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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 옥황상제님은 누구이신가?
두 번째 창도주(創道主) 조정산(趙鼎山) 옥황상제(玉皇上帝)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어느 날 하늘로부터 불빛이 밝게 자기에게 비치더니 그 후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낳으니라.
이 아기가 장차 상제의 공사를 뒤 이을 도주이시니 때는 을미년 십이월 초나흘(十二月四日)이고 성은 조(趙)씨이요, 존휘는 철제(哲濟)이요, 자함은 정보(定普)이시고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며 탄강한 곳은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慶南咸安郡漆西面會文里)이도다. 이곳은 대구(大邱)에서 영산ㆍ창녕ㆍ남지에 이르러 천계산ㆍ안국산ㆍ여항산ㆍ삼족산ㆍ부봉산으로 연맥되고, 도덕골(道德谷)을 옆에 끼고 있는 문동산ㆍ자고산의 아래로, 구미산을 안대하고 있는 마을이로다.(교운2장1절)
회문리는 동쪽에는 작대산이 마주보이고 마을 앞에는 광려천이 유유히 흘러 앞으로 문인(文人)이나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회문(會文)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곳 회문리에서 탄강하신 도주님은 자라면서 그 음성이 웅장하고 안광이 부시어 범의 눈초리와 같고 목은 학의 목과 같고 등은 거북의 등과 같고 이마가 해나 달과 같이 빛이 나서 관상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랐다.
경상도 대야지
제자가 여쭈기를, 시속에 경상도 대야지 노래가 있으니 무슨 뜻입니까?
말씀하시기를, 경상도에 세상을 고칠 큰 다스림이 나오느니라 하시니라.(이중성 천지개벽경4편5장)
*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에 탄강하실 도주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상제님께서 진인을 찾아 보시다.
1903년(계묘) 겨울 어느 날 보경 등의 종도들이 모시고 앉아 있는 자리에서 혼자 말씀으로
『내 일이 어찌 이렇게 더디냐.』하시니라.
보경이 여쭈기를 『무엇이 그리 더디나이까?』하니
『내 이제 신명을 시켜 진인(眞人)을 찾아보니 아직 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 지라.
내 일과 때가 이렇듯 더디니 어찌 딱하지 않으리요.』 하시니라.
보경이 다시 그러하오면 『저희들은 모두 쓸모없는 사람이요, 또한 지금까지 헛되이 따름이오니까?』하고 아뢰니
상제님께서 『체유기체 용유기용(體有其體 用有其用, 체에는 그 체가 있고, 용에는 그 용이 있음)이며, 시유기시 인유기인(時有其時 人有其人, 때에는 그 때가 있고 사람에는 그 사람이 있음) 이니라.』 하시니라.(진경3장59절)
상제님의 뒤를 이을 진인이 1903년에 아홉 살이라면, 진인은 1895년 을미년에 태어나야 합니다.
몇몇 종도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진 이 일화는 상제님께서 재세시에 이미 종통계승자를 따로 정하셨고 을미생임을 명확히 하셨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속의 민요에서 ‘조을시구’라는 후렴구가 조을(趙乙)과 시구(矢口)로 풀어 ‘조씨 을미(乙未)생을 알아라.’는 뜻으로 해석됨도 상제님께서 안배하신 종통계승의 천부적 신성성을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내 덕을 펼 사람은 지금 초립동년(草笠童年)이니라
하루는 대흥리에 계시더니, 제자가 명을 받고 삿갓을 사와서 비치하니라.
말씀하시기를, 내 덕을 펼 사람은 지금 초립동년(草笠童年)이니라.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공우야. 비록 나이가 적은 사람이라도
지위가 너보다 높고, 덕이 너보다 높거든 만날 적에 반드시 공경하라.
어떤 날은 말씀하시기를, 공우야. 때가 와서 한 사람이 허락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내가 있는 곳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노라.(이중성 천지개벽경7편8장)
* 1907년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살려보자.
- 선도교 고수부 : 본명은 고판례로 1907년 당시 28세
- 천지개벽경 저자 이중성은 1907년 당시 11세
- 대순전경 저자 이상호 선생은 1888년 생으로 1907년 당시 20세
- 증산도 안운산(본명-안세찬)은 1922년생으로 1907년엔 태어나지도 못했다.
