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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는 조선시대에 네 번째로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해 10대 명문가의 하나
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남양홍씨에는 같은 본관을 쓰는 두 계통이 있는데, 당홍과
토홍이 그것이다. 당홍은 당나라에서 건너온 중국계를 의미하고, 토홍은 토착 호족
계통을 뜻한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남양홍씨 중 당홍은 11만7638가구 총 37만9708명이 국내에 살고 있다고 한다.
남양홍씨는 조선시대에 모두 329명(당홍 206명, 토홍 123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
데 이는 전주이씨(884명), 안동권씨(359명), 파평윤씨(336명)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것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순위는 더 올라간다. 그중 당홍에서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8명, 문형 2명을 비롯해 왕비 1명(헌종의 계비), 청백리 3명, 부마 4명, 공신 10여명
을 배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인 시조 홍은열을 비롯해 그의 6세손이자 이자겸의 난에
충절을 지키다 척준경에게 살해된 홍관(洪灌), 홍관의 손자이며 성불도감판관을
지낸 홍원중(洪源中), 홍원중의 아들이며 추밀원사와 공부상서를 역임한 홍사윤(洪
斯胤), 홍사윤의 장남이자 동지추밀원사와 형부상서를 역임한 홍진(洪縉), 홍사윤의
차남이며 동지밀직사사를 역임한 홍예(洪裔), 홍진의 아들이면서 송종례와 함께
임유무를 주살하여 무신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홍규(洪奎), 충렬왕 때 세 번이나
시중 자리에 오른 홍자번(洪子藩), 문정공파 파조이면서 공민왕 때 수상을 지낸
홍언박 등이 유명하다.
이들 가운데 홍규는 남양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그의 두 딸은 충선왕의 비인 순화원
비와 충숙왕의 비이자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다. 아들은 삼사좌사를 역임한
홍융(洪戎)이고 손자는 남양군파의 파조인 홍주, 문정공파 파조이면서 도첨의우정승
을 지낸 홍언박, 감찰대부를 역임한 홍언유(洪彦猷), 검교참찬문하부사를 역임한
홍언수(洪彦修)다. 또 사촌형이 홍자번(홍예의 아들)이다.
홍자번의 장남 홍경(洪敬)은 도첨의찬성사와 상호군을 역임했고, 차남 홍순(洪順)
은 도첨의평리를 역임했고, 홍경의 장남 홍승서(洪承緖)는 우대언을 역임했고, 차남
홍승연(洪承演)은 선공부령을 역임했다.
또 남양군파 파조 홍주의 아들 홍징(洪徵)은 벼슬이 판밀직사사에 이르고 당산군에
추봉되었으나, 염흥방이 처형될 때 그의 매부라는 이유로 아들 홍상빈과 함께 처형
되었다. 홍언박의 장남 홍사보(洪師普)는 판각문사를, 차남 홍사범(洪師範)은 지밀직
사사를, 3남 홍사우(洪師禹)는 전라도 도순문사를, 4남 홍사원(洪師援)은 전서를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공신인 홍길민(洪吉旼·호조판서)과 아들 홍여방(洪汝方
·이조판서)이 유명하다. 특히 세조의 반정에 공을 세운 홍윤성(洪允成)과 홍달손(洪
達孫), 홍순손(洪順孫) 형제가 있다. 홍윤성은 예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홍달손은 좌의정, 홍순손은 판서를 역임하였다.
허균에 의해 지어진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모티브가 된 홍길동도 남양홍씨
당홍계로 알려져 있다. 홍길동의 아버지인 홍상직(洪尙直)은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홍상직의 아들이자 홍길동의 형인 홍일동(洪逸童)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또 홍일동의 측실 딸은 성종의 후궁인 숙의(淑儀) 남양홍씨다.
익산군파인 홍응(洪應)은 좌의정에 올랐고, 동생 홍흥(洪興)은 연산군 때 강원도 관찰사와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홍경주(洪景舟)는 중종반정에 참여한 후 병조판서와 좌참찬을 역임했고, 홍순언(洪淳彦)은 종계변무사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다녀왔다. 또 홍희남(洪喜男)은 임진왜란 후 여섯 차례나 일본을 왕래하며 종전 협상을 매듭지었고, 명나라에도 두 차례 파견되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며 대제학과 영의정에 오른 홍서봉(洪瑞鳳)은 아버지 홍천민(洪天民), 숙부 홍성민(洪聖民), 할아버지 홍춘경(洪春卿)과 함께 3대4호당의 영예를 누렸다. 또 홍천민과 홍성민의 후예는 6대에 걸쳐 7명이 대과의 영예를 누렸으며, 그중 영의정이 3명(홍명하·홍치중·홍순목), 우의정이 1명(홍중보) 배출되었다. 홍주(洪澍)의 7대손인 홍춘경(洪春卿)의 자손에서만 상신 5명, 문형 2명, 왕비 1명을 비롯해 20여명의 판서급 인물을 배출한 것이다.
