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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맑은 물 흐르는 곳 (나들목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들풀처럼
(논문) 통곡이냐, 자살이냐 |
- 두 배반자의 초상, 혹은 그 해석의 궤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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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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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491, 1999/11.
배반의 심리학
배반은 무엇보다 심리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한 욕망의 꼭지를 거두고 그 역으로 또 다른 욕망의 날개를 펼치는 마음의 작용이다. 물론 배반이란 주제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은 외면당한 그 욕망의 꼭지가 설익은 열매를 달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아니, ‘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하는 놀라운 반응은 그래서 생겨난다. 죽은 사람, 이미 나와 인연이 다 된 사람과의 소원한 관계나 적극적 망각은 배반이 아니다. 그것은 감이 다 익은 뒤 꼭지에서 이탈하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관계의 정리일 뿐이다.
반면, 친근한 사이가 하루아침에 서먹한 사이로 돌변하고, 우호적인 관계가 뒤집어져 적대적 관계로 전락할 때 이는 그 사이와 관계를 이룬 당사자들의 의도적인 이반(離叛)을 전제로 한다. 그 돌이킴의 핵심 대상이 사상이나 이념일 때 우리는 이를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전향’이라고 한다. 한편, 그 대상이 자신이 속한 특정 집단이나 딴에 헌신적으로 섬겨온 개인 등일 때, 이는 부정적으로 ‘변절’이나 ‘훼절’로 표현되곤 한다. 반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라합의 경우처럼, 그 배반으로써 이익을 챙기는 대상에게 그 배반은 동지애적 결탁이나 용감한 선택으로 칭송되기도 한다.
이처럼 배반은 그 어감의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시각과 관점에 따라 이중적 가치를 내장하고 있다. 예컨대 철저한 교조적 공산주의자들에게 전향 각서는 통탄할 만한 변절이 되겠지만 자유 민주주의 사회의 시각으로 보면 자유세계에의 동참으로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배교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쪽에서는 그것이 신앙적 절개를 저버린 수치스런 일로 비치겠지만 정통 주자성리학의 이념을 따르던 당시의 지배 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사교와의 마땅한 단절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놓고도 ‘사옥’과 ‘박해’로 갈리고 ‘민란’과 ‘혁명’ 등으로 이를 규정짓는 용어가 달라진다.
배반은 운명, 팔자 따위와는 무관하다. 애당초 배반자로 태어나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악독한 배반자로 낙인찍히는 사람일수록 이전에 그 배반의 오명에 비례하는 충성의 열성을 보인 경우가 많다. 배반과 변절 하면 으레 떠오르는 악명 높은 이완용의 경우도 그렇다. 그가 민족 배반자, 친일파의 수괴로 낙인찍히기 전 한때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지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그 영광스런 순간을 뒤로하고 나중에 거의 대부분 친일의 덫에 걸린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들에게 그 배반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을까? 아니면, 잠 못 드는 숱한 고뇌의 밤을 통과한 끝에 피치 못해 선택한 길이었을까?
한 사람의 배반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심리적 동인은 무엇보다 정치적 이해관계이다. 이기적 동물의 탈을 온전히 벗지 못한 인간에게 이해득실의 차이는 늘 민감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한 개인이나 집단을 편드는 과정에서 이념이나 대의명분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사람살이의 진득한 밑바닥에서 그것은 단지 장식용 외피로 작용하거나 이해득실의 상부구조로 표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추켜세우고 편드는 대상에게 물심양면의 적극적 투자를 할 때 그 반대급부가 자신에게 혜택이 될지 해코지가 될지 이에 민감한 관심을 기울이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여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거나 투자한 것의 본전에 못 미친다는 판단이 설 때 체면 불구하고 손을 떼고 등을 돌리기 십상인 것이다. 그 사이에 작용하는 것은 치밀한 계산속일 수도 있고 예상과 기대를 저버린 결과에 대한 낙담과 실망일 수도 있다.
이러한 배반이 자의적인 결단에 따른 적극적 행위로 나타난다면 그렇지 못한 배반도 있다. 즉, 환경이나 권세의 억압에 따라 자신의 본심과 무관하게, 오히려 그 역으로 배반하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하는 경우가 있듯,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배반하는 경우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큰 비중으로 사랑하는 주체에 대한 배려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겨난다. 가령, 극단적인 고문과 죽음을 통한 협박 가운데 인간적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사람을 배반하는 참혹한 상황 같은 것 말이다.
그 어느 쪽의 경우든 배반은 비극적인 정서를 달고 다닌다. 실망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배반했든, 사랑의 용기가 지나쳐 감당 못하는 억압적 환경에서 불가피하게 배반했든, 그 배반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비추어주는 역설의 거울이 아닐 수 없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즈음하여 등장하는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배반을 그 성격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취급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인간적 실존의 공감각성 때문이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의 조짐이 당시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예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향해 충성을 바쳐 따르던 측근 제자들한테 그 길은 당혹과 실의의 반응을 유발하였다고 보는 게 한층 더 현실적이다. 예수의 정체와 그가 전망한 구원의 길에 먼저 의식이 깨인 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조차 회의와 배반의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문제는 회의를 회의하는 치열한 내성의 채널이 가동되고 있었느냐 하는 점에 있었다. 결국 배반의 배반에 이르면서 한 꺼풀 자신의 틀을 깨고 뿌리 깊은 진보와 성숙을 이루어나갈 만한 저력의 여부가 중요했던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수난사화의 주제에 대한 사색적 성찰과 텍스트 분석의 결과로 쓰이고 있다. 예수의 수난을 장식하는, 아니 겹으로 직조해내고 있는 그 추종자들의 수난을 대상으로 나는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배반에 특히 주목하고자 한다. 이로써 나는 그 배반의 동기와 과정에 담긴 내면 풍경을 추적하면서, 텍스트에 반영된 대로, 그 배반이 해석되고 그 의미가 굴절된 내력을 더듬어 볼 것이다.
더불어 필요한, 또 중요한 작업은 그들이 각자의 배반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보여준 통곡과 자살의 의미를 깊이 통찰해보는 것이다. 내게 이는 예수의 수난이 지닌 신학적 의의와 면밀히 대응되는 사건으로 다가온다. 이에 따라 나는 예수의 수난이 역사화 되는 과정의 일환으로 그들의 배반의 역사를 평가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수난이 낳은 지속적인 수난의 행렬, 그것이 무모한 인간 압제의 역사가 아니었다면 수난은 어떻게 거룩한 의미를 걸치고 역사화 되어 갔는가? 왜, 어떻게 역사의 기록 속에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배반과 이로써 표상되는 수난 지향성이 그 가운데 차지하는 상징적 위상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을 비켜가고선 그 인물들에 대한 해석은 자못 건조해질 듯하다. 덩달아 예수의 수난이 지닌 의미에 대한 해석적 조명도 침침해지기 마련이다.
베드로의 경우 - 억압과 만용
베드로(본명 게바)는 그 이름 자 그대로 딱딱한 바위의 우직함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종종 그 우직한 바위의 이미지는 우직함이 지나쳐 우유부단한 돌멩이, 잔물결에도 쉽사리 휩쓸리는 조약돌의 이미지로 변신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그의 그러한 변화무쌍한 이미지는 예수 배반의 사건 이전이나 이후에 골고루 탐지된다. 이는 필시 베드로의 사도적 개성에 해당되는 문제이려니와 동시에 끊임없이 출렁이는 욕망이라는 이름을 단 인간을 반영하는 보편적 예로 거론될 만도 하다.
부활 신앙을 체험한 이후 베드로의 교회 내 리더십은 중립과 타협이란 장기(長技)를 두루 선보인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보여준 그의 입장은 바울계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야고보를 좌장으로 한 전통적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보편 주의적 복음의 이름으로 일단 전자의 손을 들어준 듯하다(행 15:7-11). 그러나 안디옥 사건에서 보듯, 그는 야고보 세력을 의식하여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그들의 명분을 배반하는 이중성을 드러낸다(갈 2:11-14). 이로 인해 그는 바울의 통렬한 공박을 받았던 바, 여기서 우리의 초점은 그 공박 자체가 아니라 이를 유발한 그의 내면적 동기, 또는 심리적 풍경 같은 것들이다. 얼떨결에 발생한 그 사건은 기실 일관되게 베드로의 우유부단한 개성을 엿보게 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그의 개성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이에 대한 정밀한 정신분석을 위해서는 전문가에 의한 별도의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일단 그 대략적 구조만 따라가 보자면 이는 지나친 삶의 부침의 반작용에 따른 균형 감각의 소산이란 생각이 든다. 한때 뜨거운 사랑의 열병을 앓은 자가 사랑을 무서워하여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그만큼 예수를 따르며 살아온 지난 3년(혹은 1년) 남짓의 세월은 그에게 짧은 만큼 진한 체험의 연륜을 더해온 것이리라. 그 뜨거운 정열과 허풍, 간절한 신뢰와 만용 사이를 조율하며 그는 삶과 신앙의 진국을 신중하게 걸러오지 않았을까? 그 모든 변전의 계기로 작용한 것은 물론 그의 아픔과 추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예수 배반 사건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끊임없는 지적, 영적 되새김질이 결국 죽은 예수를 되살아난 존재로 보게 되는 극적인 체험을 선사한 것일 터.