위의 인물들 중에서 강증산으로 부터 종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고수부와 조정산이다.
그러나 고수부는 여자로써 초립동이 아니였고,
조정산께서 증산상제 님으로 부터 종통을 받아 덕을 펼칠 그 초립동이 맞다고 볼 수 있다.
* 초립동(草笠童)은 초립(草笠)을 쓴 사내아이로 1907년 당시 도주님은 13세 이셨다.
증산도경전인 도전에서 밝힌 종통에 대한 상제님의 공사가 어떤것인지 확인해보자.
위는 증산도 경전 도전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처음에는 있었던 사실 그대로 진실을 기록했는데
이후 자신들의 체재를 주장하기에 불리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신판에는 삭제되어 찾을 수 없다.
증산 상제님께서 조정산 도주님께 종통계시의 공사를 보시다.
도주 옥황상제님께서는 15세 되시던 1909년 4월 28일에 전 가족과 함께 창원역에서 신의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길에 오르셨다. 바로 이날 상제님께서는 진주이신 도주 옥황상제님의 봉천행 여정을 확인하시기 위해 기차가 다니는 들판으로 가 기차를 향해 명을 내리시고 또한 공사를 보셨다.
김보경(金甫京, 1861~1934)과 이치복(李致福, 1860∼1944)을 비롯한 몇몇 종도를 앞세우시고 대전역 근처의 철도주변에 이르셔서 혼자 말씀으로 「올 때가 되었는데.......」 하시고 멀리 바라보시며 누구를 기다리는 표정이시니라.
종도들이 이상이 여겨 여쭈기를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시옵니까?』 하였으나 답을 않으시고 바라만 보시더니 마침 남쪽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보시고 반겨 하시며 『이제 나의 일은 다 이루었도다. 남자가 15세면 호패를 차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요. 과연 인유기인(人有其人) 시유기시(時有其時)로다.』 하시고 한참동안 서 계시니라.(태극진경9장153절)
* 증산께서 기유년(己酉年) 화천하시기 2개월 전 대전역 부근의 일이다.
신의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길
아래는 도주님의 행적을 기록한 태극진경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찾아보자.
상제(도주 옥황상제)님께서는 창원역을 출발하신 후 처음에는 망명준비의 과로로 피곤하셨으나 미시(오후1시30분 3시30분사이)경 대전부근에 임하셔서는 정신이 맑아지시고 기운이 충천하신 중에 마음공부를 조금도 늦추지 않으시니라.
이때 갑자기 일광 같은 모습에 황금색 용포의 신인(神人) 한 분이 나타나셔서 우뢰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를『내 그대를 기다린지 오래노라. 그대는 삼계의 진주니 이는 막중한 천기라. 그대가 나의 도통을 이어 치천하도수(治天下度數)로 무극대운(无極大運)의 대공사를 성취하되 내 명교(命敎)를 받들어 태극(太極)의 진법(眞法)을 용(用)하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광구삼계(匡救三界)하리라.
그대의 호는 정산(鼎山)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일체(以道一體)니라.
나는 구천(九天)의 천존상제(天尊上帝)로라.』하시니라.
상제(도주 옥황상제)님께서는 이 말씀에 정신이 더욱 환해지셔서 이 신인이 바로 진리의 당체이신 구천상제님이심을 깨닫는 동시 봉천명(奉天命)의 기쁨속에 몸소 태극진주(太極眞主)임을 대오(大悟) 자각(自覺)하시고 삼계를 광구하실 각오를 마음속에 굳게 다지시니라.(진경1장39)
* 증산 상제님과의 종통 계승은 이처럼 이루어지셨음을 알 수가 있다.
기유년(己酉年)에 십오세이면, 을미생(乙未生)임을 뜻하는 내용이다.
당시 도주님의 조부께서는 홍문관 정자(正字)겸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승정원 주서(注書) 등을 지낸 조영규(趙瑩奎)셨다. 그 분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할 뜻을 품은 것을 알고 나라의 위태함을 거듭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낙향하셨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개하여 토혈 서거하셨다.
