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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화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송화
안동시 용수사
고려 명종 11년(1181년)에 崔詵(최선)이 찬(撰)한 용두산 용수사 개창기에 따르면 용수사 개창 이전에 이곳에는 이미 古刹(고찰)이 있었으나 수차례의 산불로 인해 옛터만 남아 있었다.
奉化(봉화) 覺華寺(각화사)의 주지인 誠源(성원)이 의종 원년(1146년)에 옛터의 수백 보 남쪽에 암자 몇 칸을 지은 뒤 입적하자 그의 문인인 處彛(처이)가 수년 동안 수십 칸으로 증축해 비로소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재력이 부족하여 각화사의 주지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고승 釋胤(석윤)에게 청탁했고, 석윤은 의종 18년에 왕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소견을 개진하였다.
이에 국왕은 예종이 膺公(응공)이란 고승을 위해 각화사를 창건하여 화엄교리를 폈듯이 자신도 각화사에 못지않은 사찰을 지어 화엄교리를 펴고자 했다.
그래서 釋胤(석윤)은 용두산의 암자를 추천했고 의종은 日官(일관)인 榮緯(영위)를 보내어 터를 살펴보고 龍壽寺(용수사)라 사액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증축을 돕게 하였다.
다음 해인 1165년에는 본당(本堂)과 요사, 강사(講舍) 및 창고, 부엌 등 90여 칸을 완공하고 100여 보의 담장을 둘렀다.
명종 3년에 용수사의 실질적인 창건주지인 釋胤(석윤)이 입적하였다.
그 뒤를 이어 제자인 雲美(운미)가 주지가 되었으며 뒤를 이어 廓心(곽심)이 주지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용수사의 창건 이후 3대 주지이며 그의 대에서 용수사가 완성되었다.
그는 釋胤(석윤)에게 수업한 사람인데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經律論(경률논) 등 대장경을 갖추고 13층의 靑石塔(청석탑)을 세웠다. 불사가 완료되자 명종 8년에 이르러 국왕이 차(茶)와 향(香). 그리고 찬미하는 글을 보내서 700여 대중을 모으고 화엄법회와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후에도 용수사에 대한 국왕의 지원이 지속되었는데 당시에 의종의 胎藏所(태장소)였던 嚮福寺(향복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명종은 향복사에 소속되었던 노비와 토지를 용수사로 이적하고 의종의 薦福(천복)과 忌日齋(기일재)를 올리는 願刹(원찰)로 삼았다.
이상이 龍壽寺(용수사) 창건과 관련된 용수사 개창비문에 드러난 내용이다. 조선시대의 용수사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의 불교유적이 그렇듯 소상한 기록이 없고 단지 조선중기의 고승이었던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당집」에 실린 「용두산 용수사 극락전기(極樂殿記)」를 통해 당시 용수사에 있었던 극락전의 면모를 조금이라도 살펴볼 수 있다.
극락전은 3칸의 황금전각으로 내부에는 아미타불 한구를 봉안하였는데 선조 11년(1578)에 공사를 하여 1580년 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용수사는 조선중기 이 후에는 聾巖(농암) 선생이나 退溪(퇴계) 선생 집안의 학문탐구의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조선후기로 내려오면서 사찰로서의 기능을 조금씩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高宗代(고종대)에 이르러서는 수만금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켜 중흥을 꾀했으나 고종 1년(1896) 乙未義兵(을미의병) 전쟁의 와중에 용수사와 부속암자인 영은암이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용수사는 축대와 초석만남은 채 근 백 여년 동안 폐사지로 내려오던 것을 願行(원행)스님과 불자들이 힘을 합하여 다시 건립하였다. 願行(원행)과 불자들은 나라의 평안과 국운의 융성을 위해 불사를 계획하고 부지를 물색하던 중에 1992년 이곳의 부지 2만여 평을 매입하고 1994년에 법당과 요사 2동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넘의 점안식을 거행하였으며 1996년에는 대웅전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점안식을 거행하였다.