예수 사후 독자적인 리더십을 행사한 베드로의 균형 감각과 관련하여 그가 선교지에 아내를 데리고 다닌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사도들도 이런 스타일을 추구했음이 바울의 증언(고후 9:5)을 통해 명시된다. 예수와 열둘을 비롯한 그 측근 제자들이 끼리끼리 팔레스타인을 누빌 적에는 스승 예수가 그들의 정신적 의지 처로 일상적 삶의 리듬에 균형을 잡아주는 축이었을 것이다. 또한 제자들은 서로 견제와 자극을 통해 그들의 상호 관계에 긴장과 조화를 유지하는 데 일조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재하고 측근 제자들마저 뿔뿔이 흩어진 그 디아스포라의 공간은 새로운 균형의 구심점을 필요로 했다. 그때 아내와 그에 딸린 가족들이 그들에게 일상의 안정과 최소한의 균형을 유지하는 축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바울과 바나바가 육친의 틀을 깨고 종족적, 성적, 계층적 경계를 넘어 동역자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이로써 사역의 균제를 이루었던 것에 비해, 그들에겐 가족이 여전히 중요한 회귀 처로 작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족은 이념적 사랑의 무덤이라는 부정성과 동시에 부박한 삶을 추슬러주는 위안의 둥지로서의 긍정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간의 갖은 무리수로 인한 상처를 다독일 둥지로서, 또 툭하면 튀곤 하는 그 개성적 행태를 무마해줄 조력자로서 아내가, 가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은 베드로에 대하여 가장 신랄하다. 그것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12사도 리더십과 이에 줄을 댄 교권의 허세, 영광의 신학에 사로잡혀 고난을 외면하는 신앙 행태를 비판하기 위한 편집적 의도와 무관치 않았을 터. 그 촘촘한 편집적 각색의 틈새를 들추어보면 베드로란 인물은 드높은 신의와 용기와 충절에서 회의와 비겁과 배신의 현장을 오가는 종잡을 수 없는 삶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그렇게 참담히 고꾸라지는 실수와 실패의 경험은 쓰라린 강도만큼 성숙을 겨냥한 것이어서 베드로의 거듭남을 위해 어쩌면 필연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로 아우 안드레와 더불어 예수의 부름을 받은 베드로는 일찍이 예수의 신통력을 통해 장모의 열병을 치유 받는 등 각별한 사적 인연을 쌓아왔다(막 1:29-31). 그 사이 베드로는 불과 여러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들을 대표하여, 또 그들보다 앞서 적극적으로 예수를 접하고 만나는 열심을 보인다(막 1:35-38). 그래서인지 베드로나 12사도 전통에 그토록 비판적인 마가적 시각에서조차 베드로가 그 열둘 가운데 수장이었던 사실을 굳이 감추거나 부인하지 않고 있다(막 3:14-16). 그는 분명 여러 추종자들 가운데 선택된 12제자의 한 사람이었다. 나아가 그들 가운데 특히 더 총애를 받은 측근 3인방(베드로, 요한, 야고보)에 들었을 뿐 아니라(막 9:2-13, 13:3-8), 그 중에서도 으뜸을 차지하고 있었다. ‘으뜸’이라 함은 물론 스승 예수의 관심도, 또한 그들 사이의 지명도와 대내외적 영향력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의 긍정적 위상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정점에 달한다(막 8:27-30). 거기서 그가 예수의 정체를 메시아로 간파했을 때 마치 영적 개안을 한 자처럼 그는 다른 제자들과 구별되는 비범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꼭대기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 것이 기정 사실. 베드로는 그 정상에 다다르자마자 내동댕이쳐진다. 그것은 서서히 내려가는 점진적 하강과는 달리 꼭대기에서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으로 급속히 추락하는 형국에 비견될 만하다. 그 메시아 고백 바로 다음에 바로 ‘사탄’이란 불명예를 뒤집어쓰기 때문이다(막 8:31-33). 그것은 그의 과잉 의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을 터. 예수의 정체를 파악한 그의 지혜가 돌연히 그의 앞길을 가로막은 만용으로 꼴값을 한 격이라고나 할까?
베드로의 그네타기식 상승과 추락은 계속된다. 변화산에서 그를 위시한 3인방은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를 나란히 대면하는 영광을 즐기지만 그 환상적인 공간에 초막까지 지어놓고 영영 머물길 간청하는 오버 액션으로 무지를 드러내며 추락한다(막 9:2-13). 그럼에도 베드로를 향한 예수의 사랑은 지극하여 그가 제자들의 헌신적 추종에 대한 보상을 묻는 그에게 예수는 기꺼이 금생과 내세를 아우르는 영광스런 보상에 대한 언질을 준다(막 10:28-30).
그 뒤로도 그는 틈틈이 자신의 총명을 드러내면서 선수를 치고(막 11:21) 또 장래일에 대하여 예수의 가르침으로 훈계를 받는 등(막 13:3-8) 재기에 성공하지만 그 성공은 반드시 추락을 담보로 한 것일 따름이다. 특히 예수가 가장 고역스러운 겟세마네의 기도 싸움의 현장조차 지키지 못한 채 잠구렁에 빠져든 그는 과연 예수와 더불어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한 팔불출이었다(막 14:37). 마침내 그는 예수의 체포 당시 그를 뒤쫓는 과감한 용기 뒤에 그 용기의 정상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는 추락을 보여줌으로써 그 상승과 하강의 줄다리기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예수 배반은 상습적 행태의 한 부정적 정점에 불과한 것처럼 읽힌다. 그간 보여준 허둥대는 선수 치기와나 몰라라 하는 식의 미진한 뒷감당, 사려 깊은 통찰과 이로 인한 과잉 의욕 사이의 불안한 곡예는 스승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하는 큰 파탄의 전조를 예고해온 듯하다. 그렇다면 그를 그와 같은 불안한 곡예로 내몬 심리적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일단 잠정적으로 그것을 과열된 ‘장자 의식’이란 말로 규정해본다. 이는 남보다 앞서고자 하는 의욕으로 보통 건전한 경쟁 관계를 부추기고 자기 발전을 자극하는 동인으로 작용하는 자의식이다. 단적으로 “다 [예수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바로 베드로의 장자 의식의 근간을 이룬다. 또 겟세마네에서 예수를 잡으러 온 자들을 물리치며 단박에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 귀를 자르는(막 14:47) 그 열정은 과연 장자다운 행위의 한 극적인 사례에 해당된다. 이렇듯, 대개 열정적인 종교 활동을 수행하는 자가 표방하는 소명감이나 사명감의 이면에는 장자 의식이 그 심리적 토대로 가동되고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러나 자신의 위상에 대한 과장과 허영된 포장에 매달릴 때 그 의식은 결과적으로 파탄을 자초하는 법. 장고 끝에 악수라고, 열심히 사명을 불태우는 그 정점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는 경향이 있다. 성서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 가운데, 그 과잉된 의욕이나 자만, 부주의, 이에 따른 결정적 실수로 말미암아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장자들이 더러 있다. 표면적 기록에 그 세세한 심리적 작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내막은 한 눈에 훤히 비친다. 율법에 장자권에 대한 강조를 명시하면서도 기실 역사의 흐름을 뒤적여보면 장자가 패배하고 차자나 막내가 득세하는 역설적 풍경을 보여준다. 이는 베드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제자들 중의 장자 베드로는 그 한시적 역할과 상징적 위상으로 기본 체통은 지켰지만 그리스도교 태동기에 역사의 물꼬를 돌린 인물은 오히려 맨 마지막에 출현한 팔삭둥이 제자 바울이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를 파탄으로 몰고 간 내면의 질곡은 상당 부분 그 장자 의식의 과잉과 연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과잉된 의식은 필경 억압으로 작용하였을 터이고 그 억압은 결정적인 순간에 악수를 연발하는 비극을 연출한 셈이다. 그 억압적 정황은 내면적으로, 또 외부적으로 베드로의 운신을 연거푸 어색하고 서투르게 만들었다. 여러 돌발적 해프닝을 통해 노출한 그의 만용과 허세, 무지와 비겁 또한 그 억압적 산물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첨가된 외부적 요소는 일종의 정치적 위협이었다. 산헤드린 공회 마당에 체포된 예수를 은밀히 뒤따라간 베드로에겐 그 은밀한 익명의 공간이 유일한 방패였다. 그런데 거기서조차 자기를 알아보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거기서 죄인의 혐의를 받고 있는 예수와 관련하여 말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예수를 향한 정치적 위협이 그에게 직결되는, 절체절명의 위태로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전에 예수에게 약속한 충절이 시험을 받는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그 결정적인 순간 예수를 부인하고, 나아가 저주하며 맹서까지 한 것이니, 그가 시험에 불합격했음은 물론이다. 뿐 아니라 그는 스승 예수에게 배반자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불경죄까지 범한 꼴이 되었다. 내면적 억압의 결과 파생된 과잉 의욕, 즉 만용이 외부적 위협과 만나 비겁한 자기기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베드로의 배반은 짐짓 필연적 귀결로 떠오르게 된다.
