아 세금을 예전처럼 거두기 어렵다는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충청도 공주 땅에는 홍길동의 무리들이 쌓았다는 산성이 남아 있고, 이 지역에선 홍길동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많은 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17세기 초반 허균이 쓴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홍길동의 모델은 16세기 초반의 실존 인물 홍길동인 것이 분명하다. 홍명희의 『임꺽정』이나 황석영의 『장길산』이 그러하듯이, 실존하는 인물과 그의 활동에 작가의 역사관과 철학 그리고 문학적 상상력이 덧붙여진 것일 뿐이다. 『홍길동전』을 쓴 풍운아 허균이 능지 처참당한 이유 조선 시대를 통틀어 허균만큼 파란 만장한 생애를 살고 간 인물은 찾기 힘들다. 그리고 허균의 성격만큼 복잡한 경우를 달리 찾기도 힘들다. 그는 일곱 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났으면서도 ‘거사’를 위해 계획적으로 고위직까지 진출한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세상을 뒤엎는 혁명 소설을 쓰면서 자신이 직접 ‘혁명’을 계획하고 실천한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혁명가’였다. 그 결과 자신이 쓴 소설 『홍길동전』은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었지만 정작 작가의 최후는 비극으로 끝났다. 광해군 10년(1618) 8월 반역의 주모자로 몰린 허균은 두 팔과 두 다리, 머리와 몸통이 6개 조각으로 찢기는 능지 처참을 당한 것이다. 일곱 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난 앞뒤 사정을 살펴보면 허균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1589년 누이 허난설헌이 죽은 슬픔을 딛고 생원 시험에 합격한 허균은 임진 왜란이 끝나고 질서가 회복되면서 실시된 1594년의 과거 시험에서 을과(두 번째 등급)로 급제했다. 평소 자유 분방한 행동으로 방탕자라는 비난을 받아 온 탓으로 관직 임용이 늦어졌다. 그런데 형의 도움으로 1597년 황해도 도사(종5품 벼슬, 오늘날의 부도지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허균은 서울의 기생들을 임지로 데려가 별장을 짓고 데리고 놀았다는 이유로 곧 파면되었다. 해직되어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인 1598년 보란 듯이 문과 중시(문과 급제자들을 대상으로 10년마다 시행하던 시험)에 장원 급제해 조정의 중요 문서를 다루는 관리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일 년도 못 가 방탕한 생활로 다시 해직되었다. 1601년 다시 복직되었으나 2년만에 양반의 품위를 손상한 자로 탄핵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 예조 판서가 된 형의 도움으로 1604년 다시 복직되어 황해도 수안 군수와 성균관 전적(교관)을 거쳤다. 1607년 삼척 부사(요즘의 시장)로 있다가 불교에 심취해, 관청 안에서 염주를 목에 걸고 일하는가 하면 걸승 흉내를 내기도 해 유교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이유로 다시 쫓겨났다. 네 번째 해직된 그는 1608년에 공주 부사로 복직되었는데 임지에 가자마자 탄핵을 받아 함경도로 유배되고 말았다. 1610년에는 시험 감독관으로 있으면서 친구와 친척들을 우선 합격시키는 부정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섯 번째 해직을 당했다. 1612년 12월 일본의 정세를 조사하는 왜정 진주사(倭情陳奏使)가 된 허균은 바로 다음 날 역모 혐의가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해직되었다. 이처럼 여러 번의 해직을 낳은 허균의 관직 생활은 평소 서얼 차별 같은 신분 제도의 모순에 불만을 품은 그의 자유 분방한 행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균이 방탕한 생활로 불만을 표현했던 것만은 아니다. 서출에게도 관직 임용의 길을 열어 달라는 상소를 제출해 조정의 미움을 사기도 했으며,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여섯 명의 서출 출신들과 강원도 산 속으로 들어가 죽림 칠현을 본떠 강변 칠우(江邊七友)라 자처하기도 했다. 그의 일곱 번째 해직은 역모 혐의로 인한 것이었는데 일을 함께 꾸민 자들이 입을 다물어 처벌은 면했으나, 전라도 태인에서 거의 감금과 같은 격리 생활을 했다. 1613년 마지막으로 복직된 허균은 전과 달리 트집 잡힐 일을 피하면서 현실적인 처세를 하는 한편 남몰래 혁명을 준비해 갔다. 1617년 12월 정책 입안의 총책임자인 좌참찬 자리까지 오르며 왕의 신임을 받던 허균은 자신이 1612년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누설되자 거사를 앞당기기로 했다. 