조부의 배일사상(排日思想)을 이어받은 도주님의 부친과 숙부들은 구국운동을 하기 위해 화약 공장을 차리고 무기 수집을 하였는데 그만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형세가 다급해지자 도주님을 비롯한 전 가족은 고향을 떠나 만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909년 4월 28일 당시 15세이셨던 도주님께서는 창원역에서 신의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전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오르게 되신 것인데, 바로 그날 그 기차가 대전의 신탄진을 지날 때에 상제님께서 미리 마중 나와 계시다가 보시고 기뻐하셨던 것이다.
도주님께서 천명(天命)을 받드는 50년 공부를 시작하시게 됨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이 일화는 종도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상제님의 뒤를 이어 종통을 세우실 분이 도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훗날 이상호와 이정립이 상제님의 행적을 모아 『증산천사공사기』와 『대순전경』을 간행할 때 이 이야기를 싣지 않았는데, 그것은 종통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려주는 이 일화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도들에게는 이 불편한 진실이 워낙 광범히 하게 퍼져 있었다.
만약 당시 인물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종통을 주셨다면 그것도 편파적이라고 하여 종도들 간에 큰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통은 판밖에서 맥을 이루신 것이며, 종도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종교를 만들어 교주로 활동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증산관련 다른 교단들은 종교는 있으나 맥은 떨어져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증산도는 위 구절을 가지고 창시자인 안운산의 고향이 대전이라는 것을 꿰맞춰보려 했으나, 그 어떤 해석으로도 관련성을 찾을 수 없기에 증산도 경전인 도전의 신판을 발행하면서 부터는 이 구절을 빼 버렸다.
그러므로 지금 증산도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구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구천상제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으심
망명 9년 후인 1917년(정사) 2월 10일 23세시에 구천상제님의 삼계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득도하시고
구천상제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으셨다.
주문을 송독하시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구천상제님의 계시에 따라
그 해 봄에 수로를 통해 고국으로 돌아오시게 되고 4월 안면도 정당리에 우일재를 마련하시고 공부를 하셨다.
* 구천상제님과 옥황상제님 두 분께서 실제 만나신 적이 없지만, 모든것은 계시로 이어지셨다.
23세시의 감오득도(感悟得道)
이러한 도주님의 감오득도에 관하여 도전님께서는 “도주님께서 진주(眞主:15세)로 봉천명(奉天命)하시고 23세시에 득도하심은 태을주(太乙呪) 23자의 수리가 일치하는 본령합리(本領合理)를 이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본령합리(本領合理)란 본령(本領: 본래의 특성)이 진리에 부합된다는 말로서, 천부 의 종통 계승을 하실 도주님께서 득도하신 1917년 2월 10일은 도주님의 연세가 23세 되시는 해로, 23은 태을주 글자 수 23과 서로 상응이 되기 때문에 진리와 조금도 틀림없이 꼭 들어맞는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마동(馬洞) 봉서(封書)
1919년(기미) 도주님께서는 정월 보름에 이치복과 함께 정읍 마동(馬洞) 김기부의 집에 이르러 그곳에서 대사모님과 상제님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다.
이때 선돌부인은 「상제께서 재세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말씀을 전하며 도주님께 봉서를 내어드렸다.
이렇게 상제님께서 선돌부인에게 남기신 봉서는 10년 후 을미생 이신 도주님께 전해졌으며, 상제님의 친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봉서를 전해 받으신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종통을 계승하실 분이 도주님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또 하나의 징표이다.
마동(馬洞)의 마(馬)는 조씨(趙氏)를 뜻한다고 한다.
상제님께서는 도주님께서 조씨(趙氏)이기 때문에 조씨(趙氏)를 상징하는 말(馬), 즉 마동(馬洞)에 봉서를 숨기신 것으로 보여지며, 이는 마동을 통한 도주님의 종통 계승이 천부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도주님의 종통계승은 계시와 봉서로 이루어져 도주님은 상제님을 인세에서 직접 만나지 않으셨고, 따라서 상제님의 가르침을 들으신 적도 없었다. 하지만 도주님은 멀고 먼 만주 봉천에서 상제님의 대순진리를 감오득도 하시고 귀국하시어 상제님의 진리를 선포하심으로써 진주임을 증명하셨다.