마가복음은 그의 그런 실상을 가급적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그의 허무한 비극을 예수의 숭고한 비극에 대조시키고 있다. 물론 그 배반에 이어 회개의 모티프를 삽입하고 또 그를 위시한 제자들을 향해서도 긍정적 희망을 몽땅 거두어들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희망은 장차 부활한 예수가 갈릴리로 가서 그들을 만나리라는(막 16:7), 좀 막연한, 또 제3자를 통한 간접적 메시지로 전달되고 있을 뿐, 그 희망의 실현은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이로써 베드로의 예수 배반이 지닌 비극성은 비극성으로 남는다. 더불어 예수의 수난이 지닌 비극적 에토스도 냉엄한 현실로 조명되고 있다. 그 비극성을 완화시키고 베드로의 실수와 오명에 대해 변명하는 일은 후대 작가들의 몫으로 전이된 것이다.
가룟 유다의 경우 - 소외와 좌절
가룟 유다는 자신의 사적인 이득을 위해 신앙의 절개를 팔곤 하는 모든 크리스천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또한 사소한 경우든 거창한 경우든, 한 번도 제대로 예수의 길을 따르지 못한 이후의 역사는 유다가 뒤집어쓴 혐의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예수의 죽음이 신학적으로 세상의 온갖 죄를 떠맡은 ‘속죄양’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면 유다의 경우는 그 의인의 죽음에 대한 동시대인의 수치와 모멸을 껴안은 채 고적한 광야에 패대기쳐진 ‘속죄염소’(scape goat)를 연상시킨다. 그만큼 그의 생애는 예수의 수난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비극적으로 명멸한다. 그렇다. 명멸(明滅)한다. 이후의 역사 속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이 휘황찬란하게 빛난다면 그의 초라한 이미지는 등급 낮은 별처럼 아련히 깜빡거릴 뿐이다.
그가 배반에 이르게 된 경로를 짚어보기 위해 먼저 그에게 후대에 뒤집어씌워진 악의적 폄훼의 이면을 들추어보자. 그곳엔 예수의 죽음을 초래한 근인과 원인을 깡그리 훑어내면서 그 비극적 죽음으로 인한 충격을 달래보고자 한 황망한 심사가 잘 반영되어 있다. 그 심사는 물론 과장되고 왜곡된 욕망의 프리즘을 통해 발현된 것이다. 이는 마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대형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이를 굳이 인재(人災)나 관재(官災)로 규정짓고 호들갑스럽게 그 원인제공자를 색출하여 처벌함으로써 민심과 여론을 잠재우려는 수법과 비슷한 경우다. 그렇게 해서라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과 그 가족들을 달래지 않으면 피차의 심기가 편치 않기 때문이다.
복음서보다 먼저 쓰인 바울 서신에는 가룟 유다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두루뭉수리 그를 포함한 ‘열둘’의 전승이 부활한 주의 나타남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한차례 언급되고 있다(고전 15:6). 물론 가룟 유다를 포함한 열둘이었겠지만 바울이 이 점을 꼼꼼히 의식했을 가능성은 적다. 그는 열둘이 지닌 역사적 사실성에 집착하기보다 이로써 표상되는 예수의 사역 구도와 교회의 전통을 떠올렸을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열둘조차 넘어야 할 벽이었다. 하물며 바울이 당대적 사역의 판도 속에서 싸우면서 그 열두 사도 등의 권위를 ‘거짓 사도들’ ‘사탄의 역군’이란 가능태로 판별했음에랴(고후 11:13).
이를 불온한 표현으로 여겼던지 일부 사본(D* F G latt)은 ‘열둘’(dodeka)을 후대의 복음서 기록(마 28:16)에 의존하여 ‘열하나’(endeka)로 교정하는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구를 고친 필사자의 내면에는 가룟 유다 같은 패륜아에게 예수가 나타났을 리 없다는 단정과 확신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가 그 열둘 가운데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예수가 그를 핵심 측근 가운데 하나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시종일관 그가 예수 집단의 사역에 동행했음을 방증한다. 심지어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그 만찬의 자리에도 유다는 동석한다. 민족주의적 감정이 뜨겁게 고조되는 그 유월절의 분위기에 예수의 암울한 앞길에 대한 복선은 예루살렘에서의 대규모 군중집회를 기대한 유다 등에게 찬물을 끼얹는 결과와 같았을 것이다. 아마도 여기서부터 유다의 고민이 본격화되었으리라 추리된다.
복음서에서 가룟 유다의 정체와 본심을 파악하는 데 적절한 진입로는 그의 이름 ‘유다’ 앞에 따라 붙은 별칭 ‘가룟’이란 말의 의미 해석이다. 먼저 이 단어가 단검으로 적대자들을 살해하는 자객 집단(이른바, ‘시카리’[Sicarii])과 연관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로써 유다가 젤롯당 출신임을 증명코자 한 것이다. 한편, 이 단어를 히브리어나 아람어의 어원과 접맥시켜 그 의미를 유다의 행적과 관련하여 풀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다. 그래서 나온 뜻인즉, 기만과 배신의 행적에 초점을 맞춘 ‘거짓된 자’(false one), ‘내어준 자’(betrayer) 따위이다. 그런가 하면 이 칭호를 그의 용모와 연관시켜 ‘빨간 머리’ ‘불그스레한 얼굴’을 찾아내기도 하고, 그의 직업과 연관시켜 ‘자색 염색공’ ‘과수 재배자’ 등의 전력을 추리하기도 한다. 또한 혹자는 이 칭호의 바닥에 그가 유대 지역 출신이었음을 입증하는 ‘케리옷’, ‘아스카롯’(또는 ‘아스칼’) 등의 지명을 추출해내기도 한다.
여기서 그 어떤 경우를 취하든, 가룟 유다는 사전에 예수 집단으로부터 소외될 여건이 충분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개연성의 순차대로 그가 왕년에 ‘시카리’ 집단의 일원이었다면 그에게 예수의 대중적 인기는 유대 민족의 독립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잠재력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것이 한때의 열정 끝에 남은 미련이었든, 아니면 여전히 유효한 잠복적 가능성이었든, 예수와 그의 관계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그 구현 방법에 대한 확인 과정으로 점철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어쨌든 그가 민족의 독립 운동에 의식이 깨인 것은 여타의 제자들과 비교하여 지적인 명민함과 시대감각이 특출하였음을 암시한다. 복음서에서 그의 역할은 늘 그늘에 가려져 있다. 예수와의 관계에서든, 제자들이나 외부인과의 만남 속에서든, 그는 이야기의 전면에 주인공으로 나서는 적이 거의 없다. 하여 그는 날카로운 관찰자의 입장에서 늘 진행되는 일들을 주시하고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의 특출한 시대감각이 사실과 일치한다면 그는 비교적 순진하게 예수를 따르던 여타의 제자들과 구별된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구별됨은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특출한 리더십을 보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젤롯당 배경은 유대(혹은 예루살렘)라는 지역적 배경의 차이와 맞물려 은근한 차별을 낳고, 당연히 핵심 측근들로부터의 소외를 부채질했을 것이다. 예수의 핵심 측근들이 갈릴리 출신 위주로 짜여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그 사역 또한 그 지역적 정서와 문화 감각을 대변했으리라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 가운데 가룟 유다의 위상이 어떠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 한 것이다.
