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시와정신》신인상 당선작
섬 외 4편 / 안성덕
겨울벽화 외 4편 / 김종덕
섬 / 안성덕
소나기 뛰어간 하늘이 깊다
아파트 옥상에 조각구름 몇 점 떠있고
무료한 나는 등대처럼 하품이 잦다
친정 사촌오라비 댁 혼사에 간
아내는 돌아오지 않는다
퉁퉁 면발은 불고 베어 문 단무지가 조각배 같다
냉장고 속 열무김치를 꺼내 올까, 그냥 먹는데
텔레비는 자꾸만 자지러진다 저희끼리 낄낄거린다
하품하듯 한 번쯤 웃어줘야 할 텐데
도무지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재방송처럼 늦은 점심을 먹는 휴일
선풍기가 뚝뚝 목을 꺾다가
절래절래 고개를 흔든다
사무실 자판기 커피 생각 간절하다
내 잠든 뒤에나 막배로 돌아와 그녀는
널브러진 짜장면 그릇 두런두런 치울 것이다
아직 용돈이 남아있는지 아이들은
한 마디도 없다
가마우지 / 안성덕
아내가 묶어준 넥타이를 바짝 조이고
비상대책확대영업회의에 참석한다
목이 조여 파닥거리다가
돌아와 미수금대장을 패대기친다
한바탕 졸린 목을 푼다
물 말아 맨밥을 몇 술 삼킨 그가
사무실을 나서며 넥타이를 매만진다
끝내 사장의 행방을 모른다는 거래처 미스 박 면전에
미수금명세를 들이대며 콕콕 쪼아대다가
유난히 긴 그녀의, 목걸이도 안 한
허술한 V존을 흘끔거린다
아내가 기다릴 생일선물은 글렀다
스카프라도 한 장 둘러줘야 할 텐데
게워 줄 거라곤 아침에 넘긴 미역국뿐
잔고 없는 급여이체통장뿐
늦은 귀가를 한 그가 졸린 목을 풀어놓는다
내일 아침 아내는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며
허전한 목에 또 넥타이를 묶어 줄 것이다
* 가마우지 : 중국 계림지방 어부들은 가마우지 목에 끈을 묶어 낚아챈 물고기를 게워내게 한다.
빈 들판 / 안성덕
단위농협에 갑니다
잠뱅이 걷어붙이고 이슬 차던 그 길입니다
구시렁거리던 참새 떼도 사라졌네요
타타타타 콤바인 툴툴거리던 들판
허수아비 모르게 대출금 갚으러 갑니다
빈들을 질러 온 바람이 우우우
우황 든 소처럼 웁니다
터벅터벅 단위농협에 갑니다
발자국 소리에 송사리 떼 소스라칩니다
하늘이 유난히 시푸르네요
된서리에 고욤이 익어 갑니다
우물거리던 자잘한 생각들
가슴 속 먹먹하네요
코스모스 한들거리던 들길로 부러 돌아갑니다
씨앗 다 내려놓고 벌써 꽃잎으로 묻었군요
타박타박 단위농협에 갑니다
돌아와 저녁나절엔 남은 보리갈이를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습니다
무국 달큰할 것 같은 저녁밥상에
두런두런 마주앉겠습니다
스위치백 / 안성덕
반백의 사내가 뒤로 걷고 있다
세상은 이미 뒤로 걸을 만큼 만만하다는 걸까
태백선 통리와 도계를 넘나드는 기차처럼
두 팔을 휘저어 크랭크 돌리며
빡꾸를 하고 있다
군말 없이 따라온 부르튼 발자국 때문일까
발부리에 차이는 돌부리 때문일까
제 몸뚱이로 밟아 온 헐거워진 발자국
그 발자국에 꾹꾹 눈길 쥐어박으며
지그재그 뒷걸음치고 있다
쉰에서 마흔쯤 한 세월 되돌리고 싶은
저 뒷걸음질
새 발자국처럼 화살표 뒤로 찍고 있다
흐물흐물한 허벅지에 안간힘을 넣고 있다
뒤로 걷는 반백의 사내가
뒷걸음치며 앞으로 가고 있다
행여 되돌아가는 길 걸려 넘어질세라
함부로 찍어온 제 발자국 거둬들이며
쉰에서 예순으로 가고 있다
* 스위치백 : 태백선 통리와 도계 구간에서 4분쯤 기차가 뒤로 간다. 높은 산을 한 번에 넘을 수 없어 지그재그로 산을 넘어간다.