상제님의 종도 그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상제님의 도덕을 펴시고 밝히셨을 뿐만 아니라 상제님을 구천상제님으로 봉안하시어 상제님이 우주 삼라만상을 주관하는 조화주이심을 명확히 선포하셔서 삼계대순 개벽공사의 실상을 보여주셨으며 오십년 공부로 대순진리의 진법을 완성하셨다. 즉 도주님에 의해 상제님의 진리가 밝혀지고 도법이 짜짐으로써 교리적 정통성이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도주님의 종통계승이란 천부적인 이치에 의해 완성되고 계승됨을 의미한다.
1919년(기미) 9월에는 보천교 본부에 보관 중이던 둔궤를 통사동 재실로 옮기시어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설법하셨다.
1920년(경신) 2월 17일 재실에서 밤낮으로 불면불식 공부하시던 중 둔궤가 봉안된 곳에서 벼락소리가 나더니 둔궤가 저절로 열렸다. 둔궤 속에는 호피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있고 양피(羊血) 스물넉점이 궤에 찍혀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다.
1921년(신유) 7월 대원사에서 백일도수를 마치시고, 9월 5일 동곡 장탯날에 가매장되어 있던 상제님의 성골을 통사동 재실로 모시고 와 치성을 올렸다.
* 통사동 재실은 전북 정읍시 감곡면 통석리 통사동 74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도주님께서 무극도장이 마련될 때까지 거주하시기도 하면서 도수를 보신 곳으로, 동곡 장탯날에 가매장 되어있던 상제님의 성골을 모시고 치성을 올렸으며 보천교에 있던 둔궤를 옮겨와 공부를 하신 중요한 재실이다.
종통(宗統)이란 도의 생명이며 진리인 것입니다.
종통이 바르지 못하면, 법이 있을 수 없고 경위가 바로 설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 속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으며 만물만상을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도(道)란 신성, 불, 보살의 하소연에 의해 상제님께서 삼계대권을 가지시고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사람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오셔서 진멸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구하시려고 천지공사를 행하셨으며, 그 행하신 바를 계시로 도주님께 전하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전경에도 상제님께서 홀로 이룩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도의 연원(淵源)은 구천상제님의 계시(봉서)를 받으셔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이 연원은 바꿀 수도 고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도주님께서 십 오세 시 진주(眞主)로 봉천명(奉天命)하시고, 만주 봉천에서 이십삼 세 시 득도하심은 태을주로 본령합리(本領合理)를 이루신 것이며, 전경에 「12월26일 재생신(再生身)」이라 하신 것은 12월 4일로 1년 운회의 만도(滿度)를 채우실 도주님의 탄강을 뜻하심입니다. 이것을 여합부절(如合符節)한 천부적 종통 계승이라고 합니다.
진표율사가 금산사의 용추(용소)를 숯으로 메우고 솥을 올려놓은 위에 미륵불을 봉안한 것은 증산(甑出), 정산(鼎山), 양산(兩山)의 진리를 암시하여 도의 근원을 밝혀 놓은 것이며, 상제님께서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라."고 하심도 미륵불과 솥의 양산의 이치를 알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도인들은 이 종통을 바르게 알아야 유언비어나 조언비어로 마음을 현혹하더라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니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도전님훈시중에서)
이처럼 종통은 하늘에서 이어져 오는 천부적인 신성성이며 연속성이다.
금산사(金山寺) 미륵금불과 양산(兩山)의 진리
금산사(金山寺)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의 모악산(母岳山: 794m) 서편 기슭의 골짜기에 자리한 사찰로 상제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강세하시기 전에 금산사 미륵금불에 30년간 임하여 계셨던 곳이다.
진표율사가 세운 미륵불은 1597(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고, 1627(인조 5)년 미륵전을 중건할 때 흙으로 빚은 불상에 도금을 한 형태로 다시 만들어졌다.
이때 중앙의 미륵불(11.8m)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불(挾侍佛: 8.8m)이 ‘뫼 산(山)’ 자 형태의 삼존불로 조성되었는데 그 후 협시불 양옆으로 작은 보살상이 추가로 봉안되면서 전체적으로 ‘날 출(出=山+山: 兩山)’ 자 형태가 되었다.
* 수미좌(須彌座) : 절의 불전(佛殿) 안에 불상을 받치는 단.
- 수미산을 본뜬 것으로 수미단 또는 수미좌라고 한다.