그에게 재정 관리 책임이 맡겨진 게 사실이라면(요 12:7) 예수는 여타의 갈릴리 시골 출신과 다른 그의 도시적 현실 감각과 경영 능력을 높이 샀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이는 그의 그런 소외된 위상을 다소 추켜 세워주기 위한 예수의 정치적 균형 감각의 발로였을 가능성이 있다. 단순히 재정 관리 능력만을 따진다면 세리 출신인 마태(또는 레위)가 더 적격이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에서 상세히 설명되겠거니와, 그의 현실주의적 감각은 후대의 편자들에 의해 돈에 눈먼 자라는 편벽된 시각에서 부정적인 것 일변도로 해석되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예수를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긴 것이 단순히 돈 때문이었을까? 마가복음(14:11)은 그가 예수를 미끼로 돈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의 성사에 대한 대가로 추후 돈을 받기로 약속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돈은 그들간의 음모에 덤으로 추가된 부차적인 결과물일 따름이다. 그가 자색 염색공, 혹은 과수업자로서 겪은 생계의 곤란을 돈에 대한 탐욕과 연계시켜 그 넘겨줌의 행위를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합리적인 설득력을 띠지 못하는 듯하다. 이는, 그 신학적 단정의 강도에도 불구하고, 사탄이 유다 속에 들어가 그 행위를 사주했다는 후대의 해석만큼이나 역사적 개연성은 희박하다.
그렇다고 그의 그 넘겨줌의 행위를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사건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에겐 필시 그 일을 결행함에 앞서 주체적 판단과 그에 합당한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결정적 기회를 노리면서 그 시점을 향해 치밀한 준비와 동향 파악에 적잖은 신경을 할애한 흔적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참새가슴으로 그 동안 따르던 스승을 무턱대고 대적들에게 넘겨줄 수 있었겠는가. 그가 사전에 노린 것이 돈이나 명예가 아니었다면, 또 결행 과정에서 일시적 영웅 심리에 기댄 것이 아니었다면, 현실주의자답게 그에겐 이로 인한 정치적 충격과 그 파급 효과에 대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필경 공개 재판과 대중적 지도자의 재판과 처형이 몰고 오는 전시(展示) 효과, 또 군중들의 집단행동을 유발하는 선동 효과를 겨냥했으리라 판단된다.
그에게 축적된 사전 명분이 있었다면 예수가 택한 하나님 나라의 구현 방법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었으리라는 심증이 간다. 그의 현실주의적 시대감각에 비추어 예수의 길은 칼과 창으로 무장한 물리적 세력 앞에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이라는 판단이 들 법도 했다. 여기에 그의 출신 배경상의 소외감이 상승 작용하여 예수를 잡아 죽일 빌미를 찾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결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굳이 로마 군부에 호소하지 않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순간적 판단인즉, 아마도 현실적으로 무력한 대중 영웅인 예수를 숙청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유대의 민족주의적 열기를 고취하고 독립 운동의 선명성을 강조하는 것이었을 듯하다.
유다의 역할은 그러나 보기에 따라 예루살렘의 성전 세력과 그 주변부의 종교 지도자들을 지속적으로 질타해온 갈릴리의 한 이단자를 제거하려는 조직적 음모의 일환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율법의 해석과 적용이란 차원에서 별도의 입장을 지니고 있던 예수 집단과 그들 사이의 대립은 그간의 갈등상으로 미루어보아 어쩌면 불가피했을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싼 기득권 세력이 예수의 비판적 시각에 대해 위협을 느끼며 기민하게 대응했으리라는 점도 명백하다. 한편, 로마 정부는 그 입장이 다소 달랐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종교적인 문제보다 예수로 인한 소요 사태와 정치 질서의 문란에 더 촉각을 기울였을 터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토에서 유다는 딴에 가장 현실적인 상황 판단 끝에 나름대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상황의 희생자로 전락한 셈이다. 예루살렘의 종교 세력은 혁명이나 독립 운동을 지지하기엔 지나치게 기득권에 유착되어 있었고, 군중들은 메시아를 대망하는 열렬한 기대를 정치적 힘으로 결집하기에 지나치게 변덕스러웠다. 그 가운데 애당초 유다의 계산은 빗나갔다. 그렇게 그 선택이 결과적으로 오판에 근거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당사자인 유다에겐 참담한 회한이 밀려왔을 것이다. 더구나 예수 집단의 내부에서 유다가 예수를 예루살렘의 토착 종교 세력에게 넘겨준 그 주체적 행위는 필시 배신의 행위로 낙인찍혀갈 운명이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유다의 역설은 그의 그 ‘넘겨줌’의 행위가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사후 승인적 ‘넘겨줌’과 일치한다는 데 있다. 그 일치는 문자적인 일치(paradidomai)일 뿐 아니라, 결과론적인 일치이다. 가룟 유다의 넘겨줌을 ‘배반’으로 착색하고 하나님의 넘겨줌을 ‘구원의 은혜’로 읽는 것은 변신론적 이분법에 근거한 발상이다. 물론 여기서 세간의 상투적 의혹대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가 그의 십자가 죽음을 필연으로 만들었다면 그 역사의 일등공신이 가룟 유다였다고 추켜세울 것까지는 없다. 다만 그 넘겨줌의 행위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낙인찍혀간 이후의 역사적 궤적을 철저히 추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똑같이 예수를 배반했는데, 왜 후대의 역사 속에 베드로는 재기에 성공했고 유다는 천인공노할 역적으로 매도되었는가? 그들에게 그 배반 행위에 대한 통한과 회개가 있었다면 그 방식은 어떠했으며 그 차이는 무엇인가? 베드로와 유다를 포함하여 사도들의 저러한 실패담을 표 나게 내세운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와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후대의 해석 과정에서 베드로의 배반이 변명과 해명을 거쳐 사면으로 이어진 것에 비해 유다의 배반이 정죄와 저주를 거쳐 깡그리 무시되어온 극단적 행로는 예수 수난의 역사적 유산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무엇을 시사 하는가? 이 점을 조목조목 살펴보기 전까지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에 대한 전통적 선입관을 잠시 유보하도록 하자.
배반의 배반에 이르는 방식, 하나 - 치욕과 통곡
배반은 그 배반의 순간이 지나면 배반을 배반으로 인식하는 그 당사자에게 죄책감을 몰고 온다. 이와 정반대로, 그 배반을 정당화하기 위해 각종 변명과 구실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그 배반이 순수한 전향이 아니고, 또 사람이 그 대상으로 연루되는 경우, 그 뻣뻣한 자기 합리화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그 배반이 베드로의 경우처럼 얼떨결에 정신없이 이루어진 상황이든, 유다의 경우처럼 나름대로 숙고 끝에 내려진 결단이든, 그것은 배반의 대상자뿐 아니라 그 당사자에게도 깊은 상처의 골을 남기는 법이다. 그 상처는 결국 견뎌낼 수밖에 없는 실존의 자리이겠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그 흔적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상처를 당대의 문화적 환경은 수치와 명예라는 인식의 틀 속에 소화하고 있었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남자다움 또는 인간다움의 가치는 의리를 중시하고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염치를 구기는 짓을 삼가는 데서 추구되는 법이다. 반면 자신의 사익 추구와 보신에 눈이 멀어 명분과 의리를 저버리는 짓은 불명예와 수치로 낙인찍히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문화적 일탈로 인식되어 사회적 정치적 매장을 감수해야 하는 치명적인 오류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사적 맥락에 비추어 평소 추종하던 스승을 부인하거나 배반하고, 나아가 저주까지 하는 짓은 명예의 말살과 극도의 수치를 유발하는 하극상의 사건이 될 법도 했다.
베드로의 배반은 심정적이고 고백적인 배반이었다. 그만큼 소극적인 측면이 있지만 이는 정작 제자도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에 결정적으로 역행하는 처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그는 단번의 부인으로써 예수의 이 말만 배반한 게 아니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31)고 한 자신의 다짐을 배반했다. 예수 공동체의 주인공인 예수가 그 수제자의 입술에서 부인된 마당에 뿔뿔이 흩어진 다른 제자들의 처신은 차마 거론할 바 못 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그들은 한결같이 그 공동체 성원의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사제의 도를 거스른 패륜아란 수치의 낙인을 모면할 길이 없었을 터이다.
더구나 그가 어떤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있는지를 보라. 그의 부인은 빌라도 총독 같은 유력한 권세자도, 대제사장과 같은 근엄한 권위자 앞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갓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또 익명의 하찮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가짜 결백을 스승 예수를 향한 저주로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베드로의 삼중적 부인은 3이라는 숫자를 두루 애용한 마가복음 저자의 편집적 틀 속에서 재구성된 것이 분명하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베드로의 치명적인 실수가 사면 받을 길은 없는 듯하다. 다만 성서변증의 일환으로 가미된 인용구(막 14:27)와 증빙구(막 14:30)를 뒷받침하는 확인구(막 14:72)로써 닭울음소리만이 처연히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베드로에게 입술로 예수의 예수됨을 부인하고 자신의 자신됨을 포기한 것이 배반 사건의 핵자를 이룬다면 닭울음소리는 그 배반의 비극적 분위기를 고조하는 음향 장치로 기능한다.