현재 용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15교구인 양산 통도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으며 초대주지인 願行(원행)의 뒤를 이어 梵友(범우)가 주지를 이었으며 현재는 祥雲(상운)이 주지로 있으며 寺勢(사세)를 더욱 확창시키며 願行(원행)이 못다한 나머지 많은 불사와 문제들을 잘 이루고 있다.
통도사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이 곳..조계종 제16교구 본사 의성 고운사의 관할임에도 통도사 말사로 등록한 것은 아마 초대 주지스님인 원행스님께서 통도사와 인연이 깊어서가 아닐까 싶다
탈북1호 미륵 돌부처님 이야기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용수사에는 법당 좌측 편에 돌부처님이 모셔져 계신다. 일명 탈북1호 미륵돌부처이다. 기이한 사연이 있는 이 돌부처는 지난 2005년에 어느 노 보살님이 탈북하면서 북한에서 모시고 나온 것이다. 이 돌부처를 어떤 사람이 구입하여 용수사스님에게 시주한 것을 경내에다 봉안해 놓았다.
이 돌부처는 원래 휴전선 근방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개성시 영통사에 모셔져 있던 돌부처님다. 영통사는 1027년(고려 현종 18) 창건된 사찰로, 개성시 용흥동 오관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16세기 무렵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2002년 11월 북한의 조선경제협력위원회와 대한불교천태종이 함께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2005년 10월 31일에 복원을 완성했다.
영통사는 일찍이 고려 왕실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인종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자주 참배하고, 각종 왕실 법회가 열렸던 큰 사찰이었다. 당시에는 인연이 있는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진영각(眞影閣)이 있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이곳에서 교관(敎觀)을 배우고 천태종을 열었으며, 입적한 후에는 그의 비가 이곳에 건립되었다.
문화재로는 영통사 대각국사비(북한 국보 155), 영통사 오층석탑(국보 133호)이 있다. 그 외에 당간지주, 삼층석탑, 의천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돌부처가 탈북하게 된 사연은 그야말로 기묘한 일 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까 이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탈 북한 보살님은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2003년경 이 영통사 앞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들과 딸 며느리가 모두 탈북 하여, 중국으로 넘어간 까닭에 정안수를 떠 놓고 매일매일 자식들의 무사안일과 만나기를 빌었다. 그러기를 3년째. 어느 날 꿈속에 친정아버지가 나타나 집 뒤에 묻혀 있으니 답답하다며 꺼내달라고 호소를 하였다. 기이한 생각이 들었지만 꿈속의 일이라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3일 계속 꿈속에 나타나 자신을 땅 속에서 빨리 꺼내 달라고 호소하였다. 집 뒤로 가서 꿈에서 본 곳과 비슷하여 파 보니 돌로 조각된 불상이 나오게 된 것이다.
아마도 영통사가 16세기경 화제로 소실될 적에 이 돌부처님은 어느 누군가에 의하여 마을의가정집으로 옮겨졌거나 아니면 고려 때 불교가 성할 적에 민간이 자신의 가족이나 개인의 안녕을 위하여 자기 집에 모셨거나 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이부처님은 보통 우리의 상식적인 불상의 모습에서 벗어나 일반 보통사람들의 정감이 점치는 해학적이고 중생의 근심을 짊어진 마치 등신불에 나오는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불상을 노 보살은 친정아버지의 현신이라고 믿고 날마다 정안수를 떠올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며 치성을 다했다.
