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자 (완)
- 아랑/손영열 -
내가 우체국 앞에 도착한 건 30분 전이었다.
일요일이라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제각기 재잘대며 웃는 소리가 봄날 보리밭의 종달새 노랫소리 같았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그중에 휩쓸려 있는 나도 분명 행복한 사내였다.
15분쯤 기다렸을까?
문뜩 길모퉁이에 서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공방에서 입던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옷깃이 구겨진 청색 작업복은 그렇다고 치자,
바지마저 밭일하는 아줌마처럼 펑퍼짐한 몸빼바지 작업복 차림이었다.
귀속에서 유리창이 깨어지는 파열음이 챙! 하고 스쳐 지나갔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마음을 추슬렀다.
그래, 나무 여자는 보통사람이 아니야, 역시 대단한 사람일 거야!
나는 그녀 앞에 다가가 반가이 인사했다.
”여기에 계신 줄 몰랐어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뇨, 지금 막 도착했어요!“
그녀는 대답하면서 옆을 돌아다 본다.
그곳에는 한눈에 인형 같은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서 있다.
빨간 투피스의 짧은 치마, 어깨를 덮는 생머리, 하늘거리는 몸짓,
여성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요즘 말로 섹시걸이었다.
”제 친구를 소개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녀는 친구를 앞으로 끌어드리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목소리가 간드러진다. 수줍어하면서도 어딘가 한편에 교만이 묻어있다.
”아! 예~!“
나는 황급히 대답은 하였으나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선 어디 가서 자리를 잡고 얘기하죠“
나는 두 여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길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그녀들도 황급히 내 뒤를 따라나선다.
앞서 걷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거친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환청처럼 내 귓가에 맴도는 소리
<얘기 많이 들었어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
애초에, 친구를 나에게 소개해주려는 게 나무 여자의 뜻임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녀는 나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피해가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나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다.
섹시한 여자,
그런 여자는 많이 있었다.
양장점마다 맵시 있게 옷을 입고 미소짓는 마네킹 같은 여자들…….
뇌쇄적인 몸짓이나 표정으로 은근히 유혹하는 여성들…….
나는 그런 여성들 앞에서 자주 마음이 흔들려 본 경험도 있다.
매혹적인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명품가방 같은 것들만 들어있다고 일축했다.
지금 내 뒤를 따르는 두 여자.
너무도 대비되는 두 여자의 겉모습.
하늘거리는 미녀의 화려함에 비해 너무 초라한 나무 여자는 이미 여성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와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 싶었다.
공허한 삶에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나무 여자를 간절히 원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흔들리고 있다.
투피스의 늘씬한 다리에 흔들리고 있다.
나는 이미 나 자신을 배반하고, 나무 여자를 배신하고 있다.
어쩌면 나무 여자는 이런 나의 모습을 뒤에서 모두 꿰뚫어 보고 있을 것이다.
<어때요, 내 판단이 맞지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나무 여자에 대하여, 우리를 비웃을 섹시걸에 대하여.
주변에는 다방이나 제과점 등이 얼마든지 있었으나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계속 걸으며 계속 생각했다.
나무 여자는 저 인형을 나에게 던지듯 떠맡기고 가버릴 것이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저 작업복이 그걸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게 화가 나고 두려웠다.
잠을 자다가 꾸는 꿈속에서 자주 길을 잃고 공포에 헤맨 적이 많았다.
그럴 때는 의식적으로라도 꿈속에서 깨어나면 그만이었다.
언뜻, 이런 상황을 쉽게 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방법은 간단했다.
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사람을 잃어버리기란 너무 쉽다.
뒤를 돌아보니 조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두 사람이 따라오고 있다.
나무 여자가 그 친구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이야기에 빠진 그녀들의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나의 행보를 확인하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잰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뒤돌아 찾아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쩌면 눈치 빠른 여자들이라 분위기를 짐작하고 미리 잠적해 버렸는지 모른다.
두 여자에겐 정말 미안하고 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젠 별수 없다. 이를 기점으로 나무 여자도 공방도 모두 깨끗이 잊자 했다.
그 후로 나는 정말 그곳을 잊었다.
어쩌다 작품제작에 대한 욕구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면 그 나무 여자도 함께 떠 올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기억을 지우고 다시 지웠다.
한 계절이 지나자 나의 염세적인 병은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꼬리를 무는 생각과 생각 속에 방황하기 시작했다.
걷고 또 걷다가 문뜩 낯익은 골목 어귀에서 흠칫 놀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그 공방 앞에 와 있었다.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당황해서 급히 되돌아 나왔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능처럼 길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나이 지긋한 수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젊은 예비 수녀가 따라 나왔다.
예비 수녀의 손에 이끌린 또 다른 손, 그리고 사람이 나왔다.
나무 여자였다.
예비 수녀는 나무 여자의 손을 잡고 팔딱팔딱 뛰며 석별을 아쉬워했다.
나이든 수녀가 말했다.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돌아오너라!“
나무 여자는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는 뛰어들 듯 공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이든 수녀는 빨개진 눈을 연신 훔치는 예비 수녀의 등을 떠밀며 길을 재촉했다.
나는 순간 밝은 빛을 보았다.
머리가 폭포수에 씻긴 듯 맑아졌다.
나무 여자에 얽힌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려나갔다.
어름보다 단단하고 차가웠던 겨울 같은 여자.
언젠가 그녀가 말했던,
‘강철보다 더 강하고 송곳보다 더 날카로운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 끝 - (2019/01/29)
첫댓글 아~ 그녀는 수녀원에 몸담고 있었던 거로군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요.
감사~
한동안 뜸 하시기에 멀리 여행을 다녀 오셨나?
생각했어요.
제 글... 실랄하게 비평을 해주면 더욱 고맙겠어요! 욕심일까요?