먼저 베드로의 고통은 닭울음이 청각적으로 매개한 기억(anemnesthe)을 통해 다가왔다. 이렇듯, 기억은 고통의 뿌리가 된다. 무엇보다 그 기억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다짐한 예언의 기억일 터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방금 한 짓이 무엇인지 즉각 사태를 파악하고 배신을 배신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때 번득인 깨달음인즉, 당연히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그 짓이 예수의 제자도 가르침을 위반하고 자기의 장담을 무참하게 만들었다는 자각이었을 터.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자각은 예수의 예언을 올바르게 실현한 결과가 된 것이니,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마가의 편집적 복선과 마주친다.
그 고통이 한 기억으로 촉발되었다면 그 고통은 그 기억에 대한 상념으로 한층 더 심화된다. 그 통한의 상념은 베드로의 심리적 와해(epibalon) 속에 감추어져 있다.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그의 의식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만용으로 넘실대던 그의 장자 의식도 참담하게 훼손되었다. 스승에 대한 그의 유다르던 충절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기본 체통과 최소한의 자존심조차 구겨질 대로 구겨진 것이다. 긴장의 이완은 눈물을 부르고 그 눈물은 예의 통한어린 상념과 결합하여 통곡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당시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길, 자신의 배반을 배반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회개란 이름을 덧붙이는 것은 크게 틀리지 않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회개’의 ‘회’(悔)만이 표 나게 나타날 뿐, 아직 ‘개’(改)의 단계는 유보되거나 감추어져 있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이 어디 한순간의 눈물과 통곡으로 될 수 있을 터인가. 그것은 수난사화 속편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개될 후일담의 몫으로 남아 있다. 현재 베드로의 통곡은 아직 어떤 비난이나 연민의 구석도 남기지 않은 채, 치욕을 치욕으로 오롯이 제시할 뿐이다. 그 치욕은 베드로가 그 순간 겪은 내면적 수난의 대명사라 할 만하다. 꼭대기에서 밑바닥으로의 추락이라는 순환적 서사 구도가 이 지점에서 한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배반의 배반에 이르는 방식, 둘 - 회한과 자살
가룟 유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도 예수 수난의 희생자, 적어도 피해자라면 그 풍경은 어떻게 달리 드러나고 있는가. 애석하게도 마가복음은 가룟 유다에게 겟세마네의 그 배신의 입맞춤(막 14:44-45) 이후 어떤 기록도 보태고 있지 않다. 그러나 또 다른 전승 자료는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한 비감한 사연을 또렷이 들려주는 바, 마태복음(27:3-10)과 사도행전(1:18-19)에 그 내막이 다소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이 자료 가운데 어디까지가 전승된 부분이고 어디까지가 편집적 각색인지 갈라치기가 다소 버겁지만 두 자료를 면밀히 비교, 검토해보면 그 대강의 이음매가 드러난다.
이 두 에피소드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룟 유다에 대한 전승 정보의 기본 단위는, 첫째 가룟 유다는 예수의 죽음을 전후하여 급작스럽게 죽었다는 사실과, 둘째 그 급작스런 죽음은 그의 종전 행실에 비추어 지당한 것이었다는 항간의 해석이다. 그 해석은 가룟 유다의 죽음을 비참하게 재구성하는 차원에서 ‘아겔다마’(=피의 밭)에 얽힌 ‘기원론적 전설’(etiological legend)과 결합되고 그 두 전승의 접착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성서(슥 11:12-13; 렘 18:1-3; 시 69:25)의 인용과 변증이 곁들여진 것이다. 그의 비극적 죽음은 마태복음(27:5)에 의하면 목매달아 자살하는 방식을 취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도행전(1:18)에서는 이와 좀 달리 거꾸러져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져 나와 죽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두 기록을 조화롭게 포개어 읽으려는 시도가 전통적으로 장려되어 왔다. 그가 목매달았지만 채 죽지 않은 상태에서 거꾸로 떨어져 내장 파열로 사망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비평의 이전 단계에 속하는 단순한 독법일 뿐이다. 비평적 검토에 비추어 마태복음의 기록을 좀 더 역사적 사실성에 접근하는 것으로 취한다면 그가 취한 자살의 동기와 경위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자료 비평적 시각에서 그가 자살에 이른 패턴은 다윗을 압살롬에게 넘겨주기 위한 모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스스로 목매달아 죽은 아히도벨의 경우(삼하 15-17)를 연상시켜준다.
실제로 자살은 어거스틴에 의해 교리적으로 정죄되기 이전에 반드시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은 아니다. 그 죽음의 방식뿐 아니라 그 명분을 문제 삼은 까닭이다. 특히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자살은 구차하고 수치스러운 삶을 택하기보다 명예롭고 고귀한 죽음을 택하는 극단적인, 그러나 자율적인 선택으로 옹호되기도 했다. 심지어 고귀한 죽음으로서의 자살을 ‘자기 신격화’(self-divinization)의 시각에서 승화하고자 한 경우도 없지 않다. 자기 신격화까지는 못 될지라도 사도 바울조차 수감 생활의 가혹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극단적 방편으로, 동시에 하나의 명예로운 선택으로, 자살에 관해 고뇌한 흔적을 내비치기도 한다.
유대교 전통에서 자살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불경이라는 신앙 고백적 사고의 결과였다. 하여 자살로 죽은 자는 사후 세계에서 가장 심한 암흑 속으로 떨어져 벌을 받거나 그 부정적 영향이 자손들에게 미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자살로 죽은 시체를 해질녘까지 파묻어 주지 않은 율법 조항이 언급될 정도였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로, 그레코-로만의 이해 방식처럼 치욕스런 구차함을 모면하기 위한 영웅적 행위로 자살이 암묵적으로 용인된 예도 없지 않다(삼손, 아히도벨 등). 또한 무죄한 피를 흘린 것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서, 저주를 방지하는 제의적 처방으로서, 자살의 신학적 가치가 거론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자살에 그러한 속죄적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대목이 그가 예수의 정죄 장면을 보고 무죄한 피를 팔아넘긴 죄를 고백하며 은 30(세겔?)을 되돌려주었다는 기록이다. 마태복음의 그 기록(27:3-5)은 유다에게 나름의 뉘우침이 있었음을 명시해두고 있다. 그때 그 ‘뉘우침’(metamelesthai)의 속성에 관하여는 다채로운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이 단어가 ‘회개’를 일컫는 일반적인 표현(metanoein)과 구별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 역시 베드로의 경우처럼 통한의 뉘우침은 있었을지언정 아직 마음을 고쳐먹고 갱생의 길로 가는 데까지는 못 미친 것이다. 그가 거기까지 나갔다면 죄에 대한 고백과 뉘우침 이후 먼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아닌 예수를 찾아가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 자기 회복의 수순을 놓친 채, 그는 그 통한의 후회와 죄책감 속에 스스로를 영영 묻어버렸다. 이어지는 자살이 그 증거이다. 자신의 일시적 선택에 대한 통한의 감정을 다스리고 자기에의 배려 차원에서 대안적 삶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냉철한 이성의 몫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것을 회복하여 긴 여생으로 보답하기보다 짧고 굵은 자살의 길을 택해 수치심을 단번에 벗어던진 것이다. 후일 베드로가 새로운 삶의 도전 가운데 거듭나서 예수의 큰 사도가 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 두 사람 모두 자신이 택한 길에 대한 치열한 자의식이 있었고 그것이 허위로 들통 나자 절통한 심정으로 뉘우쳤다. 다만 그 뉘우침의 방식, 즉 종전의 배반을 뒤집어 다시금 이를 배반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을 따름이다.
여하튼 그 둘은 똑같이 배반했고 똑같이 뉘우쳤지만, 한 사람은 불세출의 사도로 숭앙되고 다른 하나는 천하에 둘도 없는 변절자로 낙인찍히는 운명으로 갈라졌다. 다소 편파적인 듯한 이 후대의 평가는, 부분적으로 예수의 체포와 죽음에 직접 개입한 가룟 유다의 배반과 내면적으로 배반한 베드로의 배반 사이의 차이에 기인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그 두 당사자가 택한 배반의 배반에 이르는 방식의 차이가 더 밀접히 연관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쪽이 배반의 섬뜩한 순간을 통곡으로 부수어버린 뒤 그 통곡을 넘어섰다면 다른 한쪽은 배반으로 인한 심리적 회한에 시달리다가 아예 죽음의 망각으로 도피한 셈이다.