그런 말이 있다 부모는 땅에다 묻고 자식은 가슴에다 묻는다고 자식이 살아있는데 만나지 못한다면 세상에 그 애간장이 녹지 않을 부모가 있겠는가 보통 자식이 군대에 가도 밤잠을 설치고 음식을 먹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하물며 타국 땅으로 금생에 다시 볼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이야 오죽 하겠는가 ? 불가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듯이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그리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오직 자식 생각에 오매불망 몸이 스러지도록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석 달 정도 지났을 적에 생각지도 않던 조카가 찾아와 함께 탈북하자고 권유했다. 자식과 며느리를 보고 싶어 매일 밤 꿈속에서까지도 그리던 가족이기에 가다가 붙잡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탈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열흘 후에 탈북을 하겠다고 서로 약속을 하였다. 그런데 또 다시 꿈속에 친정아버지의 형상을 한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자신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한 것이다. 이 돌부처님은 무게가 약 200키로그렘 정도 된다. 이처럼 무거운 돌부처를 옮기고 이동하는 것이 여간 힘들고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꿈을 3일 동안 계속 꾸어서 보살님은 조카에게 이야기하니 조카도 이 돌부처님이 자신의 꿈에도 나타나 자신과 작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달리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조카는 부처님을 모시고 가야 한다고 마음먹고 어디에선가 광목천을 구해 와서 미륵 돌부처님을 둘둘 말아서 마치 미라같이 만들었다.
그리고 조카가 중고차를 가지고와서 미륵돌부처님를 차에 싣고 탈북하기위해 길을 떠났다.
이 보살님은 자녀들에게 줄 것은 없고 마침 자신이 직접담은 아들이 좋아하는 3년이나 묵은 간장이 있어서 유리로 된 병에다 담아 차량 난간에다 걸어두었다. 비포장 산길을 달리게 되었는데 간장을 담은 유리병의 끈이 끊어져서 미륵돌부처님 머리에 떨어져 병은 깨지고 간장이 온통 광목천에 쏟아져서 한여름에 마치 시체가 썩는 냄새가 나게 된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보아라! 한여름에 3년이나 묵은 간장이 몸에 몇 방울만 묻어도 옷을 빨아야하는데 여러분 머리위에 한 병의 간장이 쏟아져서 더운 여름날 한나절만 길을 걸어 다닌다면 아마도 수십 미터에 있는 사람도 코를 막고 피해서 다닐 것이다.
그런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지 않았는가? 탈북 하는 신세이다 보니 지나가는 경찰만보아도 마음은 얼마나 조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쩌랴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대로 오다가 중간에 검문소에서 경찰에게 검문을 검색 당하게 된 것이다.
어디에 가느냐? 묻는데 마침 조카가 임기응변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엉겁결에 몸이 썩어가는 옴병에 걸렸다고 했더니 의외로 경찰이 먼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놀래서 빨리 가라고 재촉하였다. 이렇게 하여서 몇 번을 무사히 통과하여 드디어 중국과 국경선인 신의주에 도착하여 지난번과 비슷한 검문이 발생했는데 조카가 또다시 기지를 발휘하여 무사히 국경을 넘어 탈북 할 수 있었다.
드디어 중국의 단둥에 이르게 되었다.
단둥의 옛 이름은 안둥[安東안동]이었으나, 1965년 개명하였으며, 압록강 하구부의 신의주 대안에 자리하여 신의주와는 철교로 연결된다. 참기이하지 않은가? 중국의 단둥 즉 옛 안동의 부처님이 오랜 세월 흙속에 묻혀 있다가 대한민국의 안동에 오게 되다니 정말로 우연인지 기연인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단둥에 도착한 보살님과 조카는 십 여일 여 만에 오매불망 그리던 자식들을 만났다. 그런데 타국에서 이무거운 돌부처님을 모시고 다닐 수 가없어서 고민하였다 그런데 마침 아들과 인연이 있는 한국에서 10여 년 전에 사업을 하다 실패하여 부도를 내고 중국으로 피신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어렵사리 탈북을 할 수 있었던 노 보살님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부처님을 사겠다고 하였다.