홍춘경은 홍천민(洪天民·율정공파), 홍일민(洪逸民·연기공파), 홍성민(洪聖民·졸옹공파)의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인 율정공파(栗亭公派)에서는 홍천민의 아들 홍서봉(洪瑞鳳)이 인조 때 삼정승을 두루 거쳤고, 증손 홍처량(洪處亮)이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 둘째인 연기공파(燕岐公派)에서는 홍일민의 손자 홍명원(洪命元)이 인조 때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고,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인 홍처후(洪處厚)의 자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경종 때 노론(老論)의 선봉으로 소론(少論)과 맞섰던 홍계적(洪啓迪)은 홍처후의 증손이다.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홍계희(洪啓禧)는 홍처후의 아우인 홍처심(洪處深)의 증손이다. 셋째인 졸옹공파에서는 대제학 홍성민의 손자 홍명하(洪命夏)가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으며 그밖에 홍치중(洪致中)이 영조 때, 홍순목(洪淳穆)이 고종 때 각각 영의정을 역임하는 등 4명의 정승을 배출하였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을 피력한 홍서봉과는 달리 승문원부제조였던 홍명형(洪命亨)은
강화에 피신했다가 청군이 쳐들어오자 불을 붙이고 화약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또 홍명구(洪命耉)는 평안도 관찰사로 청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또 청백리인 홍기섭
(洪耆燮)은 도둑이 들었다가 솥뚜껑에 먼지가 쌓인 것을 보고 돈 꾸러미를 놓고 갔는
데, 다음날 “돈 잃은 사람 찾아가라”는 방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명심보감’에 실려
있다. 홍기섭의 아들이자 어영대장이었던 홍재룡(洪在龍)의 딸은 헌종의 계비로 왕
비가 되었고 아들 홍종석(洪鐘奭), 손자 홍순형(洪淳馨)은 부자 예조판서를 지냈다.
하지만, 이렇게 영화를 누리던 남양홍씨 당홍도 부침은 있었다. 이조판서를 지내고
봉조하가 된 홍계희(洪啓禧)의 아들 5형제가 대과에 올라 위세를 떨쳤는데 그중 홍지
해(洪趾海·형조판서), 홍술해(洪述海·이의), 홍찬해(洪纘海·승지), 그리고 홍지해의
아들 홍상간(洪相簡) 등이 벽파에 가담했다가 정조 1년 홍인한(洪麟漢) 역모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당해 한동안 쇠운의 길을 걸었다
나. 남양홍씨 토홍계
토홍(土洪)계는 남양(화성시)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착 성씨이다.
시조 홍선행(洪先幸)이 고려시대 금오위 별장동정을 지내면서 그를 시조로 삼고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홍선행의 9~12대손에서 문희공파(文僖公派)·정효공파(貞孝公派)·참의공파(參議公
派)·주부공파(主簿公派)·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등 5파로 나뉜다.
토홍계는 조선시대에 상신 2명, 문형 1명, 청백리 3명, 부마 1명, 공신 3명 등을 배출
하였다.
문희공파에서는 문희공 홍언필(洪彦弼)이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홍섬(洪暹) 역시 선조 때 영의정을 세 차례나 중임하고 청백리에 뽑혔다. 홍언필의
부인 여산송씨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송질(宋軼)의 딸이다. 정효공파의 정효공
홍담(洪曇)은 홍언필의 조카인데, 훈구파(勳舊派)의 거두로서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역시 청백리에 뽑혔다.
대호군공파에서는 홍숙(洪淑)이 병조판서·좌찬성 등을 역임하였고,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창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홍익한(洪翼漢)은 그의 현손이다.
현대 인물로는 홍사구, 홍사덕, 홍사용, 홍난파 등이 있으며 인구는 2000년 기준
30,60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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