통곡이나 뉘우침은 감정적인 폭발의 결과로 심리적 와해와 그 정화 작용으로 인한 긴장의 이완 효과는 제공한다. 그러나 그 속에 함몰할 때 새로운 출발을 위한 굳센 의지와 결단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한다. 그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격앙된 치욕과 통한의 감정이 가시고 난 뒤 차분하게, ‘그러면 이제 앞으로는 무엇을 어떻게?’를 묻기 시작해야 한다. 이는 회개의 목적이 단순히 감정의 일시적 폭발이나 자기 연민에의 도취가 아니라 결국 삶을 긍정하는 방향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함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의 그 회한에 담긴 진정성은 스스로 택한 극적인 죽음의 연출로 검증된 것이니 함부로 폄훼할 바 못 된다. 물론 그의 자살에 대한 신학적인 비판은 가능하다. 또한 그가 갱신의 삶으로 거듭 나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버렸기에 그의 죽음에 내장된 진정성이 반감된다고 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는 것은 그와 베드로의 배반과 그 배반의 배반을 둘러 싼 선택이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선과 악의 이중적 모습으로 괴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마태복음(27:3)의 기록대로 그의 회한이 예수의 정죄 사실을 목도한 끝에 유발된 것이라면 재판정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예수를 지켜본 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유다인 셈이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는 그들이 스스로 뼈저린 자기 전복을 통해 배반의 배반에 이른 그 방식의 진정성을 그 둘이 처한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공정하게 평가해주기보다 그들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양극화시켜버리고 말았다. 마치 이순신 장군을 흠없는 불세출의 성웅으로 과잉 포장하기 위해 그 공과를 촘촘히 따지지도 않은 채 원균을 천인공노할 역적 일변도로 매장한 한 시대의 역사 해석처럼 말이다.
양극화의 길, 하나 - 사면과 복권
예수의 수난에 즈음한 그 통곡과 자살의 해프닝이 태풍처럼 지난 뒤...세월은 베드로와 가룟 유다에게 각각 지나치게 관대하고 지나치게 매정했다. 마가복음에서 그토록 냉혹하게 베드로의 배반을 이야기하던 냉엄한 어조는 이후 복음서의 편집사를 거치면서 유들유들하게 변해갔다. 반면, 가룟 유다의 굵고 짧은 선택은 갖은 악의적인 재해석과 인신공격 속에 좀처럼 변명의 기회를 얻기 어렵게 되었다. 그가 그토록 지독한 치욕 가운데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택한 그 죽음의 명분은 깡그리 사라지고 그 추태만이 만고의 스캔들로 그의 이미지를 채색해온 것이다.
먼저 베드로는 이미 마태복음부터 그 대접이 남다르다. 가령 저자는 한 특수 자료를 통해 베드로가 예수처럼 바다 위를 걷다가 물속에 빠진 다음 구조되는 이야기를 전개시킴으로 그의 용맹무쌍함을 독자들에게 확인시킨다(마 14:28-31). 또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 끝에 예수의 과분한 칭찬(“바요나 시몬아 너는 복이 있도다”)과 약속(“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과 선물(“내가 너에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을 무더기로 받는다. 이 모든 새로운 기록들이 베드로의 위상을 드높여줌으로써 앞으로 나올 그의 배반에 예변적 중화 장치로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뒤 베드로의 울음은 마태복음에서 쓰라린 정서(pikros)를 동반하는 통곡으로 한층 더 강조되어 나온다(마 26:75). 부활 이후엔 그의 부인과 배신 그 자체가 아예 망각의 늪에 가라앉아 버린다(마 28:16-20).
누가복음의 경우도 베드로에 대한 해명적 어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제자들을 뽑는 단계에서부터 그는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할 뿐 아니라(눅 5:8) 이에 대한 사면조의 격려를 예수로부터 미리 듣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눅 5:10). 베드로의 위상이 선험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대목이다. 누가만의 독특한 베드로 살리기 전략은 베드로를 향한 예수의 유다른 중보기도와 위탁의 말씀 속에서도 명백히 확인된다: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사탄이 밀처럼 체질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눅 22:31-32). 베드로를 위한 예수의 그 중보기도는 산헤드린 마당에서 침묵의 응시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째 부인하고 닭이 우는 그 순간, 예수는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베드로를 쳐다본 것이다(눅 22:61). 이는 단지 예수의 예언이 성취됨을 전하는 응시로만 볼 수 없다. 오히려 배반한 베드로를 향한 변함없는 예수의 관심과 격려를 확인하는 문학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베드로가 예수를 배반하기도 전에 미리 그의 회개를 전제하면서 용서한다. 더구나 그 뒤에 떠맡아야 할 사명까지 부여하고 있다. 또 최악의 처지에서도 그를 향한 따스한 관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예수의 지극한 정성을 첨가해둔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약속을 이행하기라도 하듯, 예수는 부활 후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 그 용서와 사명을 확증할 뿐 아니라 제자들을 대표한 리더십까지 보장하고 있다(눅 24:34). 그 이후 사도행전이 증명하듯, 베드로는 거듭난 열둘의 수장답게 당당히 복음을 선포한다. 또 바울 서신이 추인하듯, 기둥 사도들의 한 축에 걸맞게 그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구축과 선교 사역을 위해 종횡무진 활약한다. 심지어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 성령 충만한 교회의 지도자로서, 이전의 예수 부인에 얽힌 악몽을 극복하고 이제 예수를 부인한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는 위치에 선다(행 3:13). 예수를 부인한 자가 예수를 부인한 자들을 고발하는 자로 역전된 것이다.
이에 비해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의 위상은 다소 미묘하다. 이 복음서의 초반에서 중반까지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 매사에 표 나게 앞장서는 수제자라는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는 예수를 만류하는 대목에서 그의 그런 모습은 요한복음에만 제시되어 있는 터라 자못 인상적이다(요 13:36-38). 그러다가 13:23부터 익명으로 등장하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베드로는 다소 꿀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요 18:15-16; 20:2-10). 그 익명의 제자의 정체에 관해서는 여러 추리가 있지만 신학적으로 이는 요한 공동체가 창출한 이상화된 제자상을 투영한 것으로 보아 족할 것이다. 베드로의 그간 여러 실수들을 회고할 때, 그를 제자도의 최선의 본보기로 삼는 게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베드로의 예수 배반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 이를 기록하면서도 그가 닭울음소리와 함께 통곡한 사실은 은근 슬쩍 비껴가고 있다. 일종의 베드로 영향력 감퇴하기 전략이랄까. 혹은 베드로계 제자 그룹을 견제하여 요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수립하기 위한 전술이랄까. 그러나 그 전략과 전술에 피차 주고받은 대가가 없을 리 없다. 베드로의 통곡을 비껴가는 대가로 저자는 그가 예수를 저주한 대목을 아울러 생략해줌으로써 은연중 그가 예수를 부인한 강도(强度)를 약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막강한 이상적 제자상의 출현과 베드로 넘어서기란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활한 예수와의 해후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돈독한 신뢰를 얻고 있다. 사랑받는 예의 제자가 걸어갈 행로와 별도로, 예수로부터 그의 양을 먹이고 치라는 특명을 부여받을 정도로 말이다(요 21:15-19).
이렇게 후대의 역사를 통해 베드로는 충분히 사면되고 복권되었다. 하여 베드로전서에서 그는 예수 대신 그의 양을 치는 ‘목자’(벧전 5:1-4)로서 당당히 그의 위상을 시위하고 있다. 베드로후서에서 그는 역사적 예수의 전통을 목도한 진정한 증인으로(벧후 1:16-18),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의 수호자요 거짓 예언자들의 비판자로(벧후 2:1), 또한 바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는 권위 있는 교계의 원로로(벧후 3:14-16) 자리매김 되고 있다. 바울이 지니고 있던 박해자로서의 그 전력에 대한 죄책감이나 씁쓸한 회한 따위는 이미 과거지사로 망각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신약성서 이후 또는 외부의 일부 기록에서 베드로의 그 쓰라린 과거가 회고되는 경우가 더러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예전의 그 부정적 비극성을 탈각한 상태에서 오히려 베드로를 변호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베드로행전’에서 베드로의 배반은 사탄이 주께서 큰 영광 가운데 붙잡아준 자신을 압도한 결과로 해석된다. 그렇게 대단한 나 베드로까지 사탄이 압도했으니 신참내기 신앙인들이야 어떠하겠느냐는 것이다. 아울러 그의 통곡에 관해서도, 그것이 마귀에 속아 주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 결과로 말미암은 연약한 믿음에 대한 통곡이었음을 부연해두고 있다(벧행 7:20). 인간적 결핍이나 실존적 치욕보다는 신앙적 부족이 그 통곡에 대한 변명의 사유로 제기된 셈이다.