* 철수미좌(鐵須彌座]) : 철로 만든 수미좌
금산사에는 본래 그 터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용소(용추)가 있었다.
진표율사는 못을 메우고 미륵불을 세워야하는데 도저히 물을 메울 수가 없었다.
흙으로 메우면 흙이 간 곳이 없어져 버리고, 돌로 메워도 그 다음날이면 모두 밖으로 튕겨 나와 있었다.
다시 기도를 하니 계시가 있기를 숯(목탄)으로 메워라. 라고 하시었다. 그리고 내가 고을 사람들에게 눈병을 창궐하리라. 고을마다 방을 붙여 안질이 있는 사람은 숯을 갖고 와서 여기 연못에 넣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눈병이 낫는다고 널리 알리라고 하셨다. 이후 고을에 방을 붙이고 나니 정말로 사람들이 눈병이 생겨 숯을 가져와서 연못에 넣고 그 물로 눈을 씻으니 눈병을 나았다.
그렇게 연못이 숯으로 메워진 뒤 계시대로 솥[鼎]과 시루[甑]를 놓고 그 위에 미륵불을 모셨다.
지금 금산사 미륵전 밑으로 들어가면 쇠로 만든 솥이 있고 그 아래 숯으로 메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루는 솥 위에 얹혀야 조화가 나온다. 물도 있어야 하고 숯으로 불도 때야 하는데 용추 못은 물이고, 숯은 불이니 조화가 나온다.
금불의 양쪽에 보호불이 두 개씩 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금불과 보호불, 그 옆의 조그만 불이 합쳐서 두 개의 뫼 산(山) 자, 즉 출(出) 자를 이룬다. 이것은 산(山)이 두 개 있는 형상으로 증산, 정산을 의미한다. 완연하다.
이 시루와 솥의 이치가 바로 시루 증(甑) 뫼 산(山) 증산(甑山) 상제님을, 솥 정(鼎) 뫼 산(山) 정산(鼎山) 옥황상제님을 상징하는데, 상제님께서 인세(人世)에 계실 때 호가 증산(甑山), 옥황상제님의 호는 정산(鼎山)이셨다.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후 천하지 대금산(天下之大金山) 모악산하(母岳山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고 육장 금불(六丈金佛)이 화위 전녀(化爲全女)라”고 하셔서 미륵금불이 전녀(全女)를 합친 성씨인 강(姜)씨로 왔음을 암시하신 데서도 알 수 있다.
양산도(兩山道) 타령
상제님께서는 금산사의 미륵금불을 양산도(兩山道)라고 이름 지으시고 세속에 전해지는 양산도와 비유하곤 하셨다. 시속에는 양산도 타령이라는 유명한 민요가 전해지는데, 그 후렴구 중에는 “에라 놓아라, 아니 못 놓겠네, 능지를 하여도 못 놓겠네, 에헤이예”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게 능지처참을 당해도 양산(兩山)의 도(道), 이 줄만큼은 절대 못 놓는다는 것인데, 그 양산이란 바로 시루와 솥인 증산(甑山)과 정산(鼎山)인 것이다.
가을(歌乙)을 노래함
도전님께서는 ‘가을이라는 말에, 을(乙)을 노래한다는[歌: 노래 가] 뜻이 숨겨져 있음’을 말씀해주시고 우주의 가을인 후천의 진법을 짜는 진주(眞主)가 을미생으로 올 수 밖에 없는 이치는 가을이라는 말에도 들어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 오는 잠 적게 자고 태을주(太乙呪)를 많이 읽으라 하시며 후천 오만년 동안 동리 동리 각 학교마다 태을주를 외우게 되리라(교운 1장 60절) 하신 것도 가을(歌乙), 즉 ‘을을 노래함’과 관련시켜 보면 더욱 의미가 깊다.
태을(太乙)은 큰 을이니 태을주를 외우는 것은 결국 을(乙)을 노래하는 것으로 추수하는 시기의 가을(歌乙)이 되기 때문이다.
우주의 가을에 외워지는 큰 을의 주문인 태을주는 23글자이다. 즉 ‘을(乙)’은 23이라는 수리로 나타난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8도였던 조선의 행정구역이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1895년(을미)에 갑자기 23부로 재편성되었던 것이다.