소리꾼 / 안성덕
자, 골라 부담 없이 골라
사철 입는 츄리닝이 단돈 만 원
남부시장 골목 그가 사철가를 한다
스을 슬 목을 푼다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척척 앵기는 소리에 귀 밝은 이 두엇 기웃거리고
기다렸다는 듯 얼씨구, 원단이 참 좋네!
그의 마누라 추임새를 넣는다
가는 사람 어쩔거나 사람들아 가지 마라
골라골라 엄마도 골라 이모도 골라
목이 풀려 제비 노정기를 중중모리로 뽑는다
마수걸이 지폐 한 장 마빡에 붙이고
북 치듯 손뼉 장단을 친다
골라골라 아줌마도 골라 아저씨도 골라
흑운 박차고 백운 무릅쓰고 아무나 골라
자진모리 휘모리로 몰아간다
시장바닥에 피는 몇 동이나 토했나
잘 삭힌 똥물 몇 동이 마셨나, 얼핏 듣기로 명창이다
순댓집 갸웃한 창틈으로 떡목 몇
멱따는 소리 새어나오고 상설할인매장 건너
그가 귀명창 불러모아 판을 키우고 있다
흥보네 박통처럼 전대를 불리고 있다
바글바글 게거품 무는 저 사내
거칠고 쉰 수리성이다
안성덕 시인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현재 '시야(詩野)' 동인으로 활동.
겨울벽화 / 김종덕
먼저 창문을 열어둬야겠어 팔랑거리는 저 떠는 잎을 봐
우리 그날 주머니에 손을 움키며 길을 걸어갔지
당나귀마냥 저마다 어디론가 헤어지고 있었나봐
사막으로, 강물 속으로 너는 태양 너머로 뒷동산에는
계절이 지나가고 저 잎을 보렴, 들떠서 피다가 꽃물 들다가
타올라가서 불꽃으로 먼지 속에서 떠는 가을을
진부한 것들이 무너지고 있어, 겨울이 새겨지는 저 벽화 속으로
걸어가야겠어, 그러기 위해서 창문을 열어두는 거야
입김이 나와 후후 불 때마다 나는 찬바람이 되어보는 거야
찬바람 깊이 헤집고 들어간 나를 흔들어 깨운다면
플라타너스, 아침부터 늙어버린 내 동전들을 생각해
우리는 그나마 허름한 바지나 튼튼한 장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지
떨어지는 너의 잎들을 어찌해야 하는 걸까
계절은 꺾인 가지 끝에 무기력한, 장식으로 새겨지고
짧은 전신주 주상복합 아파트 창백한 하늘 별빛 없는 바람이 되어가는 시간들
풍경이 되어 말라붙어버렸지, 어쩌면 창문 밖에 그대의 벽화는
누군가로부터 멀어지고 문득 떨어지는, 그래서 너에게 바람이 불어
창문을 열어두는 거야, 그들이 우리를 망각의 상태로 이끄는 것에 대해
나는 크나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 그리하여
나는 창문을 열어두는 거야, 마치 네가 찬바람 같거든
너의 얼굴에 나는 입김을 불어보는 거야, 호호 말라붙어버린
가을은 떠나가고 나를 겨울벽화에 새기고 있어 사랑하는 앨런.
삼익오르간 / 김종덕
천변에 이 빠진 오르간이 버려져 검붉게 타들어간다
그 밤새 장맛비 내리고 그들은 검정 우산을 뒤집어 쓴 채 돌아갔다
살 나간 우산 몇 개 바닥에 버려졌고, 울음을 비워냈다
문짝 뜯긴 폐가에 누군가 비 피해 왔을 법한데,
오르간이 울면 큰일이야 우리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으니까
들키지 않으려 물에 젖은 오르간 다리를 우걱우걱 갉아먹는 생쥐들
오르간의 난간을 기어오르는 달팽이의 나선을 따라 이따금
울음통에 꽉 찬 빗물은 울컥, 파이프는 노래를 잃어갔다
하류로 흐르는 젖은 것들의 마지막은 콸콸콸, 곡소리를 냈다
장미덤불에 잎사귀들은 제 가시에 찔려 비명을 질렀다
붉은 꽃잎이 떨어졌다 폐경기의 여자가 장마 속을 걸어갔다
올 터진 스타킹에서 그녀가 걸을 때마다 음표들이 새나왔다
음표는 저기압처럼 늘어진 전깃줄에 걸려 떨어졌고 여자는 없었다
바닥에 푸른 멍자국 새기며 스트로크 되는 선율들 장대비만 내렸다
퍽퍽한 살점을 물어뜯으며 생쥐들은 오르간 파이프에서 찍찍거렸다
오르간이 울면 큰일이야 우리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으니까