무력으로 왕궁을 점거해 권좌에 있던 양반 귀족들을 몰살시킨다는 계획 아래,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해 밤에 남산에 올라가 “외적이 침입했으니 서울을 버리고 피난 가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불심 검문에 걸린 부하 현응민이 고문에 못 이겨 궐기 계획을 자백하는 바람에 허균 또한 체포당했다. 1618년 8월 광해군이 직접 인정전에 나아가 허균 일당을 심문했다. 그러나 허균의 차례가 되자 그의 입에서 당파 싸움 과정의 음모와 비리가 터져 나올 것을 두려워한 대신들이 왕을 만류했다. 왕이 “사형을 속히 해야 마땅하겠지만 물어야 할 것을 물어 본 뒤에 사형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했으나, 대신들은 “도당들이 모두 승복했으니 달리 물어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며 만류했다. 왕이 거듭 “오늘 사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심문한 뒤에 사형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말했으나 대신들의 만류는 거세었다. 이 날의 일을 다룬 『조선 왕조 실록』은 “왕이 끝내 군신들의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몸소 국문하는 과정을 목격한 사관은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의 「광해군 일기」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때에 이이첨과 한찬남의 무리들은 허균이 사실대로 말하면 그들의 전후 흉모가 여지없이 드러나 다 같이 사형을 받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자기들의 심복을 시켜 몰래 허균에게 말하게 하기를 “잠깐만 참고 지내면 나중에는 반드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고 하고, 또 허균의 딸이 뽑혀서 후궁으로 들어갈 참이므로 다른 근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한다면서 온갖 수단으로 사주하고 회유했다. 그러나 그 계책은 실로 허균을 빨리 사형에 처해 입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왕이 몸소 국문할 때 왕이 정상을 캐물으려고 하자 이이첨의 무리들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그 당류들과 더불어 왕 앞에서 정상을 막고 은폐하며 갖은 말로 협박하고 논쟁해서 왕이 다시 캐묻지 못하게 했다.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그들의 청을 따라 주자 이이첨의 무리가 서둘러 허균을 끌고 나가게 했다. 허균은 나오라는 재촉을 받고서 비로소 깨닫고 크게 소리치기를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했으나, 국청(역적 같은 중한 죄인을 신문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곳)의 상하가 못 들은 척하니 왕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둘 따름이었다. 안마를 세게 해 반역자 된 시녀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형제들 사이의 치열한 왕권 쟁탈 싸움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그의 나이 51살에 셋째 아들 충녕군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으니 그가 바로 세종이다. 그런데 태종은 왜 아직 건장한 나이에 서둘러 왕위를 세종에게 넘겨 준 것일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사고에 대비하려는 뜻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의 자격으로 세종의 왕권을 보강하려는 뜻도 있었다. 이에 따라 현직에서 물러난 상왕 태종은 세종의 집권 초기에 각종 국사에 관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아직 이빨이 빠지지 않은 이 늙은 호랑이에게 대들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장미라는 예쁜 이름의 시녀였다. 세종 2년(1490) 10월 11일 53살의 상왕 태종은 말한다. 내 나이 오십이 지난 뒤에는 잠을 편케 못 자고, 밤이 삼경이 되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시녀 장미를 시켜서 무릎을 두드리게 했더니 마음에 맞지 아니해, 내가 조금 꾸짖어 주고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장미가 조심 없이 갑자기 두들겨서 놀라 잠을 깨었다. 그 무례함을 미워해 대비에게 보내 그 정상을 물었으나 실상대로 대답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불러서 친히 물으니 말하기를 “꾸지람하심에 분이 나서 조심 없이 두드렸다”고 하니, 그 불경함이 크다. 