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그것은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들쑤셔 덧나게 할뿐이다. 머리와 달리 감정은 폭풍우처럼 휘몰아 친다. 다른이의 눈으로 본다면 분명 그녀의 삶은 한으로 점철된 삶이다. 어쩌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또 다른 감정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듯 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야 소유와 집착이지‘ 부부서약은 그저 한낱 문구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신의를 저버리는 순간 예전의 좋았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은 시대를 거스르는 것 처럼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란 미묘한 관계인 것 같다. 미움과 원망이 공존하는 그 속에 버리고 싶지 않았던 지난날 추억이라는 이름, 그것들이 이미 끝나버린 관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부간에 알 수 없는 이 미묘한 감정선은 부모와 자식간에도 다르지 않은 듯 하다. 놓아버리고 싶고, 더이상의 감정의 소비가 무의미한 것을 알면서도 쉽게 져 버려지지 않는 마음, 그것을 드라마 속 어느 여자는 애증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며칠 전 그러니깐 얼마되지 않은 지난 겨울, 송년회를 보내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이제는 제법 사람의 형상을 갖춰가는 어린 조카들, 눈도 채 뜨지 못한채 태어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제법 똘똘한 모습으로 자랐다. 이제 네돌을 넘긴 어린 조카는 십 여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쌍둥이다. 외모, 성격, 행동 무엇하나 닮지 않았다. 두 돌을 넘겼을때는 형에게 모든 것을 다 뺏기고도 이내 돌아서서 미처 울지도 못했던 아이가 이제는 제법 반기를 든다.
웬만 해선 싸움이 되지 않았던 이 아이들이 지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눈에 띄었다. 둘째가 둘이 다정하게 잘 놀다가 무슨 심산인지 갑자기 형을 밀쳐 낸다. 형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울지도 못한채 쫒겨나고, 저만큼 물러서 있다. 그 모습을 본 아이 아빠가 ‘함께 같이 놓아야지 그렇게 하면 안되 잘못하면 형이 다치잖아’ 아이가 자신을 향해 나무라는 아빠를 향해 설움이 폭발해 연신 울어댄다. 애 엄마가 달래도 보고 하지만 아이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닭똥같은 눈물이 연신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제 제법 말문이 틔여서 그런지 아빠를 향해 문맥을 알 수 없는 말들을 하며 마구잡이로 쏟아낸다. 그래도 제 아빠가 아무런 대응을 안해주니 아이는 아빠의 가슴팍을 앙증맞은 손으로 사정없이 내리친다.
아이의 말은 어른들의 말처럼 말의 핵심이 없다. 주어가 없고 서술어가 없다 보니 무슨말을 하려 하는지 왜 그러는 것인지를 어른 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늘 뺏기고 항의 한번 하지 못했던 아이가 갑자기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에는 아이만의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을뿐이다.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엄마가 자초한 거야.’ 대장암 수술을 마치고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엄마에게 그렇게 몰아붙였다. 그녀의 모습은 측은하고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정을 브레이크가 없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멍한 시선으로 고개를 떨군 엄마의 모습은 오히려 나를 더욱 자극했다. 마음을 도저히 알아주지 않는 엄마의 행동에 나는 마음을 몰라준다고 떼를 쓰는 둘째 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그녀를 선택할 수 없었듯 그녀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천륜이라는 이름으로 얽혔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끊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그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녀는 나의 어미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알지 못한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고, 그저 참는 것만이 미덕이라 믿고 살아온 어미다. 외할머니가 열 두 남매를 낳았고, 그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 남매중 하나다. 깐깐한 외할머니와 유교 사상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던 외할아버지 그들은 어미에게 밭일을 하고, 동생들을 업어 키우고, 교육의 기회를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그녀가 사는 삶으로 강요되었다.
교육의 기회가 전혀 없었던 어미는 평생 문맹으로 사셨다. 그런 까닭으로 가난한 아비를 만났고, 그저 여자로서 조신하게 남편에 순종하며 살았다. 가부장적인 아비의 틈속에 어미는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했다. 밥 세끼를 챙기고 까다로운 식성때문에 늘 전전긍긍했던 어미다. 자신이 아내로서, 어미로서의 삶만이 요구되었고, 여자로서의 삶의 중심이었던 적이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어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며 산 적이 없다. 늘 강요당했던 여자의 삶, 인내의 삶, 그저 묵묵히 지내는 것만이 자신의 삶이라 여겼다. 그런까닭으로 어미는 타인과는 불협화음이 없었다. 의견의 차이를 내며 다툴일도 없었고, 누군가를 험담하는 일 또한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성격은 나의 숨통을 조여왔다. 온순한 성격이 누군가에게는 속이기 쉬운 먹이감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친정엄마의 치매와 남편의 병간호를 하느라 어미는 젊은 청춘을 다 보냈다. 아비가 미안하다는 단 한마디만을 남기며 세상을 떴을때 어미는 이미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두 번의 암수술로 점점 초췌해져 가는 어미에게 내 뱉어서는 안되는 말들을 그렇게 쏟아내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뿌린 씨라고.....,.
아파트로 이사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어미는 심한 독감에 걸렸다. 감기는 매번 가볍게 넘어가는 편인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독감에 심근경색으로 스탠스시술까지 받아야 했다.
어미는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했다. 술을 마시면 취하기 일쑤고, 늘 취해 있었다. 나는 어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젊은시절 그 문제는 그녀와 나를 더이상 소통하기 어려운 존재로 만들었다. 자신의 삶을 늘 술에 의존하는 어미는 지금 고스란히 그 폐해를 입고 있다.
나의 감정은 뒤죽박죽이다. 다른이의 삶이라면 아마도 최소한 이해하려 노력이라도 했을 것이다. 측은하게 여기고 안타까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녀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으면서도 추락한 날개를 지닌 그녀의 삶의 대한 미움이 또 다른 한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머리로는 그녀의 삶을 이해하려 하지만, 나의 감정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걱정과 염려는 부드러운 치즈의 언어처럼 되지 않았다. 쏘아대는 말들은 어미에 대한 염려라기 보다는 어쩌면 나의 불편함이라는 이기심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미는 늘 나와 함께였다. 대부분의 어미의 삶의 역사는 나와 함께 해왔다.
어미의 심장이 펌프질을 멈추었던 순간, 나의 삶의 순간도 멈추는 듯 했다. 영원할 것이라는 무지함은 어미의 존재를 가볍게 했다. 어쩌면 그동안 함께 해왔던 삶의 역사들이 후회와 원망으로 남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우리네는 그들이 늘 함께 일 것이라는 몽매한 망각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