달팽이가 제 몸집을 두고 사라졌을 뿐
강물의 수위는 격정으로 차올랐다 어둡고 깊은 장마전선을 뚫고 갔다
움푹움푹 패인 웅덩이에 멀쩡한 하늘이 흘렀다
주파수 속의 주파수 속의 주파수 속의 주파수 속의 주파수 수많은 주파수 속의 주파수 속의 단일 주파수 속의 복수의 주파수 속의 수많은 / 김종덕
1
영혼은 떠돈다
밤을 거역하지 못하는
시린 뼈들, 빼곡한 수레에 유령들
거기, 누구 없나요
눈이 없는 시선
저 시선을 보지 마라
독한 광끼와 마주치는
죽음
달달달
라푼젤
2
한 부분이었다 움직이는 건 한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의 흔들림, 흔들리는 파스텔톤 조명 한 부분이었다
저기 말라붙은 낮달, 조용해라 너희들은 묵념하라 도시에 네온사인이 밝을 것이다
거리, 그것은 기필코 취한다 무희를 껴안고 돈다 사방은 막힌 출입구 노상방뇨를 하자 쓰러지는 너, 숨이 식어가는 너에게
유령들은 집착할 곳을 찾아 떠돈다, 바람이 숭숭 구멍 뚫린 하수구 맨홀 시멘트 빈벽 전단지 치맛자락, 이미 배경으로 말라붙은 다락방 부재중인 너를 찾아
타인은 온다, 제발! 열지 마 빠레뜨에 물감을 짠다 붓이 흔들린다 너를 섞는다 내가 섞인다 내가, 피범벅인 무희가 돈다
어느 날 / 김종덕
동생이 쓰다만 일기장을 훔쳐보다 형은 다락방에 숨었다 너도 그림자가 되어보는 게 어때, 동생은 미닫이문에 끼어서 형 제발… 점점 모자이크로 변해가는 동생을 향해 개는 짖었다 저금통의 동전을 꺼내던 나는 형의 서랍에 여자들을 수집하기로 계획했다 공사현장, 벽돌은 하루하루 층을 이뤘다, 골판지 깔고 앉아있던 할아버지에겐 그림자가 없었다 할아버지를 업고 집에 왔을 때, 목 없이 달아나는 닭을 보았다 무당이 할머니냐 물었다 배역은 중요하지 않다, 집에서 칼이 흔들렸다 춤사위에 전등이 나갔다 넋을 잃었을 때, 밤이 왔다 밤 같은 아버지가 왔다 오일 만에 파랗게 질린 어머니의 몸에 금니가 박혀있었다, 글자들이 박혀있었다 제발! 이라는 외삼촌의 유언은 거울이었다 닮은 구석을 찾아야 했다 여드름을 쥐어짰다 고름이 유리에 달라붙었다 닮은 구석을 찾자 살점들이 가시에 찔려 떨어져나갔다 요구르트 병을 핥던 강아지는 거품을 물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은 탓에 강아지는 대문 밖으로 쫓겨났다 목줄 풀린 강아지는 야생을 찾아 뒷걸음질 쳤다
오학년이 되자마자 동생은 형과 형에게 물려받은 장난감을 길밖에 내다버렸다 필요 없는 것들이 하나씩 생겨날 때 동생은 문짝에 끼어 모자이크로 살아났다 동생이 올 때마다 나는 창피했다 방바닥과 벽에 붙어 스며들길 바랐다, 납작 엎드리면 유령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배수관 소리는 묘지명 없는 유령들의 내력, 그들이 무서워 형… 제발 그림자가 되어야 했다 아버지는 짐을 꾸려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을 풀자 여자가 태어났다 인형기계 속에 강아지들, 양수 없는 세계에서 태어났다 오층 석탑에는 여자들이 세들었고 발밑에는 유령처럼 헝클어진 조화가 피어났다
오체투지 / 김종덕
사람들이 밀물 지어 오는 저녁
기차 떠나는 길목
몸과 다리 부재의 슬픔 동여매
고무집에 목숨 말아 넣는 사람
아스팔트 바닥에 심장 박동 새기며
그 힘으로 잡화 수레 밀고
다리 대신 휠체어 타지 않은
그리하여 바닥이 되어가는 그,
바닥 깊숙이 아픔 찔러 넣거나
더듬더듬 절망 고르는 동안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
일생 하나님에게 오체투지
빌고 또 빌었을까
아주 신에게 쓰러져
이제 더 쓰러지지 않는 몸짓
찬송 테이프 풀면서
밀고 밀어 건너는
붉은 신호등
김종덕 시인
1980년 전북 남원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