* 23부 : 한성부, 인천부, 충주부, 홍주부, 공주부, 전주부, 남원부, 나주부, 제주부, 진주부, 동래부, 대구부, 안동부, 강릉부, 춘천부, 개성부, 해주부, 평양부, 의주부, 강계부, 함흥부, 갑산부, 경성부.
이 체제는 을미(1895)년 1년 동안만 유지되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다시 8도로 환원되는데, 이것은 1895년 을미년에 도주님께서 을(乙: 23)을 노래하는 가을의 이치로 탄강하시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을(乙: 23)의 이치로 탄강하신 도주님께서는 23세 시에 감오득도를 하시어 23자의 태을주와 본령합리를 이루시게 된다(『대순지침』, 13쪽).
이렇게 을미(1895)년에 일어났던 몇몇 역사적 사건들 역시 도주님의 탄강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이 5백 년 만에 중국(청)의 속국으로부터 벗어난 역사적인 해가 을미년이다.
이는 1894년 시작된 청과 일본 간의 전쟁에서 청이 패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청나라는 더 이상 조선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상제님께서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주려 함이노라”(권지1장11절)고 하신 말씀과 그러한 상제님의 의지를 계승해 나가실 도주님의 탄강하신 연도에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을미(1895)년에는 역법(曆法)이 개정되어 태양력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양복의 착용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자 은둔의 군자국이었던 한국이 근대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리기도 하지만,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융합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도주님의 탄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었다.
도주께서 1918년(무오) 가을 상제께 치성을 올리신 다음 원평을 거쳐 구릿골 약방에 이르셨으며, 이해 十월에 모악산의 대원사에 이르셨는데 “개벽 후 후천(後天) 五만년의 도수를 나는 펴고 너는 득도하니 그 아니 좋을시구.”라 하시고 대원사에 몇 달 동안 머무셨다.
도창현(道昌峴) 무극도(无極道) 창도하시다
1925년(乙丑) 전북 구태인 도창현에서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신 후 구천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봉안하시고 종지, 신조, 목적을 정하셨다.
당시 도주님께서는 「태인(泰仁) 도창현이 마땅한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 치마바위 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실제 무극도장 근처에는 치마바위가 있다.
치마바위 의미는 상제님께서 고판례 수부공사에서 「내 세상에는 여자치마 밑에서 도통이 나오느니라.」는 말씀과도 관련이 있는데, 상제님께서 하루는 성도들을 데리고 태인 도창현 성황산(城隍山)에 올라 치마바위에서 여러 공사를 행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치마 밑에서 대도통(大道通) 난다." 하시니라.(무극도 창건공사)
여자치마를 말씀하신 것은 고수부공사에서 고수부 즉 며느리를 지칭한다.
상제님께서 고판례 수부공사에서 「내 세상에는 여자치마 밑에서 도통이 나오느니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를 빙자하여 실제 여자가 도통을 준다며 대두목행세를 하는 자가 있다.
모 단체의 선감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그 첩노릇을 하던 여자들 몇몇이 자기들이 대두목이라며 종통을 이었다고 한다. 허령 밭에서 허령이 싹트고 자라는 꼴이다.
상제님께서는 행하신 모든것이 공사이시다. 그러므로 여자치마 밑에서 도통이 나온다 하심은 실제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음의 이치로 고수부 며느리의 역할을 하실 분을 말씀하신 것이다.
무극도의 해산
1935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민족종교 탄압을 보시고 도주께서는 전국 각지의 종도들을 모아 인덕도수와 잠복도수를 말씀하시며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고 하시며 무극도의 해산을 명하셨다.
1936년 새해 치성을 마치신 후 홀연히 떠나시어 전주 및 마산 교방동에 계시다.
1936년 4월 조선총독부는 민족종교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증산종교운동이 민중에 널리 확산되는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모든 증산교단 및 민족종교에 대한 해산령을 선포했다.
이 선포 후 무극도 도장건물은 일본 총독부에 강제로 빼앗기듯 기증되어 경매를 통해서 철거되었다.
1939년 가을에 회문리로 가셔서 회룡재(廻龍齋)에 설석(設席)하시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시며 공부(工夫)하시었다.