이 노 보살님은 아버지와 같은 부처님이지만 그러나 타국으로 탈북 하여 어려운 신세라 어쩔 수 없이 팔게 되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도망간 사업가는 자신의 가진 돈을 다 털어서 부처님을 모셔서 용수사의 스님께 시주하여 현제 안동 용수사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여곡절 끝에 미륵 돌부처님이 안동용수사로 오게 된 것이다
경북 안동시 봉황사
봉황사는 근래까지도 절 이름과 창건년대, 창건주, 그리고 가람의 구성에 대한 뚜렷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막연히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 1980년 사적비가 발견되면서 절 이름과 가람의 구성에 대해 조금 밝혀지게 되었다.
언제 개명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기와 명문의 “천계사년(天啓四年)”(1624)이중창 때 기록이라면 이 시기까지는 봉황사로 불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전각을 중창하면서 황산사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짐작하고 있다.
봉황사는 신라시대인 644년(선덕여왕 13)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창건 이후 조선시대까지의 내력도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으나, 다만 현존하는 자료로 가장 앞선 기록인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임하현에서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기산(岐山)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라고 황산사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사적비의 내용에 비중을 두고 보면 번성기 때에는 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승당, 선당, 청풍당, 만월대, 범종각, 만세루 등의 여러 전각과 부속암자로 낙석암(樂西庵), 정수암(淨水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전소되었다가 왜란 이후에 대웅전과 요사 1채만이 중창되어 그 명맥을 이어오다 사적비의 발견으로 가람의 옛 모습을 확인하고, 이에 맞게 옛 터에 중창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1) 위치
거위모양을 하고 있다는 아기산 중턱에 자리한 봉황사는 그 아래 임하호가 길쭉하게 뻗어있다.
안동 시내를 빠져나오면 임하호를 따라 길이 나있는데, 호수의 물과 산이 어우러져 멋스러운 드라이브코스로 손색이 없을 정도다. 소요시간은 20분 정도이다. 굽이굽이 돌아서 시원스레 달릴 수 있는 임하호 길을 따라 수많은 신도들이 극락왕생의 뜻을 품고 절로 향했을 것이다.
기암절벽으로 된 속칭 선어대를 지나 임하댐 준공시 건설된 수곡교를 건너면 봉황사와 아기산 등산로 진입로가 나온다. 그 곳을 따라 올라가면 마을과 과수원 위에 봉황사가 터를 잡고 있다. 봉황사로 들어서면 겹벗꽃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4월 말에서 5월 중순까지 피어 있어 절을 찾는 이들의 눈을 더욱 즐겁게 한다.
2) 교통편
승용차 이용 - 봉황사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서안동 I.C에서 청송과 영양방향으로 34번 국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서안동 I.C에서 30분 정도 걸리는데, 안동 시내를 빠져나와 임하댐 방향으로 가다보면 안동대학교를 지나게 된다.
안동대학교에서 20여분 가다 면소재지가 저만치 보일 때쯤 오른쪽으로 높게 세운 교각에 상판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 수곡교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친절하게 안내판이 있는데 시멘트 포장한 길을 따라가면 봉황사가 눈에 들어온다.
대중교통 이용 - 기차 또는 버스를 이용해 안동으로 와서 33번 수곡리 행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안동으로 올 때는 기차보다 시외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수곡리까지 3, 40분정도 걸리며 수곡리에서 내려 봉황사까지는 10여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경북 안동시 용담사
용담사는 664년(문무왕4) 신라시대에 화엄화상(華嚴和尙)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서는 1574년(선조7) 혜증(惠證)법사가 중창하였다. 한창 사세가 좋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쌀 씻는 물이 절 앞을 흐르는 개울을 따라 묵계까지 흐를 정도로 승려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당우 전체가 소실되어 버렸다가 17세기에 중창되었고, 20세기 초에 무량전을 새로 지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동안 다소 사세가 위축되었는지, 1924년과 1925년 사이에 절에 있던 누각이 뜯겨 부근에 있는 묵계서원의 강당 목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무량전 동쪽에 황학선원(黃鶴禪院)이 있었으나 현재는 공터로 남아 있다. 최근에는 1992년 대웅전을 새로 지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1999년에 새로운 대웅전을 지었다. 지금은 무량전과 대웅전, 요사가 남아있다. 부속암자로 금정암, 극락암, 학소암이 있었으나 지금은 금정암만 남아있다.