인명이 중하다 하겠으나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서 물에 넣든지 목을 졸라 죽이든지 해야겠다. 상왕이 격노했으니 세종이 이 일을 수습해야 했다. 변계량을 비롯한 세종의 대신들이 앞을 다투어 준엄하게 충언한다. 장미가 저지른 죄는 반역으로 논해야 될 것이니, 마땅히 세 정승과 함께 국문해 사형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안마를 세게 했으니 반역이요,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세 정승이 몸소 심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23살의 세종은 다소 침착한 편이었다. 장미의 일은 말만 해도 오히려 부끄러우니 세 정승까지 번거롭게 할 것이 있겠는가. 영의정이 이미 몸소 국문하기로 되어 있으니 그렇게 하라. ‘반역자’ 장미는 어떻게 되었는가? 꺼낼수록 부끄러운 일인지 「세종 실록」에 그 뒤의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 영조 소주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1277년 고려 말 충렬왕 때였다고 한다. 소주의 원산지는 페르시아 지역이다. 페르시아의 증류법은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 유럽으로 건너갔고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를 낳았다. 또 이 술은 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을 통해 우리 나라로 들어왔다. 페르시아 말로 증류주를 뜻하는 ‘아라키’라는 이 술이 개성에서 ‘아락주’로 일컬어진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였다. 또 일본 침입을 위한 몽고군 병영이 안동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안동은 소주로 유명한 고장이다. 소주는 곡식을 증류해 만드는 술인지라 조선 초기에는 주로 약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대마도·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을 비롯한 일본의 사신이 올 때 하사하는 물품이기도 했다. 성종 21년 4월 10일의 「성종 실록」은 그 무렵 소주 마시는 풍습이 널리 퍼졌음을 말해 준다. 사간 조효동이 아뢰었다. “세종조에는 사대부 집에서 소주를 쓰는 일이 드물었는데 지금은 보통 잔치에서도 모두 쓰므로 낭비가 큽니다. 청컨대 모두 금지하도록 하소서.”그러자 임금이 말했다. “이와 같은 일은 사헌부에서 마땅히 금지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특진관 손순효가 대답했다. “일일이 금지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지사 어세겸이 말했다. “소주를 낭비한다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만들 수 없습니다. 또한 국가에서 어찌 개인 집에서 소비하는 것을 억눌러서 절제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 뒤 흉년이 들어 양곡이 모자랄 때마다 소주 제조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소주는 차츰 민간 속에 뿌리를 내렸다. 또 지금의 희석식 소주와는 달리 증류식으로 만든 그 무렵의 소주는 알콜 도수가 높고 독했기 때문에, 폭음해 죽는 사람도 자주 있었다. 중종 10년(1516) 4월 23일의 「중종 실록」은 일찍이 장원 급제한 뒤 청렴하고 유능한 관리로 이름 높던 제주 목사 성수재가 소주를 많이 마셔 죽은 소식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소주를 폭음하고 죽은 고위 관료의 이야기는 심심찮게 『조선 왕조 실록』에 등장한다. 『조선 왕조 실록』에 등장하는 소주에 얽힌 사건 가운데 백미는 영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다. 영조 12년(1736) 4월 24일 야간 경연(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의하던 자리)이 끝난 뒤 조명겸은 왕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말을 가만히 들어 보니, 전하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신이 그 거짓과 참을 알지 못하지만 오직 바라건대, 조심하고 염려하며 경계하도록 하소서." 그러자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목이 마를 때에 이따금 오미자차를 마시는데, 남들이 가끔 소주로 의심했나 보다." [출처] 조선야사 3-홍길동은 실존 인물이었다 |작성자 맘착한 토끼아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