또 다른 민담에는 어느 두 병사가 천국 문 앞에서 거절당하자 베드로에게 그가 예수를 부인한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베드로의 연약한 배반이 다른 연약한 자들의 천국행을 보장하는 동정적 기능을 수행한 셈이다. 예수를 배반한 베드로의 어리석음을 전하는 또 다른 후대의 이야기는 베드로가 예수와 같은 여관 한 침대에서 잠자고 있는 장면을 제시한다. 술 취한 여관 주인이 와서 베드로를 때리자 베드로는 예수와 잠자리를 바꾼다. 그런데 그 주인이 다시 돌아와 다른 숙객을 때릴 때 또다시 베드로가 그 피해를 입는다. 이 이야기에서 베드로의 예수 배반이란 모티프는 해학적 분위기에 휩싸여 한갓 우스갯거리로 나타날 뿐이다. 그 비극적 면모는 송두리째 탈색된 채.
이 모든 사례로써 우리는 베드로의 그 배반을 통곡으로 뒤집은 연후 어떻게 후대의 교권과 민중의 영웅 심리가 그 사밀한 회개의 진정성을 뒤로하고 다시금 그 의도를 배반하였는지 그 일단의 내력을 더듬어볼 수 있다. 그 결과 베드로에게 사면과 복권, 더 강성한 리더십이 부여되었다. 반면 그 과장되고 편벽된 해석의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상실된 것은 정작 그때의 치욕과 싸우며 견뎌온 그의 굳은 의지와 내면적 진실이었을 터이다.
양극화의 길, 둘 - 저주와 외면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의 돌연한 죽음은 항간에 이를 둘러싼 여러 가지 악의적 풍문을 유포시켰을 것이다. 예수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도한 당시의 군중들에겐 그 ‘무죄한 피’에 대한 죄책감을 전가하고 공범 의식을 잠재워줄 동네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유다는 사후승인적 단정을 통해 저주받은, 아니 아예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매도되기에 이른다.
그러한 단세포적 이미지 창출을 위해 구체적으로 복음서 기자들은 유다가 돈에 매수된 자였음을 부각시킨다. 앞서 살핀 대로, 마가복음에서 유다의 배신행위는 돈을 담보로 한 거래라고 보기 어렵다. 돈은 예수를 산헤드린 공회에 넘겨주는 유다의 그 행위에 대해 대제사장 그룹 쪽에서 사의조로 약속한, 말하자면 부대적 결과로 묘사될 뿐이다(막 14:11). 그러나 마태복음서의 저자는 이 소재를 확대하여 그가 받은 은 삼십이 예수를 넘겨준 것에 대한 대가성 사례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편집한다(마 26:14-16). 요컨대, “내가 예수를 넘겨주면,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라는 물음은 분명히 금전적인 보답에 대한 그의 적극적 기대를 반영한다. 시쳇말로 돈에 환장해서 스승을 판 자로 유다의 초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도 유다의 부정적 초상은 일관되게 제시된다(마 26:20-25). 이미 예수를 돈에 팔기로 작정한 마당에 유다는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날 배반하리라”는 예수의 말을 “랍비여, 진정 나입니까?”라는 뻔뻔스런 물음으로 응대한다. 이 정도면 그는 거의 파렴치한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렇게 파렴치한 그의 이미지는 겟세마네의 체포 장면에서 예수에게 입 맞추면서 그 키스를 통해 예수를 넘기는 기만적 행동에서 극적으로 재현된다(마 26:49). 그의 그 배신은 여전히 우호적인 예수의 반응-‘친구여’-와 대조되면서 더욱 진한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여기서 그 대조는 배신한 친구를 여전히 친구로 여기는 관용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우정을 거두지 않는 자를 끝내 기만하는 후안무치 사이의 상극적 대조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보인 그 한없는 관용의 틈새로 은근히 무서운 독기를 뿜어대고 있으니 다음과 같은 저주가 바로 그 일례이다: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마 26:24). 여기에는 견디기 힘든 삶을 염세적 시선으로 응시하는 예레미야나 욥기 류의 비극적 탄식이 잠재되어 있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이 땅에 모든 생명을 내시되 귀하게 지으신 그 창조적 섭리에 대한 거역의 의지를 함유한다. 익명의 대상으로 포장되었지만 예수의 입술을 통해 제시된 예의 진술은, 그러니까 극단적 노여움 가운데 내뱉는 ‘너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는 식의 악담보다 더 가혹한 정죄요, 저주의 언사인 셈이다. 이렇듯, 가룟 유다는 한순간의 그 배신행위로 인해 그의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 심지어 탄생의 의미 그 자체까지 무참하게 난도질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은 가룟 유다를 사탄과 야합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눅 22:3). 누가복음의 서사구도에 따르면 예수를 유혹하는 데 실패한 사탄은 그를 일단 떠났지만 훗날을 기약한 바 있다(눅 4:13). 그 훗날이 언제인지는 바로 가룟 유다를 통해 분명해지는데, 그 날인즉 바로 그 속으로 사탄이 들어가 예수를 족치기 시작할 때와 일치하는 것이다. 겟세마네의 체포 장면에서 유다는 어둠을 몰고 온 세력(눅 22:53), 즉 대제사장들, 성전 수위대장들, 장로들의 인도자로 등장한다. 마태복음(26:49)과는 달리 여기서 유다는 채 입 맞추기도 전에 예수로부터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려고 하느냐?”는 식의 쑥스러운 공박을 당한다. 저자는 유다처럼 악독한 배반자가 예수의 입술을 훔치는 위선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어둡고 추한 유다의 초상은 사도행전으로 이어져 그의 비참한 죽음을 장식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사도행전(1:16-20)에서 그의 죽음은 거꾸러져서 내장이 터져 추저분하게 죽은 것으로 묘사된다. 마태복음에서 대제사장들이 되돌려 받은 그 돈이 ‘피값’(마 27:6)인데 비해 여기서 그 돈은 ‘불의의 삯’(행 1:18)으로 조금 달리 표현된다. 또한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 돈으로 ‘피밭’을 산 것은 유다가 자살한 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결정에 따른 것이지만 누가는 유다가 친히 그 밭을 산 뒤 거기서 죽은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즉, 마태복음의 경우처럼 유다는 자신의 배반 행위에 대한 통한의 마음으로 그 불의의 삯을 되돌려주지도 않고 버젓이 토지 매입에 사용한 것이다. 유다의 불의한 짓이 한 꺼풀 더 덮씌워진 격이다.
그래서 그 밭에서 죽은 그의 죽음은 목을 매 죽는 마태복음의 그 자살처럼 깔끔한 뒷맛을 남기지도 못한 채 터진 내장을 통해 더러운 냄새를 풍긴다. 동시대인들에게 내장이 터져 죽는 것은 사탄 혹은 마귀가 그 속에 들어간 뒤 밖으로 나오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이해되곤 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의 묘사는 가룟 유다와 사탄의 결탁을 시사한 누가적 발상에 잇닿아 있음에 틀림없다. 뿐 아니라, 사도행전이 제시하는 유다의 죽음에는 사악한 자가 죽는 불결한 죽음이라는 유형화된 양식이 변용되어 나타난 측면도 없지 않다.
가령, 악한 자를 하나님이 징벌하는 방식에 관하여 ‘그 몸을 발기발기 찢어버림으로써 쭉 뻗어 잠잠하게 만든다.’는 발상(솔로몬의 지혜서 4:19)이 그 한 예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을 훼파한 자로 악명 높은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가 나자빠져 그 몸이 썩어버렸다는 식의 묘사(마카베오2서 9:5-10)에 비추어 보면 사도행전이 그리는 가룟 유다의 죽음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게 죽는 죽음은 불결하고, 또 그렇게 불결하게 죽은 유다 같은 자는 태생적으로 스승 예수를 팔수밖에 없는 패역한 자라는 식의 결정론적 순환 논리가 여기에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도 그러한 결정론적 사고 패턴에 있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유다는 일관되게 ‘예수를 넘겨준 자’라는 별명으로 호칭된다. 열둘 중의 하나로 그를 묘사할 때조차도 그는 ‘마귀’로 일컬어지며 예외적인 취급을 받는다(요 6:70). 단순히 나중에 마귀가 그 속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 초기부터 그는 마귀 자체였던 것이다. 이미 들어간 그 마귀가 유월절에 즈음하여 유다에게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집어넣어준 것이다(요 13:2).
예수의 발에 향유를 쏟아 붓는 에피소드(요 12:1-9)에서 그 아까운 기름 낭비를 탓한 제자들은 여기서 다수가 아닌 가룟 유다 한 사람으로 축소된다. 재정 담당으로 등장하는 그에게 기름이 아까운 것은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 때문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유추하여 저자는 그가 그 동안 공동 자금을 사적으로 착복한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그때 마태복음의 경우처럼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기로 작심한 것이 돈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나아가 예수의 체포 장면(요 18:1-14)에서 유다는 마태복음의 해당 기록과 달리 입맞춤을 통한 순간적 교제도 없고, 누가복음의 경우와도 달리 입 맞추기 위해 접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병들을 이끌고 와서 그들로 예수를 붙잡게 하고서는 멀찌감치서 이를 지켜볼 뿐이다. 예수는 빛의 아들로 어둠의 자식인 유다를 상종조차 않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그가 로마 군인 한 떼까지 데리고 왔다는 기록을 보태고 있다. 그렇다면 유다는 단순히 스승 예수를 판 변절자일 뿐 아니라 로마 군대와 내통한 민족 반역자 축에 드는 것이다. 젤롯당원에서 민족 반역자로의 변신이라...? 요한 류의 해석적 착색은 이토록 가혹하다.