* 회문리 옛집 공지에 아담한 정사(精舍)를 짓고 이는 후일을 예비하는 도수니라 하시고 회룡재(廻龍齋)라고 하시다.
이후 이곳에 자리를 잡으시고 공부하셨다.
부산에서 태극도(太極道)
1945년 조국 광복을 맞이하여 10년간의 잠룡도수를 거치신 후 우리 도명이 태극도(太極道)라 밝히시고 아직 일반에게는 공개발표하지 말라. 하시었다.
1948년 9월(도기 40년) 태극도(太極道) 본부를 부산 보수동에서 새로 여시다.
1956년 감천동으로 태극도 본부 도장을 옮기셨으며,
1957년 4월 감천동 도장 영대에 15신위를 봉안하시고 11월 시학과 시법 공부를 시작하셨다.
마하사 49일 공부
1949년(기축) 겨울에 도주께서 동래 마하사(摩訶寺)의 방 한간에서 정화수 스물네 그릇을 받들고 사십구일을 한 도수로 정하시고 공부를 하셨도다.
四十九일이 거의 될 무렵에 도주께서 승녀와 시종자에게 「법당의 불상을 자세히 보았느냐」고 물으시므로 그들이 달려가 보니 불상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도다.
도주께서 四十九일을 다 채우신 새벽에 공부실 위에 학이 울며 날아가고 시종자에게 그동안 모아놓은 글씨 종이를 태우고 그 재를 시냇물에 띄우라고 이르시므로 시종자가 그대로 하니 시냇물에 무지개가 서는도다. (교운 2장 47절)
“도주께서 마하사에서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오시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느니라. 도주께서 그 자리에서
소년재기발천마(少年才氣拔天摩) 수파용천기세마(手把龍泉幾歲磨)
세계유이차산출(世界有而此山出) 기운금천장물화(紀運金天藏物華)
응수조종태호복(應須祖宗太昊伏) 도인하사다불가(道人何事多佛歌) 의 상제의 글귀를 외우시고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나가노라」고 말씀하셨도다.”(교운 2장 48절)고 말씀하셨다.
포교 오십년 공부종필
상제께서 六월 어느 날 천지공사를 마치신 후
“포교 오십년 공부종필(布敎五十年工夫終畢)”이라 쓰신 종이를 불사르시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윤(伊尹)이 오십이 지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없이 굳게 짜 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하셨도다.(공사3장37절)
포교 오십년 공부는 상제님께서 정하신 “포교 오십년 공부종필(布敎五十年工夫終畢)”의 도수에 따라 (1909년(己酉) 4월 28일부터 1958년(戊戌) 3월 6일까지) 도주님께서 50년간 행하신 공부로 인하여 도통의 법방인 진법을 완성하신 것을 두고 「포교 오십년 공부 종필」이라 합니다.
도주님의 공부는 대부분 불면(不眠), 불식(不食), 불휴(不休)의 과정이었기에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정성을 요구하는 것임을 우리는 『전경』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도주님처럼 50년을 한결같은 뜻과 지극한 정성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내며 상제님의 도수에 따른 공부로 진법을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오십년공부(五十年工夫)’의 천부적 신성성이 있는 것입니다.
상제께서 “내가 평천하 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 하라.
치천하는 五十년 공부이니라.(행록3장31절) 라고 오십년 공부에 대한 공사를 행하셨다.
종통계승
1958년 2월 하순경에 도주께서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 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이니라.
종전의 시봉 도전과는 전혀 다르니라”고 분부를 내리셨도다.(교운2장64절)
화천(化天)
도주께서 정유년 十一월 二十一일 자시부터 무술년 三월 三일까지 도장에서 불면 불휴하고 백일도수를 마치시니라.
五일에 심히 괴로워하시므로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왔으되 「때가 늦었도다」고 이르시니라.
도주께서 이튿날 미시에 간부 전원을 문 밖에 시립케 한후 도전 박한경을 가까이 하고 도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고 「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 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문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번 부르시더니 화천하시니라.
무술년 三월 六일 미시요. 양력으로 一九五八년 四월 二十四일이요. 수는 六十四세로다.(교운2장66절)
조 정산(鼎山) 도주님이 신위는 「조성옥황상제(趙聖玉皇上帝) 하감지위」 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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