찾아가기
승용차 이용 - 안동에서 영천 방향으로 가는 35번 국도를 따라서 24km 정도 가면 길안면 천지리가 나온다. 이곳은 35번 국도와 914번 지방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인데, 천지리에서 35번 국도로 6㎞ 가량 더 가면 묵계서원이 있고, 여기에서 5㎞를 가면 안동의 절경이라 일컫는 천지갑산이 있다. 천지갑산의 입구 미내에서 오른쪽으로 신기 마을로 들어서는 포장도로를 따라 다시 2㎞를 가면 용담사에 도달한다.
대중교통 이용 - 안동 시내버스터미널이나 안동역에서 하루에 두 번 다니는 길안 노선인 28번 버스를 타고 미내에 내려서 30여 분 걸어가면 용담사로 갈 수 있다. 버스는 안동에서 오전 6시와 오후 4시에 출발하며 40여 분 소유된다.
경북 청송군 보광사
창건 이후의 역사는 자료가 없어 확실하지 않은데 소헌왕후 심씨가 절 근처에 있는 청송 심씨 시조의 묘를 제향하기 위해 추모재와 만세루를 짓고 원당 사찰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청송 심씨 후예들이 보광사를 중수하는 일이 많았고 관련된 사적도 전해지고 있다. 현재 보광사 만세루에 경상도관찰사, 이조판서,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했던 심성희 등 청송 심씨의 후손들이 기록한 현판 3매가 걸려있다.
신라 문무왕 12(672)년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현 건물은 조선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경상북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84호이다. 사찰 뒤쪽에 조선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의 조상인 청송심씨 시조묘가 있으며 앞쪽에는 심씨 문중의 제각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2호인 만세루가 있다.
보광사는 신라 문무왕 12(672)년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설과 조선 세종(재위 1418∼1450)의 비 소헌왕후의 조상묘를 수호하기 위해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경북 청송군 청송포교당
경북 내륙에 자리한 청송으로는 북쪽 봉화 방면에서 내려온 31번 국도가 청송을 지나 남쪽 포항으로 이어지고 서쪽 안동에서 뻗어온 34번 국도는 진보를 거쳐 동쪽의 영덕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외 여러 지방도로와 군도로가 안동, 의성, 포항, 영덕, 울진, 봉화 등지로 나 있지만 아직도 교통이 불편한 오지이다. 교통이 편리한 안동으로 먼저 가서 다시 진보를 찾은 다음 그곳에서 청송을 찾아가는 편이 빠르고 편리하다.
안동을 가든 진보를 가든 청송까지의 거리는 만만치 않은 일정이다. 산이 많은 고장이듯 주왕산을 빙 둘러서야 청송읍내까지 당도할 수 있다. 청송포교당은 팔공산 은해사의 청송지역 포교당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청송읍내 중앙에 소재하는 지역 포교당으로서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주석하고 계신다. 매주 일요일 군법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이때 외에는 젊은 사람을 구경하기 어렵다는 스님의 목소리에서 젊은이는 도시로 떠나고 중늙이만 남은 중소도시들의 어려운 현실정이 묻어나는 듯 하다.