그 뒤로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늘 불온한 그림자로 머물렀다. 악역이나마 빌라도처럼 사도신경에서 그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았다. 그렇게 교회로부터 그는 격리되었고 배제되었고 철저히 외면되어온 것이다. 그가 거론된 경우라 하더라도 십중팔구 부정적인 맥락에 한정될 뿐이었다. 가령 신앙의 변절자가 어떤 끔찍한 대가를 치르는지, 마귀의 덫에 걸려 이용당한 불운아의 초상이 어떠한지, 그 부정적 본보기로 제시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그가 예수의 사역에 동행하던 시절, 천덕꾸러기 신세로 그려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예컨대, 한 후대의 전설 조각에서는 떡을 나누는 기적의 자리에서도 그는 다른 제자들과 떨어져 있고 군중들에게 나눠 줄 떡도 받지 못한 열등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렇게라도 언급되는 것이 감지덕지라고나 할까. 설상가상으로 유다는 어린 시절부터 마귀에 사로잡혀 있었으며(아랍어 유년기 복음서 35), 사후 예수와 지옥에서 만나 긴 꾸지람을 듣고(바돌로메의 그리스도 부활서), 그가 범한 서른 가지의 죄상이 낱낱이 폭로되며, 헤롯왕과 가인과 더불어 끝까지 지옥에 남아 있는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꼽히고 있다. 더욱더 괴상망측한 것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기 전 뱀의 형상으로 된 마귀를 경배했으며 이로 인해 지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전설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나중에 예수를 만나 속죄한 이후에도 광야로 들어가 마귀를 경배하는 등 구제불능의 존재로 그려진 바 있다(안드레와 바울행전).
무엇보다 섬뜩한 유다의 부정적 초상은 그의 죽음을 묘사한 파피아스(Papias)의 다음 회고담을 통해 제시된다:
유다는 이 세상에서 그의 평생을 불경의 거대한 본보기로 살았다. 그는 육신이 부어올라 마차가 쉽게 다닐 수 있는 곳을 지날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지나치게 큰 그의 머리 하나조차 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의 눈까풀이 어찌나 퉁퉁 부었는지 빛을 전혀 볼 수 없었다고. 또한 그의 눈이 피부 밑으로 푹 꺼져버려 눈 전문가의 연장으로도 탐색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그의 성기는 수치스럽기 짝이 없어 쳐다보기에 께름칙하고 혐오스러웠다. 치욕스럽게도 몸의 곳곳에서 운반된 것이 성기를 통해 배설될 때 고름과 벌레들까지 쏟아냈다. 이와 같은 숱한 고통과 징벌을 받은 뒤 그의 삶은 그의 밭떼기에서 마감되었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이 밭은 그 악취로 인해 지금까지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으로 남아 있다. 정말로 지금까지 아무도 손으로 코를 쥐지 않고는 그곳을 지나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만큼 그 육체로부터 흘러나온 것들이 엄청났고 그래서 [그 악취가] 이 땅에 두루 퍼진 것이다.
이보다 짧은, 또 다른 전승은 유다가 퉁퉁 부은 비대한 몸집으로 마차에 치여 그 내장이 터져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나마 가룟 유다에 대한 최소한의 동정심을 표한 교부는 오리겐(Origen) 정도이다. 그에 의하면 그의 자살은 벌거벗은 영혼이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구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해석은 영원한 징벌을 믿지 않은 그의 교리적 성향과 연루되어 있다. 그가 예수를 배신하기 전에 집에 가서 그 계획을 놓고 아내와 상의했다는 전설도 있다. 아내는 이를 만류했지만 그가 기적을 통해 예수가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는 확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빌라도행전). 그가 나름의 돈독한 믿음으로 예수를 넘겼다는 말이다.
한편 신학적인 필요성으로 인해 가룟 유다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인류의 구원을 중개한 봉사자로 높이 평가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행위를 제의적으로 기념하고 ‘유다복음서’를 성서로 읽었다고 한다. 영지주의적 교리 체계에 따라 유다 홀로 진리를 알고 그 배반 행위로써 하늘과 땅의 것들을 분리시키는 대업을 완수했다고 믿은 연고이다.
이렇듯, 그들은 유다의 배반 속에서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적 ‘신비’를 보는 독특한 안목을 보여준 것이다. 그 덕분에 살아생전에도 그는 마태와 마리암과 더불어 정상적이고, 호기심 많은 제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마귀와 동일시된 그에게 이렇게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해준 것은 눈물겹도록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어쩌랴, 그들은 정통 교회의 주변부에서 역시 마귀적으로 정죄된 이단 집단인 것을. 마귀 집단이 유다에게 부과된 마귀의 탈을 벗겨 준 형국이니, 그 아이러니는 심오하다 못해 괜스레 껄끄럽게 느껴진다.
내성(內省)을 위한 사족
그렇게 후대의 역사는 베드로를 걸출한 사도로 부활시킨 반면 유다를 사악한 마귀적 존재로 퇴락시켰다. 그리고 그 극단적 이미지 속에 그들의 초상을 증폭시켜 나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실존적 고뇌와 탄식, 육성의 울부짖음은 몇 가지 특징적 제스처로 요약되었고, 그 요약은 상투적 이미지로 고착되어 내내 존속되어갔다. 베드로는 한 번의 통곡으로 이후 순교하기까지 당당히 회생했지만 유다는 그 설욕의 죽음으로도 재기하지 못했다. 특히 죽음을 담보로 한 유다의 속죄 고백은 사소한 것으로 외면되었고, 그 죄의 결과에 대한 책임만 엄중하게 부과되었다. 그런 가운데, 당연히, 유다는 교회로부터 추방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는 그 원죄적 오명과 압살에서 비롯된 역사적 소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그 누구의 목소리를 빌어서라도 한마디의 변명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영지주의자들이란 원군이 있었지만 그들의 후원은 흙 묻은 걸레로 마루를 닦는 격이었다.
근세기에 그를 동정하여 되살리고자 애쓴 자들은 거룩한 목사나 신부가 아니다. 신실한 교인들도 아니다. 소수의 신학자와 작가, 시인, 화가들이 있을 뿐이다. 신학적으로 그의 행적은 하나님의 절대 섭리와 인간의 자유 의지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숙제를 남겨주고 있다. 또 문학과 예술 세계에서 그는 인간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실존의 미로를 비추어주는 내성의 거울로서 이따금 조명되어왔을 따름이다.
예수의 수난을 보면서 베드로와 유다의 수난이 지닌 진정성을 보지 못한 맹목적인, 또 사나운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지금도 물론 있다. 그들은 그간 예수를 죽인 죄의식을 유다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모든 유대인들에게 그 누명을 뒤집어씌워온 것이다. 베드로는 그나마 제도권의 사도로 재기했지만 유다의 초상은 이처럼 특정 종족 혐오주의와 배은망덕의 대명사로 여전히 망령처럼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눅 23:34)라는 예수의 기도가 무색할 정도로. 마치 그 기도의 혜택을 받을 대상에도 마치 예외적인 존재가 있다는 듯이.
내가 누구를 대단하게 생각하여 과도하게 추켜세우고자 한다면 나를 그렇게 유도하는 욕망의 동인은 무엇일까? 단순히 열등감의 은닉일까? 영웅 심리에의 편승일까? 혹은 내가 특정 개인을 인간 이하로 폄시하고 비난, 매도, 정죄한다면 그 욕구는 또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월감의 과시일까? 그저 순간적 정의감의 토로일까? 나는 왜 사표(師表)를 말하고, 모범을 논하며, 역사의 교훈을 따지려드는가? 나 또한 승자들의 축제인 텍스트의 역사를 은연중 정당화하고 미화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치욕과 저주의 파노라마 속에 일탈되고 배제되고 외면된, 그래서 참혹하게 죽어간 그 패배자들을 나는 한 번 죽이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 편한 망각의 역사를 또다시 망각해버리려는 욕망의 책략은 아닐까? 사건과 체험과 풍문을 되새김질한 역사적 해석들을 나는 한 번 되새김질해보지만, 그 뒤안길엔 여전히 잔인하고 음험한 승자들의 욕망만이 득실거린다. 내 영혼의 날씨는 오늘도 구질구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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