청송포교당은 1936년에 청송읍내의 신도들이 마음을 모아 세운 사찰이다. 따라서 초창기 창건이후부터 지금까지 별다른 역사는 전하는 게 없다. 하지만 어려운 현실을 딛고 고령지역민의 포교를 위해 군법회며 불자들을 모아 불심을 펼치는 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경북 청송군 수정사
수정사는 고려시대 공민왕대(1352~1374)에 나옹스님이 창건하였는데,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산 속에서 흘러내리는 샘물과 계곡에 흩어진 돌이 수정같이 깨끗하여 수정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외에 수정사와 관련된 문건이나 이후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은 고려 말의 불교를 중흥시킨 선사이다. 경상북도 영덕 사람으로 아버지는 선관서령 벼슬을 지낸 아서구(牙瑞具)이고,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속명은 원혜(元慧)이고 호가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인데 지금 전탑 아래 여강 가에 지은 정자 ‘강월헌’은 바로 나옹 스님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 선사에게 출가하였다. 4, 5년간 명산을 찾아다니다가 1344년(고려 충혜왕 5)에 경기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4년 동안 정진하여 득도하였다.
1347년(고려 충목왕 3) 7월에 원나라 서울 연경 법원사(法原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指空)에게 4년 동안 불도를 배웠다. 이때 원나라 임금의 청을 받고 광제선사(廣濟禪寺)에서 주지로 머물며 법회를 크게 열기도 하였다.
그 뒤 정자사(淨慈寺)로 가서 임제종 18대손인 평산처림(平山處林)의 법을 전수받았으며, 명주의 보타낙가산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하였다.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머물렀다. 공민왕과 태후의 청으로 황해도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1363년에는 구월산 금강암(金剛庵)에, 3년 뒤인 1366년에는 금강산 정양암(正陽庵)에, 그리고 청평사(淸平寺)에 차례로 머물렀다.
그 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지를 돌아본 후,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고 10년 후인 1371년(공민왕 20)에는 왕사가 되었다. 이후 송광사에 잠시 머물다가 회암사를 중창하여 낙성식을 열었다. 1376년(우왕 2) 왕명으로 경북 밀양 영원사로 가다가 신륵사에서 열반하였다.
경북 청송군 주왕암
이 암자는 대전사(大典寺)와 함께 창건되었다 하며 주왕(周王)의 혼(魂)을 위안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 합니다. 문간채인 가학루(駕鶴樓)는 중층 누각으로 되어 있고 기와는 이끼가 그윽하여 오랜 풍상을 보여 줍니다. 또한 16나한을 모신 나한전(羅漢殿)이 있습니다. 주왕암 옆에는 주왕의 최후의 전설이 전해져 오는 주왕굴로 들어가는 협곡의 좁은 길이 있습니다.
주왕굴은 협곡 사이 암벽에 위치한 자연 동굴로 주왕(周王)이 마장군(馬將軍)의 공격을 피하여 이곳에 은거하던 어느 날, 굴 입구에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 마장군 일행에 발각되어 마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주왕의 웅대한 이상을 이루지 못하고 애절하게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종 목 명 칭 분 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 재 지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0호
대전사 주왕암 나한전 후불탱화 (大典寺 周王庵 羅漢殿 後佛幀畵)
유물 / 불교회화/ 탱화/ 불도
1점
2004.10.14
부동면 상의리 173
조선시대
대전사
대전사
경상북도 청송군 문화관광과 054-870-6247
19세기 불화의 특징은 과장되고 변형되는 표현이 나타나고, 액자형 화면에 본존을 중심으로 각 형태가 경직되고 있다. 또한 채색은 짙어졌고 명도가 높은 코발트 빛 청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분홍색이 부분적으로 엿보인다.
석가불의 대좌, 신광, 손모양은 특징적이지만, 각 상을 상징하는 지물형태 묘사 등에서 치밀함이 결여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19세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경북 청송군 대전사
대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 672년 의상(義湘)이 세웠다는 설과 919년(고려 태조 2)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절이 있는 산과 절의 이름은 주왕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주왕내기(周王內記)》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이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절 이름은 나옹화상 혜근(惠勤)이 붙였다고 한다. 또한 신라의 주원왕(周元王)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